낯익은 얼굴들과
장마가 끝물로 치닫는 칠월 하순 일요일은 대서다. 하지 이후 한 달째인 대서는 소서에 이어오는데 보름 후 다음 주자 입추와 배턴 터치를 하게 된다. 대서이긴 해도 무더위보다 연일 장맛비가 내려 야외 활동에 제약이 따른다. 어제는 날씨를 핑계 삼아 무릎에 휴식을 안겨주려고 산행이나 산책을 나서지 않았다. 집 근처 반송시장 외과로 나가 무릎과 종아리의 통증을 치료했다.
의사 처방전 따라 약을 타고는 용지호수 산책로 쉼터에서 생활 속에 남겨가는 시조를 세 수 다듬었다. 요새는 필기구와 종이가 없어도 바깥에서 얼마든지 메모가 가능해 나는 버스 안에서나 길을 가다가도 시상을 남기는 경우가 더러 있다.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어 그때그때 적어두면 후일 쓰일 날이 왔다. 나는 휴대폰 카톡에서 나에게 보내기로 남기고 싶은 내용을 입력해 둔다.
어제 점심나절까지 용지 호숫가 숲에서 삼림욕 겸해 묵상에 잠겨 시상을 떠올렸다. 이후 작은 어울림도서관에서 지방지 신문을 열람하고 신간 산착 도서를 뽑아 독서삼매에 빠져 시간을 보냈다. 저녁엔 초등 동기들 모임이 있어 상남동 갈비찜 식당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지난 오월에는 어시장 해안가에서 장어를 구워 다가올 여름의 보양식으로 삼자면서 술잔이 오고 갔더랬다.
같은 생활권 초등 동기가 스무 명 남짓인데 열여섯 명 나왔다. 지난 모임에서 술잔을 받아만 두고 한 모금도 마시질 않았는데 그때는 친구들이 나의 단주 사실을 예사로 보고 넘어간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잔에다 맥주와 소주를 바닥만 채우고 비우지 않았더니 다들 의아하게 여겼다. 한 여학생은 곁으로 다가와 어디 건강이 좋지 않으냐고 걱정했는데 이처럼 혈색 좋게 산다고 했다.
나는 퇴직하면서 소박한 꿈으로 건강한 두 발로 산책 산행을 여유롭게 다니고 즐기는 술을 십 년은 먹었으면 좋겠다 했다. 그런데 무릎은 연골 탈이 아니고 지난겨울 귀촌을 앞둔 친구의 표고목 벌채를 돕다가 예기치 않은 충격으로 불편을 겪고 있다. 몸이 늘 건강하면 좋겠지만 때로는 고쳐 다듬어 가면서 쓰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이번 기회를 무릎 관절의 안식기로 삼으려 한다.
술은 체질로 잘 받고 숙취에도 회복이 빨라 아무런 탈이 없다. 몇 해 전부터 즐기던 곡차에서 소주로 바꾸어 마셨는데 한두 병으로는 양이 차질 않았다. 자리에 앉으면 내 몫으로 세 병은 비워야 술을 마신 듯했다. 어떤 때는 네 병까지도 감당되었다. 어제 마주 앉은 친구가 어떤 계기로 술을 끊게 되었느냐고 물어와 잔을 비워도 술이 싱거워 그런지 취하지 않아 끊게 되었다고 했다.
가정의 달이었던 지난 오월 우리 형제는 뜻깊은 여행을 다녀왔다. 7남매는 장조카 주선으로 내가 교직 말년 머문 거제로 건너가 해안 경관을 둘러보고 야경이 아름답던 호텔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왔다. 그때도 형수와 여동생은 나의 단주를 무척 환영하면서 좋아했다. 사실 나의 단주 이면에는 건강을 잘 지켜 형님 내외분을 모두 보내드리고 나의 차례를 맞고 싶은 심정이다.
초등 친구들과는 수년 전 회갑을 앞둔 해 봄에 제주도로 건너가 짧은 일정이었지만 밤을 같이 보내고 왔다. 한라산 등정까지 할 수 없는 여건이라도 일출봉은 오르고 저녁에는 제주 시내 나이트클럽의 반짝이는 불빛 아래서 여흥을 함께 즐겼다. 시간이 이슥해지자 돔 천정이 열리면서 밤하늘 별이 보여 환호성을 질렀다. 일명 ‘뚜껑 열리는 나이트클럽’으로 유명한 주점이라 했다.
어제 자리에서 한 친구는 올가을 나라 밖으로 잠시 나갔다가 올 여행 일정을 의논해 알려주었다. 친구는 연전 암을 수술받고 요양병원에서 후속 진료를 받는 중이다. 그러함에도 친구들과 보낼 장소와 일자를 정하면서 사뭇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 자리 함께 있던 친구들은 모두 동행을 동의해 준 것으로 간주했다. 난 특이체질이라 고소 공포가 심해 비행기를 타려면 머뭇거려지는데. 23.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