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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다워(31) - 밀라노에서 만난 레오나르도 다빈치
얼마 전 조선일보에 실린 ‘요리사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기획기사를 보며 2008년 여름 영국에 40여 일간 머물면서 아들과 함께 이탈리아의 베니스와 베로나, 밀라노를 3일간 돌아보며 살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적은 여행기록과 함께 인류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로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면모를 맛보시기 바란다.
1. 베니스에서 베로나를 거쳐 밀라노로
1995년에 들른 적이 있는 베니스를 다시 찾아 베니스영화제가 열리는 리도 섬을 오가는 뱃길에서 본 물의 도시의 여러 모습들이 여동생의 딸들이 유럽여행 중 가장 멋있게 느꼈다는 말처럼 인상적이다. 새만금이 개발되면 물의 도시의 면모를 갖출는지. 베니스에서 밀라노 가는 중간 지점의 베로나에 들러 도시의 중앙에 자리 잡은 로마시대의 원형경기장 (1세기에 건설), 옛 귀족이 살았다는 성터, 섹스피어의 명작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가 되는 줄리엣의 집 등을 돌아본 것도 좋았다.
밀라노에서는 먼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역작 ‘최후의 만찬(Cenacolo Vinciano)’이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로 향하였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려 하니 이미 2주간의 예약이 끝나 당일입장이 불가하다고 하여 입구에 걸려있는 ‘최후의 만찬’ 장면을 축소한 모사본에 표시된 12사도의 이름과 모습을 연결하여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교회 본당 내부를 둘러본 후 (최후의 만찬은 교회 본당 옆 식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에 그려진 벽화이다) 발길을 돌렸다.
이어서 지하철을 이용하여 두오모 (Duomo) 성당으로 향하였다. 지하철에서 올라오니 바로 옆에 두오모 성당의 위용이 눈에 들어온다. 길고 큰 성당의 주변을 한 바퀴 돈 후 전체가 카메라에 잡히는 지점에서 아들과 기념촬영을 한 후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무료입장의 성당 내부는 네다섯 아름이나 되는 큰 대리석 기둥이 52개나 서 있는 엄청난 크기인데 1387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400여 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명성과 역사에 걸맞게 장중하고 숙연한 분위기가 감돈다.
두오모 인근의 오페라 전용극장으로 유명한 스칼라극장 앞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동상에서 사진을 찍으며 피렌체 태생의 그가 밀라노에서도 다년간 활동하였음을 짐작하였는데 그의 비행기 모형 등이 전시된 과학기술박물관에 이르니 직원이 내부수리 관계로 올 여름 동안 박물관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아쉽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 1층에 전시된 기계모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후 브레라(Brera) 미술관으로 향했다. 역시 한쪽에서는 큰 수리 공사를 하고 있는 미술관 2층으로 올라가니 40여 개가 넘는 전시실에 성화를 비롯한 많은 작품들이 각 전시실을 채우고 있고 어떤 방에는 수십 점의 작품들이 겹겹이 쌓인 채 수리공사가 완료되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라파엘의 ‘성모 마리아의 결혼’, 베르니니의 ‘피에타 (Pieta)’ 등 팜플렛에서 특별히 소개하고 있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40여 개가 넘은 전시실을 두 번 돌면서 14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유화와 추상화 등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미술관을 마지막으로 밀라노 여행을 마감하고 베르가모(Vergamo)라는 소도시 인근의 오리오 알 세리오 공항에서 런던 스탠스테드 행 비행기에 올랐다.
2005년 여름에 발칸반도를 여행하며 몬테니그로의 아름다운 호수처럼 산들이 병풍같이 둘러싼 코트르라는 항구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아침에 산책하던 중 배들이 정박한 부두에서 여러 곳으로 출항하는 선박 가운데 베네치아(Venezia) 행이 있는 것을 보고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다.
2008년 1월에 중동 요르단의 명승지 페트라를 돌아보던 중, 우리 일행 뒤로 가톨릭 사제들이 따르는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일요일인데 12시쯤 미사를 드리려고 준비하는 그들과 다시 만났다. 양해를 구하고 미사를 지켜보며 어디서 왔는지 물으니 밀라노에서 왔다고 한다. 밀라노는 313년에 밀라노칙령이 반포된 곳으로 가톨릭의 전통이 깊은 곳이어서 막연히 동경하던 도시인데.
이번에 아들이 혼자 이탈리아에 여행하려고 미리 예매하였다가 나의 영국행이 결정되어 함께 오게 된 밀라노의 두오모와 베니치아의 대운하를 보면서 꿈을 지니면 이렇게 이루어지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아름다운 꿈을 꾸세요.
그리고 그 꿈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2. 요리사이기도 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를 두고 그저 '시대를 앞서간 예술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과연 한 사람이 그 많은 일을 했을까 의심될 만큼 그의 관심은 깊고도 넓었다. 그는 배경과 인물을 동화시키는 '스푸마토 기법'의 창안자이며 탱크와 비행기의 개념 제공자이자 동시에 요리사였다.
인간의 잠재력이라는 거대한 대륙을 발견한 그는 진정 '르네상스 맨'이었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많지 않고, 더욱이 그의 발명 노트의 글씨는 거울에 비친 글자처럼 거꾸로 쓰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와 발명을 누군가 훔쳐갈까 노심초사했으며, 그의 시대로서는 파격적으로 수염을 기르고 빨간 외투를 입고 다닌 일종의 패션 리더였다.
그의 저작 중 가장 최근에 발견된 책이 하나 있다. 1981년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발견된 '엘 코덱스 로마노프 디 레오나르도 다 빈치'(El Codex Romanoff De Leonardo Da Vinci, 1490년경 추정). 그의 요리비법과 요리 관련 발명품이 수록돼 있는 이 책은 1982년 진품으로 인정받았지만 진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다 빈치의 여러 저작물을 해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다 빈치와의 가상 인터뷰를 꾸몄다.
―젊어서 아주 재미있는 식당에서 일을 시작하셨더군요.
"아 '세 마리 달팽이 식당' 얘기로구먼. 조각·그림·공학 등을 배운 피렌체의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공방의 수업이 끝난 후의 일이야. 피렌체 베키오 다리 근처에 있는 그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을 시작했네. 그런데 1473년 봄, 주방 식구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죽고, 내가 주방을 맡았지. 난 혁신적인 메뉴를 시도했지만, 내 요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어."
―그러다 공방 동창인 보티첼리와 또다시 술집을 차렸던 걸요.
"1478년 '산드로와 레오나르도의 세마리 개구리 깃발'이란 식당을 차렸네. 실내 장식도 멋졌고, 안초비 한 마리와 당근 네 쪽으로 꾸민 근사한 안주도 내놨지. 하지만 그 역시 천박한 대중 입맛 때문에 문을 닫고 말았네."
―그 후에도 선생은 수도원의 그림을 그리게 되지만, 선생이 와인만 축냈다는 비난까지 들었다면서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으로부터 만찬과 요리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려달란 주문을 받았네. 나는 1년여 고심 끝에 잘게 썬 당근을 곁들인 삶은 계란, 풋참외꽃으로 치장한 검둥오리 넓적다리, 작은 빵, 무국, 장어요리 같은 음식을 그려 넣었지. 인물을 그리는 것도 큰일이었어. 난 그리스도의 얼굴과 닮은 이를 지구상에서 발견하긴 힘들 것 같아 괴로워했고, 유다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 밀라노 빈민가를 헤매고 다녔네. 2년9개월이나 걸려 1497년 완성했지."
―그래서 그 작품 이름이 뭔데요?
"음, '최후의 만찬'이라고…."
―케네디 국제공항에, LA 포레스트론 공동묘지에도 있던, 그리고 루이 브뉘엘의 영화('비리디아나')에서도 베끼거나, 패러디한 그 '최후의 만찬'이요? 작품 얘기를 하면 한도 없을 테니, 음식 얘길 하지요. 스파게티를 발명했습니까.
"그대가 스파게티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내 살던 밀라노에는 탐험가 마르코 폴로가 이미 200여 년 전 중국에서 가져온 국수가 알려져 있었어. 당시 국수는 먹을 게 아니라 식탁 장식품이었지. 나폴리 지방에는 빈대떡처럼 생긴 파스타가 있었고. 나는 두 개를 합쳐봤네. 기계를 만들고 반죽을 길게 잡아 늘여 삶아 봤지. 그게 바로 '스파고 만지아빌레', 즉 '먹을 수 있는 끈'(edible string)이었다네. 하지만 요즘 것과는 달랐어. 지금 먹는 스파게티는 나 죽은 후 수십 년 후에야 공장에서 생산되기 시작했네."
―그런데 헝클어진 끈을 나이프로 먹기란 굉장히 곤란했다면서요.
"내가 발명가 아닌가. 그래서 이가 세 개 달린 삼지창(포크의 원형)을 개발했지. 당시 이가 두 개 달린 포크는 주방에서 도구로만 사용됐었지. 하지만 내 발명품의 운명이 그렇듯, 외면 받고 말았소."
―선생의 발명품으로는 냅킨도 있지 않습니까?
"귀족들의 연회가 끝난 후 연회장은 난장판이었어. 난 조그만 천 조각을 식탁에 놓으면 어떨까 생각했소. 접는 방법을 그림으로도 남겼지. 벌(蜂)이 움직이는 회전식 냅킨 건조대도 만들고. 그런데 어땠는 줄 아시오? 엉덩이에 깔고 앉는 인간, 코 푸는 인간, 별별 인간들이 다 있더이다."
―선생이 최초의 '웰빙 음식' 요리사이자 채식주의자였다고요?
"젊어서는 나도 다양한 고기와 생선으로 요리를 했지만 나이 들면서는 채식이 좋아집디다. '움직이지 않는 식물만을 먹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생명에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생명을 얻을 가치가 없다'는 글도 남겼지."
―요리와 관련한 발명품도 많습니다.
"내 시대, 피렌체에서는 사람이 망치를 들고 마늘을 깨부쉈지. 나는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마늘 빻는 도구를 만들었어. 이 도구를 '레오나르도'라 부르는 사람도 있더군. 자동 고기구이 기계도 만들었지. 고기를 구워서 생기는 열이 바람개비를 돌리면 그 힘을 다시 아래로 연결해 고기를 꽂은 꼬치를 돌리는 식이지. 후추 가는 기계, 와인 따개도 내 아이디어야. 탱크·헬리콥터·낙하산·자동차·비행기…. 더 얘기해야 하나?"
―선생 작업은 늘 천재적이며, 동시에 언제나 비실용적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해 장작을 주방으로 자동 운반하는 기계는 정말 앞서 가는 기계였지요. 하지만 그걸 작동시키려면 바깥에서 일꾼 네 명과 말 8마리가 있어야 하지 않았나요. 주방 바닥을 닦는 자동 회전 솔도 역시 소 두 마리가 끌어야 했고, 솔의 지름만 1.5m였습니다."
"그래서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나를 두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모두 잠들어 있는 어둠 속에서 너무 빨리 깨어난 사나이'라고. 정말 나는 너무 빨리 태어났던 것 같아. 너무 빨리. 그대들은,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났으니 어서 뭐든 해보시오. 뜻이 있는 것만으론 부족하오. 반드시 하시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선생이 67세로 숨을 거두었을 때, 낡은 궤짝에서 오래된 그림 한 점이 나옵니다. '모나리자'였지요. 대체 '그녀'는 누구였나요, 의뢰받은 그림이었다는데 왜 돌려주질 않은 걸까요?
"마르셀 뒤상은 수염 난 모나리자를, 페르난도 보테로는 뚱뚱한 모나리자를 그렸지. 왜일까. 그건 걸작이기 때문이겠지. 걸작에 뭔 설명이 그리 필요한가. 그냥 즐기게나."(조선일보 2010. 1. 6)
이탈리아 여행 20여일 후 아들과 함께 파리의 루불박물관에서 유리관을 씌워 보호 중인 모나리자도 감상하였다. 일부 학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노년에 스스로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와 모나리자 두 그림의 얼굴 모습이 유사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를 확인하기 위해 프랑스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무덤을 발굴하여 유골의 얼굴모습을 복원해서 확인하자는 논란이 일고 있는데 부질없는 일이 아닐까?
첫댓글 기대에 차서 읽는 글이 있어 좋습니다. 여행,관광과 문화며 역사와 예술의 세계에 무임승차한 묘한 기분이 듭니다.
이웃집 드나들듯 동서양을 섭렵하시고 걸출한 문장으로 자세하고 또렷하게 알려 감도과 감화를 불러 일으키시니 김교수님의 아름다운 글에 감복할 뿐입니다. 계속 설렘으로 다음 글을 기다려 보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