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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高校, 옛 문장 위주로 교육
일상 생활에 필요한 어휘 적고 그나마 있던 과정도 축소 추세
초등학교 정규교과 아예 없어… 학부모 89% "한자 교육 필요"
'談虎虎至(담호호지)요 談人人至(담인인지)라(호랑이를 말하면 호랑이가 오고, 사람을 말하면 사람이 온다).' '天下(천하)에 難得者(난득자)는 兄弟(형제)요, 易求者(이구자)는 田地(전지)라(세상에 얻기 어려운 것은 형제요, 구하기 쉬운 것은 밭과 땅이다).'
현행 중학교 한문 교과서에 나오는 문장이다. 현대 실생활에서 그다지 쓰이지 않는 어려운 어휘와 문장으로 이뤄져 있다. 서울의 공립고에 다니는 김지수(17)양은 "한문 과목에는 부모님께 여쭤봐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문장이 많이 나온다"며 "배워 봐야 별 소용도 없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많아, 수능에서 선택과목으로 택하지 않으면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한문(漢文)'은 일부 배우지만 '한자(漢字)'는 모른다
현재 우리나라 중·고교 교육과정에는 '한문' 과목이 있으나, 현대 한국어에서 사용되는 한자어가 아니라 고전(古典) 한문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행 교육과정은 중·고등학교 한문 과목의 목표에 대해 '한문에 대한 기초적 지식을 익혀 한문 독해와 언어생활에 활용하는 능력을 기른다' '선인(先人)들의 삶과 지혜를 이해하고… 전통문화를 바르게 이해하고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키려는 태도를 지닌다'고 했다.
'한문'을 배우는 목표 자체가 현재 우리말 어휘의 약 70%를 차지하는 한자어를 독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옛 한문 문장의 이해'에 있는 것이다. 상당수 대학생이 '大韓民國(대한민국)'이나 '社會(사회)' 같은 기초 한자어를 읽거나 쓰지 못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전광진 성균관대 중문과 교수는 "'이등변(二等邊)삼각형'이 '두[二] 변(邊)의 길이가 같은[等] 삼각형'이고 '조도(照度)'란 말이 '밝게 비치는[照] 정도[度]'라는 뜻인 것을 알고 나서 수학·과학 수업을 들으면 한자 교육의 연계성이 훨씬 커질 것"이라며 "하지만 지금 한문 교과서에는 그런 어휘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줄어드는 한문 교육
현행 '2009 개정 교육과정'이 실시된 이후 기존 '한문' 교육이 축소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이전 교육과정에서는 고교 일반선택 과목으로 '한문'과 '교련' 중 하나(6단위)를 선택하고, 심화선택 과목으로 '한문고전'(6단위)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09 개정 교육과정(7차)에서는 '기술·가정' '제2외국어' '한문' '교양' 등 생활·교양 영역에서 16단위 이상만 개설하면 되도록 바뀌었다. 한문을 선택하는 기회가 실질적으로 줄어든 셈이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황기모씨의 계명대 석사 논문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한문 교육의 문제'에 따르면, 교육과정이 바뀐 뒤 대구의 고등학교 중 문과에서 한문 과목 편성을 기존 6단위로 유지한 곳은 31곳에서 7곳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이과에서 아예 한문 과목을 없앤 학교는 1곳에서 8곳으로 늘어났다. 그나마 있는 한문 교육조차 부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학부모 89%, "초등학교 한자 가르쳐야"
하지만 학부모와 교사는 한자 교육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2009년 학부모와 교사 5200여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학부모의 89.1%, 교사의 77.3%가 초등학교 한자 교육 시행에 대해서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초등학교 한자 교육의 이점으로는 '어휘력 신장'(35.4%) '교과의 주요 개념 이해'(27%) '사고력 신장'(3.8%) '아시아 각국과 이해·교류 증진'(3.1%) '인격 향상'(2.5%) '맞춤법에 맞게 쓰는 데 도움이 됨'(2.2%) 순으로 대답했다.
한자 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권에서도 여야를 뛰어넘어 공감하고 있다. 지난 2009년 김종필 전 총리부터 한명숙·한덕수 전 총리까지 당시 생존한 역대 국무총리 21명 중 20명의 서명을 받은 '초등학교 정규 교육과정 한자 교육 촉구 건의서'가 청와대에 제출되기도 했다. 현재 초등학교에서는 학교 재량에 따라 창의적 체험 활동 시간을 활용해 한자 교육을 할 수 있게 돼 있지만, 정규 교육과정에는 편성돼 있지 않은 상태다.
한글 專用만 애국인가?
한자교육이 반민족 행위라는 주장, 피해의식 사로잡힌 문화쇄국주의
우리말의 70% 차지하는 한자어는 中·日과 다른 역사·관습적 國字
외국 학자들 "한국 문화 알기 위해 한자·한문 교육 반드시 필요하다"
"마흔 이하 젊은이들은 한자(漢字)를 몰라서 의사소통 과정에서 오해가 많이 생겨요. 한자는 외국어가 아니라 한국어의 큰 범주에서 봐야 해요. 한국 문화를 알게 하려면 한자와 한문 교육이 필요합니다."
독일인 한국학자 베르너 사세 전 한양대 석좌교수가 최근 본지 인터뷰 중 "학생들이 한국 문화에 대해 너무 무지해서 놀랐다"며 한 말이다. 한자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한국 문화를 잘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한글만 쓰고 배우는 것이 곧 애국'이라는 일각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셈이다.
◇"세종대왕도 한글·한자 함께 썼다"
"한글은 온 누리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로서 우리의 자랑이고 보물이다. …한자 혼용은 왜정시대 식민지 교육 찌꺼기로서 이제 피어나는 우리 자주문화와 '한류' 바람을 가로막는 반민족 행위다." 한글 관련 단체들이 지난해 3월 발표한 '초등학교 한자 교육 절대로 안 된다'란 제목의 성명서 일부다. 한글로만 표기하는 것이 민족적 자주성(自主性)을 지키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한자 조기(早期) 교육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한글 전용론자의 이 같은 시각은 우리 문화의 일부가 된 지 오래인 한자에 대해 '외래문화'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것으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문화쇄국주의'란 비판을 받고 있다.
심재기 전 국립국어원장(서울대 명예교수)은 이 성명서에 반박하며 "자기 것만을 고집하지 않고, 유연하고 열린 자세로 외부 문물을 수용할 수 있을 때 그 민족의 발전은 보장되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인인 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지난해 한 언론 기고에서 "지금은 열린 자세로 문화적 교류를 하면서 동시에 자국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것이 요구되는 시대"라며 "그렇다면 더더욱 한국어 문자에서 한자를 빼낼 이유가 없다"고 했다.
'한자 혼용이 왜정시대(일제 강점기) 잔재'라는 주장도 우리 역사에서 한자 사용의 역할을 도외시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은 한자어는 한자로, 고유어는 훈민정음으로 구별해 적었다. 김창진 초당대 교수(국문학)는 "세종대왕에서 비롯된 국한자(國漢字) 혼용은 조선왕조는 물론 개화기, 일제 강점기, 광복 이후 1980년대까지 한국어 문자 표기에서 주류(主流)였다"고 했다.
◇팔만대장경은 딴 나라 문화유산인가
'한글만이 우리 고유(固有) 문자'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2000여년 동안 우리 민족이 사용해 온 한자는 '고유한 것'이 아니고 570년 전 창제한 한글만 '고유한 것'이냐"는 반론이 제기된다. 그런 논리라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은 5200만 자(字)가 모두 한자로 새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 문화유산'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한자 문맹(文盲)' 현상은 한자어가 우리 고유문화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객관적 사실조차 희석시키고 있다. 한자·한문으로 된 수많은 고전(古典) 독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현대 우리말 어휘 70%를 차지하는 한자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한글로 발음만 표기하는 데 그치도록 하는 것이다.
김경수 중앙대 명예교수(국문학)는 "우리말은 한자어로 된 어휘가 인체의 척추처럼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며 "한자 사용 반대는 우리말 언어의 가장 큰 특색이자 장점인 표의(表意·뜻을 나타냄) 문자와 표음(表音·소리를 나타냄) 문자의 혼용을 막아 우리말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사는 곳'이라는 말을 그대로 써도 될 경우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 '거처(居處)' '처소(處所)' '거소(居所)' '우거(寓居)' '주소(住所)' 등의 다양한 한자어 표현 중 하나를 골라 쓰면 더 적확한 용어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말들을 한글로만 표기하면 의미상 차이를 분간하기 힘들다.
이계황 전통문화연구회장은 "우리가 쓰는 한자는 소리·형태·의미에서 중국이나 일본과 구별되는 우리 문자이며 역사적·관습적 국자(國字)로 봐야 한다"며 "한자를 공용 문자로 인정하지 않고 외국 문자로 취급하면 우리 정신문화에서 과거와 현재의 맥을 끊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다섯 번 이겨도 져도 한글로는 '5연패'… 한자 없인 의미 혼란스러워
오랫동안 외세 침략을 당한 민족이어서 배외 감정이 크다'의 '배외'와 '외국 것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배외 정신은 버려야 마땅하다'의 '배외'는 같은 말일까? 정반대 뜻이다. 전자는 '외국 것을 배척해 물리친다'는 '배외(排外)'이고, 후자는 '외국 것을 맹목적으로 숭배한다'는 '배외(拜外)'다.
한글 전용의 커다란 맹점 중 하나가 '동음반의어(同音反義語)', 즉 '소리는 같은데 뜻은 반대인 용어'의 존재다. 한글로 '5연패'라고만 쓰는 경우 연패가 잇따라 이겼다는(連覇) 것인지 잇따라 졌다는(連敗) 것인지 알 수 없게 돼 버린다.
자칫 안전사고로 연결될 수 있는 동음 반의어도 있다. '방화(防火)' '방수(防水)'는 각각 '불을 막다' '물을 막다'는 뜻인데, '방화(放火)' '방수(放水)'라고 쓰면 '불을 지르다' '물을 흘려보낸다'는 뜻이 된다.
'실권(實權)'은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나 권세'란 뜻인 반면 '실권(失權)'은 '권리나 권세를 잃는다'는 뜻이다. 한글로 '실권자'라고만 적어 놓으면 의미가 혼란스러워진다. 비슷한 경우로 '실효(實效·실제로 나타나는 효과)'와 '실효(失效·효력을 잃음)'가 있다.
'저 여성은 정부다'라고만 하면 칭찬인지 비난인지 알 수 없다. '정부(情婦)'는 '아내가 아니면서 정을 두고 깊이 사귀는 여성', '정부(貞婦)'는 '슬기롭고 절개가 굳은 여성'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또 ▲'수상(受賞)'은 '상을 받는다', '수상(授賞)'은 '상을 준다' ▲'소음(騷音)'은 '시끄러운 소리', '소음(消音)'은 '소리를 없애거나 작게 한다' ▲'과욕(過慾)'은 '욕심이 지나치다', '과욕(寡慾)'은 '욕심이 적다' ▲'편재(偏在)'는 '한곳에 치우쳐 있다', '편재(遍在)'는 '널리 퍼져 있다'는 뜻이다.
"漢字 외면하는 한국…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고립"한자 교육 외치는 한글전용론자
"학생들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것이 그렇게 비(非)애국적이고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요? 그러면 양복은 왜 입고 다닙니까?"
'한글 전용론자'면서도 한자(漢字) 교육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허성도 서울대 중문과 교수다. 그는 '삼국사기' '고려사' '태조실록' 등 역사서의 한자 원문과 확장한자(정부 지정 표준한자 4888자에 포함되지 않은 한자) 1만5000자를 컴퓨터에 입력해 연구 등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국학 전산화'의 선구자다.
허 교수는 "우선 필수 한자 1500자(字)를 원하는 학생 중심으로 가르치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자는 그 숫자가 너무 많아 배우기 힘든 문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20여년 동안 수백 권의 자료에 대해 전산화 작업을 해보니 기초 한자 1000자를 알면 중요한 한문책 86% 정도를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허 교수는 "한글만 알아야 애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애국이란 결코 '우리만 최고'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며,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 고립될 게 아니라 그 문화권에 속해 있는 주변 나라와 조화롭게 지내는 게 더 큰 애국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한글이 문맹률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면, 이제는 한자가 한국어 고급화에 기여해야 할 때"라고 했다.
법률적 논쟁 붙은 漢字
"훈민정음 창제 이래 한자·한글 혼용, 로마자·아랍문자도 여러 민족 써… 한글전용 강제한 국어기본법 위헌"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 헌법 소원
정부 "한자는 고유 문자 아냐" 반박
"한자로도 우리말을 표기할 수 있으나, 한자는 우리나라 고유 문자가 아니다."(국어기본법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에 대한 정부 측 의견서)
"고유어와 한자어는 배타적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약점을 보완하며 국어 생활을 풍요롭게 해 준다."(정부 측 의견서에 대한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의 반박)
한자 사용과 교육을 둘러싼 법률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회장 이한동 전 국무총리)는 지난 2012년 10월 "국어기본법의 한글 전용 정책에 위헌성이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청구인 측은 "현행 국어기본법이야말로 한자 문맹(文盲) 현상이 확산되는 문제의 핵심"이라는 입장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법무법인을 통해 지난해 7월 이 헌법소원에 대한 장관 명의 의견서를 내며 맞받아치자, 청구인 측도 지난해 12월 이를 반박하는 의견을 냈다. 위헌 여부에 대한 결정은 내년 이후에 나올 전망이다.
◇헌법소원: "한글 전용은 언어 인권 침해"
청구인 측이 '위헌'이라고 지적한 국어기본법은 2005년에 제정된 것으로, 국가 기관과 지자체의 어문 정책을 총체적으로 규율하는 역할을 한다. 이 법의 3조 2항은 〈'한글'이란 국어를 표기하는 우리의 고유문자를 말한다〉고 했으며, 14조 1항은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고 했다.
'한자'는 국어를 표기하는 문자가 아니라 '외국 글자'라는 얘기다. 청구인들은 "국어기본법은 한국어 표기 문자라는 한자의 법적 지위를 박탈했고, 언어생활 속에서 한글 전용의 표기 원칙을 국가가 관철하려고 하는 것은 언어 인권을 침해한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또 ▲초·중등교육의 교과용 도서에서 한글 전용의 표기 원칙을 강제하는 것 ▲국어 교과에서 한자를 가르치지 않는 교육과정 역시 위헌이라고 했다.
◇정부의 반박: "한자는 우리 글자 아냐"
이에 대해 정부 측 의견서는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배우기 쉽고 쓰기 쉽고 조리 있는 글자이며, 우리나라 초고속 성장의 원동력이었다"며 "아무리 오랫동안 사용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한자를 아는 것이 우리말을 이해하고 바로 쓰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한자 자체가 우리 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의견서는 "많은 국민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중국말, 중국에서 일본을 거쳐 이상해진 한자로 된 말을 쓰면서 그 말들을 계속 쓰라고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학생들이 12년 동안 교육을 받고도 모국어를 정확하게 쓸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가장 큰 원인은 한자어가 57%가 넘도록, 지금까지 순 우리말(고유어)이 풍부하게 발전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했다.
또 ▲한자·한문은 현대 정보화 사회에서 별로 적합하지 않으며 ▲처음 대하는 한자어는 이미 알고 있는 한자어들을 통해 알게 된 글자의 뜻과 문맥의 도움을 받아 뜻을 확인하면 된다고 했다.
◇재반박: "2000년 동안 써 온 고유 문자"
이에 대해 청구인 측은 다시 "한국 한자는 한글과 같이 우리의 전통문자이자 고유문자"라고 반박했다. 우리 민족은 민족의 사상과 정서를 담은 한자를 2000년 이상 사용해 왔는데 '이것은 고유한 것이 아니고 500여년 전에 창제한 훈민정음만 고유한 것'이라는 논법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로마자나 아랍문자에서 보듯, 문자는 한 민족뿐 아니라 여러 민족이 공통으로 사용한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우리말이 한자어와 한자를 필수 요소로 한다"는 점도 제기됐다. 한국어는 뜻을 나타내는 표의문자와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문자를 섞어 두 문자의 장점을 절묘하게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래 한국어 표기 방식의 주류는 한글·한자의 혼용이었고 ▲5000년 동양 문화의 지혜가 녹아 있는 한자는 인성을 함양하고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는 좋은 문명의 도구라고 했다. 청구인 측은 또 "한자를 쓰는 중국·일본이 결코 정보화에 뒤처지지 않았고, 문맥을 통해 어휘의 뜻을 파악할 수 있다면 학생들이 교과서 용어를 몰라 고통받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漢字를 영어처럼… 뜻 모르고 외우는 학생들
구멍 뚫린 어휘력
봉기·사화… 한자 알면 쉬운 단어, 音 알지만 의미 몰라 학습에 지장
국어사전에서 단어 뜻 찾더라도 한자 알아야 이해하기 더 수월해
"교수님, 질문이 있습니다. '봉기'가 도대체 뭡니까?"
서울 한 사립대 사학과의 A교수는 며칠 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학생들과 대화하던 중 이런 질문을 받았다. '봉기(蜂起)'란 '벌 봉(蜂)'에 '일어날 기(起)'자이니 '벌떼처럼 많은 사람이 들고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역사학과에 지원하면서 그런 것도 몰랐느냐'고 핀잔을 주려다 보니 주변의 학생들 모두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자어 모르면서 역사 공부하는 학생들
학생들이 잘 모르는 역사 용어는 이것 말고도 많았다. '선비가 화를 입은 일'이라는 뜻의 '사화(士禍)' '뜻이 같은 사람끼리 모인 단체'란 뜻의 '붕당(朋黨)' '서양 세력이 일으킨 난리'라는 뜻의 '양요(洋擾)'…. 심지어 '싸워서 크게 이겼다'는 뜻인 '대첩(大捷)'이란 말을 '크게 싸웠다'는 대전(大戰) 정도의 의미로 잘못 알고 있는 학생도 많았다.
해당 어휘의 한자를 알았더라면 쉽게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교과서에 한글로만 쓰여 있다 보니 뜻도 모른 채 외우기에만 바빴던 것이다. A교수는 "그렇다고 저걸 '무오년에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 '병인년에 서양 세력이 침공해 와서 전투를 벌인 사건' 같은 식으로 다 풀어쓸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뜻풀이 못해 영어 단어 외우듯 무작정 외워
역사 과목뿐이 아니다. 수학의 경우 '등호(等號)'나 '대분수(帶分數)'란 용어를 처음 배울 때 한자어의 뜻까지 함께 배워 '서로 같음을 나타내는 부호' '정수가 분수를 지니고[帶]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면 이해가 훨씬 쉬웠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과학 과목에서도 한자를 알면 '양서류(兩棲類)'를 '땅과 물 양쪽에서 모두 서식할 수 있는 무리' '설치류(齧齒類)'를 '이빨[齒]로 물건을 갉는[齧] 무리'로 쉽게 이해하고, '수지상(樹枝狀) 세포'의 '수지상'이 '나뭇가지 모양'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자를 모를 때는 용어를 일일이 암기해야 한다.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자료에 따르면, 고교 교과서의 색인(찾아보기)에 나오는 용어 중 한자어의 비율은 한국사 96.5%, 사회 92.7%, 생물 87.2%, 물리 76.2%, 화학 64.5%였다. 중학교 교과서에선 과학 76.2%, 수학 81.1%, 도덕 91.4%였다.
김언종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는 "한자는 '한문' 시간에만 가르치게 돼 있는 현행 교육과정에서는, 전 과목 교과서 어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자어를 그저 영어 단어 외우듯 소리글자로 그 뜻을 익힐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진태하 인제대 석좌교수는 "대부분 한자로 된 지식 용어를 한글만으로 표음(表音)해 학습하면 그저 들은 풍월로 어렴풋이 알게 된다"며 "결국 말을 해도 자신감이 없고, 글을 써도 정확성을 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국어사전 찾으면 오히려 더 어렵다?
'잘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보면 되지 않느냐'는 일반적인 인식에 대해서도 "지금 나온 사전을 찾아보면 더 헤맬 때가 많다"는 반론이 나온다. 전광진 성균관대 중문과 교수는 "아무리 새로운 단어가 나올 때마다 국어사전을 찾는 학생들이라 해도, 막상 사전을 읽어 보면 더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지리 시간에 나오는 '해일'이란 말의 뜻이 궁금해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해저의 지각 변동이나 해상의 기상 변화에 의하여 갑자기 바닷물이 크게 일어서 육지로 넘쳐 들어오는 것. 또는 그런 현상'이라 돼 있다. '해일(海溢)'의 뜻이 '바닷물이 넘친다'는 것이란 기본적인 의미 정보가 없으면 이해가 더 어렵게 되는 셈이다.
수학 교과서에 실린 '타원'이란 용어는 사전에 '평면 위의 두 정점(定點)에서의 거리의 합이 언제나 일정한 점의 자취. 정점과 정직선으로부터의 거리의 비가 일정한 점의 자취로, 이 두 정점을 타원의 초점이라고 하고, 정직선을 준선이라고 한다'고 난수표처럼 돼 있다. 하지만 '타원(楕圓)'이 '길쭉한[楕] 동그라미[圓]'라는 걸 알면 훨씬 쉽게 된다. 결국 한자어의 뜻을 제대로 배우지 않기 때문에 너무 먼 길로 돌아가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어렵기만 한 시사용어
한글만 표기하면서 뜻도 실종… 틀리게 해독하는 사람들 많아
대구의 자영업자 정모(51)씨는 최근 서울의 한 사립대에 입학한 딸을 기숙사에 들여보내려고 선발 절차를 알아보다가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을 우선 선발한다'는 문구를 봤다. '기초생활수급자'란 대략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저소득계층'이란 뜻이겠거니 했지만, '차상위계층'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최저생계비의 100~ 120% 소득 가계로, 4인 가족 소득 기준으로 월 164만~196만원인 가정'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왜 '차상위계층'인 거지?" 대학교수인 동창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본 끝에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바로 위의 계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최하위 계층의) 다음(次·차) 위(上·상) 자리(位·위) 계층'이라는 한자 뜻을 모른 채 한글로만 써 놓은 용어를 봐서는 전혀 모를 노릇이었다.
한자를 배우지 않아 한자로 된 우리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학생들뿐이 아니다. 40대까지도 '한글 전용(專用) 교육'을 받은 세대가 되다 보니,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시사 용어의 뜻을 몰라 '독해(讀解) 불능(不能)' 상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한자 뜻을 알고 나면 고개를 끄덕거릴 용어다.
◇한자 없애 더 어려운 경제 용어
최근 신문 경제면에 자주 등장했던 금융상품 중 '재형저축'이 있다. 17년 만에 부활한 이 상품은 연봉 5000만원 이하 근로자나 연소득 3500만원 이하 자영업자만 가입 가능한 비과세 통장으로, '서민들의 목돈 마련 수단'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역시 한글로 쓴 용어만 봐서는 왜 '재형저축'이라 하는지 알기 힘들다. 재형저축(財形貯蓄)이란 '근로자 재산 형성 저축'의 준말이다. 이 상품이 유행했던 1976~1995년에는 한자로 쓰는 일이 많아 혼란이 별로 없었지만 시대를 건너뛰어 한글 표기만 남으니 '뜻'이 실종돼 버린 경우다.
포털 사이트 지식 문답란에 한 네티즌이 "'수의계약'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 알고 싶습니다"란 질문을 남겼다. '베스트 답변'은 이랬다. "간단한 예로 설명드릴게요. 교육청에서 학교 급식 재료를 납품하는 기업을 선택하는데 임의로 한 기업을 선정해 계약을 합니다. 단점은 부정부패가 있을 수 있다는 거고 장점은 입찰 경쟁 과열로 질이 낮아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처음부터 수의계약(隨意契約)이 '자기 뜻(意·의)에 따라(隨·수) 상대편을 골라서 맺는 계약'이란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긴 설명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잘못 알고 있는'시정연설'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하면 '시정연설'이란 단어가 포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른다. 역시 한글로만 적혀 있으니 시정연설(施政演說)이 '정치(政·정)를 시행(施·시)하는 것과 관련한 연설'이라는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시정(始政·정치를 시작함)연설'이나 '시정(是正·잘못된 것을 고침)연설', '시정(市井·인가가 모인 곳)연설' 정도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최근 뉴스에 곧잘 등장하는 '대사공학'이란 단어에 대해 한 과학 용어 사전은 '물질대사 과정에 포함된 경로에 조작을 가하여 변화시키거나 혹은 새로운 물질대사 경로를 만드는 기술'이라 풀이했다. '대사'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하나 마나 한 설명이다. 대신할 대(代), 물러날 사(謝)를 써서 '새것이 들어오는 대신(代)에 헌것이 물러남(謝)'이라는 뜻을 알면 '물질을 섭취하는 대신 노폐물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말한다는 것도 알기 쉽게 된다.
한자 원음주의 표기 혼란 - 인명·지명 原地音 '외래어표기법'
젊은 층은 한자 몰라 혼란 더 키워 "중국어 고유명사 한자 병기해야"
교수가 수업 중에 "다음 주에는 북경(北京) 출장이 있어서 보강을 하겠다"는 말을 했다.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선생님, 북경만 가시고 베이징은 안 가세요?" 서울의 한 사립대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한자를 잘 모르니 '북경'과 '베이징'이 같은 장소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1990년대 이후 한자로 쓰인 중국의 인명·지명을 원래 음대로 적는 원음주의(原音主義)가 대세를 이루면서 '毛澤東'은 '모택동'이 아닌 '마오쩌둥'으로, '上海'는 '상해' 대신 '상하이'로 적는 표기가 늘어났다. 하지만 젊은 층의 '한자 문맹' 현상이 확대되면서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쓰촨성'에서 온 '사천 요리'?
이 표기 원칙은 1986년 1월 문교부 '외래어표기법' 제4장 2절 '동양의 인명 지명 표기'에서 비롯된다. 외래어는 원지음(原地音)을 따르는 것이 원칙인데, 오랫동안 우리 식으로 발음해 온 중국 고유명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인명은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인물은 우리 발음으로, 그 이후는 중국식 발음으로 읽게 했다. 하지만 이를 따르더라도 생몰연대가 1911년 전후(前後)에 걸친 '孫文'이나 '袁世凱'는 '손문' '쑨원'과 '원세개' '위안스카이'가 혼용될 수밖에 없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지명이다. 역사 지명으로서 현재 쓰이지 않는 것은 우리 발음으로, 현재 쓰이는 것은 원음으로 표기한다는 것이다. '長安에서 洛陽으로 천도했다'는 문장은 '장안에서 뤄양으로 천도했다'고 써야 하는 셈이다. 문제는 또 있다. 외래어표기법은 인명·지명의 원음 표기만 규정했기 때문에 '人民日報' '嫦娥一號'는 '인민일보' '항아 1호'로 써야 맞지만 '런민일보' '런민르바오'나 '창어 1호'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四川省'은 '쓰촨성'으로 적어야 하지만 이곳 요리는 '쓰촨 요리'라 하지 않고 '사천 요리'라고 한다. 표기법 자체가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데다, 표기법 원칙에도 어긋나는 표기가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자를 모르니 혼란 더 커져"
한자 고유명사 표기의 원음주의에 대한 비판도 계속 나오고 있다. 우선 현행 표기법대로 쓴 인명·지명을 발음하면 정작 중국인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다(송기중 전 서울대 교수). 게다가 특정 인명을 표기할 경우 ①국적 ②생몰연대 ③한족(漢族)인지 조선족(재중동포)인지 여부를 모두 조사한 뒤 ④해당 한자의 중국어 발음과 ⑤그 발음의 한글 표기법을 찾는 복잡한 과정을 일일이 거쳐야 쓸 수 있다는 얘기다.
"의미 전달을 포기한 표기"라는 비판도 있다. '北京' '三峽'을 '북경' '삼협'이라 읽으면, 한자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의 경우 '북쪽에 있는 수도' '세 곳 골짜기'라는 의미를 파악하기 쉽다. 하지만 '베이징' '싼샤'라고 읽으면 그저 발음기호일 뿐이라는 것이다(진태하 인제대 석좌교수). '표기의 주체성' 문제도 제기된다. 국민이 모르는 주변국 고유명사의 '현지 원음'을 찾아서 읽어주는 나라는 우리뿐이라는 것이다.
반론도 있다. 우리는 우수한 한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래어를 원음에 가깝게 표기할 수 있고, 이미 새로운 표기 원칙에 대중이 적응해 가고 있다는 얘기다(고석주 연세대 국문과 교수). '習近平' '溫家寶'는 국제적 표기가 '시진핑' '원자바오'인데 '습근평' '온가보'라고 써서야 되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임동석 건국대 중문과 교수는 "젊은 세대가 한자를 모르기 때문에 표기상의 혼란이 더 커지고 있다"며 "중국어 고유명사 표기에 반드시 한자를 병기하고, 일반인이 납득할 수 있도록 새롭게 합의된 표기 규정을 만들어 여기에 따라야 할 것"이라고 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유석재기자의 연재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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