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의 동네 한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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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토요일 저녁, 테레비에서는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가 나온다. 여기는 삼례, 나는 혼자서 우두커니 앉아, 탤런트 김영철이, 개성 만두를 빚는 할머니건, 99세인대도 산수 문제를 푸는 할머니건, 아무 할머니나 붙들고 자기 어머니 생각이 난다면서 또 눈물을 훔치다가 이윽고 돌아서서 나가되,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면서 자꾸자꾸 돌아보는 모습을 본다. 별거 아냐. 진부한 감정이고 상투적인 표현이잖아.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쫓기듯 방에 들어와 이 글을 쓴다. 두 달 전만 해도 나는 어머니와 같이 이 프로그램을 보곤 했다. “김영철이 저 사람, 노래도 잘해요. 노래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 “넉살도 좋아.”
내가 서초동 어머니 집에 올라갔던 날은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이다. 월요일과 목요일은 누이동생이 어머니에게 와서 목욕을 시켜드리는 등의 시중을 들고, 나머지 날은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사는 막내동생 부부가 어머니를 돌봐드린다. 내가 어머니 집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점심밥, 저녁밥을 차려서 같이 먹는 거 하고, 같이 테레비를 보는 것이다. 잠깐 안마를 해드리는 것도 있다. 이런 식이다. 토요일, 점심 설거지를 끝내고 내가 커피를 타면, 어머니는 내가 마실 커피를 올려놓을 테이블을 만드신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어머니에게 안마를 해드린다. 그리고는 테레비를 본다.
그 지역에서는 80번을 틀면 전원일기가 나온다. 혹시 안 나오면 62번을 틀면 된다. 어떤 때는 종일 그 프로가 방영된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신다. 시력에도 문제가 있지만, 이 경우에는 청력문제쪽이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이상한 일이지만, 내가 하는 말은, 상당히 작은 소리로 하는 말까지 포함해서 다 알아들으시면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말은, 특히 드라마에서 나오는 말은 거의 알아듣지 못하신다. 그래도 모자는 재미있게 전원일기를 본다. “김자옥이네요.” “김자옥이 나온 적이 있었나?” “있었나 보네요.” “저건 금동이가 장가들기 전이네요.” “자가 금동이 각시가 되지?” “예.” 그러다가 나는 양촌리 사람들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섬집아기처럼 스스르 잠이 든다. 깨어나면 어머니가 떨리는 손으로 힘들게 깎아놓은 참외나 복숭아가 접시에 앙증맞게 담겨있는 것이 보인다.
저녁밥을 먹고도 유사한 루틴을 반복한다. 다만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바뀐다. 바로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 일요일 점심에 다시 오면, 이번에는 전국노래자랑을 보게 되어 있다. 요즈음 전국노래자랑은 코로나로 인해 새로 찍지 못하니까 예전에 방영하였던 것들을 새로이 편집해서 방송해준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이야기하자면, 한 가지를 더 말해야 한다. 가요무대. 내가 매주 월요일 서울에 올라와 공부 모임에 참석하던 시절, 공부를 끝내고 용산역에 도착하면 대합실의 대형 텔레비전에서는 가요무대가 나왔다. 나는 노숙자들 사이에 끼어 고향을 찾는 구슬픈 옛날 노래를 들으면서 내 신세가 저들 노숙자보다 나은가, 내 심정은 저들과 한 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어머니도 지금 저 프로를 보고 계실텐데, 혼자서. 서울까지 올라왔으면서 어머니에게 들르지를 않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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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달라진 것도 있다. 작년 초여름부터지만, 내가 주말 근무를 시작한 이후 뭔가가 약간, 아주 약간, 그러나 분명하게 달라졌다. (어머니집에 오는 것을 내가 ‘근무’라고 부르면서 농담으로 그렇게 부르는 거라고 말하곤 하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농담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달라진 것은, 어쩌면 내가 아들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며느리 역할까지 하게 되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어쩌면 어머니가 그 전보다 더 노쇄하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내가 설거지하는 모습을 가끔 감시하신다. 내가 물로 대강 씻어내면 세제를 써서 빡빡 씻으라고 지시를 하신다. 십여 년 전 일이지만, 삼례에서 같이 살 때는, 나의 주방 출입을 아예 금지시켰던 분이다. 심지어, 노인네가 설거지하시는 것을 내가 좀 도와드리려고 하면, “니가 자꾸 그러면, 나 울어버린다”고까지 말씀하셨었다. 반찬이 이것저것 많이 차려져 있어야 좋아하신다. 그러나 내가 독거노인 스타일로 반찬통째 반찬을 식탁에 늘어놓으면 마뜩찮아 하신다. 내가 사가는 반찬이나 포장해가는 음식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신다. 길 건너편의 유명한 고깃집에서 포장해간 우거지국은 아예 손도 대지 않으셨다. 고깃국을 못드시기에 일부러 고른 것이었는데. 너무 하신 거 아냐? 만두도 안 드셨고 육개장도 안 드셨다. 며칠 전에는 시장에서 사간 오이무침의 맛을 보시고는 심지어 갖다버리라고 하셨다. 음식에 까다로운 분이야. 은근히 까다로우셔. 밥은 아직도 어머니가 손수 짓는데, 점심밥을 지어 저녁까지 드시는 게 아니라 두 번 밥을 지으신다. (아침 식사는 거르신다.) 삼례에서 그렇게 하시는 것을 보았을 때는 그게 순전히 아들을 위한 것인 줄 알았다. 혼자 드실 때도 그렇게 하시는 것 같다. 정말로 까다롭다니까.
코로나가 일일발생횟수 2천명을 넘긴 두 달 전부터 나는 주말 근무를 포기했다. 매주 어머니에게 올라가는 것을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코로나 핑계를 대기는 하지만, 내가 꾀가 났다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안다. 사실 90이 넘은 노인에게 무서운 유행병을 감염시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꾀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은, 최소한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이후 나는 어머니에게 식사를 배달시켜드린다. 토요일 점심에 된장찌개 백반이나 순두부찌개 백반, 비빔밥 등을 2인분 주문했다. 워낙 식사량이 작은 분인지라 2인분이면 네 끼를 충분히 드시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지지난 주에 내가 크게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네 한바퀴를 보다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을 때이다. “지금 동네 한바퀴 하는데, 어머니도 보고 계시지요?” 2인분은 네 끼 드시기에 모라랐던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끼니를 거르거나 맨밥을 드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 이후, 주문 방식을 바꾸었다. 어머니는 식당에서 오는 반찬도 입에 맞지 않는다면서 반찬 대신 공기밥을 보내라고 하셨다.
불효다. 시중을 들어드리지 못하는 것만 불효가 아니다. 어머니를 오해하여, 혹은 극히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여 어머니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지다니...... 심지어는 까다로운 분이라고 흉을 보기까지 하다니...... 어머니는 원래 고기 냄새가 조금만 나도 ― 많이 나는 게 아니라 조금만 나도 ― 먹지 못하는 분이다. 내가 어찌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어머니는,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어린 나를 위하여, 국이건, 찌개건 항상 따로 끓여주곤 하셨다. 요즈음도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무엇을 요청하지 않으신다. 배달시킨 찌개가 모자라도 일언반구 내색을 하지 않으시지 않았는가? 요즈음도 어머니가 당신 자신을 위하여 하시는 일은 거의 없다. 어머니는 점심밥, 저녁밥을 따로 짓는다고 말했지만, 항상 넉넉하게 지으셔서 나는 항상 밥을 남기게 되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냉장고에 넣어두셨다가 다음 날 데워 드신다. 오이무침을 갖다버리라고 한 것 역시 맛없는 음식을 아들에게 먹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한들 뭐가 문제인가? 아흔이 넘은 노인이 당신 자신을 좀 주장한다고 하자. 평생 자식들의 주장을 들어주던 분이 이제 자기주장을 약간 내놓는다고 하자는 말이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요즘 그렇게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게 뭐가 문제냐는 말이다. 얼마 전에 동생들이 “요즈음 엄마는 자기자신밖에는 관심가는 게 없나봐.”라고 말하였을 때, 나는 동생들을 나무라기는커녕, 속으로, 저 효자들도 저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하면서 적이 안심을 하였었다.
밤이 깊었다. 동네 한바퀴도 끝났고, 어머니가 뜻도 모르면서 틀어놓는 연속극들도 다 끝났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어머니 집에 들르는 막내동생도 이미 다녀갔을 시간이다. 어머니는, 어머니에게는 세계의 전부인 투룸의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있거나 침대에 조용히 누워계실 것이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잠이 잘 안 와.” 그럴 때면 무슨 생각을 하세요? “그냥 옛날에 살던 생각을 하지. 자꾸 생각이 나. 그런 꿈도 자꾸 꾸고. 할머니가 많이 보여.” 할머니라는 것은 내 할머니, 곧 어머니의 시어머니를 가리킨다. 지금 이 시간, 할머니 산소는 달빛을 받으며 우두커니 앉아있을 것이다. 할아버지 산소도, 아버지 산소도. 며칠 지나 한가위가 되면, 이 무덤들 위에 비치는 달빛은 지금보다 더 밝아져있을 것이다.
첫댓글 몇해전에 돌아가신 내 엄마 생각이 나네. 조교수 화이팅!
ㅎㅎㅎ 조교수님 글 읽으면 여기서 만나 보는듯 해 반가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