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를 치루고
지난 오월 18일 토요일 낮에 아들 장가를 보냈다.
40세 늦은 나이에 드디어 캥거루가 엄마 뱃주머니에서 벗어난 거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대체로 요즘 얘들, 특히 남자얘들을 보면 한심한 경우를 많이 본다. 아들 친구놈들 중에도 절반 이상이 아직도 장가를 가지 못하였고, 알바 수준을 벗어난 뚜렸한 직업을 가지지 못한 축들이 많다.
난 그 나이에 아이를 셋을 두었고, 집도 있었고 요지에 약국도 갖고있었다.
늦게나마 집도 차도 여자도 직업도 다 갖추었으니, 이제 내가 돌볼 이유는 하나도 없어진게 홀가분하기만 하다.
나 스스로에게 축하한다.
아이들 결혼식에 일가 친척만 불러서 잔치를 하는 게 타당한 일이다. 그래서 나도 청첩을 가급적 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을 불러 얼굴 한번 보는 일도 좋은 것이지만, 자칫 축의금이 부담될까 망설여졌다.
사실 축의금은 형제들과 가까운 친적들이 보내온 것으로도 이미 기천은 되었다. 특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촌 7남매는 물론 그 아들 딸(조카들)까지 많은 돈을 보내왔다. 식대고 뭐고 다 충족하고도 남는 돈이었다.
그러니 그게 탐나서 청첩을 한 건 아니었다. 풍기에는 정석이와 대영이에게 알렸고, 서을엔 은석이에게 청첩했을 뿐이다, 그래도 많이도 왔다.
홍구는 부산에서 단독으로 왔고, 서을에선 은석이와 동신이 현종이가 왔다. 아픈 몸을 이끌고 융기가 인천에서 가족 모두가 왔다. 풍기에선 정석이, 동선이, 오석기, 김낙형 등이 왔고, 멀리 제주에서도 세명이 뱅기를 타고 왔다.
그 밖에도 창홍이, 김수영이, 권호섭, 홍용식, 김근동, 정대영 원영준(부산, 구명-원성수) 여주현 등등이 축하를해주고 축의금도 보내왔다. 일일이 전화하고 김사를 전했으나, 마음은 늘 부족하다.
강릉에는 유일하게 여자동창 이경숙이 사는데, 맘씨 좋고 유능한 남편을 얻었고,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서울에서 수출을 주로하는 큰 세라믹 회사를 경영하고 있고, 작은 아들은 대 기업에 다니면서 오랫동안 대만에 살다가 지금은 미국에 거서 샌 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다. 다음 달엔 부부가 미국가서 한달쯤 있다가 온다고 한다. 우리 약국에도 한두달에 한번 씩은 부부가 온다.
이렇게 오랜만에 친구들 십여명이 모여서 싫컷 떠들고 마셨다. 특히 경숙이와는 혹은 초등학교 또는 중고등학교 이후에는 거의 다가 첨 보는 사이라 더욱 떠들썩했다.
그 자리에 혁수가 있었으면 융기와도 반갑게 만났겠지만,
그 넘은 올 것 같지도 않아서 알리지 않았다.ㅎ
대구 사는 철수와 창희도 강릉에 다녀갔다.
그래, 이맛이다!
이런 날이라도 있어야 살아서 친구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봐서 뭐하느냐고?
그러면 아무도 안보고 그렇게 살아서 뭐 하려고?
이제 부모님들은 모두가 가고 드디어 본인이 갈 차례가 되었지만, 아직은 조금 이르다, 성질 급한 넘들은 가겠지.
교촌에 살던 배기환 박정헌은 친구 따라 함께 갔다.
이제 나처럼 아들 딸 치우는 잔치를 해야하는 입장에 있는 친구들의 소식을 들으면 나는 불원천리하고 갈 것이다.
지방에 살고 있으니, 서울 갈 일은 그때 생긴다. 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사전에 검색해놓은 맛집도 찾아간다.
시간이나면 예술의 전당이나 간송미술관을 찾는 것도 또한 낙이다.
甲辰年 6월 1일
蘴 江
첫댓글 부모 마음이란 늘 자식 걱정이 앞서지만
이렇게 살 맛 나는 날도 있어 행복한가 봅니다.
늦은 결혼이지만 우리 시댁 조카 보니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살더군요
아드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