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점에 들자마자 채택(蔡澤)은 흰소리부터 쳤다. "주인은 좋은 술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주게. 내가 머지않아 이 나라 승상(丞相)이 될 터인데, 그때 밀린 돈을 다 갚아주겠네."
여점 주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손님은 누구시기에 함부로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나는 연나라 유세객 채택(蔡澤)이라는 사람이네. 천하에 나를 따를 변론가는 아무도 없지."
"그뿐인가. 지혜 또한 출중하여 진왕(秦王)은 나를 만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당장 지금의 승상 범수(范睢)를 내쫓고 나를 승상으로 임명할 것이 틀림없네. 그러니 주인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이 집에서 제일 좋은 술과 음식을 내오게."
"별 미친 사람 다 있군." 말도 되지 않는 허풍에 여점 주인은 그 뒤로 채택을 상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채택(蔡澤)의 그러한 행각은 계속 이어졌다. 함양성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주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범수(范睢)는 어디 있는가. 내가 그를 만나는 날 그는 나에게 승상 자리를 내놓지 않을 수 없으리라.
가는 곳마다 이렇게 떠들어대니 이 소문이 범수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처음에는 미친 놈이로군, 하고 무시하던 범수(范睢)도 채택이라는 자의 허풍이 자꾸 귀에 들려오자 화를 벌컥 내었다.
"웅변이라면 천하에 나를 따를 자가 누가 있겠는가. 나는 삼황오제때의 일부터 제자백가의 설까지 모두 꿰뚫고 있다. 난다긴다 하는 유세가(遊說家)도 모두 내 앞에 굴복하지 않았던가."
"채택(蔡澤)이라는 자가 어떤 자이기에 감히 나를 망신주어 승상직을 빼앗겠다고 떠들어댄단 말이냐?" 그러고는 심복 부하를 시켜 채택을 잡아오게 하였다.
승상부 관리들은 채택(蔡澤)이 머물고 있는 여점으로 달려갔다. 여점 주인이 놀라 채택에게 말했다. "큰일났소. 공연히 입을 잘못 놀려 큰 화를 당하게 되었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도망치는 게 어떻소?"
그러나 채택(蔡澤)은 오히려 껄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잘 되었군. 범수(范睢)가 스스로 나를 만나려 하니, 오늘로서 범수도 승상부에서 떠나게 되었구나."
채택(蔡澤)은 허름한 베옷에 구멍난 짚신을 신고 승상부로 끌려갔다. 범수(范睢)는 관사 높은 자리에 앉아 붙들려오는 채택을 내려다보았다. 당하에 선 채택은 당연히 큰절을 올려야 했다. 그것이 예법이다.
그런데 그는 절은 커녕 읍(揖)조차 하지 않았다. 고개만 까딱 흔들었을 뿐이었다. 범수(范睢)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보듯 채택을 응시하다가 대뜸 소리쳤다. "네가 나를 내쫓고 승상(丞相)이 되겠다고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니는 자인가?" 채택(蔡澤)은 조금도 위축됨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냐?" "목적이야 간단하지요. 첫째는 상국(相國)을 위함이요, 둘째는 저를 위함입니다." "이놈, 나를 위해 그러다니? 네가 감히 내 앞에서 요설(妖舌)을 지껄일 셈인가?" 범수가 자기를 윽박지를수록 채택(蔡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탄식하는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허, 안타깝고 슬픈 일이로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것이거늘."
"장강(長江)의 앞물결도 뒷물결에 밀려 먼저 바다에 이르는 것이거늘. 인간사도 마찬가지. 성공한 자는 뒤에 오는 자를 위하여 물러날 줄 알아야 하는 것이거늘. 어찌 이 나라 상국(相國)은 그렇게 간단한 이치도 모른단 말인가."
범수(范睢)는 겉으로는 화를 내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호기심이 없지도 않았다. "누가 성공한 자이고, 누가 뒤에 오는 자라는 것이냐?" "상국(相國)께 묻겠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신체 건강하고, 팔다리 성하고, 눈귀 밝고, 마음이 지혜로우면 이는 성공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실패한 사람입니까?"
"그야 당연히 성공한 사람이다." "또 묻겠습니다. 천하에 자기 뜻을 성취하고, 존귀한 부유를 누리고, 백성들을 즐겁게 하고, 부귀영화(富貴榮華)를 후손에 전하면, 이는 성공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실패한 사람입니까?"
"성공한 사람이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지난날 진나라 상앙(商鞅)과 초나라 오기(吳起)와 월나라 문종(文種)은 평생 큰 공을 이룩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결같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 후손도 끊어졌습니다. 상국(相國)께서는 이들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실패한 사람이라고 여기십니까?"
범수(范睢)는 속으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들어 자신이 자주 생각해보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이 자는 독심술(讀心術)을 익혔는가?"
그는 일부러 다른 대답을 던졌다. "그들이 비록 명(命)대로 살지 못하고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긴 했지만 그들이 생전에 이룬 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이름은 후세까지 길이 남을 것이다. 이 정도면 사람으로 태어나 성공한 생(生)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자 채택의 입가에 짙은 냉소가 서렸다. "상국(相國)께서는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한 번 더 묻겠습니다. 상국이 생각하시기에 상앙(商鞅)은 비명에 죽기를 바랐겠습니까, 아니면 관중(管仲)처럼 천수를 누리기를 바랐겠습니까?"
범수(范睢)로서는 정곡을 찔린 셈이었다.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 "답은 뻔합니다. 관중(管仲)처럼 천수를 누리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이는 초나라 오기(吳起)도, 월나라 문종(文種)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비명(非命)에 죽어갔습니다. 또 묻겠습니다. 상국께서는 상앙(商鞅)이나 오기(吳起)나 문종(文種)과 같은 죽음을 원하십니까?" "............................"
범수(范睢)는 역시 침묵했다. 답이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채택(蔡澤)은 스스로 답을 내렸다.
"물론 아니겠지요. 그렇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입신양명하여 부귀를 누리는 것도 성공이랄 수 있겠지만, 그 죽음 또한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온전한 성공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 공명(功名)을 이루되 이름까지 빛나는 자는 상등(上等) 인물이요, 공명은 이루었으나 이름에 오점을 남기는 자는 중등(中等) 인물이요, 공명도 이루지 못하고 이름마저 더럽힌 자는 하등(下等) 인물이다.
"이 말은 곧 공명을 이루었다고 반드시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범수(范睢)는 어느새 채택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옳은 말이오."
처음으로 범수의 입에서 긍정하는 대답이 나왔다. 말투도 '하게'에서 '하오'로 바뀌어 있었다.
첫댓글 감사~.^
연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