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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불행(2)
행 5:1-11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 설 교 >
거짓의 죄
이동원목사 / 행 5:1-11
거짓말에 대한 테스트가 있습니 다.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마음 속 으로 선택하시면 됩니다. 나는 얼마 나 거짓말에 익숙해 있나 자기 자신 을 점검해 볼 수 있는 하나의 테스 트라고 생각합니다. 네 가지 답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만 나에게 적합 한 것을 골라서 선택하시면 됩니다. 첫째로 나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한 다. 둘째 나는 종종 자주 거짓말을 하는 편이다. 세 번째는 나는 거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솔직 히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한 경우도 있다. 네 번째는 나는 거짓말을 결 코 하지 않는다. 넷 중에 어디에 해 당되십니까? 첫째 나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 이거는 병원에 입원하셔 야 돼요. 영적 병원에 입원하셔서 주님의 심각한 다루심을 받으셔야 합니다. 나는 종종 자주 거짓말 하 는 편이다. 저는 이런 분들에게 진 지하고도 심각한 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거의 거짓말을 하 지 않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경 우에 한 경우도 사실은 있다. 저는 이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라고 생각을 해요. 네 번째 나는 결 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는 거 짓말쟁이의 대표적 진술입니다.
한번은 하버드 대학에 지망하는 학생들이 학교 투어를 한 일이 있었 다고 합니다. 그 투어 가이드가 학 교 내 광장 스퀘어 한복판에 있는 동상, 사람의 동상인데, 동상 앞에 멈추더니 그 동상에 대해 이런 설명 을 했다고 합니다. 이 동상은 하버 드 대학의 창설자로 알려진 쟌 하버 드 목사의 동상입니다. 이 아래 쓰 신 것을 보십시오. John Harvard Founder 창설자 1638년.이렇게 쓰여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동상과 이 아래 쓰여진 말은 반쯤은 사실이 고 half truth이고 반은 거짓말입니 다 half lie에 속합니다. 세 가지 면 에서 여기에 거짓이 섞여 있다고 말 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뭐냐 하 면 이 John Harvard 목사의 동상은 오리지날 그 분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 조각하시던 조각가가 너무 시간 에 쫓긴 나머지 그 분의 사진을 구 할 수가 없어서 그 분과 비슷한 사 람을 모델로 해서 이 조각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그 분 의 그림은 아니죠. 둘째로 이 분이 창립 초기에 학교가 창설되는 과정 에 헌금으로 많이 기여하신 것은 사 실이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이 분이 창설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 고 세번째로 이 분이 이 아래 쓴 것 을 보면 창설자 Founder John Harvard 1638년 이라고 있는데 대 부분의 사람들은 이 1638년을 그 분 의 사망한 연도로 이해를 합니다. 그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사망한 연 도가 아니라 1638년은 그가 재산의 절반을 바쳐서 학교의 library 를 만 드는 일에 기증을 했던 그 연도가 1638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반쯤은 사실이지만 반쯤은 거짓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재미있지 않습니까? 우리학교의 모 토는, Harvard의 모토는 소위 베리 타스Veritas진실 진리입니다. 그런 데 우리 안에 진실하지 못한 이런 부분들이 있는 것, 이것이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투어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고 해요.
반쯤은 진실 반쯤은 거짓말, 이 것은 하버드 캠퍼스 안에만 있는 사 건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삶의 거리 어디에서나 우리가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삶의 모습들이라고 할 수가 있 을 것입니다. 교회안에도 이런 모습 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아나니아와 삽비 라라는 두 부부의 얘기가 나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할 필요가 있었을 때 이 분 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어떤 땅 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헌납 하면서 한 부분은 상당한 부분은 꼬 불쳐 두고 그리고 상당한 부분을 헌 금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가 가진 전부입니다. 전부를 드리는 것 처럼 말하고 헌납을 했습니다. 그런 데 이것이 어떻게 사건이 경과되는 고 하니 오늘 본문에 읽어 보시면 아주 하나님이 화가 나셨어. 베드로 를 보내서 이것을 책망하시고 그리 고 이 두사람 이 내외분 남편과 아 내의 목숨을 모두가 다 가져 가셨다 는 그런 사건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 어 있습니다. 조금은 하나님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물론 이 두 사람이 잘 한 것은 아니지만 뭐 있을 수 있 는 잘못인데 또 부분적으로 헌금한 것도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두 사람의 목숨까지 하나님 이 가져 가시다니 하나님이 너무 잔 인하신 분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 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인의 의식구조, 기독 교적 가치관이 반영된 서구 사회와 달리 한국에서는 이러한 느낌을 받 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습니다. 왜 냐하면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거짓 말을 심각한 범죄로 별로 받아들이 지 않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지 난 번 미국에 클린턴 섹스 스캔들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분의 섹스 스캔들에만 커다란 관심을 가졌습니 다. 그러나 사실 미국 안에서 문제 가 된 것, 법적으로 문제가 되고 사 회의 핫 이슈가 된 핵심은 섹스 스 캔들이 아니라 그 분이 위증을 했느 냐 하지 않았느냐 거짓말을 했느냐 안 했느냐 그것이 더 중요한 핵심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와 얼마 나 의식구조가 달라요? 한국에서는 섹스 같은 건 커다란 범죄로 생각을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인 거짓말을 매우 심각한 범죄로 생각하지 않습 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짓을 범죄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매우 심각한 범죄 라고 말합니다. 왜 어떤 의미에서 거짓은 죄악인가? 왜 어떤 의미에서 거짓은 죄악이라고 할 수 있는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품성을 거스리는 죄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 님의 품성을 거스리는 죄악. 하나님 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성경은 누 누히 일관성있게 강조하기를 하나님 은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강조합니 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 진실의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진리이 신 하나님.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 음14장6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말씀 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그 다음에 뭐라고 그랬어요? 진리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라 진리다. 내가 바로 진리 그 자체이다. 요한일서1장9절 에 보시면 만일 우리가 우리죄를 자 백하면 저는(하나님은) 미쁘시사 하 나님은 미쁘시다. 이 말은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곧 하나님은 진실하시 다. 이런 말씀이죠? 시편5편4절이하 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 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그 다음절 6절에 보시면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속 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이런 말 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에도 잠언20장10절에 보면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신 다 부정직한 상업윤리 그것을 정죄 하고 있는 성경의 말씀을 볼 수가 있어요.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그 리고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 느니라 일관성있게 하나님은 진실하 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라면 참되고 진실하신 그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자녀가 진실하지 못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모 습을 보실까요? 반대로 요한복음8장 44절에 보시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존재, 마귀, 마귀의 존재를 묘 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즉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다. 진리가 그 속에 없었고 진리에 서지 못하고 저는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마귀를 가리켜 서 거짓의 아비다 그랬어요.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공부할 때 아버지에 대한 공부를 했죠. 무슨 발명의 아버지 에디슨, 교향악의 아 버지 하이든, 뭐 이런 공부를 했는 데 제가 문교부 교과서 편찬위원이 면 거기다가 거짓의 아버지? 정답이 뭘까요? 마귀 Satan 사탄이예요. 사 탄 마귀가 거짓의 아버지다. 그러므 로 우리가 거짓말할 때 그리고 우리 의 행동이나 언어에 거짓이 섞여 있 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사탄의 지배아래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다 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 본문의 2절을 다시 보시면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아내도 알 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절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앞에 붙들린 바 된 베드로가 아나니 아 삽비라 부부를 향해서 이렇게 말 합니다. 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 작.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 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 하여 네가 이런 일을 했다. 그렇습 니다. 이 거짓의 아버지인 사단의 영향력 아래서 지금 그가 거짓을 말 하고 있고 거짓된 행동을 하고 있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땅 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 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교회를 향하여 교회 지도자를 향해서 이들이 이렇 게 말했지만 모든 거짓말은 궁극적 으로 하나님을 향한 범죄이다. 그것 은 진리의 하나님, 진실하신 하나님 의 품성을 거스리는 죄악이라고 성 경은 가르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두 번째로 이 거짓이라는 것은 공동체를 파괴 하는 죄악입니다. 공동체를 파괴하 는 범죄인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조금 거짓말을 했다고 그래서 아나니아 삽비라를 이렇게 목숨을 거두어 가시다니 이 것은 너무 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 가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사실 하 나님의 깊은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 는 인간적 피상성때문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자, 역사적으로 볼 때 이때 초대 교회는 신약교회는 막 교회의 기초 를 놓는 때였어요. 교회가 막 형성 되기 시작한 때였어요. 우리가 흔히 하는 말가운데 이런 말이 있지 않습 니까?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이 첫 단추가 제대로 끼워지지 않으 면 그대로 계속해서 잘못됩니다. 처 음이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 이 하나 님이 사랑하시는 교회,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야 할 교회, 그 교회가 정 말 복음의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진 실 위에 그리고 진지한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할 교회의 모습을 주께서 기대하셨기 때문에 그 교회 안에 처 음에 거짓이 들어왔을 때 처음부터 이것은 단단히 다룰 필요가 있다. 저는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본 문의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은 항상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은 아닐지 모릅니다. 예외 적인 사건이고 샘플링에 속하는 사 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진리의 터 전 위에, 정직의 터전 위에 하나님 의 교회가 세워질 때 비로소 하나님 의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복 음 선포의 책임을 다할 수가 있다. 이렇게 믿었던 하나님께서 이 부정 직한 모습으로 섰던 이 한 부부를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다루어 하나님 의 공의를 나타냈던 사건. 이것이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의 진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거짓이 지배하는 공동체, 거짓이 지배하는 사회 이것은 병든 사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반드시 도덕적인 위기가 찾 아 옵니다. 진실을 잃어 버리고 양 심이 통하지 않는, 신용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을 때 그 사회의 복된 미래를 우리가 어떻게 기대할 수가 있을 까요?
수년 전 미국의 시카고 데일리 라는 뉴스지에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리노이 즈주에 어글스피 라는 마을이 있었 는데 마을에 세탁소를 경영하는 한 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손님이 맡긴 세탁물을 뒤지다가 주머니에서 2만 불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다 렸습니다. 손님을 기다렸지만 그 옷 을 맡긴 주인이 나타나질 않는다 말 이죠. 한참 일정한 시간이 경과된 후에 그것을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 다. 경찰은 이것을 신문사에 알렸습 니다. 그래서 신문에 났어요. 이 기 사를 취급하던 기자가 이 사건을 보 도하면서 맨 마지막 줄에 이런 흥미 있는 기사를 썼다고 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이제는 정직이 뉴스거리가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정직이 뉴스거리가 되어야 하는 시 대가 되었다. 뭐 자기 돈이 아니니 까 그 돈의 원래 주인에게 그것을 돌려주는 것, 당연한 일이죠. 마땅히 해야할 일. 너무나 당연한 일이예요. 그러나 당연한 일이 오히려 드물게 된 시대. 다시 말하면 그만큼 사회 가 부정직한 사회가 되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부정직한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정직이 뉴스거리가 되어야 하는 시대, 그리고 세상. 그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이 시대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 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사회 속에 누구의 말도 믿을 수가 없다. 한 번 가정해 보세요. 신용이 통하 지 않는 사회, 정직이 통하지 않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질서와 공의를 지배할 수가 있을까요? 하나 님은 그래서 당신의 교회만이라도 진리 위에, 정직 위에 세워지기를 기대하셔서 이 사건을 몹시도 몹시 도 정확하게 거룩하게 엄중하게 다 루신 사건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 다.
자, 결과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 왔습니까? 11절 한번 읽어 보세요. 11절. 같이 우리 본문의 11절입니다. 마지막 절. 다같이 시작.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 려워하니라 자, 이 사건이 나고 나 니까 온 교회가 두려워했어요. 얼마 나 그것이 충격이었겠어요. 거짓말 했다 생명을 잃어버렸다 성가대에서 거짓말 한 번 했다가 한 사람이 가 셨다. 그러면 얼마나 긴장을 하겠어 요? 우리가 얼마나 긴장을 하겠습니 까? 우리 삶이 좀 새로워 지지 않겠 어요? 실제로 보면 그 다음절 이하 에 이 사건 직후에 교회를 통한 부 흥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 그것이 바 로 거짓의 죄악인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거짓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죄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을 파괴합니 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거짓이 얼마 나 오래 가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실 존주의 작가인 알버트 까뮈는 자기 가 쓴 작품의 주인공의 입술을 빌려 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마지막 심판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 나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거리에서 날마다 심판을 본다. 나는 날마다 심판을 본다. 우리는 이미 거짓을 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도 심판을 경 험하고 이 땅에서도 비틀거리는 삶 의 모습을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도 볼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심판 은 여기에도 있다는 것이예요.
링컨이 한 유명한 말 가운데 거 짓은 사람들은 잠시는 속일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영원히 우리를 속일 수는 없다. 거짓은 반드시 노 출됩니다.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도 록 되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고등학생 몇 사 람이 일요일날, 주일날 놀러 갔어요. 신나게 하루종일 놀아제꼈습니다. 월요일날 아침에 학교를 가려고 그 러는데 가기 싫거든요. 그러니까 한 학생이 꾀를 냈습니다. 야, 우리 하 루 더 놀자. 그리고 완전히 결석이 되면 안 되니까 이따 오후에 학교 끝나기 직전에 들어가서 사실 주일 날 우리가 놀러 갔었는데 시골 깊은 곳에 놀러 갔다가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가 났는데 공구를 tool을 가져 오지 않아서 바퀴를 고칠 방법이 없 었다. 하루종일 애쓰다가 가까스로 고쳐서 겨우 왔습니다. 이렇게 선생 님께 보고하자. 넷이서 합의가 되었 습니다. 그래서 월요일날 하루 더 신나게 놀아제끼고 오후에 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선생님에게 선 생님 참 죄송합니다. 어제 우리가 사실은 깊은 산골에 놀러 갔다가 월 요일날 아침에 학교에 오려고 그러 니까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가 나 있 었습니다. 우리가 공구를 안 가져와 서요 고칠 방법이 없었어요. 하루종 일 애쓰다가 가까스로 고쳐가지고 이제야 도착했습니다. 그러니까 선 생님이 아 그러냐고 빙그레 웃으면 서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러면서 메 모지 하나를 다 주더래요. 네 사람 에게. 떨어져. 그러더니 그 메모지에 다가 자동차 타이어 어느 쪽 바퀸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앞 바퀸지 뒷 바퀸지 어느 쪽인지 네 사람 각자 쓰라.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도록 되 어 있습니다.
거짓의 사람들이란 책을 쓴 정신 분석학자인 스코트 팩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거짓에 익숙해 지 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거 짓말을 한다. 그리고 그 거짓을 믿 을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거 짓말장이가 된다. 그리고 나중에 이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 태는 그는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 는 인생을 산다. 이것은 최악의 비 극이다.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 는 인생, 자기 파멸의 인생을 살아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 습니다. 거짓은 자신을 파괴하는 죄 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어요. 우리가 어떻 게 이 거짓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 까? 혹은 어떻게 이 거짓을 예방할 수가 있습니까? 혹은 우리가 거짓에 빠졌을 때 어떻게 빠져 나올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질문에 대한 대답 을 얻기 위해서 이 성경에 나타난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어떻게 했 어야만 했었는가 라는 질문으로 질 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몇 가지 대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짓의 죄를 극복하려면 혹은 예방하려면 사람보 다 하나님을 더 의식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저와 여러분이 거짓 말을 하게 될 경우에 가만히 분석해 보세요. 왜 그러냐? 사람을 의식하 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 떻게 생각할까? 자기 최면, 자기 위 신 때문에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아나니아 삽비라 는 더 많이 드린 것처럼 보여지기 위해서, 자기 희생을 가장하기 위해 서 이런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죠. 그가 하나님만 의식했더라면 이 거 짓을 범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랜드빌트라는 대학에 수학을 가 르치던 교수인 매디슨 새럿 이란 교 수님이 계셨는데 아주 존경받는 경 건한 크리스챤 교수였습니다. 이 분 은 자기 클래스에 와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시작할 때마다 늘 똑같은 말 로 했고 특별히 시험을 칠 때 시험 을 치를 때는 어김없이 이런 말로 시험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시험을 치르게 되었 습니다. 시험관은 두 분입니다. 나 매디슨 교수와 함께 하나님이 시험 관이십니다. 여러분은 두 분을 다 의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두 가지 시험을 치르는 것입니다. 하나는 수학 시험이구요 또 하나는 정직이라는 시험입니다. 여러분은 수학 시험보다도 정직이라는 시험에 패스하는 것을 더 생각하셔야 합니 다. 왜냐하면 정직한 인생, 이것은 인생 전체를 살아가는 여러분의 중 요한 테스트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 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얼마나 우리 는 하나님을 의식할까요? 우리의 그 조잡스러운 작은 거짓의 실수들의 상황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보다도 사람을 의식했던 그런 자기 Defense,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 아 니면 나를 과장하기 위해서 혹은 나 를 겉치레 하기 위해서, 내 체면을 위해서 우리가 거짓말하는 점들이 얼마나 많으냐 말이죠. 우리가 하나 님을 의식할 때 우리는 좀 더 정직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요 우리가 서로가 서로 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친구가 주변에 많아야 정직할 수가 있어요. 서로 정직을 격려하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 이 실수했다고 하십시다. 뭐, 실수가 있을 수가 있죠. 그래서 자기 실수 를 교정하기 위해서 그때 내가 사실 은 진실을 말하지 못했어. 야 너 거 짓말했구나. 그럴 수가 있니. 그러면 안 돼죠. 그래 네가 지금이라도 진 실을 말하는 것은 그것은 정직한 것 이야. 그것은 용기있는 행동이야. 여 러분,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 있다 는 것보다 용기있는 행동이 어디 있 습니까?
요즈음 일련의 한국 사회에서 벌 어지는 사태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관련되어 있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 습니다.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이것 이 지나가요. 그럴 수는 없다고 생 각했습니다. 최근의 몇몇 한국 교회 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서 우리가 이것에 관한 공개적인 사과가 필요 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조선일 보나 한겨레를 여러분이 보셨겠습니 다만 제가 속한 단체인 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 또 침례교 미 래를 준비하는 모임, 한국교회 목회 자 협의회와 연계해서 하나님과 국 민 앞에 우리 자신을 고발합니다. 우리가 이런 성명서를 최근에 냈습 니다. 여러분, 저는 정직한 자기 토 로, 이것은 용기있는 일이라고 생각 해요. 잘못할 수도 있으니까. 잘못했 습니다. 말하면 되쟎아요. 잘못했다 고 말하면 되쟎아요. 또 그것을 격 려해 주는 분위기가 우리에게는 필 요합니다.
다시 본문의 사건으로 돌아와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두 사람 중에서 만약 한 사람이라도 정직할 수 있었 더라면. 자, 남편이 그렇다고 하십시 다. 아내만이라고 정직할 수 있었더 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본문의 사건을 보면 재미있어요. 1절에 어 떻게 시작됩니까?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더 불어 소유를 팔았다. 자, 2절 그 값 에서 얼마를 감추매 아마 주도적으 로 남편이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얼마를 감추매 2절에 보시면 누가 알았어요?, 그 아내도 알더라 아내 도 알았어요. 자, 이때 아내가 여보 우리 정직합시다. 이러면 안 되잖아 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요. 자, 우 리가 결정적으로 본문의 8절을 보시 면 이런 말이 나와요. 9절. 9절. 9절 같이 읽겠습니다. 9절 다같이 시작.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 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가 어찌 함께, 중요한 단어가 함께 꾀하여 이 부부는 아주 환상의 콤비 였어요. 죄도 같이 짓고 그러나 부 인 만이라도 정직할 수 있었더라면 여보 안돼요. 우리 하나님 앞에 정 직합시다. 한 번 따라서 하십시다. 여보 크게 해요. 여보 정직합시다. 평소에 우리가 이 말을 하는 것이 필요해요. 여보 정직합시다. 둘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이렇게 챌린지 challenge를 했더라도 이 사건은 얼 마나 달라질 수가 있었겠어요.
옆의 사람에게 한 번 해 보세요. 정직합시다. 여보, 정직합시다 아무 한테나 여보 그러면 어떻게 해요? 집사님 정직합시다 한다든지 자매님 정직합시다 이렇게 얘기를 해야지 요.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해요. 도움이 될 수 있는 친 구, 유익한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직한 인생의 길을 함께 갈 수 있는 친구가 된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 일이예요.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로서 필요로 할 때 그만큼 건강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 더 우리가 이 거 짓을 예방하기 위해서 혹은 거짓을 극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했어야만 했던 것, 세 번째는 뭐냐하면 회개 할 수 있을 때 바로 회개했어야 합 니다. 회개할 수 있을 때 바로 회개 해야 돼. 회개는 빠를수록 좋은 것 입니다. 시간을 더 끌지 말고 늦을 수록 안 좋아요. 우리가 빠를수록 좋다. 회개는 빠를수록 필요한 것입 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사도행 전5장을 묵상할 때마다 늘 안타까움 이 있는데 저는 3절이 제일 안타깝 더라구요. 3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성령충만하여 베드로가 아나니아 삽 비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나니 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 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때 아나니아가 맞습니다. 베드로 님. 제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얼 마나 달라졌겠어요? 얼마나 달라졌 을까요? 오리발 내밀지 말고 자기 변명하지 말고 네 잘못했습니다. 제 가 그때 실수했습니다. 용서해 주십 시오. 사건이 달라졌을 거예요. 아주 안타까워요. 그 찬스를,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 다음에 삽비라의 경우 아내의 경우를 보세요. 결정적 때가 또 찾 아왔어요. 이 부인에게도. 7절에 보 시면 세 시간쯤 지나 (남편이 죽고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절 베 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이것이 전부냐) 내게 말하라 (이것이 전부더냐) 이것이 기회였 습니다.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은 우리의 거짓이 섞여 있었습니다. 우리의 허영이 섞여 있었습니다. 용 서해주십시오. 그것은 잘못이었습니 다. 말하면 된다 말이죠. 그런데 묵 살해버리고 양심의 음성을,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묵살하고 이렇게 말 했습니다. 예, 이것이 전붑니다. 그 리고 모든 상황은 끝났어요. 그것이 비극의 마지막 종말이었습니다.
회개할 수 있는 찬스, 회개의 기 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계속적으로 이런 기독교인의 윤리적 인 삶을 말할때마다 이런 강조를 합 니다. 성령을 속이지 말라 혹은 성 령을 소멸하지 말라 이럴 때 성령이 역사하세요. 정직하라고. 너 고백해 야지. 마음은 있어요. 체면 때문에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이 감 동을 소멸치 말고 예 제가 잘못했습 니다. 용기있는 사람이예요.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것이 회갭니다. 회 개는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되 어야 마땅합니다. 네 제가 잘못했어 요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떠나야 합니다.
죄를 떠난 것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내가 거짓을 중단하고 있 는 것, 그것만으로 아직 회개가 이 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언제 또 다 시 거짓이 튀어나올지 몰라요. 내가 거짓말을 중단하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해요. 거짓을 말하던 내 입술에서 이제는 진실한 말이 담겨 져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나 와 나의 거짓의 범죄 그리고 나의 모든 범죄를 짊어지고 보배로운 피 를 떨구신 그 분 앞에 무릎 꿇고 그 거룩한 보혈로 씻음 받고 죄를 자백 하고 용서를 받고 일어나 이제 거짓 으로 지배되던 내 입술 속에 진실의 새로운 언어를 담아야 합니다. 미움 의 언어 대신에 사랑의 언어를 담아 야 합니다. 죽음의 언어 대신에 이 웃들을 중상하고 모략하고 그리고 파헤치던 그런 언어 대신에 내 입술 에 사랑의 언어를, 생명의 언어를, 창조의 언어를 담아야 합니다. 그리 고 진실한 말을, 새로운 언어를, 정 직한 말을, 거룩한 언어를 담고 그 리고 이 언어 속에 복음을 담아 예 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 사람 이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거짓을 벗어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얘기 하나 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실화예요. 오래 전 에 전세계 기독교인들을 감동시켰던 얘기라고 합니다. 독일에서 참 불쌍 한 사람 많이 돕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인 자매 하나가 혀 암으로 판명되어 수술을 받게 되었 습니다. 어쩌면 언어를 잃어버릴지 모른다. 이제 나는 언어를 잃어버릴 지 모른다. 당신은 앞으로는 말을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자, 그 순간 그는 간호사나 의사를 바라보면서 마치 유언 같은 이런 아름다운 신앙 고백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래요 지 금까지 하나님이 나에게 언어를 주 셔서 이 언어를 가지고 제가 하나님 을 찬양했고 그리고 복음을 증거했 고 이웃들을 격려할 수가 있었습니 다. 오 하나님, 하나님의 이 은혜를 찬양합니다. 더 이상 만약 내가 더 이상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면 이제 는 하나님 내 마음의 언어로 당신을 찬양하고 당신을 높이고 여전히 이 웃들에게 진실과 사랑의 마음의 언 어를 가지고 다가서겠습니다. 하나 님, 언어를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 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언 어, 그 언어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고 계신지요? 기도하십시다.
오늘 우리는 거짓이 유행하는, 거짓이 편만한 사회 속에, 시대 속 에, 분위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리스도인들만이라도 정직해야 되는 데 오늘 우리의 체면, 우리의 위신 때문에 정직을 외면하고 살아갑니 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당 신을 아십니다. 이제 그만 거짓을 포기하십시다. 그리고 새로워 지십 시다. 그리고 정직하십시다.
하나님, 내게 주어진 나머지 인 생만이라도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 다. 진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내 입 술에 묻어있었던 거짓의 피흘림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하 나님 성령충만하게 도와주십시오. 내 입술에 거룩의 언어, 생명의 언 어, 사랑의 언어를 담아 이웃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내 입술이, 내 언어 가, 내 마음이, 내 존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살아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 합니다. 오늘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 앞에 나오게 하셨사오니 오 하나님, 우리에게서 거짓을 제거하시고 생명 의 언어, 거룩의 언어 하나님 담아 주시사 주 앞에 한 평생 정직한 인 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 소서. 우리가 연약합니다. 우리가 부 족합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 의 삶 속에 거룩의 언어를 담아 주 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게 해 주시옵 소서. 오 하나님, 주님을 찬양합니 다. 주께 우리의 감사와 사랑을 드 립니다.
죽음의 가면
박정근목사 / 행 5:1~11
아이들이 소꿉장난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지요? 어린 시절 다 소꿉장난을 했겠지만. 기억이 나지 않을 겁니다. 주변의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너는 아빠, 나는 엄마를 정해서 얼마나 잘 하는지 모릅니다. "여보, 나 왔어!" 상대방 아이가 잘 모르면 가르쳐 주기까지 합니다. "잘 다녀왔어요!" 하고 인사해야지 하면서 말입니다. 때로 순사놀이도 합니다. 나는 순경, 너는 도둑놈 이렇게 정해서 합니다. 요즘은 이것이 바뀌어서 서로 도둑놈 하려고 한답니다. 경찰이 범인에게 당하는 것이 많다보니 그런 모양입니다.
소꿉장난 속에서 아이들은 모든 인생을 흉내냅니다. 때로 아빠 엄마가 되고, 때로 선생님, 때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아이들만 소꿉장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른들도 똑같이 이 놀이를 즐기고 있습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아이들은 놀이로 하는 반면 어른들은 진지하게 합니다. 아이들은 드러내놓고 하는 반면어른들은 은밀하게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속과 다른 모습을 띠고 살아가는지요? 슬픔을 감추기 위해 때로는 웃음의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재미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처럼 나를 감추고 살아갑니다. 지성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내가 다 아는 질문을 날카롭게 포장해서 던집니다. 나의 지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의 의로움을 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죄를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지적합니다. 나의 선함을 알리기 위해 때로 남을 돕고, 헌금을 합니다. 내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도 내 이름을 내기 위해서 우리는 종종 많은 일들을 행합니다. 일종의 소꿉장난인 셈입니다.
성경은 어른들의 이러한 놀이를 한 단어로 표현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선(僞善)'입니다. 이 단어의 원 뜻을 찾아보니 재미있는 뜻이었어요. 우리말로 하면 '가면 배우'입니다.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배우입니다. 옛날에는 배우가 그리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 연극에서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때 목소리와 얼굴을 바꾸기 위해 가면을 쓰고 등장합니다. 한 사람이 주인과 종의 역할을 합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역할도 합니다. 이런 가면 배우들을 위선자라고 불렀습니다. Hypocrite!
때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아픈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진실 되게 삶을 살아야 마땅한데, 때로 하나님 앞에서조차 우리는 가면을 쓰고, 삶이 아닌 연기를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연기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아이들이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가볍게 보아 넘기실까요? 아니면 귀엽다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과연 가면 배우에 대해서, 우리가 늘상 생활에 젖은 이 가면을 쓰고 사는 삶을 과연 어떻게 진단하실까요? 오늘 저는 바로 이 본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우리의 머리에 대한 진단을 진지하게 연구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때는 바로 부흥의 때였습니다. 부흥의 물결이 온 예루살렘 교회를 뒤덮고 있을 때에 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20문도(門徒)가 다락방에서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이 땅에 임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고 나아가 담대하게 목숨을 걸고 증거 했더니,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교회가 비좁았습니다. 순식간에 교회는 만 명 이상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 명 이상 되는 성도들이 한 공동체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자기의 물건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줍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 32절은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모두가 남을 위해 자기의 재산을 내어놓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나바였습니다. 이 부흥의 물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동참하기 원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땅을 팔아 절반은 떼어놓고 나머지 절반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죽음이었어요.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라 부부가 다 죽었어요. 세 시간 차이로 부부가 강대상, 사도 베드로 앞에서 거꾸러져 죽은 것입니다.
왜 죽어야만 했을까요? 왜 하나님이 그들을 죽여야만 했습니까? 아예 안 바치는 사람도 있는데, 절반이나 바친 이들이 왜 죽어야만 했을까요? 설령 이들이 죄를 지었다 해도 부부를 다 죽이는 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지은 죄가 뭐가 그리 심각하다고 부부를 세시간 차이로, 그것도 교회 앞에서 그들을 죽여야 한단 말입니까? 이 질문을 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우리가 진지하게 읽기를 원하십니다. 도대체 이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들의 잘못을 이토록 엄하게 다루셨습니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교회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원하셨을까요?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하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바라볼 때, 우리는 두 가지를 명심하고 지나가야 이 본문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이 본문은 계시적인 사건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징벌하심은 어떤 면에서 계시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말씀, 메시지를 전달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자신의 소유를 바쳤습니다. 10분의 1만 바치면 되는데, 절반을 바쳤어요. 많이 바친 것이지요. 그런데 왜 이들은 저주를 받아 죽어야만 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 본문 가운데서 찾아야만 합니다. 왜?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것입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대할 때 이 사건을 계시적인 차원으로 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은 하나의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사실,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저를 포함해서 우리 교회 안에도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일벌백계(一罰百戒)의 대표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 자신들로 볼 때는 불행한 일입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어떤 교훈을 말씀하시기 위해 그들을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다스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과거와 현재에도 그랬듯이 후세에도 이런 일을 얼마든지 범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바로 이 위험한 죄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파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교회를 지키시기 위해서 이 사건을 다루신 것입니다. 일벌백계(一罰百戒)에는 반드시 교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지막으로 던져야 할 종합적인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각하게 이 두 사람의 죄를, 초대교회의 부흥의 물결 한가운데서 두 사람을 죽일 만큼 엄하게 다루신 그 교훈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몇 가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심각한 죄 몇 가지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죄는 다름 아닌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잘못입니다.
1.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죄
하나님은 이것을 심각한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적어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한날 강대상에서 죽이실 정도로요. 오늘 본문은 이들 부부가 왜 땅을 팔아서 헌금을 하려고 했는지, 구체적인 동기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만, 문맥상 그 동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아나니아~'이런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불행한 번역입니다. 원문에 보면 'But(그러나)'이라는 단어가 끼어 있어요. '그러나'가 있음으로 해서 이 5장은 4장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장과 절이 편리하기는 합니다만, 믿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태초에 기록되었을때, 장과 절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어떤 한 사람이 설교를 하려고 보니 너무 찾기가 힘들어 장과 절을 만든 겁니다. 그래서 잘못 나누어진 부분들이 많습니다. 이 5장도 그렇습니다. 4장과 이어져야 합니다.
4장에서 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자기의 재산을 팔아 10분의 1 또는 10분의 2를 헌금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한 사람, 바나바라고 불리는 요셉이라는 사람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 가지고 몽땅 다 드렸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예루살렘 교회 본 출신이 아닙니다. 저 촌구석인 구브로 출신이었어요. 오늘날로 말하면 새가족이 와서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 하나님 앞에 드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그러니까 만 명이나 되는 교인들의 시선이 이 바나바에게 다 모인 겁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예루살렘 교회의 창립 멤버가 아니었는가 라고 말합니다. 주동이었다고 얘기합니다. 그 교회의 기둥을 이루는 주동 집사였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안수집사쯤 되겠지요. 지도자였습니다. 교인이 만 명이 넘었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면 그 교회에서 유명하고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가족이 하나 와서는 재산을 다 팔아서 몽땅 바쳤던 겁니다.
온 교인의 시선이 "와! 저 사람이 누구야? 바나바 아니냐!"하고 몰렸어요. 그러자 이들의 마음 속에 질투가 생겼어요. "그래도 내가 이 교회의 기둥인데!"
이들이 헌금한 동기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해서 드린 것이 아니고, 정말 가난한 형제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드린 것이 아니고, 바로 이 질투와 자기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이 동기였다고 문맥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들이 헌금한 동기였습니다.
체면 때문에 한 것입니다. 정말 드리고 싶어서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 때문에, 그래도 내가 저 새가족보다 나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드렸던 겁니다. 결국 아까운 마음이 많았습니다. 사람을 의식해서 할 수 없이 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궁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적게 드리고 극대의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결과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반만 바치기로 한 것이었어요. 말과 행동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전교인들은 그들이 재산을 다 드린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반을 감추어 놓았습니다. 누구만 알고? 부부만 알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심각하게 보신 이들의 죄였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고 하면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의식해야 되는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되는데, 하나님의 눈을 무서워해야 되는데, 이들은 사람의 눈만을 의식했다고 본문은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 분이 살아 계셔서 나를 보고 계신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그 분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그 분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명예와 이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체면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실상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믿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 당신이 나의 왕입니다"라고 찬양합니다. 그러나 삶 속에서는 우리가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잊어버리는 겁니다.
무시해 버리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알고 나를 따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주님을 쫓는 양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쫓아가는 자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주님을 쫓기보다는 사람들의 인기를 따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살기보다는 자신의 체면을 중요시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가를 이 시간 성령 하나님의 도움으로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때로 성경은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혀 중요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우리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가볍게 여기는 것들을 하나님은 문제 삼으십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사건입니다.
우리 한국은 체면의 문화입니다. 유교는 체면의 문화입니다. 우리가 체면의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에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 안에도 보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되는데, 정말 주님 앞에서 떳떳하게 살면 그것을 자부심으로 알고 외로워도 그 길을 걸어가야 되는데, 사람의 눈 때문에 헌금하고 교회 출석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요? 우리가 체면의 문화 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체면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내 영광입니다. 내 프라이드(pride)입니다. 나를 높이려고 하는 겁니다. 내 체면이 구겨지는 것은 정말 못 견딥니다. 내 자존심이 상하고 명예에 흠집이 생기는 것을 우리는 싫어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보다 나를 높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뜻하면서 내 이름을 내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이것을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이 죄가 교회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나도 모르게 우리는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 생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초대교회에서 이 죄를 근절하시기 위해, 모든 예루살렘 교인들과 오고 있는 세대의 성도들이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의식하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이 부부를 엄중하게 죽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1절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
'주의하라' 우리는 이 말씀을 종종 잊어버립니다. 이 말을 거꾸로 얘기하면,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보이려고 의를 행하기가 쉽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눈을 팔고 조금만 잘못하여도 하나님을 보아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 때문에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세 가지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먼저 구제의 예를 드셨어요. 구제할 때 너희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어요. 나발불면서 하지 말라는 겁니다. 얼마를 바쳤다고, 고아원에 얼마를 기부했다고, 수재민을 위해 1억을 냈다고 KBS 방송국에 나발을 불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너희가 바친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저 교회는 1억을 바쳤는데, 우리 교회는 2억을 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동기로 행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구제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또한 금식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금식할 때에 40일 금식을 평생에 몇 번 했느니, 3일 금식을 했느니 하지 말라. 금식할 때에 세수를 하고, 양복을 입고, 화장을 깨끗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화장하라고 하십니다. 말라보이지 않도록 통통한 색깔을 내고, 명랑한 웃음을 띠면서 하라고 하십니다.
기도할 때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유창한 말로 공중기도에 힘쓸 것이 아니라, 혼자 골방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짧게 하고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심각한 마음으로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악이었습니다. 그들은 왜 헌금했는가? 반을 헌금했으면 많이 바친 겁니다. 오늘날, 아파트 2억 짜리 팔아서 1억을 바친 겁니다. 이것이 보통 헌신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왜 입니까?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헌금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하나님 앞에 불경의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누구 때문에 주일날 나오십니까? 제가 체크하니까 나오십니까? 누구 때문에 헌금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십일조 하십니까? 제가 헌금 많이 나오는 방법을 몰라서 그렇게 안 하는 줄 아십니까? 저도 할 줄 압니다. 다음 주부터 주보에 십일조와 선교헌금 명단을 내고, 집사님들이 낸 액수를 날마다 봅니다. 제직회에 그 액수를 돌립니다. 그리하면 헌금이 지금보다 두 배는 늘어날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아픔이며, 우리의 아픔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아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의 무리들이 나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신앙생활 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 중심에 제가 서 있습니다. 이 목사가 가장 일선의 죄를 범하기 쉬운 자리임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이 시간 자신을 한번 돌아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과연 누구 때문에 신앙생활을 합니까? 누구 때문에 구제사업과 기도, 봉사를 하십니까? 혹시라도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사람이 더 우선순위에 있습니까? 내 체면이 있습니까? 대표적이고 계시적인 사건, 오늘 말씀을 당신의 것으로 삼아 이 순위를 뒤바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삽시다!
그래도 미국은 좀 낫습니다. 체면문화가 아니거든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사람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거꾸로 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우리 죄로 인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대표로 징계하셨던 것입니다.
2. 거짓의 죄
미국은 제가 가서 살아보니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문화입니다. 그래서 우리보다는 거짓과 위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거짓말이 습관이 되어 밥먹듯 합니다. 이것 때문에 미국 가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성추행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사실은 성추행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이 위증, 즉 거짓말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나중에 큰 이슈로 다가왔어요. 결국 거짓말 때문에 탄핵 당할 뻔했어요. 벌써 학자들은 미국이 썩었다고 얘기합니다. 클린턴 대통령이 위증한 것을 알고도 탄핵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은 더 이상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옛날 같았으면 어림도 없을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문화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문화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군사문화의 특징 때문입니다. 군사문화라는 것은 수단과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이겨야 됩니다. 그래서 정치판도 이기면 군자가 되고, 지면 감옥 가는 겁니다. 선거에서 지면 다 감옥 갑니다. 다음에 또 누가 지면 감옥 갈 사람 천지일겁니다. 거짓말을 해도 어쨌든 정권만 잡으면 의인이 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군사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이 군사문화가 우리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어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우리 모든 사람들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편법을 써서라도 성공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교회 안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는 얘기로, 성경을 읽기 위해서 양초를 훔치는 정도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말이 됩니까?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말아야지, 어떻게 성경을 읽기 위해서 남의 집 양초를 훔칠 수 있습니까? 이것이 통용되는 교회가 오늘 한국 교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거짓을 심각하게 다루십니다. 예수님은 사탄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사탄의 대명사를 하나로 얘기했어요. '그는 거짓의 아비라' 그는 거짓말에 왕자라는 겁니다. 사탄이 누구냐 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실제로 사탄이 어떻게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켰습니까?
창세기 3장에 보면, 그는 거짓말을 통해서 인간을 타락시켰어요. 어떤 거짓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이 말씀을 사탄이 하와에게 가서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또한 사탄은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왜 못 먹게 하는 줄 아니? 숨은 동기가 있어.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네 눈이 밝아져서, 네가 하나님과 똑같이 될 거야!' 거짓말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을 타락시킨 이 사탄은 지금도 동일한 원리와 방법으로 우리를 멸망시킵니다. 오늘날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속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파괴하는 것 역시 거짓말입니다. 거짓말! 그것을 성경은 심각하게 다루십니다. 우리는 거짓말을 습관적으로 늘상 하는, 미덕으로 하는 문화에서 자라났습니다. 오늘 이렇게 잘못된 우리의 문화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정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짓말을 하지 맙시다. 가능하면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어떤 목사님이 하루는 심방을 갔습니다. 한참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밖에서 아이가 뛰어 들어 와서 엄마에게 누가 왔다고 하는 겁니다. 누구냐고 물으니까 거지가 돈을 얻으러 왔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계신 줄도 모르고 습관적으로 "얘, 가서 엄마 없다고 그래!" 아이가 쫓아 나가서 "우리 엄마가요, 엄마 없다고 하래요!" 실화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정말 거짓말투성이입니다. 이 사회를 이대로 두면 다 멸망하고 말 겁니다. 사람이 서로 신뢰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말을 신뢰할 수도 없어요. 국민은 정치가를 신뢰하지 못하고, 상호간에 신뢰하지 못하고, 학생은 선생을 신뢰하지 못하고, 부부가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부모가 자녀를 믿지 못하는 이 세대에 결국 멸망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사회를 누가 건지겠습니까? 오늘 우리 영안교회가 해 봅시다. 아멘!
우리끼리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맙시다. 거짓말을 하지 말자! 이를 여러분 마음속에 심으십시오. 저도 한국 사회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그러나 노력해 봅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3.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죄
하나님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 주시는 마지막 교훈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죄악입니다. 이들 사건을 한편으로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가 없어요. 재물의 일부를 감추었어요. 남의 것도 아니고 자기의 것을 감추었는데 죽었어요.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오늘 하나님의 지적을 우리 잘 한번 살펴봅시다. 자기의 것을 감춘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여기에는 큰 문제가 걸려 있다고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3절과 4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이 말은 거짓말을 말합니다. 또 누구를 속였나요? 성령을 속였어요. 베드로에게 거짓말했는데, 베드로는 그가 성령을 속였다고 얘기합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베드로의 이 말씀이 얼마나 합당합니까? "아나니아야, 너의 땅이 너에게 있을 때는 그것이 너의 땅이 아니더냐!" 그리고 "그 땅을 판 돈이 다 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냐! 그런데 왜 너의 물건을 가지고 큰 죄를 지었느냐!" 이는 내 물질을 가지고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10분의 1을 바쳤느냐 안 바쳤느냐를 우리는 중요하게 보지만, 하나님은 태도를 보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헌금의 액수를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태도를 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헌금을 잘못했을 때, 그것이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중요한 죄악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태도로 하나님 앞에 헌금했을 때입니까?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길 때입니다. 목사님과 집사님만 속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은 나도 모르게 만홀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겁니다.
십계명 중에 제 3계명을 아십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나니아의 심각한 죄악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섬기지 않았어요. 자신의 명예를 유지하는데 급급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여긴 겁니다. 오늘 교회에 이러한 죄가 가득 합니다. 사람의 눈은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눈은 의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은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귀머거리입니다. 오늘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장님입니다.
저기 계셔서 아무 것도 모르시는 분입니다. 아무 능력도 없는 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건, 죄를 짓건, 하나님의 이름을 무시하건,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한 신학자는 죽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사신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사신 분입니까? 여러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감찰하시는 분입니까? 하나님은 정말 여러분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이신가요? 하나님은 구약에서 자신의 거룩을 얼마나 엄중하게 보여주셨습니까? 웃시야의 사건을 아시지요. 법궤를 수레에 실어 옮깁니다.
그런데 소가 펄쩍펄쩍 뛰는 겁니다. 법궤가 떨어지려고 하니까, 웃시야가 손을 내밀어 그 법궤를 잡습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그를 쳐죽이셨어요.
이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혼돈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법궤가 떨어지려고 해서 웃시야가 도와주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웃시야를 죽였어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거룩에 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문제, 하나님이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가 거기에 연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이 법궤는 나를 대표하니 아무나 만질 수 없다. 제사장들만 만질 수 있다." 이 거룩! 제사장들만 만지게 하시고, 성전을 만드시고, 성전 가운데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가 없다. 대제사장들만 1년에 한번 속죄일 날만 들어와야 된다. 대제사장도 자기의 죄를 다 속죄하고 들어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그 대제사장을 죽였어요. 그래서 지성소 안에 대제사장이 들어갈 때, 커다란 끌리는 옷을 입고 끝에다가 방울을 달았어요. 제사장의 발목에 줄을 매달아 놓았어요. 방울소리가 오랫동안 안납니다. "아, 하나님이 제사장을 죽였구나!" 하면서 백성들이 밖에서 줄을 당겨 내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섬기라는 겁니다. 그 분은 너무나도 거룩하신 분이니까요. 하나님은 만홀히 여기심을 받을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첫 번째 기도 제목은 이렇게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님께서 한 가지 진리를 말씀해 주십니다.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과 염소로 다 나눌 겁니다. 그날 예수님이 양들에게 "양들아, 너희는 복 받을지어다. 너희는 내가 목마를 때에 물을 주었고, 헐벗을 때에 옷을 주었지 않느냐!" "저희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데요." "이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염소들을 향해서는 진노하시면서 이들을 밖에 내어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헐벗을 때에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데요."
"너희 형제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형제에게, 자녀와 부모에게 거짓말하고, 이 땅에서 편법을 행하며 남을 속이고 살 때에, 그것은 그 사람만을 속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습니다.
나는 그 사람에게 거짓말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나에 대해 거짓말했다고 평가하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를 속였지만, 베드로는 선포합니다. "네가 성령을 속이고 사람에 대하여 거짓말함이 아니요, 하나님께 대하여 거짓말하였도다!" 그 영혼이 떠나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혹시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로 사람의 칭송을 받으면서 은밀한 죄악을 마음에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겉으로 교회에 헌신하면서, 속으로 썩어 문드러져 가는 것은 아닙니까? 겉으로 많은 헌금을 하면서, 그러나 얼마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언제나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까? 겉으로 착실하면서, 속으로 하나님을 속이며 날마다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은 아무도 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여러분이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아실 테니까요.
오늘 돌이킵시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 부부의 비극이 부부가 똑같다는데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부부 가운데 한 사람만이라도 나았더라면 그를 말렸을 겁니다. 둘이 똑같았어요.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위선의 탈을 던져버리는 일에 서로를 도웁시다. 내 명예를 버리고, 거짓을 버리고, 하나님을 만홀(漫忽)히 여기는 것을 우리는 버려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감사한 것은, 이후의 내용을 읽어보니 예루살렘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왜 징계를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왜 우리 안의 죄악을 제거하시기 원하십니까? 우리를 징계하심이 아니요, 우리를 구원케 하심인 줄 믿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큰 부흥을 체험했듯이,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위선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끊어, 우리 영혼에 구원이 다가오고 나아가 우리 사회,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위대한 교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감 사
행 05장 1~11절 / 고흥식목사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07:1)
매일매일 감사하십시오. 전심으로 감사하십시오.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리스 철학의 3대 산맥으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리스가 있습니다. 그 중 플라톤이 4가지 사실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한 것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소나, 돼지, 개, 짐승, 곤충으로 태어나지 않고 만물의 영장인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시49:20) 둘째, 문명국 그리스(아테네)의 사람이 된 것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정치와 예술이 발달하고, 좋은 나라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셋째, 남자로 태어나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옛날 그리스에는 여자에게는 참정권이 없었습니다. 여성학대가 있었고 여성을 무시했습니다. 넷째, 좋은 스승(소크라테스)에게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예쁜 병아리가 마당에서 물 한 모금 먹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또 한번 먹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계속 고개를 숙였다 쳐들었다 하는 것을 보고 한 인도주의자가 말했습니다. “저 병아리는 고개가 아프겠군, 저렇게 고개를 숙였다가, 올렸다가 하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생물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다 먹고 살자고 저러지요 목을 들지 않으면 물이 목구멍에 넘어가겠습니까?” 이제는 신앙이 좋은 한 성도가 말합니다. “두 분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저 병아리는 물을 한 모금 삼킬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말에 두 사람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당신은 평범한 일에도 감사의 의미를 찾으니, 당신은 얼마나 많은 감사거리가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속에서 감사를 발견하는 눈은 귀한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감사에 대한 성령이 말씀하시는 가르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1. 감사생활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맙시다.(2-3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고 싶어서 그 소유를 팔았으나, 순간 세상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계산하다가 땅값 얼마를 뒤로 빼돌렸습니다. 영적인 생활로 복된 인생을 살고자 했으나, 세상욕망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 물질을 세상에서 사용할 때 더 요긴한 것이라고 셈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는 세상욕심에 더 비중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마귀의 세계에는 감사가 없다”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마귀가 쫓겨 간다고 했습니다. 마귀가 감사생활을 빼앗아가고 나면 그 마음속에 마귀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얼마를 감추고, 사도앞에 이것을 다 가져왔다고 합니다. 양심과 진실을 버리고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은 언제나 마귀가 하는 행동입니다.(요8:44)
여러분, 은혜를 받고 감사한 마음을 깎아 내리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를 에누리 하지는 않는지요? 감사를 상실한 마음은 사단의 운동장이요, 사단의 놀이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사단에게 끌려가지 마십시다. 남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고후9:7)
감사는 벽에다 던지는 공처럼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감사를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는 은혜의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감사생활을 잃어버리면 영이 죽게 됩니다.(4-6절)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육은 몸으로 흙으로 지음 받았고 혼은 정신이고 영은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의 입김입니다. 히브리말로 루아흐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프뉴마라고 합니다. 영은 하나님의 생기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밀접하면 영이 살았다고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기면 영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이 죽으면 사실상 그 사람의 영혼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살전5:23)
아나니아는 하나님을 속였습니다.(4절) 주의 종 베드로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하나님을 속인 것으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종 앞에서 거짓말을 한 것은 하나님께 한 것입니다. 교회를 속이고 하나님의 종을 속일 때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그 사람의 혼을 시신으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그 아내도 영적으로 무지하여 하나님의 종 앞에 거짓말을 하는 순간 같이 시신이 되고 말았습니다.(9절) 쌍둥이 무덤이 생겼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이렇게 무서운 일을 행하셨을까요?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내에 누룩을 제거함이 있습니다.(고전5:8)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가 악한 행위가 퍼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갈 5:9) 우리 인생에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은혜생활이 떨어지면 감사를 잃어버리고 감사를 잃으면 영이 죽게 되고 영이 죽으면 하나님의 전에서 서슴없이 방자해집니다.
신본주의 신앙이 벗겨지면 인본주의로 부패하게 되고 인본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오면 괴악한 누룩이 펴져 생명의 역사가 끊어지므로 하나님이 치시는 것입니다. 감사를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감사 생활할 때 교회 질서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징벌하시는 이 사건을 보고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의 권위를 높여주시는 모습입니다. 감사를 잃어버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사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영적으로 높여 주시고 거짓감사와 구별시키십니다.
감사가 충만한 교회는 힘있는 교회입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감사를 잃지 않으면 왕성하게 되고 여건이 좋아도 감사를 잃어버리면 폐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같은 감사 생활을 하는 사람은 권위자라는 존귀한 이름을 얻게 됩니다.(행4:36) 성경을 보면 감사생활한 사람들이 복받는 삶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감사생활한 사람들은 기적의 일생이 되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자기가 배가 고파 먹어야할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려서 축복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려움 중에 하나님의 종의 말에 순종한 수넴 여인과 사렙다 과부는 고난 시대에 기적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미국은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제물을 드린 청교도 때문에 세계 일등가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자손 대대로 감사의 열매를 따먹고 지금도 강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감사 생활하는 모든 성도에게 창대한 미래가 있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는 진리가 있습니다.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고후 9:6).
러시아의 문호인 톨스토이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질병도 물러갑니다.
저는 무서운 질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고칠 수 없는 위병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병든 것이 너무 고생스러운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연히 가족과 하나님, 그리고 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주 안에서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말씀을 듣게 됐습니다.(빌 4:4-7) 그래서 노트와 펜을 준비하고 감사한 일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일부터 큰일까지 감사하니 감사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매일 감사하니 놀랍게도 통증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찬송을 하니 무력한 다리에 힘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니 무서운 위병이 사라졌습니다. 나 자신이 활기찬 삶을 위해서, 타인에게 기쁨을 선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복된 손길을 잡기 위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성령은 보고 계신다
행 5장 1~11절 / 김상복목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감격하고 좋아서 달려가 안기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시고 죽게 하면서까지 우리를 향하신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 겁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이런 겁나는 이야기가 기독교 역사의 초기에 성경에 기록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감격하고 감사하되,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겁을 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면서 정의로우시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기 위함입니다. 저는 가끔 이 부분을 읽을 때 “아, 하나님이 너무 하지 않으신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짓말을 했다고 남편이 즉사하고 세 시간 후에는 아내도 죽어 한꺼번에 장사를 지내게 되다니, 아 겁이 납니다. 무섭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무서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악한 것인지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 구원 받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자본주의 요소가 다분히 있습니다. 서로 나누는 것을 강조하지만 공산주의는 아닙니다.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정부나 독재자가 모든 것을 갖고 통제합니다. 북한도 그렇지 않습니까? 반면, 기독교는 사유재산을 인정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 또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또 다른 이에게는 열 달란트를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재능과 능력에 따라 사유재산을 주시고 그것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재산을 보유할 권리와 처분할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특권이죠.
그런데 성령을 받으면 사람들이 달라집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남들처럼 열심히 일해서 논과 밭과 집을 사고 재산을 모으며 살다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을 받은 후에 그 마음들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본 후에 사람들이 보인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 연약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전에는 다른 사람이란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즐기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였는데, 이제는 협력과 도움을 줄 대상으로 보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고 성령을 받은 여러분의 마음도 하나님께서 변화시켜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라는 청지기 의식을 갖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재주나 지식이나 기술이나 돈이나 건강이나 시간이나 환경이나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놓으신 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 정신으로 다스리는 지혜와 능력과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다 내꺼야. 나를 위해 살아야지. 나 밖에 없어. 남을 이용해서라도 내가 더 먹고 더 모으고 더 가져야지.’ 이런 생각과 삶에서 변화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보았듯이, 바나바는 자원하여 자기 밭을 판 돈을 베드로에게 주며 “이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십시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죄가 아닌 것을 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재산을 갖고 있거나 팔거나 그 돈을 갖고 있는 것은 아무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부부는 죄가 아닌 것을 어떻게 죄로 만들었을까요? 땅 판 돈의 일부를 베드로에게 가져오면서 전부라고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땅을 팔았으나 제게 필요한 일부를 뗀 나머지라도 드리니 주님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였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솔직히 얘기했다면 전혀 죄가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참 어리석었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4절).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 문제가 되었고 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겠다고 물건과 돈을 가져온 사람들과, 심지어 밭을 팔아 내놓은 바나바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도 칭찬을 받고 싶어서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지는 않지만 땅을 팔아 “이게 전부입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알려지고 칭찬받기를 원하면서 사람들을 너무 의식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너무 사람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면 신경 쓰이는 일이 많고 고생도 많을 것입니다. 옷을 하나 사 입어도, 자기 돈 주고 사 입었는데도, 남이 뭐라고 하지 않나 눈치 보며 남의 말에 하늘에 올라갔다 지옥에 내려갔다 합니다. 미국에는 이 팔복더위에 누가 밍크코트를 입고 나와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입고 싶으면 입게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너무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 하거나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편안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마음고생을 하며 살고 싶으시다면 여러분의 친구나 동창이나 이웃과 비교하십시오. 아마 마음고생이 심할 것입니다. 아나니아 부부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땅을 팔았습니다. 그 돈의 일부를 그대로 소유해도 아무 상관없지만, 일부를 전부라고 거짓말을 하여 죄가 아닌 것을 스스로 죄로 만들어 이런 비극을 겪게 된 것입니다.
제가 귀국한지 얼마 안 되어 누구를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가는데 교통이 막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1시간 반이나 늦게 약속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핸드폰으로 연락할 수 있을 텐데, 늦게 도착하니 만나기로 한 사람은 이미 가버리고 당장 연락할 길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 후에 만나 사과하고 용서를 받긴 했지만, 그 날 제가 얼마나 속을 태웠고 죄의식을 느꼈으면 오늘 이 아침에까지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까? 도로에서 차가 막힌 것은 내 죄가 아닌데 제가 7시까지 가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제가 늦은 것이 제 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확실한 약속보다는 7시까지 가도록 노력하겠다고 얘기합니다. 저는 원래 충성스럽게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지만, 일부러 늦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미안하지만, 그렇게 말해두면 죄의식도 없고 마음도 편해집니다. 여러분도 주일예배에 제 시간에 오도록 노력하십시오. 조금 늦어질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그렇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공모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땅을 판 돈은 적지 않은 액수인데, 이걸 어떻게 몽땅 드린단 말인가? 바나바는 왜 그렇게 해서 내 골치를 썩이나?’ 사실 바나바는 밭을 판 돈을 몽땅 바쳤는데 그는 그럴 여유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는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밭을 정확히 얼마나 소유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중에 일부를 팔아도 그의 가족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요, 베드로가 밭을 팔아가지고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바나바는 마음이 감동되어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고 스스로 내어놓은 것입니다. 이에 반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우리가 한 몫을 떼놓고 이게 전부라고 말하자’고 한 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누군가 한 사람은 “아니에요. 여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돼요. 기도해보고 결정해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간은 약합니다. 어떤 때는 남편이 잘못하고 어떤 때는 아내가 잘못합니다. 그러므로 한 쪽이 약할 때는 다른 쪽이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돼. 옳게 살아야지’ 라고, 남편이든지 아내든지 자식이든지 부모든지 동생이든지 누군가가 그 말을 해줘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누군가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신실하게 살겠다는 결단을 하셨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그 가정이 살아납니다. 남편이 거짓말하자는데 아내가 “아, 그거 좋은 생각이네” 하고 부부가 합세하면 반드시 망합니다. 그 예가 바로 오늘 이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그럴 때 아내가 “아니오” 하거나, 아내가 그럴 때 남편이 “아니오” 했어야 했는데, 둘이 입을 맞춰 아내가 남편의 거짓말을 따라 하니, 하나님께서 그들 부부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기독교 초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에 충만하여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해야 될 상황에서, 이 부부와 같은 타락한 영혼을 그대로 두면 앞으로 기독교 성장에 문제가 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아예 처음부터 본 때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악과 거짓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양심과 동료를 속이면 결국 망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가 아는 제법 번창한 사업가는 결혼한 지 오래지만 아내 몰래 숨겨놓은 여자가 있었습니다. 핸드폰으로 전화가 오면 감추고 기록을 지우느라 애쓰다가 결국 아내에게 들키자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대더니 결국 사업을 망치더군요. 밝고 정직하고 신실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전심전력을 다해도 사업이 어려운 경쟁시대에 두 마음과 죄의식을 갖고 사업을 하여 성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도 숨겨놓은 사람이 있으면 당장 포기하십시오. 왜 그런 짓을 하나요? 하나님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3-4절).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시고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계신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이것이 보이고 또 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삽니다. 그러나 영의 눈이 어둡거나 성령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안 보이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컴컴한 곳에서도 보시고, 저 하늘 끝이나 바다 끝이나 땅굴 속에도 계십니다. 다윗이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목전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나님을 피해 어디로 도망가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보시고 하나님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눈을 뜨고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서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아닌 것도 죄로 만들고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는 문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몰래 어디를 갈 수 없습니다. “주님이 가실 곳이 못되니 주님은 여기 계세요” 하면 “내가 너를 떠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고 세상 끝까지 너와 같이 하겠다고 했는데 너 혼자 어딜 가느냐?” 하십니다. 주님과 같이 갈 수 없는 곳은 우리가 갈 곳도 아닙니다. 주님이 듣고 계시는데 주님이 듣기 불편하신 이야기는 우리가 할 이야기도 아닙니다. 주님이 보고 들으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큰 위로요 격려요 축복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저주요 공포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사십시오.
남편 아나니아가 하나님을 속였다가 그 자리에서 죽어 젊은 사람들이 그 시체를 동굴 속에 넣고 돌아올 때 쯤 베드로가 아내 삽비라에게 물었습니다. “이 돈이 땅 판 값 전부냐?” “네. 전부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거짓을 합의했느냐? 네가 성령을 시험하려하느냐? 네 남편이 죽어 묻고 돌아오는 젊은이들이 바로 네 시체를 끌고 가리라.” 남편이 죽은 세 시간 후에 아내가 또 죽었습니다. 참으로 겁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생각하고 두려워서라도 죄와 거짓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날마다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속이려 했던 부부로 인하여 우리가 사전경고를 받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님과 동행하고 정직하고 신실하게 삽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나와 동행하시니,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 않고 때로 나를 오해해도 상관없이,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갑니다. 마음속에 두려움 없이 영원한 평화를 갖고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사는 길입니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므로 겁날 일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하나님의 평화 가운데 나머지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하여 우리에게 도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인간을 의식하며 인간의 압박 속에 살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자유와 평화 속에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어떤 부부의 이야기
행 5장 1~11절 / 김경년목사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전 교인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기 전에 목사님이 감사기도를 드렸답니다. 그래서 다른 교인들은 함께 식사를 시작하는데 그 교회 어떤 장로님이 식사를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간절히 기도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앞 에 앉아계시던 권사님이 물었답니다. “장로님, 조금 전에 목사님이 감사 기도를 했는데 또 그렇게 기도를 하십니까?”그 때 장로님의 대답이 걸작이었답니다. “예, 요즘 세상에 남의 기도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 부부는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일부분을 가지고 와서 전부라고 속이는 바람에 3시간 간격으로 즉사하는 엄청난 사건이 나옵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들 부부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린 부부입니다. 재산의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분을 가지고 와서 드렸는데 왜 이런 비참한 일이 생겼을까요?
오늘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초대교회는 교회의 기초를 놓는 때였습니다. 교회가 이제 막 시작하는 때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합니다. 만약에 첫 단추가 제대로 끼워지지 않으면 나중에는 계속해서 잘못됩니다. 그래서 처음이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 있었던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교회의 미래가 결정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사건을 가볍게 처리하지 않고, 심각하게 다루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1절 말씀을 보면“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이후 온 교회와 초대 공동체가 함께 두려워했습니다. 얼마나 큰 충격이었겠습니까!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거짓말했다 생명을 잃어버렸다”
만약에 우리 교회 어떤 교인이 거짓말 한 번 했다가 즉사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긴장을 하겠습니까!
모든 듣는 사람들이 아마 신앙을 새롭게 정립할 것입니다.
삶이 좀 달라질 것입니다.
실제로 그 다음절 이하에 보면 이 사건 직후에 초대교회가 다시금 부흥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 거짓을 허용치 않음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교회 부흥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사건을 통해서 몇가지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첫째로, 신앙이 좋은 믿음의 파트너를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2절 말씀입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부부입니다. 그런데 남편 아나니아가 얼마를 감추었는데 아내도 알았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편이 잘못할 때 아내가 좋은 파트너가 되어야 합니다. 그랬으면 둘 다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정직하고, 좋은 파트너가 많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좋은 파트너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사도 바울의 목회 사역에 가장 큰 도움을 준 부부가 있는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입니다. 이들 부부는 천막을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일평생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에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부부입니다. 만약 부부 중에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가 함께 헌신적으로 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일생에 잊을 수 없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 부부의 이야기를 하면서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두 사람이 똑같았습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을 보면 남편 아나니아가 재산을 숨기는 일을 주도적으로 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이 거짓을 먼저 주도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아내도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때 아내가 “여보 우리 정직합시다. 이러면 안 되요.”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결국 본문의 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여기서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함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죄 짓는 일에 이 부부는 아주 환상의 콤비였습니다.
만약 부인만이라도 정직할 수 있었더라면 “여보 안돼요. 여보, 하나님 앞에 정직합시다.”그랬으면 이런 비참한 종말은 맞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번 옆에 분과 말씀 해 보세요.
“우리 정직합시다.”“여보, 정직합시다”
둘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이렇게 했더라도 이 사건은 달라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좋은 파트너를 붙여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먼저 여러분 각자가 좋은 파트너가 되시기 바랍니다.
좋은 파트너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를 말합니다. 사단의 종 노릇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음성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가볍게 듣지 말아야 합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회개할 수 있을 때 즉시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라고 말합니다.
만약 그때 아나니아가 “맞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용서 해 주세요”그렇게 했더라면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할 수 있을 때 즉시 회개해야 됩니다. 회개는 빠를수록 좋은 것입니다. 시간을 더 끌지 말고 늦을수록 안 좋습니다. 회개는 빠를수록 좋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입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또 그의 아내 삽비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7-8절에 보면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것이 기회였습니다.
그 때 삽비라가 “아닙니다. 사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선생님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삽비라는 기회를 놓치는 대답을 합니다. 8절 하반절에 “.....예 이뿐이로라” 결국 그 한마디 대답이 그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기의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살다보면 이런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남의 돈을 떼어 먹고, 공금을 횡령하고, 이렇게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면 즉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시골에서 시멘트 한포 값을 떼어 먹고 20년 후에 기억이 나서 그 값을 이자까지 포함해서 갚아주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집의 개를 훔쳐 잡아먹고 나중에 회개하고 갚아 주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도 기억나는대로 갚아야 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 즉시 순종하여 제2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회개를 빠를 수록 좋습니다.
결 론
이제부터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네가 성령을
속이고...“라고 했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성령을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때 성령을 의식하고 있다면 결코 거짓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을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했던 말 가운데 “거짓은 사람을 잠시는 속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은 반드시 드러납니다.
어떤 고등학교 다니는 학생 몇 사람이 주일날 놀러 갔답니다. 너무 신나게 종일 놀다 보니까 월요일날 학교 가기가 싫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학생이 제안을 했습니다.
“애들아, 우리 하루 더 놀자. 그리고 완전히 결석하면 안 되니까 오후에 학교 끝나기 전에 들어가서 사실 주일날 우리가 놀러 갔었는데 시골 깊은 곳에 놀러 갔다가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고칠 방법이 없어서 하루 종일 애쓰다가 겨우 왔다”고 하자. 그래서 네명이 합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월요일날 하루 더 신나게 놀고 오후에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선생님 참 죄송합니다. 어제 우리가 사실은 깊은 산골에 놀러 갔다가 월요일날 아침에 학교에 오려고 그러니까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가 나 있었습니다. 우리가 공구를 안 가져와서 고칠 방법이 없었어요.
하루종일 애쓰다가 가까스로 고쳐가지고 이제야 도착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뭐 그럴 수도 있지.”그러면서 메모지 하나를 다 주더랍니다.
그리고는 네 사람에게, “떨어져 앉아라.” 그러더니 메모지에다가 자동차 타이어 어느 쪽 바퀸지 각자 써내라.고 하더랍니다.
여러분, 선생님이 깜쪽같이 속을 줄 알았는데 자동차 바퀴가 펑크난 것은 이야기가 되었는데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앞 바퀸지 뒷 바퀸지 어느 쪽인지 합의를 못했거든요. 결국 그들의 거짓이 드러났다는 재미있는 실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짓은 범죄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십계명을 통해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거짓은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파트너를 붙여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좋은 파트너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가 왔을 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언제나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크게 두려워하라
행 5장 1~11절 / 김 조목사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 거룩하라고 명하셨습니다.(레19:2)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해야 할 우리가 거룩하지 아니할 때에 하나님은 징계를 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즉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5절과 11절에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초대교회가 많은 핍박 가운데서도 엄청난 부흥을 이루고 있을 때 자기 소유도 자기 것이라 아니하고 서로 나누며 살았으니(2:43-47,4:32-35)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자기 소유를 팔아가지고 얼마를 감추어놓고 사도에게 드리게 될 때에 사람에게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 했던 것이라 두 사람이 현장에서 혼이 떠나 죽게 되는 끔찍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두려워했던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겠기에 “크게 두려워하라”고 제목하고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거짓된 것에 대해 두려워해야 합니다. (3-4,8-9절)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의 소유를 팔아 그 값에 얼마를 감추어 두고 모두 다인 것처럼 거짓을 했는데 이는 사람에게 한 것도 되지만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 했기에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현장에서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니 거짓에 대해 우리는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거짓된 말과 행동, 위선적인 삶에서 깨닫는 역사 두려워하는 마음 가져야 합니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순간에 거짓말 하게 되고 출세, 성공과 자기 안위를 위하여 거짓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일상적인 생활이 되어버린 우리는 아닌가 참과 거짓의 구별조차 쉽지 아니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기에 더욱 두려운 마음으로 정직하고 신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게”된다고(계21:8) 했습니다. 거짓은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한 말뿐 아니라 가식과 위선에 찬 것으로 우상숭배나(사59:4) 잘못된 가르침(롬3:7)도 거짓이요,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도 거짓이라고(요일2:21)하며 이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요8:44) 사단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3절에 “성령을 속이고”라는 말도 단순히 기만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두려워 아니하고 없이 여겨 다른 것으로 성령 훼방죄는 결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마12:31) 성도여! 하나님은 거룩하시니 거짓의 종 되지 않도록 두려운 마음 갖고 더욱 정직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2. 자기 욕심 따라 사는 것 두려워해야 합니다. (1-4절)
모두가 하는 것을 보고 가진 것 다 팔았으나 하나님의 뜻대로 다 드리지 못하고 얼마를 감추었으니 자기의 생각대로 욕심을 따라 간 것이 엄청난 비극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바친 재물도 자기들 것 중 십일조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게 드린 것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닌 자기 욕심에 끌려갔기 때문에 거짓말도 한 것입니다. 4절의 말씀은 땅을 팔기 전에도 너의 소유였는데 팔아 그 값을 가지고도 “임의로” 자기 하고 싶은 데로 다 드리지 못하고 자기 욕심 따라 간 것으로 초대교회가 이렇게 하는 것도 자기들이 자원해서 하는 것이니 법이나 강제 규정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성도들의 물질, 돈에 대한 자세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이 땅에 갖고 있는 모든 소유가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이 땅에서 맡겨준 것으로 청지기의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눅12:16-21)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것 맡은 사람으로 첫 소산도 하나님께 바치고 십일조도 철저히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것 인양 착각하고 자신과 하나님도 속이고 욕심 따라 인색한 마음 따라 해야 할 것 하지 아니함에 두려운 마음 갖고 내 욕심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역사를 이루는 일에 쓰임 받는 자 되시기 원합니다.
3. 교회를 무시하는 일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3-4절)
교회를 시작케 하신 성령님을 무시하고 속이려 했고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로써 모든 것을 서로 통용하던 아름다운 역사에 교회를 속이고 사랑과 신뢰를 손상시킨 것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무시해 온 결과가 무서운 형벌로 이어졌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예수님의 피 값을 지불하고 사신 교회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귀하게 여기고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를 자기의 어떤 유익이나 얻는 곳으로 생각했다가 조금만 자기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비방하고 비판하고 또 그러한 일에 휩싸여 동조하는 것으로 사랑과 신뢰를 저버리고 형제의 사랑이 금이 가버리게 되니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결과가 있음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여 교회를 더욱 가까이 하고 섬기는 일에 최선 다 하시고 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 섬김이 몸에 배어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목회에도 잘 적응하게 되었고 오늘도 크게 복 주셨습니다. 성도여!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지만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를 귀하게 여기시고 섬기는 일에 최선 다하시고 큰 복을 받는 주인공 되시기 원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이 크게 두려웠던 것이 공포에 질려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령을 말씀하신 것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에 두려워하며 진실하고 정직한 모습되게 해야 하겠고 하나님의 뜻 버리고 내 욕심 따라 사는 것에 두려워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최선 다해 해드리며 교회 무시하는 일들 버리고 귀하게 여기고 섬기며 봉사하는 일에 최선 다 하시고 축복의 주인공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의 위상과 권세
행 5장 1~16절 / 김영준목사
저희 교회 개척 초기에는 아주 좋은 변명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 개척교회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 한마디면 교회의 부족한 면에 대해서 면죄부가 되었습니다. 아직 개척교회이니 이해해 달라, 그러나 이제 그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벌써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교회의 나이는 사람 나이보다는 개의 나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람이 여덟 살이면 아직 아이이지만 개가 여덟 살이면 중년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8년이라는 말은 이제 벌써 어른 나이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척교회의 변명은 이제 통하지 않고 이제는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저는 제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끼지 않지만 교회가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낍니다. 이제까지 별로 이룬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이대로 별로 이루지 못하고 또 세월이 흘러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지난번에 한국교회사 강의를 하셨던 최재건 교수님의 강의를 들어보니까 그분이 젊은 학생으로 무엇을 공부할까를 고민할 때 ‘교회사를 공부해야 되나, 기독교 역사를 공부해야 되나’를 놓고 고민을 하셨다고 하는 것처럼, 맞는 얘기입니다. 기독교와 교회는 어떤 관계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교회냐 교회가 기독교냐, 교회 없는 기독교가 가능하냐, 또 교회의 모습이 기독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느냐, 기독교는 좋은데 교회는 안 좋을 수 있느냐,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느냐,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관계를 비교하자면 포도주와 포도주 잔의 관계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지 잔을 마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잔이 있기 때문에 포도주를 담을 수도 있는 것이고 마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포도주는 잔을 필요로 합니다. 서영춘씨의 유명한 말과 같습니다. ‘인천 앞바다가 사이다라고 해도 곱부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교회가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예수님을 믿도록 돕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사람은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에 대해서 배우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웁니다. 또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를 사용하셔서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복음을 전하시고 교회를 당신의 몸으로 사용하시고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친히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도 교회는 필요한 존재이고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부흥과 기독교의 부흥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데 기독교 신앙이 부흥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나라는 기독교 신앙이 부흥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상당히 큰 책임이 있고 큰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적어도 그 사실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만큼 우리가 이것을 믿고 실천하느냐에 이 시대의 기독교 신앙의 흥망성쇠가 좌우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읽기에도 겁이 나는 사건이에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말을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이 교회의 위상과 권세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첫째는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게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는 교회에게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기를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게 아니고 하나님에게 한 것이다’ 교회에 거짓말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목사님, 한 구절만 가지고 확대해석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물어보실 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다른 구절도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사울에게 나타나셨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은 없고 교회를 핍박한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당신을 핍박하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보셨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그 독생자 예수님을 대변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거짓말 한 것은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는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변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에 전하는 말도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된 것처럼 교회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는 사람의 말로 시작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주신 놀라운 사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섣불리 다뤄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더디 하고 듣기를 많이 하고 사람의 의견, 말하는 것을 자제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절제하고 또 여기에 대해서 조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하게 다룬다면 교회가 이 세상에 전하는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의견이 아니고 학술이 아니고 신학이 아니고 논리가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도 부흥하고 성도들의 신앙도 부흥하고 또 세상에 하나님의 귀한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가 됩니다.
둘째는 교회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을 권한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에게 드릴 예물을 가지고 와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사도들의 발, 이것은 교회에 그것을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에게 드리는 예물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지금 자기가 받을 몫에 대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받을지언정 베드로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취하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물이고 베드로는 다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접수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성도들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물을 접수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에 만일 베드로가 자기 개인이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집 판 돈을 조금 숨기더라도 별로 개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도 여기에 대해서 인간적인 생각으로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드리는 사람이나 접수하는 사람이나 다 동일한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것을 드리고 또 접수해야 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에게 드린다고 하면서 거짓말하는 것에 대하여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지적하고 그리고 치리해야 될 책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인간적인 생각을 좇아서 타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일조든 모든 예물에 대해서 사람이, 교회가 임의로 ‘안해도 됩니다. 힘들면 넘어가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것은 이것은 사람이 그것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접수하는 것뿐이기 때문에 사람이 임의로 ‘이래도 됩니다, 저래도 됩니다.’라고 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이것은 예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모아서 그들이 하나님에게 올바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그들을 돕고 권면하고 그들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적인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여서 찬송을 부를 때 사람들 들으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찬송가를 몇 억 번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각 찬송가를 몇 억 번씩 들어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새로운 곡을 듣기 위하여 우리에게 찬송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 같으면 아무리 좋은 곡이라고 몇 억 번 들었으면 ‘아, 괜찮다, 들은 걸로 하자. 찬송가 405장? 들은 걸로 하자. 찬송가 28장? 그래, 그래, 들은 걸로 하자.’ 이런 식으로 할 텐데 하나님은 ‘들은 걸로 하자’가 아니고 이미 수도 없이 많이 들어보셨지만 우리가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음치든 성악가든 ‘그래, 한번 들어보자.’ 주님은 우리의 찬송을 듣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예배를 받기를 원하신다는 얘기입니다. 찬송은 예배의 한 행위입니다. 예배는 명사가 아니고 동사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할 수 있도록 그 예배를 주선하고 권고하고 돕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그것을 하나님에게 전달하는 그런 귀중한 책임이 있고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십니다.
예물도 예배의 한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물을 드리는 것도 예배입니다. 찬송이든 기도든 성도의 교제든 예물 드리는 것이든 이것은 사람 들으라고, 사람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에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올 때 너무 기뻐서 겉옷을 벗고 춤을 추었는데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오해했습니다. 임금이 체면도 없이 계집종들이 보는 앞에서 그랬다…. 그때 다윗이 말하기를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한 것이다, 다윗을 예배자라고 부르고 예배가 회복됐다고 말하는 이유가 다윗 자신이 예배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기 위해서도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되면 됩니다. 로마서 12장에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예배니라’ 영적인 - this is our spiritual worship,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 그 자체가 우리의 거룩한 산 예배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예배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성도의 예배를 하나님께 모아서 드리는 제사장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일 때 하나님이 역사가 나타납니다. 모일 때에 은혜가 나타나고 모일 때에 성령이 임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혼자서 은혜 받은 경우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밖에 없고 그 이외에는 전부다 모였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것도 백이십 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한 중에 임한 것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한 것도 그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있을 때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모일 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혼자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모여서 기도할 때 더 큰 은혜가 있고 더 기도가 잘 되고 그렇습니다. 왜 내가 교회를 나가야 되느냐, 교회를 나가야만 기독교인이 되느냐? 그건 아니지만 그러나 나뭇가지 하나에 불을 붙여보세요. 금방 꺼지지요. 그러나 나무를 많이 모아서 모닥불을 만들면 활활 잘 탑니다. 내가 타는 것이 다른 나무가 타는 데 도움이 되고 남의 타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고, 교회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세 번째로 교회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심판할 수 있는 권세. 이 부분은 우리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권세를 대다수의 교회가 행사하기를 주저합니다. 이십일 세기에 이런 것이 얼마만큼 사람들에게 통할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성경은 그것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교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성 베드로 사원에 가면 거기 베드로의 동상이 있는데 손에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열쇠가 작더라도 큰 문을 열 수 있는 것처럼 천국의 열쇠, 교회에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것이 열쇠의 기능인 것입니다.
요즘은 그 기능이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외국 가는 비행기를 타는 사람이 공항 터미널에 가서 체크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공항터미널에 가서 체크인을 하고 버스를 타면 김포공항에서 별도의 체크인을 하지 않아도 이미 좌석을 얻고 짐을 맡기고 그냥 출구로 들어가면 됩니다. 공항터미널에 체크인하는 것은 공항에서 체크인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교회가 천국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체크인을 하면 천국에 체크인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천국의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의 죄를 사해줄 수 없지만 교회는 사람의 죄를 사해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3절에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해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것은 교회에 주신 죄사함의 권세입니다. 교회가 누구의 죄를 사하면 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다는 얘기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바로 후자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들의 죄를 심판했더니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심판하셨어요. 교회에 주신 권세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 대하여 경건한, 그리고 거룩한 두려움을 결코 잃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생활은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그저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제가 기쁜소식교회의 담임목사이지만 제 교회라고 제 임의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무엇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 I will build my church, on this rock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반석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한 교회는 승리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함께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