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봉 기슭에서
올여름 장마는 비가 지겹도록 내리다 어제로 종식되었다. 충청도와 경북 일대에는 폭우로 인한 인명과 재산 피해가 커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가 잘 아물고 속히 수습되었으면 한다. 장마 종료 선언과 함께 폭염경보가 발령되어 당분간 더위를 이겨낼 지혜가 필요한 때다. 장마가 물러간 이후 남은 말복까지 앞으로 보름 남짓 치솟을 더위가 극성을 부릴 텐데 우리 모두 감내해야 한다.
사람마다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기에 피서법도 제각각일 테다. 내가 더위를 잊는 남과 다른 방법이 두 가지인데 공공 도서관으로 나가 책장을 넘김이 첫째다. 바깥은 불볕더위라도 실내는 냉방이 잘 되어 시원했다. 가끔 찾는 용지호수 작은 어울림도서관은 이번 한 주간 사서의 휴가로 휴관이다. 다른 공공 도서관도 있긴 하지만 거기는 익숙한 공간이 아니라 찾아가길 머뭇거린다.
더위를 식히는 또 다른 가지는 숲을 찾아 삼림욕을 누리고 이어 계곡물에서 몸을 담그는 체험이다. 나는 여름이면 등산로를 벗어난 숲에서 영지버섯을 채집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장마철에 활엽수림 가운데 참나무가 삭은 그루터기 갓을 펼쳐 자라는 영지버섯이다. 나는 근교 생태에 훤해 어느 산자락으로 가면 영지버섯이 자라고 알탕을 하기 알맞은 물웅덩이가 있는지 알고 있다.
장마가 물러가고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 칠월 하순 목요일이다. 산행을 위해 배낭에 도시락과 얼음 생수를 챙겨 담아 현관을 나섰다. 아파트단지 이웃 동 뜰에서는 한 노인이 수국 묘목을 심은 자리에 김을 매고 물을 주느라 땀을 흘렸다. 남들은 잠에서 깨지 않은 새벽부터 아파트 뜰로 내려와 꽃밭을 가꾸는 정성이 대단한 분이다. 나는 그분처럼 헌신할 자신이 없음을 고백한다.
정류소로 나가 마산역으로 나가는 버스를 타고 역 광장 입구에서 내렸다. 주말이 아님에도 노점에는 채소를 파는 몇몇 상인이 보였다. 장마로 상추와 열무와 같은 잎채소는 귀해 보이질 않고 가지나 고추와 같은 열매채소들이었다. 집에서 도시락을 챙겼기에 으레 번개시장 들머리에서 마련하던 김밥은 살 일이 없었다. 진북 의림사로 가는 74번 농어촌버스를 타고 시내를 벗어났다.
밤밭고개를 넘어 동전터널을 지나 진동 환승장에 들렀다가 진북면 소재지 지산을 거쳤다. 예곡에서 인곡으로 가는 도중 의림사에서 내렸다. 서북산 산세가 남으로 흘러와 두 갈래 나뉘어 수리봉과 인성산이 되었다. 인성산 아래 유교 실천 덕목인 ‘인의예지’ 네 가지를 순차적으로 마을 이름에 붙인 고장이다. 의림사는 수리봉 기슭에 자리한 유서 깊은 절로 임진왜란 때 승병 기지였다.
근년에 일주문이 덩그렇게 세워져 단청까지 마쳤으나 편액은 아직 걸리지 않은 범어사 말사 의림사다. 차피안교를 건너 절집 해우소에서 수리봉으로 가는 등산로로 드니 산행객이 다니질 않아 수풀이 무성하고 거미줄이 처져 있었다. 인적이 끊긴 수리봉 기슭으로 들어섬은 삭은 참나무 등걸에 붙는 영지버섯을 찾기 위해서였다. 산행 초입 한 무더기 찾은 성과로 만족해야 했다.
숲속을 한동안 누비면서 멧돼지가 출몰할까 봐 걱정되어 휴대폰에서 유튜브를 켜 정신의학계 원로 정근후 박사의 강의를 청취했다. 멧돼지가 흙을 뒤집어 놓음을 미루어 뱀은 녀석의 먹이가 되어 마음이 놓였다. 숲속에서 벌집은 신경을 쓰지 않음은 내가 나름으로 터득한 생태계 원리에서다. 말벌이든 땅벌이든 벌들은 햇볕이 잘 드는 개활지에 서식해 숲속에서는 부딪힐 일 없었다.
수리봉 기슭의 의림사 경내로 들어 샘물을 한 모금 받아 마시고 개울 건너 인성산 그윽한 골짜기로 들었다. 인곡저수지 안쪽이 의림사 계곡인데 너럭바위에 맑은 물이 넉넉하게 흘렀다. 산에 든 이는 아무도 없는지라 옷을 훌훌 벗고 하얀 거품이 부서지는 계곡물에 몸을 담그니 선계가 따로 없었다. 가져간 도시락을 비우며 바위에서 솟는 지자기와 물이 뿜는 음이온을 한껏 받았다. 23.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