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살 노동자 죽임과 청년 예수
놀이터에서 씽씽이를 타며 즐겁게 놀던 외손주가 갑자기 운다. 넘어진 것이다.7살 아이가 팔꿈치가 좀 긁힌 걸 갖고 아파 죽겠다는 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
외손주보다 12년을 더 산 한 청년의 몸이 찢기고 부서졌다. 지난 5월 28일 서울 구의역에서다. 고장 난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혼자서 수리하던 19살 김아무개 노동자가 그만 달려오는 열차에 치여 숨졌다. 김 군의 어머니는 "20년을 키운 어미도 못 알아보겠더라."는 말을 하며 오열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주고도 남는 말이다.
글 제목에서 나는 '죽임'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가 목숨을 잃은 일은 단지 죽음-사고가 아니라 '죽임을 당한' 사건이기 때문이다.19살 노동자, 그는 죽은 게 아니라 죽임을 당했다. 사회적 타살을 당했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를 조직적으로 죽였다. 오늘 한국사회는 노동자들이 다치거나 죽임을 당하도록 세팅 setting되어 있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 하청 노동자, 파견근로자, 일용직 노동자, 젊은 노동자들은 더욱 열악한 그 틀 속에 갇혀 있다. 우리나라에서 산재로 죽임을 당하는 노동자가 하루에 평균 6명이나 된다.4시간에 한 명씩 목숨을 잃는다. OECD국가들 중 으뜸이다. 이 으뜸 자리는 오랫동안 빼앗기지 않는다. 김 군은 근무태만이나 안전불감증이나 불성실이나 우연한 실수 때문에 죽은 게 결코 아니다. 그의 죽음은 필연적인 사건이다.
김군의 가방에서 컵라면과 기름때 묻은 장갑이 스패너, 펜치, 드라이버 등과 함께 나왔다. 밥 먹을 새도 없이 일한 김군이 받은 한 달 임금은 140만원 정도였다.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이다.2인1조로 일하라는 근무 규칙이 있었지만, 그가 속한 회사(은성PSD)는 그런 매뉴얼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노동조건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해고되지 않으려면 김 군이 혼자서 목숨을 걸고라도 스크린도어에 매달려 작업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회사는 혼자서 밥 먹을 새도 없이 수십개 역을 다니며 온종일 일을 해도 주어진 작업량을 채울 수 없을 정도로 과중한 작업량을 김군에게 맡겼다. 은성은 서울시 산하 기업인 서울메트로의 하청업체다. 서울 메트로는 정규직을 줄이기 위해 회사를 여러 개로 쪼개 운영했다. 그리고 위험한 일은 하청을 주었다. 물론 하청업체들의 주요 일 자리는 메트로의 퇴직을 앞 둔 사람이나 퇴직한 사람들 차지인 경우가 많다. 공기업을 여러 개로 쪼개는 다른 이유는 흔히 낙하산 인사를 위해서고, 위험한 일을 하청 주는 이유는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서다. 동시에 이윤 확대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분열, 차별화시키는 게 큰 목적이다. 노조의 조직활동을 구조적으로 방해할 뿐 아니라 노동자들을 계층화(가령, 정규직-비정규직, 원청-하청.)시켜 분열시키고 힘을 약화시키는 게 자본의 숨은 의도다. 서울메트로의 하청노동자는 4,253명이나 된다.(2016.4월 기준) 안전문 수리만이 아니라 전동차 정비까지 하청을 주고 있다. 시민의 안전과 생명과 직결된 업무까지 부실하기 짝이 없는 하청구조에 떠넘긴 것이다.
이런 사악한 구조를 사회 전반에 심는 일은 소위 신자유주의 정책으로서 IMF이후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더욱 심화되었다. 효율성과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자본이 정부(국가)와 손잡고 아주 간교한 먹이사슬-착취와 억압의 구조를 만들었다.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민족이 분할 -통치를 받는 것도 원통한데, 국내의 2천만 노동자들은 또 분할, 지배를 받고 있다. 소수의 가진 자들은 이윤을 위해 강고하게 연합하는데 반해 노동자들은 원자화되어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대부분의 외주업체들은 최저가로 낙찰을 받으려고 한다. 저가로 낙찰을 받으면 임원들과 정규직들이 먼저 돈을 독식하다시피 한다. 그리고 하청받은 일은 쥐꼬리만한 돈을 던져주면서 시킨다. 그러다보니 저임금, 비정규직을 채용하게 되고 안전관리는 뒷전이다. 2인1조 근무 같은 안전관리는 형식이 되고 노동자의 부상과 죽임당함은 줄줄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을 일회용으로 부리며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환경과 조건을 조직적으로 세팅해 놓은 것이다. 생선의 살을 단계별로 발라 먹은 뒤 가시 정도를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던져주는 꼴이다. 그거라도 죽지 못해 주워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리거나 가시에 찔려 죽게 되는 형국이다. 김군은 어쩌다 사람들의 주목이나 받지만, 산재로 죽임을 당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개죽음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스러진다.
지난 5월 삼성중공업에서는 이런 사건이 있었다. 한 젊은 하청노동자가 철판 작업을 하다 자신의 허벅지 동맥이 끊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출혈이 심한 사람을 하청업체는 작업차량으로 이송했다. 그 노동자는 이틀만에 숨졌다. 대기하고 있던 삼성중공업 구급차(3119)를 불러 응급처치를 하고 이송했다면 목숨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왜 그리 하지 않았을까? 대답은 구조적인 문제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원청기업은 흔히 위험한 작업을 하청업체에 떠맡기면서 생산비를 줄이려고(이윤을 더 남기려고) 공정기일을 짧게 잡아준다. 그리고 하청업체에서 산재가 두세 번 일어나면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 또한 산재를 신청한 하청 노동자는 찍혀 재취업이 막힌다. 이런 구조악 속에서 하청업체는 산재사고가 나면 은폐하기 일쑤다. 공식기록에 남는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작업트럭 같은 차량으로 부상당한 노동자를 병원으로 실어 나르는 기가 막힌 촌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게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이라는 나라의 민낯이다.
이런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악은 우리 사회 도처에 괴질처럼 번져 있다. 김군은 1997년생이다. 세월호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학생들과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다. 세월호 학생들도 죽임을 당했다.20년 가까이 된 낡은 배를 수입해 얼렁 뚝딱 증축하고 개축도 했다. 승객을 더 실어 돈을 더 버는 게 유일한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법이나 시행령을 새로 만들어 줬다. 관료들도 눈 감아 줬다. 그러다보니 배의 무게중심은 위로 올라가고 침몰될 위험은 높아졌다.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작업은 한도 끝도 없었다. 배의 평형수까지 건드렸다. 생명수같은 평형수를 통 크게 빼내고 화물을 왕창 더 실었다. 침몰을 위한 세팅을 노련하게 한 것이다. 저승사자를 부르기 위한 세팅의 마지막 절정은 '가만히 있으라.'였다. 침몰되는 상황에서 선장과 선원들은 먼저 빠져나가고 관료들은 구조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국가-정부는 진상규명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로 막는다.개인적으로 놀러가다가 난 사고였을뿐이라며 유가족들까지 죽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대다수 언론은 자본을 위해 부역하는 교묘한 논리를 늘어놓기 바쁘다 .대부분의 교회나 종교도 마찬가지다. 한국교회 회중 대부분은 노동자, 도시 서민, 여성, 농민인데 교회나 종교 강단에서 하는 소리는 자본의 논리를 대변하는 소리다. 교회나 종교가 돈이 왕 노릇하는 세상에 길들여진 탓이다. 돈 중심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고대 이집트에 살던 히브리 노예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신격화된 바로왕의 체제 아래서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착취와 억압을 당하던 그 노예들은 부르짖었다. 외쳤다. 그들은 자유인으로 살고 싶었다. 바로가 던져주는 떡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다. 비록 배부르게 먹는다고 해도 노예로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사회에서 임금노예로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니다. 혹시 화려하게 살아도 주종관계 속에서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다. 수령주의적 왕조체제인 북한에서 수령의 한낱 수단이 되어,그것도 빈한하게 사는 것은 더더욱 사는 게 아니다.
아무튼 그들이 외치며 부르짖을 때 역사에 개입하셔서 새세상을 건설하시는 야훼 하나님이 응답하셨다. 야훼는 도처에서 눌린자들을 도와 새세상을 건설하시는 분이시다. 이 세상에서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과 종교는 대개 강자,지배자들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봉사한다. 그 신(종교)들은 지배자, 강자들이 고안하고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훼는 '스스로 계신 존재'로서 눌린 자들에게 임하시고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의 해방을 돕는다. 그들을 자유케 하신다. 자유로운 사람들의 공동체를 이루는 게 목적이다. 그것이 사랑과 정의이신 야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길이다. 심히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사회(세상)에서는 약자 편에 서는 것이 사랑이요 정의다. 야훼는 가난한 약자를 우선적으로 선택하시고 그들 편에 서신다. 그리고 일하신다. 그런데 그 일을 하실 때 야훼는 반드시 사람들로 하여금 연대하며 조직적인 활동을 하도록 하신다. 히브리 노예들은 자유를 위해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예수는 야훼 하나님의 아들이다. 성육신하신 분이다. 예수 시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로마제국과 이스라엘 지배자들에게 이중으로 착취당하고 억압당했다. 그 상황에서 예수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그는 태생부터가 하층민이었다. 외양간에서 태어난 그는 나사렛 시골에서 노동자로 살았다. 그리고 30살 쯤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선 이후 3년 동안도 대부분 가난한 변방 지역 갈릴리에서 활동했다. 그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로마제국과 이스라엘 지배자들이 만든 불의한 체제에 그냥 순응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저항했다.눌린 사람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더불어 저항했다. 12제자를 조직하는 등 그는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라, 고 하신 말씀은 기존 체제에 순응하라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비굴한 굴종을 가르친 말이 아니다.그 말은 지독한 저항 정신이 깃든 말이다. 상상해 보라. 한쪽 뺨을 맞은 약자가 다른 뺨마저 때리라고 강자에게 들이대는 모습을. 주먹이나 칼을 들지 않고 뺨을 돌려 댄 점을 주목하자. 이는 칼을 든 보복보다 더 강력한 항거다. 깊은 사랑에서 우러나온 저항이다. 악에 대해 악으로 대항하는 게 아니라, 선으로 악에 맞서며 선으로 악을 갚는 고상한 저항이다.주먹으로 출애굽운동을 하려 했던 40세 모세의 저항이 아니라, 미디안광야 40년(연단의 시기)을 보낸 뒤 모세가 품었던 저항 정신이다. 하나님과 연합된 사람속에서 흘러나오는 거룩한 저항이다.
청년 예수는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다. 당시 십자가는 정치범을 죽이는 틀이다. 그가 종교범이었다면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예수는 정치범 아닌 정치범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는 세속적인 정치가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정치를 한 분이다.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하셨다. 예수의 정치는 빌라도의 정치가 아니다. 헤롯이나 대제사장들의 정치는 더구나 아니다. 그리고 육신의 떡이나 배불리 먹기를 갈망한 군중의 정치가 아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부국강병해 또 다른 로마제국이 되기를 열망하는 배타적 민족주의 정치도 아니었다. 예수는 돈과 주먹으로 돌아가는 사회구조 안에서, 그 구조를 위해,그 구조에 의해 활동하는 정치꾼들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예수는 돈이 아니라 인간, 이윤이 아니라 생명, 주먹이 아니라 정의가 지배하는 새세상을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해 활약하셨던 분이시다. 그는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일하셨다. 저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며 사는 세상-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세상(사도행전2:43-47,4:32-35 참조)을 짓다가 불의한 기득권자들(정치, 종교 등)에게 잡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셨다. 물론 배만 부르면 족하고, 주먹 센 놈이 최고라는 사고방식에 젖은 무리를 권력자들은 십분 이용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하셨다. 부활은 무엇보다 야훼 하나님께서 예수가 옳았음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지구촌 전체에서 인류 보편적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확산시키는 일을 하신다. 인류 보편적인 출애굽 운동을 쉼없이 일으키시고 견인하신다. 사람들과 역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그 일을 하신다.
오늘날 인간에게 접근하는 두 종류의 영Spirit이 있다. 하나는 악령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이다. 성령은 영원한 청년 예수의 영으로서, 사람이 그 성령을 마음에 모시면 돈이 왕 노릇하는 체제와 돈이 주도하는 모든 가치관, 문화 등을 거부하고 저항하게 된다. 돈보다 사람, 이윤보다 생명, 탐욕적 이기심보다 나눔, 주먹과 분열보다 연대와 사랑이 넘치는 삶과 세상을 실현하며 살게 된다.물론 성령은 개인에게 임하시지만 동시에 무리 속에 임하신다. 인류 역사상 처음 성령이 불같이 임하신 때는 무리가 함께 모여 있을 때였다. 성령은 연대를 도모하고 조직적인 활동을 하는 성향을 갖고 계시다. 하지만 악령은 성령과 정반대로 행한다. 그것은 '돈신'으로서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을 확대 발전시키는 일에 몰두한다. 악령은 세상에 3가지를 집중적으로 퍼트린다. 첫째 ,낙수효과론이다. 즉 부자가 부유해질수록 가난한 자들도 덩달아 부유해진다는 논리다. 둘째, 가난의 원인은 오로지 그 개인의 책임일 뿐이다. 셋째, 돈이 왕 노릇하는 사회보다 더 나은 새 사회(세상)는 이 땅에 결코 오지 않는다. 이 악령은 특히 교회나 종교 속에 침투하여 맹활약한다. 가령, 널리 퍼져있는 내세주의 신앙이나 '내 탓이요!'운동 같은 것을 보라. 김모군 같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내 탓'을 하도록 유도하는 신령한(?)교회를 상상해 보라. 몸은 분명 노동자인데 자본의 논리로 머리를 가득 채운 교인들은 악령에 사로잡힌 것이요 세뇌된 것이다.
노동자들이야 말로 예수의 성령을 모실 필요가 있다. 노동자가 임금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사는 일은 노동자 자신 외의 누구도 할 수 없다. 이 일은 성령을 의지하고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성령은 특히 천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신다. 마음을 열고 성령을 모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야말로 오늘의 출애굽을 위한 첩경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해 성령은 누구보다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임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노조와 같은 연대 활동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이루어 가신다. 노조결성과 활동은 헌법이 보장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일을 멈추고 기계를 멈출 수도 있는 권리를 헌법은 엄연히 보장한다. 천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 연대하는 일은 거룩한 성사聖事(sacrament)다. 그 일은 동시에 민주공화국(헌법 제 1조 1항)의 정체성을 세우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임하시는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자. 악령을 좇아 산 죄를 회개하며 모시어 들이자. 청년 예수의 영을 따라 연대하자.
김달성목사(평안감리교회. '교회에서 신을 만드는 사람들'저자)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