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예수는 누구신가? (사9:1-7), 성탄절 메세지
부제; 예수님이 땅에 오신 목적
예수님은 2천 년 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수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오셨습니다. 구약만 해도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350회 정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마1:21). 그중에서도 주전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가장 선명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동정녀를 통해서 탄생하실 것까지 예언해 주었습니다(사7:14). 그리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다각도로 알려주십니다(6절). 또한 그분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사실 것인지를 예언해줍니다(53장). 미가 선지자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미5:2). 그것도 한 사람의 예언이 아니라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한눈에 보아도 그분은 메시아로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메시아로 영접치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마저도 말입니다. 해서 요1:11에“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에 관한 별칭을 몇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6절에 예수님을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오, 평강의 왕’이시라 묘사합니다. 그의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고 했습니다. 정사란 영어로는 ‘government’인데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메시야는 다스리시는 분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1. 기묘자요 모사라 .
여기 기묘란 "신비하다"는 ‘놀랍다’ 뜻이고 "모사란 ‘지혜자’를 뜻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인성을 초월하신 기이하신 분임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육신을 입고 오신 분으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그 하나하나가 놀랍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너무나 위대하고 신비하시어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고 다 설명할 수도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신 분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었습니다. 비천한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특히 여기 ‘모사’ 원어의 뜻은 "선비" 혹은 "상담가"라는 뜻입니다. 해서 영어로 카운셀러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분이 지혜가 풍성하신 분이므로 우리를 옳게 최선의 길로 지도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완전하신 상담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무슨 문제든지 어려운 것이 있으면 예수님께 찾아와서 상의 드리면 기도하면 예수님은 그 모든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지혜로운 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Christ is the Answer”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시는 놀라운 존재요, 더 나아가 우리의 인생을 복된 인생으로 만들어 주시는 상담자, 카운셀러이십니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은 주님 앞에 우리 인생의 고민 보따리를 풀어놓아야 합니다.더 나아가, 그분은 인간으로서는 다 이해 할 수 없는 신비한 능력을 소유한 분이십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그는 신성을 소유하셨기 때문입니다. 병자를 일으키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당신 스스로도 죽었다가 살아나시는 놀라운 권세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4대 성이이라 불리는 공자, 석가, 마호멧과 같은 그런 분의 하나로 보시면 큰 오산입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소유한 놀라운(Wonderful) 존재요, 우리 인생의 완벽하고 능력있는 모사(Counsellor)인 것입니다.
2.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 그것도,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말인가? 의문을 제기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개념을 잘 이해치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이 동양적 개념입니다. 그러나 서양적 개념은 아버지와 아들은 똑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을 자식이 그대로 물려받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찰스1세, 찰스2세 하는 것이 그런 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하나님과 동등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위해 아들이라 칭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다"는 용어는 아무에게나 쓸 수 없는 단어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쓸 수 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에게도 사람에게는 절대로 쓸 수 없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그는 힘과 능력이 무한하신 분입니다. 성경에 떡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이 넘게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고 수많은 병자를 놀라우신 방법으로 고치십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를 의지하며 나오는 자에게는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어집니다. 그러기에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3. 영존하시는 아버지이.
왜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실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1)아버지는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신 말씀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 2)아버지는 보호자이며 예수님은 우리의 보호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성령으로 지금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천군 천사 동원하여 지키시며 보호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 어머니는 한계가 있습니다. 세월이 부모의 능력을 다 앗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버리신 분이십니다.
3)아버지는 공급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한순간만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4. 그분은 우리의 평강의 왕이십니다.
"평강의 왕"이란 뜻이 무엇일까요? 그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헐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군 천사들이 노래한 것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흔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 하지만 그것은 껍데기 평화입니다. 참 평화, 참 평강은 "구원을 얻어 죄로부터의 해방을 누리는 심령의 상태"를 말합니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을 용서하며 사랑할 때 누리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성탄은 주님 오시기 전 700여 년에 예언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오셨고 그 예언대로 지금도 존재하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성탄)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 응답으로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사실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이사야7:14,마1:21~23) 그리고 그분은 기묘자요, 모사며,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시요,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공통된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분문의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1) 흑암을 빛으로(1-2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보다 흑암의 세력에서 우리를 건지사 빛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빛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빛을 거부하고 어둠을 택하였습니다. 어둠은 공중권세를 잡은 사단의 전유물로 어둠은 흑암이요, 흑암은 고통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흑암의 권세아래 압제받는 자기 백성들을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할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계획입니다. 그래서 빛으로 인도할 메시아를 우리 가운데 보내십니다. 그분이 바로 한 아기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6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하여 흑암이 걷히고 빛이 비추일 것입니다. 그 아기가 어떤 분인가는 본문 6-7절에서 그 아기는 자기 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자기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유대 땅입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 되는 이스라엘은 예수를 영접치 않았습니다(요1:11). 그 이유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5절은 말씀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만큼 흑암에 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흑암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빛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것도 가장 어두운 곳으로 말입니다. 당시 흑암에서 가장 고통 받던 지역은 대표적으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지역입니다. 그 지역들은 여러 가지 요인으로 유대인들로부터 가장 많은 천대와 멸시를 당하던 지역입니다. 한마디로 버림받은 지역으로 취급되던 땅입니다. 이 지역들은 사사시대 이래로 수많은 열국들의 침입으로 항상 시달림을 당해 왔으며, 주전 733년경 앗수르 군대가 침략하여 거의 초토화되었던 지역입니다. 빛되신 예수님은 가장 어두운 지역을 비추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도 가장 먼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의 해변 마을과 갈릴리를 비추기 시작했다고 증언합니다(마4:13).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은 가난하고 천하고 무능하고 연약하며 음지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인도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2) 고통을 기쁨으로(3절)
이사야 선지자가 공개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또 하나의 목적은 고통에서 기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기쁨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온통 세상이 흑암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고통은 흑암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흑암이 지배하는 세상에 거하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나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고통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고통은 있습니다. 그것은 명예나 권세, 재물에 상관없습니다. 육신의 고통은 두말할 것 없거니와 영적인 고통이라도 있습니다. 고통은 마음에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의 즐거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많이 가지고도 즐거움이 없으면 고통입니다. 많이 누리고도 즐거움이 없으면 고통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고통을 물리치고 기쁨을 주기 위함입니다. 본문 3절. 주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하여 흑암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회복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즐거움을 더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고통 받던 사람들에게 즐거움이 더해짐으로 기쁨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즐거움은 마치 추수하는 농부들의 즐거움이요,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들이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그런 즐거움이 주 앞에서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중에 하나가 고통에서 기쁨으로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3) 압제를 해방으로(4-5절)
압제받는 영혼들을 해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4절에 나오는 단어 ‘멍에’ ‘채찍’ ‘막대기’는 모두 노예를 다룰 때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노예는 압제받는 사람들입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세상에 자유가 없는 영혼이 가장 불쌍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압제를 받았던 민족들입니다. 때로는 주변 나라들로부터 압제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무엇인가로부터 압제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마치 무언가로부터 조종을 당하는 듯이 말입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모르면 삶의 이유와 목적을 모르는 것입니다. 무언가에 붙잡혀서 살아가는 것은 노예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압제받는 영혼들을 풀어서 해방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단의 굴레에서 풀어주기 위함이요,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죄악의 사슬에서 자유케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우리 주님이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멍에와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기 위함입니다(4절). 본문 4절은 미디안의 군대를 궤멸시킨 하나님의 은총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다가 미디안의 손에 붙여 칠년간이나 압제를 당했습니다. 그 압제의 설움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기드온의 삼백용사로 이기게 하십니다. 그것도 메뚜기의 중다함 같은 미디안의 군대를 궤멸시키십니다. 한마디로 그런 이스라엘의 쾌거를 기억해보라는 것입니다. 감히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그와 같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압제받는 영혼을 구원하여 자유케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주님이 나를 성전 삼고 내안에 오셔서 나와 함께 임마누엘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마1:23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래서 주님이 내안에서 나를 성전삼고 사실 때 흑암에서 빛으로, 고통에서 기쁨으로, 압제에서 해방이라는 위대한 역사가 동시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