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4일 수요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마태오 18,1-5.10.12-14)
Whoever becomes humble like this child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오늘 극심한 고통 중에 살아가시는 분들께>
보육원, 상담소, 쉼터, 그룹홈...갈 수 있는 거의 모든 시설을 두루 섭렵한 한 아이, 그래서 더 이상 아무도 데려가기를 원치 않는 아이, 더 이상 보낼 곳이 없는 한 아이를 바라보면서 참으로 난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곳 저 곳 다 다녔기에 각 시설의 특징이나 장단점, 취약점 등을 귀신같이 꿰고 있었습니다. 우선 더 편안한 곳, 우선 지내기 쉬운 곳, 우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곳만 찾다보니 거의 모든 시설을 다 전전하게 되었습니다.
각 시설 담당자들과 통화하면서 그 아이 때문에 사람들 속이 어지간히도 상했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제 개인적으로 드는 생각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한 살레시오 회원이 ‘맛이 간’ 아이 때문에 고민하고, 속상하고, 배신감 느끼고, 열불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겠다, 돈보스코 성인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저는 틈만 나면 귀에 못이 박히게 형제들에 이런 강조합니다.
“착하고, 말 잘 듣고, 예의바르고, 고분고분한 아이, 우리가 제시한 노선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따르는 아이들은 사실 어디 가든 잘 견뎌낼 것입니다.
예쁘고, 귀엽고, 품에 ‘착’ 안기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깁시다. 우리의 선택은 보다 다루기 힘들고, 보다 ‘맛이 간’ 아이들, 결국 그 누구도 신경 써주지 않는 한 마리 길 잃은 어린 양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십니다. 착한 목자는 건강한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길 잃었던 한 마리 양을 찾는 기쁨을 삶의 최고 보람으로 여기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 착한 목자임을 역설하십니다.
여러분들께서 세 아들을 두셨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들 가운데 가장 마음에 걸리고, 밥숟가락 들 때 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아들이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는 일마다 잘 풀려서 제 갈 길을 보란 듯이 걷고 있는 장남을 생각하면 걱정보다는 뿌듯한 마음에 안심될 것입니다.
일찌감치 시작한 외국생활에 익숙해져서 아무런 스트레스도 없고, 광활하며 청정한 주변 환경 속에 살아가는 차남 역시 생각만 하면 마음이 흐뭇해질 것입니다.
반면에 나이가 찼는데도 아직 결혼도 못하고, 아직 자리도 잡지 못해 전국산천을 떠도는 막내,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은 없는 막내아들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짠해옵니다. 눈물이 앞섭니다. 오늘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나 걱정이 끊이지 않습니다.
부모 입장에서 모든 자녀들이 다 소중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더 마음이 가는 자녀, 더 기도하게 되는 자녀는 잘 안 풀리는 자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을 공평하게 사랑하십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골고루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보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우선적 선택’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사에 잘 풀리는 사람들도 사랑하시지만 우선 눈길이 가는 대상은 길 잃고 방황하는 한 마리 어린 양입니다.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입니다. 좌절과 혼동 속에 죽음과도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끝도 없는 병고로 시달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들, 너무도 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에게 세속에서의 복락은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대신에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으시는 애틋한 눈길, 각별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저 역시 제 몫을 잘 해내는 아이들, 이제 걱정 없는 아이들보다 덜 떨어진 아이들, 매일 형들에게 ‘치이고’ 부대끼는 꼬맹이들, 어릴 때 못 먹어서 삐쩍 말라빠진 ‘인간 덜 된’ 녀석들에게 훨씬 마음이 갑니다. 한번이라도 더 손길을 주고 싶습니다.
오늘 극심한 고통 중에 살아가는 분들, 지금 이 순간 다시 못 올 길을 걷고 있는 분들, 끔찍한 외로움에 눈물 흘리시는 분들, 십자가가 너무 커서 어쩔 줄 모르는 분들, 부디 힘내시기 바랍니다.
비록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하느님께서 한없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이루 말로 다 표현 못할 ‘짠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제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받지 못할 각별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정제천신부
오늘 복음은 용서와 화해의 대헌장이라 할 수 있다. 형제가 나한테 잘못을 저지르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사람의 답은 ‘용서’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다르다. 먼저 “단둘이 만나 타일러라.” 하신다. 죄지은 사람을 혼자 찾아가 그를 타이르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복수심과 원한, 두려움과 한없는 거리감을 극복하고 그와 인격적인 대면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용서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대면하고 보면 자존감이 커진다. 그를 대면하려고 한다면 먼저 나를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대면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다. 죄지은 사람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단둘이 만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 안에서 나와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일어날 때, 가서 형제적 충고를 해주면 된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하신다. 대동하는 사람들은 내 편이 아니라 증인이다. 예수님의 두 가르침을 지킨다면 인간관계가 나로 말미암아 더 복잡해지는 일이 없게 된다. 인간관계의 기본 원리는 신뢰다. 다른 사람이 관계를 깨트렸을 때 내가 신뢰를 지킴으로써 관계를 회복하는 지혜를 일러주신 것이다.
끝으로 예수님은 이 두 가지가 통하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라고 하신다. 교회는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땅에서 맺고 푸는 권한을 받았다. 여기서 예수님은 매는 것보다 푸는 것을 더 강조하셨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풀어주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를 가져오는 그리스도의 사절들이다.(2코린 5,20)
옵션(option)이 아니라 기본(Basics)
-박상대 신부-
마태오복음사가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업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산상설교"(5-7장), "파견설교"(10장), "비유설교"(13장), "공동체설교"(18장), "종말설교"(25장)로 엮었다는 것은 이미 누차 밝혀두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공동체설교의 첫 부분이다. 공동체설교는 교회 안에서 신자들간에 지켜져야 할 규범을 담고 있어 "교회규범"이라고도 한다. 이는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작은 교회로 통하는 가정교회의 규범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으로 시작되는 공동체설교는 당장 예수님 주위의 제자들에게 향하기보다는 마태오복음공동체를 포함한 초대교회를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마태오의 편집의도가 많이 첨가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의 공동체설교는 세 가지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는 것"(1-5절)이고, 둘째는 "보잘것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10절)이며, 셋째는 "율법상의 죄인들과 윤리상의 죄인들을 소외시키지 말라"(12-14절)는 것이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제외된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6-9절)는 규범도 있다.
첫 번째 규범의 도입부에 마태오는 제자들이 예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1절) 하고 물었다고 하지만, 마르코는 제자들이 도상(途上)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하고, 루가는 제자들이 서열을 놓고 말다툼을 벌였다고 한다.(마르 9,33-34; 루가 9,46)
잃은 양 한 마리를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는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온정과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예수 어록집에서 따온 것이다. 루가는 이 비유와 함께 다른 비유들을 한데 모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루가 15장)
마태오복음 공동체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 교회공동체 안에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성직자와 수도자들 사이에 권위주의와 서열다툼이 팽배하고, 형제적 사랑이 부족하여 후임자가 전임자를 마구 흠집 내는 일도 많다. "미사예물 단가가 비싸서 미사봉헌 한번 제대로 못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신자들은 소외 받고, 혼인법상 조당(阻 )에 처한 신자들을 마치 중죄인 취급하며, 조그만 잘못도 부풀려 입에 담아 회자(膾炙)하고, 나서서 단죄(斷罪)하기를 즐겨하는 신자들도 종종 있다.
뿐만 아니라 남을 죄짓게 만들고, 스스로도 죄지을 기회를 피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일도 있다. 오늘 예수께서 내리시는 공동체 내규(內規)는 옵션(option)이 아니다. 여러 개를 놓고 여건(與件)을 고려하여 마음가는 대로 고르는 선택사향이 아니라, 기본(basics)에 속한다는 것이다. 기본은 곧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