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 들러 벽에 걸려 있는 사진들을 본다. 중간쯤에 있는 작품 앞에 나는 가만히 섰다. 흑백 사진이다. 산과 바다, 이제 막 뜨는 해가 보이고, 반짝이는 물결과 구름 속에서 사방으로 퍼지는 눈부신 햇살도 있다. 일출의 찬란한 모습이다. 그런데 깨알 같이 작은 글씨로 쓰여진 제목에는 ‘일몰’이라 적혀 있다. 아, 일몰이었구나. 일몰과 일출이 전혀 반대 현상이건만, 이처럼 똑 같을 수가 있다니. 나는 이 두 가지 상반된 자연 현상이 보는 위치에 따라 구분할 수 없도록 닮아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다.
하기야 자연뿐이랴? 어쩌면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니체는 그의 유명한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초인의 입을 빌려 ‘어린 아이가 되라’고 외쳤다. 인간 본래로의 회귀를 말했다고 보아야 하리. 정말로 노인과 어린애는 많이 닮아 있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만일 노인이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살다가 죽는다면 몹시 행복할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가 자라서 푸르른 청년이 되고, 풍성한 장년을 지나 쇄락한 노인이 되면, 또다시 어린애가 되는 인생 여정이 놀이터의 순환열차를 보는 것 같다.
내가 청년기에 즐긴 영화들은 시작과 끝 장면이 똑 같든지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영화는 처음 시작되어 숱한 우여곡절을 겪지만 귀착점은, 사랑이든, 사건이든 세상사는 늘 순리로 풀려가야 한다는 의미가 잘 나타나 있었다. 살고 죽고, 있고 없고가 궁극에 가면 모두 그 경계가 희미해 지고 말 것이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의 단계마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 한 평생이 참으로 많은 사연을 안고 돌고 돌아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묘비 석에는 ‘누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노라’고 같은 양식으로 쓰지 않는가?
출발이 있었으면 도착도 있을 것이지만, 도착은 또 다른 출발로 보아야 하리라. 하여 영원히 출발만 하는 일도, 끝없이 도착만을 반복하는 일은 애당초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니, 인과응보나 윤회, 업보라는 말은 모두가 순환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순환이란 살아있음을 말하는 것이요, 언젠가는 돌아옴을 뜻하는 것이리라. 돌고 돌지 않는 것은 영영 죽은 것일 터이니. 처음과 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꼬리를 물고 원형을 이루고 있을 것으로 본다. 이런 순환의 이치가,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사방으로 힘을 발휘하여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연어가 수년 동안을 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노닐다가도, 산란을 하고 죽음을 맞기 위해 멀고도 험한 길을 따라 제가 태어난 하천까지 찾아오는 이치나, ‘여우가 죽어도 머리를 제 집 있는 쪽으로 둔다’는 옛말이 다 마찬가지의 뜻을 지니리라. 내 비록 고향에서 보낸 날보다는 객지에서 산 세월이 더 길지만, ‘고향으로 돌아 가야지’ 하는 생각을 단 한 번도 놓았던 적이 없다. 고향으로 가서 그곳의 흙 냄새를 맡고 하늘과 바다를 보아야 편히 잠들 것 같다는 느낌은 갈수록 커져간다.
이렇게 생명 있는 것은 모두가 탄생에로의 회귀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성싶다. 회귀란 곧 순환이 아닌가? 자기가 살면서 행한 모든 일들도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라, 어느 구석엔가 영향을 미쳐 종래에는 제게로 고스란히 돌아오게 마련인 것이 인생사일 것이다. 만일 당대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후세라도 언젠가는 만나러 올 것이라 믿고 싶다. 비록 살면서 어쩌지 못해 모질게 살았다 하더라도, 나이 들어서는 무거운 허물 다 벗고 처음 태어난 순진무구한 모습으로 길 떠나려 애써야 하리.
요즈음 나는 노을을 바라보며 찬란한 아침을 생각하곤 한다. 나는 지금 황혼 녘에 서있지만 지구 반대편 사람은 아침을 보고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는 아침이 또 다른 누구에게는 황혼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절대개념의 일출이나 일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처음과 끝이 동일 선상에 있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연극이 끝나고 막이 내려진 무대를 바라보며 다시 막이 오르면 더 좋은 공연이 펼쳐지기를 기대하게 되듯이, 한 세대가 지나고 나면 다음에 오는 세대가 더욱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 본심이다. 어쩌면 그것이 먼 훗날 어느 윤회의 길목에서 제가 살아내어야 할 다음 세상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 지금 이승을 사는 사람들은 점차 나아지는 삶의 환경을 만들어 물려주는 일에 있는 힘을 다해야 하리라.
도대체 우리네 삶이 시작은 어디며 끝은 어딜까? 삶 속에 이미 죽음이 포함되어 있고, 죽음의 속성에 삶 또한 내포되어 있다면, 삶은 다만 윤회일 뿐이리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윤회의 사슬을 하루 빨리 끊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몸과 마음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인적이 드문 산중에서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수련에 임하는 이들도 드물지 않다 하니, 세상사 풀기가 어렵고 어렵도다. 정신 없이 북적대는 시장 통에서라도 바른 길을 따라, 열심으로 이승을 살고 또 살아내면 어느 땐가는 윤회도 벗을 수 있을 것이련만.
(김상립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