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20 비우당(庇雨堂)
지금 읽고 있는 지봉유설이 씌여진 곳이 바로 지봉 이수광이 은거하던 비우당이다. 위치는 “흥인문 밖 낙봉(낙산) 동쪽 구석진 곳”이라고 기록되어있다. 그가 33세에 이미 당상관에 이르럿지만 광해군이 계축옥사를 일으켜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자 관직을 버렸는데 이는 예는 물론이고 지금도 쉽지않다. 당장 밥줄이 끊기기 때문이다. 특히 청렴결백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는 이 시간을 이용하여 평소 기록하던 내용들을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불리우는 지봉유설을 탈고하는 기회로 활용하기도 하니 의를 지키는 것은 물론 시간도 제대로 활용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그를 다시 순천부사로 임용했다. 하지만 인목대비가 폐비되자 지봉은 부사 임기를 끝난후 다시 관직에 뜻을 두지 않는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었는데 당시 당파싸움으로 그와 같은 당색이 없었던 사람이 필요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관직을 버린 시기가 길기에 지위는 이조판서에 불과했지만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인조가 조회를 중지하기도 했다.
그의 외고조인 유관(柳寬)은 원래 조선 초기 청백리로 유명했는데 그의 초가집은 지붕이 새는 집이었고, 비가 오면 우산을 받아 비를 막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임진왜란 등의 혼란으로 원래의 집이 소실된 후, 이수광이 같은 터에 다시 “초가 3간” 규모의 소박한 집을 지었고, 이름을 비우당(庇雨堂)이라 지었다는데 그 뜻은 “비바람을 간신히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집”이다. 이수광은 관직을 멀리하고 비우당에 은거하며 실학적이고 실용적인 사상을 비우당 생활에서 형성해갔다. 이는 어찌보면 금은보화보다 청렴결백함을 유산으로 받았기에 가능할 수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가 때를 알고 밥줄에 초연할 수있었던 기반이 되었을 던것으로 생각되어 부랍다. 당시 영의정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이름은 학자로서 그리고 저자로서, 의를 아는 의인으로서 후손들에게 기억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