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일 2007/8/12
오늘 전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을 확증해 줍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어찌 선조들뿐이겠습니까? 지금도 믿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합니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합니다. 우리는 실망을 넘어 희망을 바라보며, 좌절을 뛰어넘어 기쁨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믿음을 청하며 오늘의 미사를 봉헌합시다.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가슴 졸이며 살았다. 태어나는 사내아이는 모두 죽여야 했으니, 민족이 사라지는 절망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해 달라며 하느님께 매달렸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인물이 모세다. 이집트 탈출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제1독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능력이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으로 자신의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려 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사람까지도 일으키신다는 것을 그는 믿었다. 사라 역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믿음으로 이사악을 받아들였다(제2독서). 충실한 종은 깨어 있으면서 주인이 언제 올지 항상 준비하고 있는 종이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은 언제 어디서건 깨어 있는 사람이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는 저희의 적들을 처벌하신 그 방법으로 저희를 당신께 부르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18,6-9 6 해방의 날 밤이 저희 조상들에게는 벌써 예고되었으니, 그들이 어떠한 맹세들을 믿어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용기를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7 그리하여 당신의 백성은 의인들의 구원과 원수들의 파멸을 기대하였습니다. 8 과연 당신께서는 저희의 적들을 처벌하신 그 방법으로 저희를 당신께 부르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9 선인들의 거룩한 자녀들은 몰래 희생 제물을 바치고,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법에 동의하였습니다. 그 법은 거룩한 이들이 모든 것을 다 같이, 성공도 위험도 함께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벌써 조상들의 찬미가들을 불렀습니다.
제2독서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이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1-2.8-19<또는 11,1-2.8-12>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8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9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10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12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서, 그것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처럼 수가 많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는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13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4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17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18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복음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2-48<또는 12,35-40>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32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 33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34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41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42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43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46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무엇이 사람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십니까? 물질의 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물질의 힘만을 믿었다가 주저앉은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소리 없이 우리를 움직이십니다. 그분의 힘 속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행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올 때까지 깨어 기다리는 종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모든 이를 향한 칭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삶의 중심은 늘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늘 깨어 있으며 준비하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희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너무 늙어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만 그는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의 믿음을 묵상하며 이번 한 주간을 지내도록 합시다.
조카의 대부가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또 길을 가던 대학생이 이야기 중에 친구를 한 대 쳤는데 맞은 사람이 넘어지면서 뇌를 다치는 바람에 숨졌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침에 건강하게 나갔던 사람을 시신으로 맞아들여야 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을 사고 순간에서 5분만, 아니 단 1초 만이라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래서 사고를 피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서쪽으로 달려가서 지는 해를 붙들어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루카 12,39) 만약 내가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안다면, 그래서 내게 단 하루 24시간이 남아 있다는 걸 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소중한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분도 있겠지요. 이 세상을 떠날 사람은 남아 있는 가족이 너무 상심하지 않도록 해주고, 남아 있는 가족은 떠날 사람이 마음 편히 갈 수 있도록 해주면서 서로에 대한 용서와 사랑,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관계가 ‘만약’이라는 가정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관계 면에서 깨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ㄱ) 그런데 집주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올까요? 김수환 추기경은 ‘새벽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이웃 사람의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보일 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매일매일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무지막지한 직장 상관의 모습으로, 일을 제대로 못해 애를 먹이는 동료의 모습으로, 지성·감성·의지·외모·부까지 다 갖추어 질투 나게 하는 잘난 사람의 모습으로, 출근길에 마구 끼어드는 얄미운 운전자의 모습으로, 마주쳐도 인사 한번 하지 않는 이웃 사람의 모습으로, 불친절한 점원의 모습으로, 피곤한 아내(남편)의 모습으로, 말썽 피우는 자식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볼 눈이 있다면 ‘생각지도 않은 때’에 ‘생각지도 않은 모습’으로 오시는 주인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을 때 만났던 한 자매님의 나눔이 떠오릅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저녁, 기도모임에 참석한 뒤 고속도로로 한 시간 정도 가야 하는 집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답니다. 비는 이미 그쳤지만 시멘트 계단은 아직 축축하게 젖어 있었는데, 한 멕시칸 노숙자가 15달러만 주면 어디 가서 잠을 잘 수 있겠다며 구걸을 했습니다. 자신의 주머니에는 50달러짜리 지폐가 한 장 있었지만 그 돈은 꼭 쓸 데가 있어 줄 수가 없고, 잔돈은 하나도 없어 난감해하다가 내려오던 교우들에게 그 사정을 말했답니다. 3명이 5달러씩 내면 되겠다 싶었지요. 그리고 5달러를 빌려 달라고 했는데, 교우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저런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며 서둘러 가버렸답니다. 자매님은 순간 화가 났답니다. 기도모임을 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자기 식구들을 위해서는 미사예물 20달러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자매님은 그만 앞뒤 생각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노숙자 손에 50달러를 꼭 쥐어주면서 ‘이런 대접받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오늘 밤 따뜻한 곳에 가서 쉬라.’고 사과했답니다. 노숙자는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자매님은 그에게 억지로 돈을 쥐어주고는 차를 타기 위해 황망히 물기 젖은 마당을 가로질러 갔습니다. 얼마 안 가 바닥에서 100달러 지폐를 주운 자매님은 그것마저 그 사람한테 주기 위해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더군요. 그날 그 자매님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노숙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ㄱ) 어떤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일까요? 저는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2독서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났습니다.”(히브 11,8) 아브라함은 오랜 기다림 끝에 사라한테서 약속의 아들 이사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10여 년 후에 그는 기쁨의 아들, 약속의 아들을 바치라는 시험을 당했습니다. 믿음이, 기다림이 최고의 시련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시련을 즉각적인 순종으로 통과했습니다.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히브 11,9)에서 보듯 아브라함의 삶의 자세는 언제나 하느님의 부르심과 요구에 즉시 응답할 태세를 갖춘 준비된 자의 모습입니다. 그의 순종은 하느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주인이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듯 주인의 목소리가 들리면 즉시 문을 열어드립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ㄱ)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여름에 본당에서는 많은 캠프가 있습니다.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교리교사, 청년……. 어제는 우리 본당 청년들이 MT를 안면도로 떠났습니다. 저는 며칠 전부터 이것저것 열심히 준비하는 그들의 모습이 좋아보였고, 또한 50명이 넘는 많은 청년들이 함께 간다는데 무척이나 긍정적으로 보였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하나 될 수 있는 시간, 이로써 본당의 더 큰 발전을 가져올 테니까요.
그런데 직장인인 청년들이 많아서 주말밖에 시간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러다보니 당연히 제가 청년 캠프에 함께 할 수가 없네요. 왜냐하면 저에게 있어서 주말은 많은 미사와 행사로 인해서 본당을 비울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혹시 청년들이 고리타분한 제가 함께 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주말로 시간을 정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면서 문득 남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놀부 심보가 제 마음에 생기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청년들에게 이야기하곤 했지요.
“이번 MT. 재미있을 것 같지? 내가 안 가는데 재미있겠냐? 아마 MT 기간 내내 비가 올꺼고, 천둥번개가 쳐서 민박집에 불이 나가서 아무것도 못할 꺼야. 너희들 알지? 하느님께서 내 기도 잘 들어주신다는 거. 내가 오늘부터 밤낮으로 기도할 꺼다.”
제가 이렇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기도를 바쳤겠습니까? 좋은 시간 될 수 있도록, 더욱 더 하나 되어서 본당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글쎄 정말로 주말에 비가 온다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는 그냥 농담으로 말한 것뿐인데, 정말로 비가 많이 오고 지역에 따라 천둥 번개를 동반한다고 일기예보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비가 온다면 청년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이렇게 비가 오는 것, 다 본당 신부 때문이야. 자기 못 간다고 어떻게 그런 기도를 바칠 수가 있어?’하면서 저를 욕하지 않겠습니까? 괜히 말 잘 못했다는 후회와 함께 시간 날 때마다 좋은 날씨를 달라는 기도를 바칠 수밖에 없었지요.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잘못된 말을, 즉 후회할 말을 참으로 많이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해서 상대방에서 크나큰 아픔과 상처를 주었던 적도 상당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조금이라도 한다면 그런 실수를 줄일 수 있을 텐데, 그 순간에는 왜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러한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종말에 대한 준비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작은 사랑의 실천 하나하나가 종말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내 가족 안에서 상처받는 사람이 없도록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건네는 것, 지금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나의 것을 함께 나누는 모습들……. 그 모든 사랑 담긴 모습들이 바로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었을까요? 혹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채운 다음에 남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채워지는 날은 절대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빈말이라도 나쁜 말은 절대로 하지 맙시다.
행복한 유산('좋은 생각'중에서)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 진한 감동을 준다. 이런 기부 문화가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어려운 형편에 있거나 가진 것이 적어도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전세 보증금 400만원과 100만원이 든 저금통장을 자신이 죽은 뒤 사회에 기부하기로 한 김화규 할머니를 '행복한 유산' 캠페인 4호로 지정했다. 행복한 유산은 죽은 뒤에 유산을 사회에 기부하기로 미리 약속하는 제도다.
김 할머니는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형편이 여의치 않지만 이와 같은 큰 결심을 했다.
"어느 날 우연히 신문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다른 할머니가 전 재산을 기부한 것을 보고 어려운 형편에도 남을 도울 수 있구나, 하고 깨달았지. 나처럼 혼자 사는 노인이나 부모 없는 아이들을 위해 썼으면 좋겠어."
이 밖에도 전세 보증금 1,500만원을 죽은 뒤 기부하겠다고 약속한 할머니를 비롯해 충청도의 3억원대 땅을 내놓은 익명의 기부자 등 행복한 유산을 남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내가 가진 많은 것 가운데 몇 개를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은 보다 쉬울지 모르나 적게 가졌음에도 나의 것을 누군가에게 준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작은 것을 나눌 수 있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부자가 아닐까?
끝까지 나를 변호해주는 선행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켜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알렉산더왕은 기원전 336년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즉위한 뒤에 동방 원정을 시작으로 유럽과 소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세계 제국을 건설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세계 문명의 조류를 바꾸어 알렉산더 대왕이라고까지 호칭되기에 이른 그도 32살 나이로 바빌론에서 운명을 달리하였지요. 죽을 날이 멀지 않았음을 감지한 알렉산더는 어느 날 신하들을 불러서 이렇게 명령하였습니다. "내가 죽은 후 나의 시신을 관에 넣어 묻을 때에는 내 양손을 밖으로 내놓아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하라." 놀란 신하들이 되물었지요. "아니,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분부를 내리십니까?" "천하의 알렉산더 대왕도 죽을 때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통일한 뛰어난 인물도 결국에는 빈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단지 재산 관리인에 불과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다시 거두어 가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에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서 준비하는 것이고 심판에 대비하는 삶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왕의 소환장을 받았습니다. 깜짝 놀란 그 사람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지요. '왕이 왜 갑자기 나를 부르는 것일까?' 겁에 질린 그는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함께 가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제일 친했던 첫번째 친구는 부탁을 꺼내자마자 못 가겠다고 거절을 하였습니다. 두번째 친구는 가긴 가는데 왕궁 앞까지만 같이 가주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친구는 왕궁 안까지는 함께 가주겠으나 왕의 대전까지는 같이 갈 수 없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마지막 네번째 친구는 사정 이야기를 듣고 함께 갈 것을 흔쾌히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소환에 기꺼이 함께 응하겠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갈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만 첫번째 친구는 평소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재물입니다. 재물은 죽는 바로 그 순간 나를 떠나버립니다. 왕궁 앞까지만 간다고 말한 두번째 친구는 가족과 친구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울면서 무덤까지는 함께 가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무덤에 같이 묻힐 수는 없는 것이지요. 세번째 친구는 왕궁 안까지는 같이 간다고 했지요. 그는 우리의 육신을 말합니다. 무덤 속까지는 같이 가서 썩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왕 앞에까지 함께 가겠다고 나선 친구는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그가 평소에 가장 멀리했던 자선과 선행이었습니다. 자선과 선행은 내가 심판을 받을 때 끝까지 하느님 앞에까지 함께 따라와 나를 변호해 준다는 것입니다(탈무드). 심판을 준비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나는 끝까지 나를 변호해주는 선행을 얼마나 쌓고 있습니까?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면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는 오늘 복음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이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 무서운 말씀으로 심화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 12,47).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더욱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안 가르쳐 드려야할 것을 제가 공연히 가르쳐 드렸나요? 아니지요. 우리에게는 알고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늘 깨어 준비하여 언제든지 주님 앞에서 합당한 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슬기로운 관리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 12,43). - 이기양신부
사랑 나누며 주님을 기다립니다
행복한 기다림
믿음의 기다림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커스를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동물들이 불이 붙어있는 둥근 고리 속을 통과하는 장면입니다. 대개의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불을 무서워합니다. 털이 긴 동물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동물들이 자신의 큰 두려움인 본능을 뛰어넘어 불이 타고 있는 고리 속으로 달려가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 같은 놀라운 힘은 불 속에 뛰어든 후에 주어지는 보상이나, 혹은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가혹한 훈련이나 체벌이 아니라, 바로 동물과 조련사 사이의 믿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동물에게는 이제껏 조련사가 훈련시키는 대로 해서 목숨이 위험했거나 손해를 당한 적이 없다는 믿음, 죽을 위험으로 내몰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본능을 거슬러 가면서까지 불 속으로 뛰어 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체험을 합니다. 누군가 가족들과 언짢은 일이 있은 뒤 성당에 나왔는데, 그날 따라 성경 말씀이나 강론 말씀이 가족 간의 사랑과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내용이면, 그 말씀이 꼭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다는 체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꼭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 같다”가 아니라, 분명 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매일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삶의 조언과 생명의 길을 안내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시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절대 위험에 처할 명령이나 손해 볼 일들을 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오늘 독서의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말씀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히브 11 ,8)
동물들도 조련사를 믿고 그의 명령에 본능을 뛰어 넘어 따릅니다. 하물며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명령과 말씀에 우리는 얼마나 더 큰 믿음을 가지고 따라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랑의 기다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 35~36)
그런데 이 같은 기다림에 앞서 하신 말씀은,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루카 12, 33) 입니다.
참된 기다림이란 무턱대고 넋 놓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기다림이라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깨어 기다리는 신앙인의 모습이며, 그럴 때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같은 실천적 의미의 사랑의 기다림에서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 박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분은 1940년 방글라데시 치타공 시에서 태어나 치타공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반더빌트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그 뒤 조국 치타공 대학 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 1974년 방글라데시에 엄청난 기근이 몰려 왔을 때, 그가 강의하던 치타공 대학 인근 조브라 마을의 참상을 보며 마을 주민 42명에게 주머닛돈 27달러를 빌려주는 것을 시작으로, 1983년 방글라데시 말로 ‘마을’이란 뜻인 ‘그라민’ 은행을 설립합니다.
그라민 은행은 방글라데시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담보나 보증 없이 소액 융자를 줌으로써, 지난 26년 간 방글라데시의 인구 10%를 넘는 240만 가구가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무하마드 유뉴스’ 교수는 대학 강단을 뛰쳐나와 가난한 마을 사람들과 동거동락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죽는 데에도 여러 방식이 있지만, 굶어서 죽는 것처럼 끔찍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모든 문제에 해답을 제공하는 경제학 이론을 가르치면서 보였던 그 열성을 기억한다. 그리고선 이 모든 이론에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길바닥에선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 도대체 경제학 이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늘 주님께서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라 하신 것은, 진정 사랑의 실천으로 당신을 기다리라 하시는 명령인 것입니다. 이론이 아닌 사랑의 실천이 우리가 준비할 기다림인 것입니다.
- 배광하 신부
[의정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루카 12, 39). ‘과연 그럴까?’ 하고 물음표를 던질 이야기가 있습니다.
잠을 못 이루던 어떤 집주인이 도둑이 담장을 넘으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집주인은 떨리는 마음으로 다짐합니다. “이놈, 담을 넘기만 해봐라.” 능숙하게 담을 넘어 마당을 가로 질러 오는 도둑을 본 집주인은 또 다짐합니다. “마당을 건너오기만 해봐라.” 도둑은 마당을 넘어 마루로 오르려 합니다. 집주인은 새로운 다짐을 합니다.“마루에 오르기만 해봐라.” 도둑은 방안으로 들어서려 합니다. 주인은 더욱 가빠진 심장박동을 느끼며 다짐합니다. “방안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도둑이 마침내 금고에 다가섭니다. 집주인은 자는 척하면서 실눈을 뜨고 다짐합니다. “금고에 손대기만 해봐라.” 도둑은 돈과 귀중품을 꺼내 방을 나서서 유유히 사라집니다. 그러자 집주인은 분한 마음을 끌어안고 허공에 소리 내어 외칩니다. “다시 또 오기만 해봐라.”
집주인은 도둑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참모습을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그는 두려워하고 상처입고 깨진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온 몸으로 외쳐야 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말입니다. 그 존재선언 만으로도 도둑은 더 이상 발을 들이지 못합니다. 집 주인은 쥐죽은 듯 있음으로써 소중한 것을 잃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을 담아내지 못한 공허한 외침뿐이었습니다. 집주인은 육신이 잠들어 있지는 않았으나, 참된 영혼으로 깨어있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분노와 미움, 그리고 우울이라는 도둑에게 소중한 마음을 털린 우리는 이야기 속의 집주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의 옷을 입은 도둑이 오늘날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마음속을 한껏 휘저으며 다니고 있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고는 있으나, 영혼으로 깨어 살지 않은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어 있음이 우리의 본연임을 말씀하시면서 경고를 내리십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루카 12, 46) 희랍어로 ‘처단하다’는 말은 ‘두 쪽 내지 두 동강 내어 자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분노, 미움, 우울 등의 마음 도둑들을 정확하게 분별하여 몰아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아는 어느 날 갑자기 두 동강이 나고 말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자아분열이라는 무서운 결과를 맞이하지 않으려면 우리 본연의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인간 본연에 맞는 일이란, 우리 자신이 부족한 그 자체로 하느님의 모상임을 알아 당당하게 내세우고, 그에 걸맞게 신앙의 결단을 통해 마음을 가꾸어 가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줍니다. - 신기배 신부
[안동] 남 몰래 드리는 희생제물
한 개신교회에서 설립한 선교단체 소속 젊은이 23명이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탈레반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여러 갈래로 석방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인솔자격인 목사 한 분은 이미 피살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종족 간의 갈등이나 종교적인 갈등, 강대국들의 세계 패권구도로 생긴 분쟁에 직접 이해 당사자가 아닌 우리 군대의 파병이 어떤 평화적 가치가 있으며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해묵은 논쟁이 재연되고 있습니다.
또 자기 종교의 신념을 위해 상대방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공격적이고 물량적인 선교 행태에 대한 반성도 일고 있습니다. 아무튼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담보로 밀고 당기는 협상이 끝이 나고 폭염 속에 한 줄기 시원한 빗줄기처럼 석방 소식이 하루빨리 들려오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다른 종교와의 화해와 존중, 교회의 선교방식, 복음화의 진정한 의미, 하느님 나라 건설이라는 본래적 소명을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소중한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지혜서의 제3부(11장에서 19장)중의 일부인데 창조 때부터 이집트를 탈출할 때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자기의 편이라고 여겼던 사람들(모세와 그를 따르던 히브리 사람들)은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왕 파라오로 대변되는 그 이외의 사람들은 없어져야 할 하느님의 원수처럼 여겼습니다. 하지만 선조들의 이집트 탈출은 하느님이 ‘자기편’ 이었기 때문에 거저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집트는 없어져 야 할 하느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맏아들들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남몰래 드리는 희생제물을 하느님께 바쳤고, 율법을 지키고 기쁠 때나 위험할 때나 모두가 함께 제사에 참여하여 찬미가를 소리 높여”(지혜 18장 9절)불렀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선조들에게 늘 성실한 마음(사랑)을 보여주셨다고 가르칩니다.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기 외에는 모두 올바르지 못하니 ‘틀렸다’고 말하는 뿌리 깊은 근본주의적 행태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마다 ‘옳다’며 상대방을 향해 날카롭게 세운 대립각이 이 여름 폭염만큼 뜨겁게 세상을 달구고 하느님의 성실한 마음을 아프게 찌르니 서글프고 착잡해 집니다.
오늘 제2독서는 심해지는 박해와 늦어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점차 지치고 확신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던 신앙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 (버리고, 비우고, 떠나는 것)을 오직 하느님을 믿고 헤쳐 나갔기에 축복을 받았습니다(히브리서11장8절-12절.17절-18절).
아브라함도 그의 아내 사라도 하느님은 약속을 어기지 않는 분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고향을 떠날 수 있었고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어렵게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던 아브라함의 행동은 맹목적인 믿음도 아니요, 광신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도 제2독서인 히브리서와 마찬가지로 다시 오신다는 주님을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쓴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 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보아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 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시편 139편 8절-10절).
주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 지 모르지만 주님이 늦게 오려니 생각하지 말고, 현재를 소홀히 하거나 먼 미래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계시는 하느님께 충실해야 합니다. 복음서의 저자는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되 자선을 베풀고 보물을 하늘에 쌓으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과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것은 두 행위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 곧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입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며 깨어있는 종처럼 항상 대비하는 것이기도 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남몰래 드리는 희생제물입니다. 남몰래 드리는 희생제물과 모두가 함께 제사에 참여하여 찬미가를 높여 부르는 것이 하느님께 바치는 우리의 성실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도 우리에게 늘 성실한 마음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 김영식 신부 |
[광주]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
언젠가 유명한 강사 한 분이 TV에 나와 토크쇼에 참여하는데 연세가 있으신 분이었다. 그분의 1주일 스케줄 표를 보여주는데 그 연세에 1주일에 하루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의를 하시는 것을 보고 사회자가 물어보았다. 힘드시지 않으시냐고. 그분이 대답하시길 이 나이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자신을 불러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기쁘게 쫓아다니고 있다고, 하나도 힘들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이런 능력이 있기에 지금 이 나이에도 자신을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언제든 부르는 곳이 있으면 갈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내가 있는 녹동성당엔 섬마을 공소 두 곳이 있다. 요새 시골이 다 그렇지만 노인들이 참 많다. 때론 이 노인들이 전부 돌아가시면 시골 공소들은 어찌 될까 걱정이 되기까지 한다. 그런데 얼마 전에 젊은(?) 형제님 한 분을 하느님께서 우리 섬마을 공소 한 곳에 보내주셨다. 그 형제님은 정년퇴임을 하시고 도시 집에 계시며 이곳 저곳이 아파서 힘들어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이에 이제는 내가 할 일이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하셨단다. 그런데 이 섬마을 공소에 들어와 보니 자신보다 연세가 많으신 어른들이 공소회장도 하시고, 사목회 임원을 하시며, 미역·다시마 작업에 공소를 위해서 애쓰시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의 깨달음을 얻으셔서 지금은 공소 마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계신다. 허리가 아프시다더니 그 무거운 돌들을 옮겨서 화단을 아름답게 꾸며놓으셨다. 이제는 허리도 안 아프다고 하시며, 자신이 우리 공소의 젊은 청년임을 자부하신다. 나도 공소를 들어갈 때면 이번엔 무엇이 바뀌어 있을까 조금씩 기대하게 된다.
오늘 복음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은 바로 이런 분들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싶다. 깨어 있다는 의미는 눈만 뜨고 있다고 깨어 있는 것이 아니다. 눈뜬 송장, 멍한 사람, 정신 빠진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깨어 있다고 해서 진정 깨어 있는 모습은 아니다. 아마도 깨어 있다는 의미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아닐까?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내가 얼마나 받았는지를 알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깨어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은 모든 것을 사용하고 진이 빠져서 하늘나라에 올라간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쁘게 환영하실 것이고, 우리를 반기시며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우리 곁에서 시중을 들어 주실 것이다. 이제 우리도 그런 영광을 받기 위해서 내 삶은 어떤 준비가 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 임창훈 신부
[부산] 루가 12, 32-48.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오늘 복음을 시작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가르치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이 하지 않던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역사 안에서 강조한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지엄하심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두렵고 멀리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높고 강한 사람은 모두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오늘과 같이 인권이 소중하고 민주화된 세상에서는 높고 무서운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에 사용되던 신앙언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아직도 하느님을 높고 두려운 분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지극히 높고 심판하시는, 두려운 분으로만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야 그분으로부터 은총을 얻어 세상에서 잘 살고, 죽어서도 내세를 보장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런 믿음에는 오늘 복음의 말씀,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는 말씀은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감언이설이나 별 의미 없는 허사(虛辭)의 하나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대조되는, 엄하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베푸신 분,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키우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호세아 예언서는 하느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11,1).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실 때, 오늘 우리가 그 의미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아버지라는 호칭 안에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자상한 마음도 함께 넣어서 이해해야 합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는, 우리의 생명을 베푸신 분, 우리를 자상하게 돌보아주시는 분,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베푸심과 돌보아주심을 배워 비로소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는 분이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은 우리 안에 또 우리와 함께 기꺼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이 끝난 다음에 만나는 환상적인 내세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내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함께 계심을 받아들인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을 높고 두려운 분이라 상상하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불편하고 불안하게 하는 일입니다. 군복무를 하는 사람에게 군 지휘관은 높고 두렵습니다. 판결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선 사람에게 재판장은 높고 두렵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또 그 나라를 기꺼이 주시는 분으로 가르친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 시대 유대인들의 통념을 깨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올바로 체험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이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분의 생명을 배워 실천하며 살기 위한 노력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불러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그분을 배워 실천할 때, 그 실천의 원천으로 우리 안에 확인되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하신 실천의 기원이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자기가 가진 것을 은혜롭게 베풀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주변에 베풀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은혜로움을 나눕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인을 기다리며 서있는 종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충실히 실천하며 살기 위해 그렇게 준비된 모습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인간을 주인이 일을 맡긴 관리인에 비유하면서,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재물이나 지위를 얻으면 그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특권이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웃 앞에서 우월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재물과 지위는 그것을 가진 사람이 마음껏 누리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신앙인은 아버지가 베푸셨기에 다른 형제들을 위해 자기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재물은 베풀어야 하고, 지위는 봉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이신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도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하느님 덕분에 자기 한 사람 잘 될 길을 찾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녀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에게 잘 바치는 자를 잘 되게 해 주는 이 세상의 관리자가 아닙니다. 공양미 삼 백석을 바쳐야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해주는 심청전의 용왕도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베풀듯이 대가 없이 당신의 나라를 기꺼이 주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인과응보의 원리 따라 베풀지 않습니다. 성공한 자녀를 더 사랑하고 실패한 자녀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 모두를 사랑하고 돌보아 주며, 자녀 모두가 훌륭히 살 것을 원합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 나라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서, 은혜로우신 당신의 자녀로 살 것을 원하십니다. 자녀는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부모의 모습을 역사 안에 지속시킵니다.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합니다. 가진 것을 베풀면서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이 높고 두려워서 그분께 빌고 바치는 노예가 아닙니다. ‘기꺼이 베푸시는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기에 그 사실을 자기의 실천으로 당당하게 나타내며 기뻐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그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 서공석 신부
<은총의 순간이 다가오면>
어느덧 여름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무더운 여름 보내시느라 고생들이 많으셨습니다. 저희는 청소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바닷가 캠프장에 와서 그들이 사용했던 담요를 빨고 있습니다. 물기를 뺀 담요들은 대 강당 양철 지붕위에 널어 말립니다.
휴식시간 동안 높다란 지붕 꼭대기에 홀로 앉아있었는데, 그 기분이 이만저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마치도 산 정상에 올라온 것 같습니다. 세상이 다 제 발아래입니다. 멀리 점점이 떠있는 고깃배들 하며, 무인도들이 그림처럼 제 아래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럴싸해도 지붕 위에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졸다가는 바로 응급실로 직행입니다. 오늘 예수님 권고 말씀대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R)
형제들과 단체로 움직일 기회가 많기에 저희는 주로 승합차를 이용합니다. 운전석 옆에 앉은 형제들이 가끔씩 꼬박꼬박 졸기 시작하면, 운전하는 저까지 졸음이 오기 때문에 저희끼리 농담 삼아 몇 가지 ‘선탑자 수칙’을 만들었습니다.
1. 선탑자는 만일의 돌발 사태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늘 깨어 있는다.
2. 선탑자는 언제나 전방을 예의주시한다.
3. 선탑자는 운전자가 졸고 있는지 여부를 주기적으로 확인한다.
4. 선탑자는 운전자가 늘 깨어있게 도와주기 위해서 최신 버전 농담을 3개 이상 준비한다.
깨어있다는 것, 생각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운전할 때 선탑자가 정신없이 졸고 있다면 정말 운전할 맛 안 납니다.
강사로 초빙되어 갔는데,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침을 흘려가면서까지 졸고 있다면 그것처럼 맥 빠지는 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가끔씩 그런 사람 있는데, 단 둘이 마주한 술자리에서 한 사람은 신나게 이런 저런 세상 살아가는 펼쳐놓고 있는데,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이 술을 못 이겨 잠을 잡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많이 그랬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분들께 정말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늘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늘 예의바르다는 것입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경건하다는 것, 단정하다는 것, 성실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들이 세상모르게 다 잠들어있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보신 적이 있습니까? 홀로 깨어있는 체험을 해보는 것, 정말 좋은 일입니다. 더욱 금상첨화인 것은 홀로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냥 홀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 홀로입니다. 그분과 나 둘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돌아보니 정말 많은 은총의 날들이 흘렀습니다. 정녕 감사해야겠습니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또 다시 자비의 세월이 흐르던 어느 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손을 내미실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자,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구나. 때가 되었구나. 나랑 같이 길을 떠날 순간이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순간이 올 때 지체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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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2독서(히브 11,1-2.8-19)는 깨어 있는 삶은 혹독한 시련의 삶이기도 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미래의 것을 약속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히브 11,8) 길을 떠나야 했던 아브라함은 늘그막에 어렵사리 얻은 외아들을 봉헌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처럼 깨어 있는 삶을 살았던 구약의 수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고 믿음만으로 살다가 죽어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히브 11,13)처럼 살다가 떠난 이들이지만 이들은 결코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현실의 전부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언젠가 돌아오실 주인 앞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셈을 바쳐야 합니다. 우리 삶의 바탕인 시간은 어느 순간이나 하느님의 영원과 맞닿아 있습니다. 복음은 이 사실을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른다”,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설명합니다(루카 12,39-40). 하느님은 언제라도 우리의 시간 안으로 들어와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살펴보시고 우리의 잘잘못에 대해 판결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