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덕수궁터 미 대사관 아파트 신축 예정부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담은 글입니다. 덕수궁터 미대사관 아파트 신축반대 시민모임에서는 내일(15) 기자회견을 갖고 "덕수궁터 미대사관 아파트 신축 예정지를 사적지로 지정하라"고 촉구할 예정이며, 이자리에서 사적지 지정의 역사적 당위성 등을 아래의 내용으로 이태진(서울대) 교수님께서 발표하실 예정입니다./옮긴이>
- 제목 : 정동 주한미국대사관저 일대 사적(史蹟)의 국가적 중요성
- 작성 : 이태진 (서울대 교수, 한국사)
1883년 5월 20일 푸트(Foote) 주한 미국공사는 현재의 정동 미국대사관저 건물을 공사관 건물로 매입했다. 당시는 현존하는 경운궁(덕수궁)이 건립되기 전으로 민씨가(閔氏家)란 한 민가를 구입한 것이다. 경운궁은 1897년 10월에 발족하는 대한제국의 본궁으로 사용하기 위해 한 해 전인 1896년부터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궁이 완공되면서 미국 공사관 건물은 경운궁 속에 든 형세가 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호레이스 알렌공사로부터 많은 우호적 협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형세가 문제될 것이 없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시작된 한미관계는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1894년 6월 일본이 한국(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을 때, 민주당 출신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대통령은 조미조약 제1조의 우의적 거중조정(good offices)을 발휘해 달라는 조선정부의 요청을 받아 들여 일본의 계획을 저지시켰다. 그러나 1900년 공화당 출신의 테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가 대통령이 되면서 상황은 아주 달라졌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지지하여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조약을 강제하는 것을 크게 도와주었다. 이 조약에 따라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감으로써, 서울에 주재하던 모든 외국 공사관들은 철수하였다. 주한 미국공사관도 공사업무는 중단되고 영사만 주재했다. 그러나 미국은 곧 만주철도부설권 경쟁에서 일본으로부터 배신을 당했고, 1938년 태평양 전쟁으로 적성국이 되어, 그 건물이 총독부 관할이 되었다. 정동 관저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미국 소유로 새로 확인된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감안하더라도 건물에 대한 미국측의 소유권은 현 대사관저 건물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테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한제국의 멸망을 도운 사실을 상기하면, 미국은 오히려 일본의 침략으로 손상된 경운궁 일대의 모든 역사적 유물들을 복구·보존하는 데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할 입장이다.
1897년 10월부터 시작되는 대한제국의 역사는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왜곡으로 한국민들에게조차 잘못 알려지고 있다. 고종황제는 1882년 이후 미국을 개화의 모델로 삼아 우호와 협조를 기대했다. 1896년 2월 고종이 일본군이 장악한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그해 9월말부터 시작된 서울 도시개조사업은 그 대표적 예다.
이 사업은 9년 전에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했던 박정양과 그 직원들(이상재, 이채연, 이종서 등)이 주관한 것으로, 서울의 구도시 틀을 유지하면서 워싱턴 디씨의 근대도시로서의 장점을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워싱턴 디씨는 대통령궁(President Palace; 현 White House)을 중심으로 한 방사상 도로체계, 가(avenue)와 노(street)를 교차시킨 직선 도로체계를 중요 특징으로 한다. 서울도시개조사업은 새로 출범하는 대한제국의 본궁으로 경운궁(현 덕수궁)을 도심에 새로 지으면서 워싱턴 디씨의 대통령궁처럼 이를 방사상 도로체계의 중심점으로 삼았다.
현재의 시청앞 광장의 방사상 도로체계는 바로 이때 처음 만들어진 것을 확대한 것이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환구단, 독립문, 고종황제즉위 40주년 기념비전, 탑골공원 등을 만든 것도 기념비와 공원이 많은 디씨의 특징을 따른 것이다.
대한제국의 본궁으로 만들어진 경운궁은 북편에 선원전(璿源殿; 역대 왕의 초상화 보존처)을 두고 전방(前方)을 좌우를 나누어 오른쪽 방향에는 서양식 건물들(돈덕전, 구성헌, 중명전 등), 왼쪽으로는 한국식 건물들(중화전, 준명정, 함령전 등)을 안치하는 설계로 전체가 구성되었다.(1910년 제작 덕수궁도 참조) 이는 동·서양 문물의 공존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설계에 따라 이루어진 건축물들은 1906년 11월 일본에 의한 강제 보호국화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고의적인 황성·황궁 파괴(舊物 타파)로 크게 훼손되어 지금은 본래의 구도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우리 한국민은 일본의 유적인멸과 역사왜곡으로 최근에이르기까지 대한제국의 자력 근대화의 노력이 있었던 것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다. 그들은 한국 지배를 정당화 하기 위해, 고종황제는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바보 군주로 만들고, 그 정부가 이루었던 모든 근대화의 성과들을 매장시키거나, 친일적인 인사들의 개인적인 치적으로 왜곡했다. 고종황제의 대한제국이 볼만한 치적이 있었다면, 국제적으로 그들이 바다를 건너와 한국을 통치할 명분이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한국을 강제적으로 보호국으로 만들때부터 국제적으로 치열한 선전공작으로 벌였으며, 미국은 그 선전 공작의 가장 중요한 대상국이었다. 미국 정부는 이렇게 일본 식민주의의 역사왜곡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1948년 정동 대사관저 매입 시점에서 대한제국과 경운궁의 역사와 그 중요성을 알 수가 없었다.
경운궁 일대의 건축적 구성과 역사적 중요성에 대해 무지하기는 한국측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한국민들도 일본 식민주의의 역사왜곡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민들은 최소한 이 일대에 한 많은 역사가 서려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자세한 역사는 알지 못하더라도, 중요한 문화유적지가 틀림없는 왕궁 일대에 외국 대사관과 그 부속 아파트가 들어서게 된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충격을 넘어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그곳이 만약, 자력근대화의 결의의 표시로, 근대화에 황제·황실이 앞장선다는 표현으로, 새로 만든 황궁의 본원적 상징성을 담은 건물(선원전)이 있던 자리란 것을 한국민이 모두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한국민이 모두 분노하기 전에 미국측이 한국과 한국민의 역사를 존중하는 뜻에서 다른 길을 택해야 하지 않을까.
대한제국은 일제가 선전한 것처럼 무능한 제국이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1873년 말 이래로 조선·대한제국은 청국과 일본의 방해를 헤치면서 자력 근대화의 노력을 최대로 기울인 나라로서, 그 중심 자리에 있던 고종황제는 1907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했다. 그들의 요구를 잘 들어주지 않는 방해자였기때문이었다. 그는 그후 '덕수궁'(이때부터 일본측이 붙인 이름)에 갖힌 신세가 되어서도, 외국 원수들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면서 주권을 되찾을 날을 기다렸다.
1919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은 새로운 전기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선언으로 그가 다시 움직일 것을 우려한 나머지 독극물로 독살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온 국민이 일어나 그의 인산(장례식)을 마친 뒤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3·1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대부분의 독립운동세력은 고종황제의 죽음을 대한제국의 종말로 간주하였다. 이 만세시위운동 후에서야 비로소 공화제를 채택하여 그해 6월에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하였다. 이 임시정부의 헌법 기초 위원회는 당초 새 민국의 국호를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으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본 회의에서는 수개월 전 3·1운동 당시, 경운궁 대한문 앞에서는 "인민의 곡성이 창일한 것은 민심이 아직은 황실에 있으니 민심 수습상 황실을 우대할 필요가 있다"(이만규, 29면)는 판단아래 대한제국을 잇는 뜻으로 대한민국을 국호로 채택하였다. 임시정부의 헌법(1919. 9. 11)은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한제국의 판도로 정함"(제3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제7조)를 명시하여 그 승계의식을 분명히 했다.(윤대원, 31-33면) 그리고 1949년 이후 대한민국의 헌법은 상해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한다는 것을 명시해 왔다.
이와같이 현재의 대한민국은 분명히 대한제국의 국체를 승계한 위치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의 황제권의 근원을 이루는 선원전은 지금의 대한민국의 중요한 역사적 연원처로서 국가적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 자리에 외국, 그것도 가장 가까운 우방국의 대사관이 들어선다면, 그것은 양국이 모두 반드시 지켜야 할 국가 의전을 모르는 야만국이 되어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양국 당국의 깊은 재검토가 요망된다.
미국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한반도에 수립할 정부를 검토하면서 상해 임시정부는 부패한 대한제국의 뒤를 잇는 사람들의 것이므로 수권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임시정부의 요청을 거부했다고 한다. 이 판단의 근거가 된 부정부패론은 곧 일본의 역사왜곡의 핵심으로 당시의 미국정부는 그 악선전의 중요 대상국이었다는 것이 이 사실로서도 명백하게 입증된다. 우리는 미국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로 더 이상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이곳에 미국 대사관이 계획대로 들어선다면,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더 이상 한미관계의 역사를 우호의 역사로 쓸 수 없게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