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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3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 1열왕 3,4-13
복 음 : 마르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지혜가 답이다
-외딴곳을 마련하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지혜가 답입니다.
외딴곳을 마련하십시오. 거리를 두는 지혜입니다.
그대로 오늘 강론 주제로 택했습니다.
거리를 두는 관상에서 샘솟는 지혜입니다.
지혜의 은총을 받기위해 일정한 거리를 마련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지식이 아닌 지혜입니다.
옛 사막 수도자들이 오늘 날 각광을 받는 것은 이들의 삶의 지혜 때문입니다.
세상을 떠나 거리를 유지하여 침묵과 고독 중에 하느님을 찾았기에 선사된 삶의 지혜, 사막의 지혜였습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처방은 지혜뿐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빛입니다.
자작시 두 편을 나눕니다. 사랑과 지혜가 깊은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과 지혜, 마치 한 실재의 양면 같습니다. 공부해서가 아닌 사랑할 때 지혜의 은총입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견뎌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 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 되는 사랑이다 -1997.3
21년 전 써놨던 ‘사랑은’이라는 글입니다.
어제 써놨던 ‘관상觀想’이란 글 역시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관상의 핵심 역시 사랑입니다.
-관상은
초연한 사랑의 눈길로
연민의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
당황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하느님을
이웃을
나를
주변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지혜와 치유
자유의 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말마디가 ‘거리’입니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상적 지혜가 참으로 절실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선교활동에 온힘을 쏟고 돌아 온 당신 사도들에게 우선 필요로 하는 것이
관상적 휴식임을 알아채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이래서 피정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잠시 떠나 시공간상 거리를 두고 성찰과 휴식의 시간을 지니는 것입니다.
멈춰야 보이는 것들입니다.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는 시편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말 그대로 살기 위하여, 영육이 살기위하여 외딴곳에서의 휴식은 필수입니다.
그러나 예외의 경우도 있습니다. 이 또한 분별의 지혜에 속합니다.
이웃의 절실한 필요에 대한 응답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모범입니다.
따라온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군중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휴식을 잠시 접어두고
이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측은지심의 사랑이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딴곳에서 영육의 충전은 필수입니다. 이래야 분별의 지혜도 얻습니다.
솔로몬이 지혜의 은총을 얻은 자리도 외딴곳의 한밤중 꿈자리였습니다.
일상의 바쁜 삶에서 거리를 둔 꿈자리에 나타난 주님이십니다.
솔로몬에 대한 물음은 우리 모두를 향한 물음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과연 여러분이라면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두 말할 것 없이 지혜의 보물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을 위해 청하지 않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청했습니다.
주님은 이에 응답하여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와 더불어 청하지 않는 부와 명예도 선사받는 솔로몬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느님은 지혜의 원천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을 때 선사되는 지혜와 더불어 곁들여 받게 되는 기타 필요로 하는 선물들입니다.
예수님처럼 매일 일정한 거리의 외딴곳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관상적 휴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관상적 휴식과도 같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영육을 새롭게 충전시켜 주시며
사랑과 지혜를 가득 선사하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알래스카는 원래 미국의 땅이 아니라 러시아 땅이었습니다.
미국이 1에이커 당 2센트로 계산해서 총 700만 달러를 지불해서 구입한 땅입니다.
(참고로 1에이커는 축구장 2개 정도의 크기로, 우리나라 남북한의 7배 크기의 땅을 약 74억 원에 매입한 것입니다).
엄청나게 싸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왜 러시아는 이렇게 수지에 맞지 않는 장사를 했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사실 이 땅을 구입할 때는 바로 남북전쟁이 막 끝난 후 전쟁의 폐허를 마주했을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700만 달러라는 액수가 미국에 커다란 부담이었고
많은 사람들은 왜 춥고 아무것도 없는 쓸모없는 땅을 구입하느냐고 반대를 했습니다.
반대로 러시아에서는 쓸모없는 땅을 잘 팔았다면서 크게 좋아했지요.
나중의 결과는 어떨까요?
미국은 이 땅에서 어마어마한 자원을 갖게 되었고,
캐나다 서남부를 전략적 요충지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이득을 보았습니다.
미래를 미리 알 수 없습니다.
만약 러시아가 그렇게 많은 자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또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절대로 거래를 하지 않았겠지요.
이처럼 손익의 관계는 지금 이 순간에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신중하게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신중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연세 지극하신 할아버지로부터 이러한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신앙생활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성당에 가는 것이 시간 낭비처럼 보였고,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많은 돈과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세상일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은퇴를 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후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왜 일찍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것이었지요.
이렇게 기쁘고 행복한 시간을 젊었을 때부터 가졌으면
분명히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후회였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먼 훗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더욱 더 의미 있고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그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는 더 큰 은총과 사랑을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러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떠납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육로로 달려가서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라서 주님을 맞이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일이 먼저일까요? 세상의 일이 먼저일까요?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주님의 일이 먼저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오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건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창세기>에서 울려오는 진동을 듣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
그렇습니다.
이 “쉼”은 하느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쉬게 하고, 그들이 한 모든 일에 복을 내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당신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세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를 성별한 것이 나 주님임을 알리라”(탈출기 31,13)
그렇습니다. 우리는 ‘쉼’ 안에서 그분이 ‘주님’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 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호세아서>에서 울려오는 진동을 듣게 됩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참조)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좀 푹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그분 앞에 돌아왔을 때에 생기는 일입니다.
그것은 등산을 할 때, 최종 목적지는 산 정상이 아니라 출발지였던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데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알찬 결실을 맺는다하더라도,
그 생명은 뿌리에서 나올 수밖에 없듯이, 우리의 뿌리이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쉼을 얻게 됩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만이 저의 진정한 쉼이오니, 오늘 제가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서 쉬게 하소서!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군중들에게는 그들을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이 여기시고,
마치 환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듯 양들을 먼저 돌보십니다.
그들을 측은히 보시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6,34).
그들은 목말라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진리임을 아셨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말라 있었던 것은 바로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 외엔 결코 그 어떤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참된 진리이신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이가 “참된 목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진정 예수님의 양인가?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진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 목요일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제단에 엎드려 기도하는 새 사제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 모두 순수한 마음으로 사제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맡겨진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살면서 몸과 마음에 많은 덧칠이 칠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일수록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쇄신, 정화, 속죄’의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자비로운 마음을 지니시기를 기도합니다.
내일은 새 사제들의 첫 미사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새 사제들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매일 드리는 미사가 첫 미사와 같은 미사였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드리는 미사가 생의 마지막 미사인 것처럼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동창신부님의 본당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방송에도 나올 정도였습니다.
동창들 모두가 걱정해 주었고, 동창신부는 무척 고마워하였습니다.
저도 동창신부와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비록 다음날 일정에 무리가 있었지만 마음은 편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동창신부와 본당 공동체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좋고 서로 사랑하는 것 보다는 함께 즐기는 것이 더 좋다.’
이제 곧 봄이 옵니다. 봄이 되면 많은 꽃들이 필 것입니다.
그런 꽃들 모두는 추운 겨울을 온 몸으로 견디어냈습니다.
눈의 무게에 가지들이 꺾이기도 했고,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꽃은 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우리의 삶도 그만큼 상처와 아픔이 있기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진 일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서 앞을 바라보는 용기입니다.
‘오늘은 어제 세상을 떠난 이들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날입니다.’
언젠가 들은 말입니다.
매일 주어지는 날들이 어떠신지요?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날인지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날들인지요?
물과 공기는 주변에 많기 때문에 소중한 가치를 모르고 지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과 공기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너무나 짧은 것이 인생입니다.
감사하면서 살기에도 부족한 것이 인생입니다. 나누면서 살기에도 빠듯한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원망과 분노, 시기와 질투, 미움과 좌절로 하루를 채우면서 지낼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악의 세력에게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주말입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화 한번 해 보시면 어떨까요?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
발걸음을 멈추는
내려앉는
휴식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외딴곳에서
지쳐있는
우리의 울음소리를
또렷이 듣게 됩니다.
때론
우리의 몸과 마음도
쉬어 주어야
편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안과 바깥이
만나는 시간이
가벼워지는
쉼의 시간입니다.
쉬어야
심각하게 여긴 것들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새들도
날개를 쉬어 주어야
더 날 수 있습니다.
쉬어 주는 것은
내어 주는 기쁨입니다.
여기저기에 있었던
많은 일들을
주님께 내어드립니다.
휴식 또한
겸손한 봉헌입니다.
외딴곳의 쉼
또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분명한 방식입니다.
우리의 존재감은
오히려
주님 안에 가라앉을 때
더욱 빛나게 되는
쉼의 역설입니다.
휴식은 다시
우리가 온전하여지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처럼
외딴곳에서 기도드립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기브온 산당으로 올라간 솔로몬이 꿈에 등장하신 주님과 나눈 대화는
참으로 감동적이고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열왕기 상권 3장 5절)
솔로몬의 대답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당시 그는 스스로 밝혔듯이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선왕 다윗으로부터 왕좌를 물려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새파랗게 젊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지극히 신중하고도 겸손하게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열왕기 상권 3장 9절)
참으로 예의바르면서도 명석한 솔로몬이었습니다.
보통 젊은 사람 같았으면 응당 청했어야 할 부귀영화나 건강과 장수,
전쟁에서의 승리를 청하지 않고,
경청의 마음과 분별력을 청한 그에게 주님께서는 그가 청하는 것뿐만 아니라,
청하지 않은 것들까지 덤으로 주시리라 약속하십니다.
“자, 내가 네 말대로 해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또한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열왕기 상권 3장 12~13절)
이런 면에서 저희 사부 돈보스코도 비슷한 측면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
리고 그 외침은 오늘 날 저희 모든 살레시오 회원들의 모토처럼 되었습니다.
“나에게 영혼을 주십시오. 다른 모든 것을 다 가져가십시오.”
그런 돈보스코에게 주님께서는 수많은 청소년들의 영혼뿐만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흘러넘치도록 베풀어주셨습니다.
돈보스코의 제자 도미니코 사비오도 이런 면에서 판박이였습니다.
초창기 돈보스코 오라토리오 안에 살았던 청소년들 사이에 전해오던 전통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버지 돈보스코의 영명 축일 날 청소년들이 작은 쪽지에다가 자신이 원하는 선물내역을 적어내면
그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전통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쪽지에 적은 내용은 이랬습니다.
“제 영혼을 구해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성인(聖人)이 되게 해주십시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도미니코 사비오에게 청을 백퍼센트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영혼도 구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 안에 길이 남을 특별한 성인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 역시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셀 수도 없이 수많은 기적과 치유를 행하신 그분께서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기적도 청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서도 질문을 던지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우리의 대답은 과연 무엇입니까?
교육은 관계다
전삼용 요셉 신부
군대 입대하기 전 많은 선배님들이 다 같은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군 생활 잘 하려면 정말 군인이 되어라!”
저는 그래서 정말 군인이 되기 위한 마음으로 훈련소에 입소하였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사제 옷을 소포에 쌓아서 넣으라고 하는데,
그 때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제 잠바가 소포에 다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소리 지르는 조교들 앞에서 숨도 쉴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급기야 한 조교가 저를 불러내더니 발길질을 하였습니다.
한 대 맞으니까 안 들어가던 잠바가 박스에 다 들어갔습니다. 신기했습니다.
논산 훈련소 소대에 배치를 받으니 무섭기로 소문난 조교가 우리 소대의 담임이 되었습니다.
나이도 많고 밖에서 선생님을 하다가 들어온 베테랑이었습니다.
매 취침 전마다 침상에서 머리 박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머리를 박고 잠을 잘 수도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습니다.
이렇게 무섭게 하니 모든 면에서 우리 소대가 단연 돋보였습니다.
저는 그래도 우리를 군인이 되게 하기 위해 고생한다고 믿고 그 조교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였습니다.
한 번은 훈련 중 야삽을 허리띠에 차야 했는데 들어가지 않아서 그냥 허리춤에 찔러 넣었습니다.
이런 것을 놓칠 리 없는 조교가 뛰어와 제 야삽을 빼어서 머리에 쓰고 있는 철모를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철모는 제 머리 위에서 뺑그르르 한 바퀴 돌았고 처음 들어보는 엄청난 소리에 귀가 멍멍해 졌습니다.
본래 훈련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글로 남겨서는 안 되는데 저는 수첩에 이렇게 썼습니다.
“조교가 너무 싫다. 밖에서 만나면... 넌 죽었다.”
이렇게 쓰고 있는데 그 조교가 와서 제 수첩을 빼앗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밤에 저를 따로 불렀습니다.
그 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매우 우울하고 원망 섞인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너희가 나를 이렇게 나쁘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
본인은 상관들이나 다른 조교들에게 인정받는 교육자였습니다.
우리를 눈빛 하나로 통제할 수 있었고 본인도 우리들을 훌륭한 군인으로 만든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자신의 아들이 전국 1등을 하지 못한다고 골프채 등으로 아들을 마구 때려서
결국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여 몇 달 동안 집에 방치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그런 강요로 아들은 서울대에 충분히 들어갈 수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도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아들 인생도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는 선생님입니다.
꼭 교육자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애인 사이에서도 서로 잘 아는 것을 가르치고, 가족에서는 당연하고,
어디에서든 자신이 더 아는 것을 남에게 가르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듯 교육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망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상대를 위한다는 가면으로 자신의 만족을 먼저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만족을 위해 희생되는 피해자들이 되어버립니다.
부모님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 분들이 원하는 대학과 학과, 직업까지도 선택해야 하는 아이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EBS 에서 방영되었던 ‘선생님이 달라졌어요.’란 프로를 보았습니다.
그 중 박소형 선생님은 대구의 한 초등학교 4학년 담임교사로서 이 프로에 참가신청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전혀 행복하지 않아서 이 프로에 참가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선생님의 수업은 완전히 군대식이었습니다.
전혀 웃지 않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눈동작, 손동작을 하면 아이들이 철저하게 통제되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반에 비해서 여러모로 질서 잡히고 조용하고 뛰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선생님께 대한 설문조사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그냥 무서워요, 도깨비 같아요, 호랑이에요. 귀신이에요. 악마에요.”
선생님은 아이들이 그렇게까지 자신을 싫어하는지 몰랐습니다. 잘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이런 모습으로 비추어지는데 어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전문가들은 박소형 선생님을 비롯하여 나머지 6명의 선생님들에게 단 한 가지만 깨닫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교육이 곧 관계다.”
좋은 관계가 먼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이들은 선생님들에게서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짐승처럼 훈육을 받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참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춤 잘 추는 곰이나 쇼를 위한 돌고래를 훈련시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동물을 훈련시키는 사람은 동물이 먼저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먼저 보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제자들은 매우 피곤합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었는데 무언가 배우기 위해 사람들은 배를 타고 오는 것보다
먼저 더 빨리 걸어서 그들 앞에 서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마음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 앞에 나아온 우리들이 먼저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보인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교육자의 모습이지,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조련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설리번 선생과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헬렌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말하자면 짐승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헬렌 켈러를 가르치기 위하여 왔던 선생들은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는 그의 상태를 보고서는 다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설리번 선생은, 헬렌의 집에 처음 도착하던 날, 그 짐승 같은 아이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그 이후 설리번 선생은 지성을 다한 노력으로 헬렌 켈러에게 수화와 단어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랑이라는 단어를 배우게 되었을 때, 설리번 선생이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헬렌은 “선생님이 오시던 날 나를 꼭 안아 주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설리번 선생이 꼭 안아 주던 그 첫날부터 짐승처럼 거칠던 헬렌의 마음이 녹아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길에 침 뱉는 것을 어머니의 단 한 마디에 고쳐졌습니다.
결혼하시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변하게 하려면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나를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사랑해야합니다. 사랑스런 사람에게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 상대는 저절로 나에게서 배우게 되고, 나는 그 안에서 행복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의 행복은 다름이 아닌 제자들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