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선거 무공천'이 정답인가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가 우린 당엔 금과옥조처럼 돼 있지만 사실 황당한 거예요. 과거 공천제도에 분명 문제가 있었죠. 혁신은 필요해요. 그렇다고, 아예 공천을 안 한다?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정치에서 기초는 손발인데, 이거 전멸하면 앞으로 일이 될까요?"
수도권의 한 지역구 초선 민주당 국회의원의 말입니다. 그는 지난 2일 김한길 대표와 안철수 의원이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에 합의했다는 속보가 타전됐을 때, 솔직히 '대략난감'이었다고 했습니다. 정치는 혼자 못하는데, 저런 결정으로 이번 지방선거에서 기초단위가 전멸하는 상황이 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저러지? 정말 걱정이 됐다는 겁니다.
기초연금 등 줄줄이 약속을 깬 박근혜 대통령과 야권의 지도자들이 이른바 '신뢰정치'라는 프레임으로 대립각을 세운다는 의미는 있지만, 이번 선거에서 과연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로 얼마나 성과를 거둘지는 의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의원은 '전멸' 가능성을 언급하며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정당공천제도가 엄연한 현실에서 또 새누리당도 기초선거 정당공천을 폐지했다면 모를까, 여당은 공천을 하는데 민주당과 새정치연합만 '새 정치'라는 명분으로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은 정당정치의 근간을 무색하게 만들고 매우 무책임한 정치를 자초하는 꼴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쏟아집니다.
기성 정당공천제의 폐단을 고치고 새로운 제도로 혁신해야 한다는 데는 전반적으로 동의하지만, 당장 새누리당이 공천을 하겠다고 나선 마당에 민주당과 새정치연합만 공천을 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결과가 나올 거라는 진단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기호 1번의 특권' 누릴 새누리당...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들은?
문제는 처음부터 새누리당입니다. 대선공약으로 내세웠던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약속을 함께 지켰다면 논쟁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기초연금처럼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약속도 저버렸습니다. 야권이 아무리 새누리당을 향해 약속을 어긴 정당이라고 맹비난을 해도 새누리당은 끄떡없이 본격적인 공천심사과정에 돌입했습니다. 약속을 어긴 데 대해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눈치입니다. 각 지역별로 공천심사위원회를 가동하고 면접심사가 진행 중입니다. 일부 지역에선 공천 경쟁률이 수치로 확인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새누리당 후보들은 공천을 통해 동일한 기호를 배정받게 됩니다. '1번의 특권'을 향유하겠지요. 반면,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은 무공천을 해서 기호가 후순위로 밀리는 것은 물론이고 출마를 원하는 모든 후보가 거의 다 출마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누가 누군지, 어떤 후보가 더 나은지 변별력도 갖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후보의 난립은 당연합니다. 후보가 많으면 표가 분산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겠지요. 그것이 선거결과에 미칠 영향은 뻔합니다.
이같은 상황이라면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은 '새누리당과의 지방선거 전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새로운 길 찾기에 나서야 합니다. 새누리당을 향해 '너흰 약속을 어겼어'라고 비난만 할 게 아니라, 약속을 지키지 않은 새누리당과 싸워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현재의 정치시스템에서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가 새 정치를 담보할 수 있는 것인가' 근본적인 물음에 답변해야 합니다.
지난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로 당선된 박원순 시장은 당선되자마자, 서울시립대 반값 등록금 약속을 실현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즉각적으로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서울시의회 다수가 민주당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새누리당이 서울시의회를 장악해 모든 박원순표 개혁정책에 안티를 걸었다면 박원순표 생활정치는 피부로 느끼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는 바보같은 짓" 지적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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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한길·안철수, '정당공천 폐지' 한 목소리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새정치연합 안철수 중앙운영위원장이 2월 20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이었던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촉구하는 피켓을 함께 들고 있다. |
ⓒ 남소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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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비단 광역단위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닙니다. 여성계는 지난해부터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에 반발했습니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가 왜 새 정치의 절대가치처럼 포장돼 있냐는 것이지요. 오히려 여성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대표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성계는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에 반대하고 있습니다.실제 기초의회는 중앙정치로 진입하는 하나의 통로이며 기초의회와 광역의회, 또 기초단체장 등을 통해 중앙정치 무대로 진입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실제 이번 지방선거에서 뽑힐 2898명(지역구 2519명, 비례대표 379명)의 기초의원의 경우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이 공천을 포기할 경우 이곳은 새누리당이 장악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분석도 있습니다.민주당 안에서도 이같은 우려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부영 민주당 상임고문은 지난 18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기초선거 무공천이란 대의명분에 집착하기보다 대국(大局)을 봐야 한다"며 "전국의 지방선거판은 아수라장이다, 대선 공약을 파기한 새누리당은 유리하게 전개되는 선거 판세에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반면에 2번 기호가 사라지게 된 우리 측은 난립하는 무소속 후보들 속에서 망연자실하고 있다"고 무공천 백지화를 촉구했습니다.정동영 상임고문도 "기초단체장 무공천 결정으로 서울 현역 구청장 19명(전체 25명 중 민주당 소속)이 전멸하고 그 여파로 서울시장까지 놓치게 되면 안철수 위원장 역시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정 고문은 "기초선거 무공천이 과연 안 위원장이 얘기했던 새 정치인지 회의적"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새정치 비전위원회 간사인 최태욱 한림대 교수는 기자들과 만나 사견임을 전제로 "정치학자의 입장에서 기초선거 무공천이 정당 민주주의에 부합하는지 의문이고,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며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는 기본적으로 여야 양당이 함께하자는 약속이지, 한 쪽만 무공천하면 불평등한 경쟁이 되지 않나"고 무공천 반대 소신을 밝혔습니다. 정치권 안에서는 '기초선거 정당공천 무공천 혹은 폐지'는 바보같은 짓이라는 성토가 이어집니다. '새 정치'라는 명분 때문에 아무도 입밖에 꺼내지 못해서 그렇지 뒤에서는 전부 수근수근 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당이라면 투명하고 정당한 공천심사과정을 통해 정당의 정책을 정확하고도 책임성 있게 수행할 주자를 뽑아 선거에 내보내는 것이 책임정치이지 누가 되든 관계없다는 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통합진보당이나 정의당도 '정당공천 폐지' 입장에 부정적입니다. 현재와 같은 정치구조에서 정당공천이 없어지면 진보정치의 새 인물로 새 정치가 활성화 되는 게 아니라 잘 알려진 구악정치인들이 활개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새정치연합, 이러다간 지방선거 망한다
새정치연합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국정원의 ‘서울시공무원간첩사건’ 조작에도 불구하고 정국주도권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제1야당이 덩치만 커졌지 역할이 실종됐다. 새정치연합은 4.19와 5.18, 6.15와 10.4선언을 삭제한 강령초안으로 정체성 홍역을 치르더니, 이제 기초선거 무공천을 둘러싸고도 당내 혼선이 일고 있다. 적전분열에 자중지란 양상이다.
야권으로서는 객관적으로 불리할 게 없는 지방선거다. 지난 1년 동안 박근혜 정권은 공약파기는 물론이고 인사정책의 난맥상을 드러냈고, 국정원을 앞세운 NLL대화록 공개로 국론분열과 국정농단을 자행하였다. 철도와 의료 민영화 강행과 함께, 복지정책 후퇴로 ‘세 모녀의 죽음’과 같은 사회적 비극도 끊이질 않고 있다. 국정원의 간첩사건 조작까지 드러나 정보공작정치에 대한 원성이 자자한데도 남재준이 버티고 있으니 선거에 악재로 작용할 게 뻔하다.
그러나 잘 차려진 밥상도 당사자가 걷어차면 어쩔 도리가 없듯, 새정치연합의 자충수와 갈팡질팡으로 선거결과가 우려스럽다. 무엇보다도 기초선거 무공천의 통합 명분이 새정치연합 전체를 결박하고 있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결국 사단이 나는 수밖에 없다. 기초선거 무공천은 기존 보수정당의 그릇된 공천관행, 이른바 돈 공천과 줄서기 공천 때문에 발생되는 비리문제이지 공천 그 자체가 원인이 아니다. 공천은 말 그대로 공식적 추천 과정을 거치는 정당 책임정치의 일환이다. 공천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정치 냉소주의에 편승해 구정물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어리석은 처사다. 기초선거 무공천은 도리어 낙후한 기초의회의 수준을 더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공산도 크다. 난립한 무소속 후보들 속에 파묻혀 제1야당 후보가 실종됨으로써 새누리당이 어부지리를 챙기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정치공학적 통합이긴 하지만 그나마 선거구도를 1대1로 변화시켜 박 정권 심판을 기대했던 일말의 가능성조차 무위로 돌려놓은 꼴이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기초선거 무공천에 대한 새정치연합 내부의 우려와 비판도 커지고 있다. 지난 15일 오후 열린 민주당 소속 서울 구청장 간담회에서 한 구청장은 “선거는 상대가 있는데 집권 여당은 공천을 하는데 새정치민주연합은 공천을 하지 않으면 '한 쪽은 총을 들고 싸우는데 우리는 맨손으로 싸우는 것'과 같아 선거 결과가 크게 걱정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만약 서울과 수도권에서 무공천으로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 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이냐며 “우리 후보가 다 죽는 것이 무슨 새정치냐”며 대책 마련을 호소했다. ‘여당 후보 기호 1번’ ‘제1야당 후보 기호 2번’으로 맞붙어도 어려운 싸움에, 새누리당 후보는 ‘기호 1번’을 받는데 반해 제1야당의 구청장과 구의원은 ‘기호 2번’을 받지 못하고 6번 이후 번호를 받게 되면 민심이 올바로 반영되겠느냐는 항변이다. 21일 열릴 마지막 민주당 중앙위원회에서도 기초선거 무공천에 대해 문제제기가 집중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통합을 주도한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로선 유일한 통합의 명분이 기초선거 무공천인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형국이다. 기초선거 무공천이 자충수가 돼버렸다. 궁색한 처지에 몰려도 안철수 의원으로선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고, 김한길 대표 역시 선택의 여지없는 외길 수순이다. 안 의원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독자 신당을 창당하고 민주당과의 선거연대는 없다‘던 공언은 대국민 약속이 아니고 빈말이었나?
잘못을 시인하고 바로잡는 용기야말로 책임 있고 진정성 있는 정치인의 자세다. 자기변명과 합리화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불통과 독선의 정치가 더 큰 화를 부르는 법이다. 결자해지의 책임은 김한길-안철수 새정치연합 두 공동대표에게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