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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라는 이름 아래
휘도의 말대로 기인을 찾는 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가는 눈에 쾡한 듯 마른 얼굴, 언제 다듬었는 지 모를 턱수염까지. 행색이 딱 며칠간 잠에 들지 못한 것 같은 얼굴로 여신 미간을 주무르며 눈을 깜빡이던 사내였다. 그는 자신을 기별청소속 주서(정7품)라 자신을 소개했다. 인사도 잠시 일이 한참 밀렸다며 손짓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잔뜩 긴장한 은아가 얼른 그 보조를 종종걸음으로 보조를 맞췄다.
[이름이.]
여전히 시선을 두지 않은 이의 그 음색도 제 주인마치 냉랭했다. 경계하며 날이 선 말투, 은아는 차분한 미소로 답했다.
[김은…우라 합니다.]
[평소에 말이 많은 부류이더냐.]
[아니옵니다.]
[그 말이 참이어야 할 것이다.]
[예.명심하겠습니다.]
[허면 됐다. 남은 것은 차차 이야기 하도록 하고.자 이곳이 네가 머물 기별청이다.]
그가 멈추어 선 곳은 기별청(奇別廳) 이란 까만 현판이 걸린 별채 앞이었다. 기별청.광월함에 이질감마저 드는 무시무시한 궐에서 그나마 사람다워 보이는 곳이었다. 작은 현판에서 어쩐 일인가 묘한 안정감마저 들었다. 그렇게 등에 진 짐이 가벼이 느껴지려 할 무렵. 주서가 보라는 듯 가리켰다.
[저 보이는 저 문은 주상전하와 그 친족들만 다닐 수 있는 문이다.]
[예.]
[혹 일이 고되 자결을 하고 싶거든 저리로 들면 된다.]
[예….예?]
[행여 자결일랑 하고 싶거든 그리 하란 말이다. 내 일이 바빠 시체 치울 시간도 없으니 차라리 저리로 가란 말이다.]
일자로 된 심지 굳어 보이는 입매가 은아의 눈에 들어왔다. 까끌까끌자란 턱수염이 거무수룩하게 올라온 것이 어쩐일에서인가 그 말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한 은아가 하마터면 손에 들린 작은 보따리를 놓칠 뻔 한 것을 겨우 다시 낚아챘다. 어찌 사람이 저리 표정변화 없을 수 있을까 싶다가도 허면 그것이 농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어 괜스레 으스스해지는 팔을 쓸며 기별청 안으로 드는 주서의 뒤를 따랐다.
[아…]
들자마자 시큰거리는 묘한 먹냄새가 진동하는 턱에 은아가 조심스레 코를 부여잡고는 부지런히 눈을 굴렸다. 종이,먹,그리고 종이,또 먹. 아버지가 그리도 자신에게 가까이 하게 하지 못한 것들이 지금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여인이 가까이하면 안 되는 것이라 그리 여겨왔던 일이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자리매김하려 하고 있었다. 참으로 사람일은 모르는 것이라더니 더도말고 딱 지금 이 상황이 그랬다. 허나 이러한 낯선 상황에서도 두려운 상황에서 은아의 머릿 속을 채우는 건 스치듯 지난 휘도의 표정이었다.그리 화가 난 얼굴은 난생 처음이었다. 난생이라 여기기엔 알고 지낸 시간이 그리 긴 것이 아님을 알지만 정말 스승이 가진 표정이 맞을 지 의심이 갈 정도로 날이 선 얼굴이었다. 그저 연민하나가 휘도를 뒤틀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아비의 청으로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인 것도 아주 작은 연민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런 어이없는 연민으로까지 이어지게 한 것은 휘도 본인이었다. 이대로라면, 아니 휘도라면 분명 언젠간 그 연민으로 자신 스스로를 앗아갈 것임이 분명했다. 어렸을 적 부터 그가 내보인 것이 연민임을 모르지 않았다. 마음이 약한 사내이니 언제고 그 연민을 내비치려 할 것이었다. 그러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만 했다. 그 연민을 끊어내도록 돕기위해선 강해지는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연민을 가지지 않을 만큼 강해져야만 한다.
'분명 화가 많이 나셨겠지.'
[기별청은 주로 전하의 명령과 지시,조정의 주요 결정사항,관리임명,각 시(試)의 일시 등의 내용을 엮어 …]
[…]
[게 듣고 있는게냐!]
[예?예!]
[너는 예?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냐?내가 말하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겠느냐!]
주서가 무의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은아가 맘에 들지 않는 듯 중지로 상을 두어번 두드렸다. 그제서야 은아는 이전의 생각을 떨치고 약사빠르게 눈을 돌리며 만족할 만을 답을 찾았다. 결국 상 위에 널부러져있던 붓들 중 가장 상태가 양호한 것을 골라 쥐곤 성해보이는 종이 한 장을 주워들었다. 이를 기다린 듯 주서가 말을 이었다.
[주로 전하의 명령과 지시,조정의 주요 결정사항,관리임명,각 시(試)의 일시 등의 내용을 엮어 대략 넉장정도로 취합을 하여 발행 된 기별지는 한양 및 지방관청으로 전달된다. 뭐 지방까지 가는데엔 대게 열흘 이상이 걸리니 관청에서는 발빠른 이를 기별청으로 보내기도 하고 배편을 이용해 이를 받아보기도 한다. 전하께서는 이를 기별지(奇別紙)라 이름하였으나 항간에서는 이를 아침조를 써 조보(朝報)라 부르기도 한다.]
조보….기별지는 듣는 이 처음이었으나 조보에 관해서는 들은 적 있었다.때때로 아버지가 이를 읽는 것을 종종 보았던 듯도 싶다. 글을 모르던 때의 일이라 자세히 기억은 나진 않았지만 꽤 중요하게 여기어 따로 보관하도록 이르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기별지임이 확실했다.
'기별지라…'
[주상전하의 명임과 동시에 궁내 돌아가는 소식을 대번에 알 수있느나 이를 받아볼 수 있는 이는 극히 적다. 실제로 여기 기별청에서 필사하는 양도 단 마흔 네장뿐.]
[하지만 소녀 간혹 장터 벽보에 이와 유사한 것이 붙은 것을 본 적 있사옵니다…]
은아의 말에 주서의 미간이 볼성사납게 구겨졌다. 그의 말을 끊어서 인 것이라 여겨 말을 주춤했지만 주서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와 별개의 것이었다.
[그것은 벽서(璧書)의 짓이다.]
[벽서…라면]
[관할청으로 가는 기별지를 도둑질하는 도적놈이지.]
벽서. 장안에서 벽서에 대해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임꺽정과 같은 도적은 아니었지만 서민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세를 타고있는 신원불명의 인물이었다. 양인들은 실제로 그를 의인이라고 칭송하기까지 했다. 그의 과업중 유명한 것은 각시의 장원이 세습되는 것과 다를바 없다 그 관례를 비판하며 그날 자 기별지를 장안 벽보에 공개한 것이었는데. 이 기별지에는 별시(試)에 사용 될 명시되어 있었다. 이는 필시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며 이 기별지를 받아볼 수 있는 이의 직급이 영상급이라는 것을 감안하였을 때 그의 말대로 장원은 세습이나 다름 없었다.
그것이 정말 이 기별청에서 난 것임은 아무도 모를일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기정 사실화하여 받아들였다. 하여 주서가 그 문제에 이리 이골이 나 있는 것이었다.
[정의를 운운하며 죄악질을 일삼는 것이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니더냐.]
그는 벽서의 이름을 뱉는 것 조차 불쾌한 듯 고개를 저었다.
[기별청이 속앓이를 하는 것은 비단 벽서때문만은 아니다. 기별지의 내용이 기밀하다보니 양반들은 물론,양인들,심지어는 청국사신까지 이를 손에 넣으려 약탈,서리 매수는 물론 심지어는 체탐인(스파이)을 심기도 하였었다. 이것이 무엇이라고…]
<知者不言言者不知>그의 말을 들고 있으니 눈에 잘 띄지 않았던 현판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지자불언언자부지. 진정 아는 사람은 떠들어 대지 않고, 떠들어 대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기별청내에 걸려있던 현판의 뜻과 그가 처음 건내었던 말들이 아구가 맞듯 딱 들어맞는다. 주서가 처음 자신에게도 '말'이 많은 지 물었거니와 여전히 자신을 날이 선 표정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것에 기쁜 은아가 조심스레 주서를 올려다 보았지만 주서의 표정은 이전보다 어두웠다.
[그들이 기별서리를 납치하여 죽이는 일까지 있었다.]
주서의 손에 들려있던 기별지가 힘 없이 구겨진다. 주서는 이를 미련 없이 바닥에 떨어뜨렸다. 지난 일을 떠올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표정이 꼭 그러했다. 은아는 그를 죽인 체탐인은 어찌되었는지 궁금하였지만 묻지 않았다. 슬픈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에 그에게 강요하고 싶진 않았다.그저 그가 하는 말들에 겁먹지 않으려 차분히 그의 말 역시 붓으로 그려내었다. 묵묵히 붓을 들었던 은아는 한참이 지나서야 주서의 한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 너를 기별에 들이는 걸 탐탁치 않게 여겼다. 기별청,이 전쟁터와도 같은 곳에 계집이라니.]
[…]
[그래서 내 서대감께 송구스러우나 그 치를 직접 보고 결정하겠다 그리 말씀드렸었다.]
주서가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말을 요약하여 적은 은아의 글을 훑었다. 사실 얼렁뚱땅 은아에게 붓을 잡도록 한 것은 기별청 문턱을 넘으려면 반드시 치뤄야하는 시험이었다. 상위에 보란듯이 준비되었던 먹, 잘 갈린 벼루와 한지 역시 모두 시험을 위해 준비 된 것이었다. 기별청에 들기위해 실제로 몇몇이 이 시험에 들었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를 시험이라 여겼던 헛똑똑이들은 주서의 빠른 말을 토시하나 틀리지않게 적어내려가다 이야기를 놓치거나 붓을 떨구기 일수였고 긴장하여 먹을 쏟는 일도 심심치않게 일어났다.
하지만 맹랑한 계집은 달랐다. 이를 그저 자신이 나중에 보기 위한 것으로 여기어 긴장을 하지 않았던 탓일까. 차분하게 써내려간 글은 적절한 삭감과 덧붙임으로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잘 나열되어 있었다. 나열도 나열이지만 먹흘림하나 없는 글씨체는 선비의 것처럼 정갈하기 그지없었다. 이를 보던 주서의 입꼬리가 작게 올라갔다.
[진정 계집이 맞더냐?]
[예…?]
아직도 분위기 파악이 덜 되어 동그랗게 뜬 눈에 주서의 굳은 입매가 풀린다.
[지레 겁을 먹은 것 빼고는 쓸만하다.]
[허면 제게 하였던 말 모두 거짓이옵니까?]
[기별청에서 붓을 한 번 잡아 보겠느냐?]
[…예?]
[이 곳에서 일을 해보겠느냔 말이다.]
퉁명스러운 듯 뱉어낸 주서의 말에 넋놓고 있던 은아의 눈이 땡그래졌다. 얼른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드렸다 .궁을 들면서부터 잔뜩 긴장했던 몸이 풀리면서 의지와는 다르게 얼굴이 발갛게 닳아 올랐다. 당황하여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계속 죄송하다고 말하는 모습에 옆에서 필사를하던 서리가 핏하고 웃음을 뱉었다. 일을 가르치게 될 서리 역시 은아가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제대로 써먹을 인재가 될 수도 있겠군.'
[바로 이것이.]
[…]
[기별청이 가진 묘책이다. 내일 윤시에 과거시험이 있을 거라는 내용이 담긴 나흘도 더 된 기별지다.]
부채질 하던 손으로 주서에게서 종이를 건내받은 은아.
[기별초이다.]
[기별초…]
그의 말에 은아가 기별지에 눈을 두었다. 글이라기보단 하나의 모양에 가까웠다. 어찌보면 처음 글을 배우는 예닐곱 아이들의 장형(章形)과 꼭 닮아있는 것이 장난질처럼 보이기도 하고 얼핏보면 선비가 잘 친 난을 제멋대로 잘라놓은 모양 같기도 했다. 아니, 주서에게 그 내용을 들어보니 그리 보이는 듯도 싶었다.
[서리들만 알아 볼 수 있도록 만든 암호서체다.]
[기별…초]
[기별청 소속 서리들이 실패를 거듭해 생각해낸 방안이다. 어찌 알아볼 수 있겠느냐?]
주서의 말에 기별지를 다시금 빤히 들여다 보더니 안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백날 들여다 본다고 알지 못 할 것이야.기별도 안 가지.]
[예…?]
[기별도 안간다. 좀처럼 소식이 닿지를 않는다는 뜻이지. 이게 양반들 사이에서 새로이 생긴 말이라더구나. 이것이 무엇이라고 그런 말까지 생기다니.]
그의 말대로라면 이곳 기별청은 참으로 무서운 곳임이 분명했다. 모든 소통의 중심지이자 심지어 양반들까지 애타게 갖고 싶어하는 소식 이를 다루는 곳. 은아의 눈이 번뜩였다.
'이런 저런 소식을 접하다보면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이에 대한 소식도…'
정녕 쉬운 일 일까 싶으면서도 어렵지 않은 일이겠거니 스스로 위안했다. 그 자가 누구인지도, 무엇을 하였는지도 이를 알게 되면 어찌 복수를 할지도 어느하나 정해진 것 없었지만 그 생각만으로도 분하였던 마음이 얼굴을 밀고 들어와 심장이 요동했다.그리고 문득 휘도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까 궁금해졌다.
[주서나리.그리 서 계실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기별군사들이 올 시각이 이각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곁발을 들인 것은 주서와 대화를 하는 내내 붓놀림을 끊임 없이 잇던 서리였다. 말하는 동안에는 붓놀림을 멈추어 원본과 필사를 대조하는 일을 하며 흘긋 눈치를 주었다. 이에 주서는 그런 서리를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저 아녀자같이 잔소리는.]
[기별청에오는 소식이 늦어져 오늘은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아직 열장은 더 배껴야 하지 않습니까…]
[하여 이리 자리하지 않았나. 지금 붓을 든대도?]
능청을 떨어대는 주서의 모습에 서리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은아도 그를 따라 작게 웃었다.
[일단 나머지 인사는 차차 하기로 하고. 일단 오늘은 예있어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가서 짐을 풀거라. 주석아!]
[그래. 네가 그러고 있으면 주서나리가 한 눈을 파신다. ]
은아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서리의 부름에 주석이라는 이가 달려와 몸을 굽혔다.
[예.나리!]
허리를 잔뜩 굽히고 있었지만 족히 여덟 척이 되어보이는 장신에 눈매가 짙은 것이 꽤 우직해 보이는 사내였다. 급히 달려왔는지 손이며 얼굴 이곳 저곳에 먹이 볼썽사납게 묻어있었지만 어느하나 이를 나무라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아 그냥 일상인 듯 보였다.
[이 아이를 숙소로 데려가 짐을 풀게하고 오늘은 이만 들어가보거라.]
[예…에? 소신 아직 일을 끝마치지 않았는데…]
[허니 들어가라 허하는 것이 아니냐. 대꾸할 시간 없으니 말 그만시키고 물러가거라.]
[예에…. 내일 뵙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 그마저도 귀찮다는 듯 얼른가라며 손을 휘이 내저었다. 주서는 일에 몰두하느라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은아도 주선을 따라 허리를 굽히고는 보따리를 주워들고는 주석을 따라 기별청을 나섰다. 사내는 걷는 내내 한 마디도 없었다.그저 잘 따라오고 있는 지 한 번 슬쩍 뒤를 돌아본 것이 전부였다. 어찌보면 주서가 했던 말 중에 말이 많지 않냐물은 것에 그 '많지 않음'은 주석을 가리키는 게 아닐 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주서나리가 하신 말은 그리 괘념치 말거라.]
서리와 대화할 때 보다 훨씬 더 낮은 음색이었다.
[무엇을 …]
어느부분을 괘념치 말란 말씀이십니까.
생각치도 않았던 상황에 은아가 갑작스러운 공격이라도 받은 듯 말을 흐렸다. 주석은 말없이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이에 은아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이라고 속으로 그리 여기며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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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사시(四試(에 장원급제한 이인가.]
본이 곤룡포를 슬쩍 걷으며 어좌에 앉았다. 여느장원들을 대했던 때와는 달리 다소 서늘한 음색이었다. 그런 본을 마주하여 몸을 조아린 사내는 푸른색 차례의복 차림의 휘도였다. 본이 말한 사시(四試).정확히는 1년에 세 번 치뤄지는 초시,복시와 전시와 3년마다 한 번씩 치뤄지는 까답기로 소문 난 별시 이 네 가지였다. 휘도는 작년부터 이어져 온 그 네가지 시험의 대과에서 문과시험 모두를 장원한 것이었다.
아마 자신의 부름을 받잡아 입궐하지 않았더라면 이 젊은 선비는 지난 해 아홉차례 장원을 하였던 율곡의 석담을 능가하는 결과를 내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한 결과는 조종을 살아나가는데 무엇보다 크나큰 밑바탕이 될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본이었지만 본은 휘도가 장원하였다는 소식에 그를 바로 정6품으로 등용했다.
[주상전하의 명 받잡고자 입궐하였습니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고개를 들라.]
본이 휘도를 궐로 들인 이유는 단 하나. 그가 네 번의 시험에서 장원을 해서도,잘나가는 이판의 자제여서도 아니었다. 사실 그를 등용하게 되면 뒤따를 골치아플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휘도가 이판의 자제임을 알게된다면 조종실료들은 죄다 제 자식을 등용시켜 한 자리 차지하게 하기위해 자신과 끝도 없는 줄다리기를 할 것이 분명했고, 주상의 총애를 받는다며 이판을 더욱 경계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본은 이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그저 휘도가 하나밖에 없는 외솔의 마지막 제자였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것이 전부였다. 그를 통해서라면 지난 날을 짐을 좀 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를 곁에 둔다면 자신이 지닌 이 끝을 모르는 죄책감도, 앞으로 짊어지고 갈 짐까지도 덜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제 앞에 머리를 조아린 사내라면 그 이상을 해낼 것도 같았다.
[외솔의 제자라고…]
[예.송자 은혁자 되시는 분이 저의 스승님이셨습니다.]
휘도는 대답하기에 앞서 한치의 주저함이 없었다. 대역죄인의 제자였느냐 묻는 것도 꽤나 위험한 질문이었지만 대역죄인의 제자였다답하는 것은 더 무서운 것이었다. 논란을 야기시키기 좋아하는 이라면 얼마든지 외솔과 같은 대역죄로 엮을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제 앞에 앉은 이는 그를 대역죄로 처형한 이였다. 대답하는 그 입매가 어찌나 우직한지 자신이 물은 것이 잘못되었던 것인지 아님 그가 잘못 이야기 한건지 의문시하게 만들었다.
표정에도 스승의 죽음에 대한 노(怒)도 죽은 스승에 대한 연민도 서려있지 않았다. 애써 평온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는 원하는만큼 감출 줄 아는 이 임이 분명했다. 물론 이로 그를 시험하고자 함은 아니었지만 휘도의 거칠것 없는 답에 본은 역으로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것을 겉으로 표하진 않았다.
[제(祭)는 잘 지내드렸느냐.]
계속되는 본의 예기치 못한 질문에 휘도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렸다. 주상은 분명 제(祭).라 그리말하였다. 대역죄,그것도 3대 가문을 멸하는 반란죄. 그 죄인들에겐 제사마저 금지되었다. 이들의 제사를 지내는 일에 있어 최대 사형까지 형벌을 내린 전례가 기록되어 있을만큼 아주 예민한 사항이었다.그것을 그 형을 내린 장본인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가장 놀랐던 것은 그가 사용한 높임말이었다. 높임말이라…하나뿐인 태양으로 인해 높여질 이는 천하에 존재하지않았다. 가만히 듣고보니 휘도는 본이 언급한 이가 정말 스승인 외솔을 말하는 것인지조차 헛갈렸다. 머릿속이 얽히고섥히니 이를 담은 이의 인상 역시 그에따라 찌푸러졌다.
[전하…. 어찌]
[쉿-.]
본이 휘도를 막아섰다.문 밖을 가리키며 더이상의 말은 아끼란 듯 검지로 입을 가렸다. 휘도의 시선이 본의 손끝을 따랐다. 자신을 들이기에 앞서 궁인들을 전부 물렸기에 문 밖에 있는 자는 호위와 서관(왕의 말을 기록하는 자) 단 둘 뿐이었다. 본의 헤아릴 수 없던 행동은 필시 후자때문일것이라 여긴 휘도가 다시 입매를 굳혔다.
아비로부터 주상이 스승을 유독 아꼈다는 것과 이 일의 배후가 따로 있음을 들었기에 입궐행을 고수했지만 아버지가 했던 말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어찌됐든 주상은 이 사건과 가장밀접히 연루된 인물이었기에 가장 깊은 의심과 강한 의구심을 가졌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행여 그 일의 주도하여 앞장 선 것이라면 최악의 상황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그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스치듯 지나간 시선에서 말하는 이의 괴로움을 휘도는 보았다. 슬픔을,연민을,죄책감을 엿보았다.그것은 은아와,제 아비와 자신의 것보다 더욱 큰 것이었다. 어쩐지 그 표정을 보고있자니 지난 기억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이는 이미 답이 정해진 것이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휘도는 태양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진심으로 그 앞에 몸을 낮추었다.
[바람이 많은 곳에 모셨습니다.]
[바람이 많은 곳이라...]
괴로이 웃음 짓던 본이 허-하고 숨을 내뱉 듯 웃었다. 휘도가 말하고자 한 것이 풍골임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풍골,평소 바람이 많아 입산을 꺼려하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약온천이 유명하여 왕족들이 온양행궁 지정소 중 한 곳으로 이번에 새로이 지정 된 곳이었다. 풍골에 묻혔다.이는 떠나간 이를 그릴 누군가를 위한 이판의 남모를 배려였을 것이다. 본은 입술을 깨물며 어좌에 기대다시피 한 몸을 일으켰다.본,그에게도 믿음이 필요했다.
[그대는 정확히 두 번의 입궐하라는 명을 거절하였다. 그것이 하도 기가차 그대의 목을 베려 하였다.]
'헌데 그대가 외솔의 제자임을 알게 되었지.'
[송구하옵니다 전하.]
[어찌 맘을 고쳐 먹어 짐에게로 온 것이냐.권력을 쥐어보고 싶은게냐, 내 밑에서 야망을 피우려함이냐?]
강경한 물음에 휘도는 속으로 얽힌 실타래를 풀었내었다. 첫 번째 실타래를 끌어내어보니 그것은 아주얇디 얇은 미련이었다. 충을 잠식시킨 것은 보잘 것 없이 미련이었다. 그것으로 제 맘이 꼬일대로 꼬인 탓에 어명을 받잡을 수 없었다.
두 번째는 그 작은 실타래를 스스로 풀어내지 못하는 자신이었다. 하나 하나 풀어 낸 실타래는 다시금 .
하지만 결국 미련이 이리도 변모되었고 연민을 낳았다. 그렇게 자리잡은 연민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다 빨리 이끌었다. 구지 풀어 말하자면 그것이 전부였다. 가감할 것 조차 없었다. 답을구하는 이로인해 얽힌 실타래를 모두 깨끗이 풀어냈지만 이를 낼만큼 마냥 게운치많은 않았다. 하여 풀린 실타래를 다시금 헝클어 욱여넣었다. 그리고 그 속내를 말끔히 감췄다.
[전하께서 소신을 부름하신 이유와 같사옵니다.]
[허….]
당차도다.
그 모습이 마치 청을 들어주지 않으려면 제 목을 베어달라 주군 앞에 엎드린 천군만마를 거린 장군의 모습과 흡사해보였다. 지금 제 앞에서 믿음을 바라는 어린 선비는 훗날 충신이 되고 천군만마를 호령하며 자신에게 그 영광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했다. 믿음을 바라기 전에 응당 주어야할 것을 주는 것 그 역시 태양의 덕목. 본은 주저함없이 휘도가 원하는 답을 내주었다.
[나의 사람이 되겠느냐?]
첫댓글 글 감사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5.15 1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