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라는 별명을 가진 사내가 있었습니다.
겉보기에 그 별명은 잘 어울리는 듯했습니다.
덩치도 크고, 얼굴도 크고, 하는 행동도
선이 굵고 다소 거칠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시절 학내민주화 투쟁을 주도할 때
동료 학생들의 믿음직한 지도자였으나
지도교수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기피인물이었고, 문제학생이었습니다.
대학생 시절 감옥 다녀온 사람들만 모인
충남민청에서 유일한 재학생 회원이었습니다.
85년 그 충남 민청에서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신례원에 충남방적 공장이 있었고
그 여공들을 위한 야간고등학교가 있었습니다.
대학졸업 후 음악교사로 그가 거기에 갔습니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꿈을 노래하게 하는 그를 여학생들은 오빠처럼 따랐고
그 아이들이 최소한의 사람대접을 해달라고
눈물로 회사 간부들에게 호소할 때
모두들 코웃음을 치며 무시하거나,
오히려 협박으로 윽박지를 때
그는 아이들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조용히 웃음 머금은 채.
그러나 그는 아이들 편에 서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제삼자개입’이라는 죄명으로 구속되고
당연히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음악을 사랑하던 알고 보면 지독하게 섬세한 사람
나팔을 부는 악사였고,
노래를 참 곱게 부르는 사람
그러나 그 뒤 사람들은 그를 해직교사, 투사로 기억하고
또다른 사람들은 꼴통, 과격분자로 불렀습니다.
그는 월급도 받지 않는 교육운동의 상근자로
충남교사협의회 창립에 참여하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충남지부 건설에 함께 했습니다.
예산에서 상근할 때 농민회나 풍물패나
지역의 양심적 인사들을 모아 충남에서 처음
군단위 사회단체협의회를 만들었는데
교사들보다 다른 단체 사람들이 더 그를 좋아할 만큼
선생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해직교사보다 6년 늦게
대천여중으로 복직했는데
그래서 참 행복해 보였는데
암이란 놈이 그를 덮쳐 4년전 오늘(19일)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고
제대로 잘해 준 일이 없다고 미안해하던
아내와 딸을 놔두고.
마지막 떠나보내던 2001년 7월 21일
엄청나게 많은 비가 쏟아져서
우리는 눈물을 비로 감출 수 있었습니다.
섬세하던 람보 남광균이 부르는
어니언스의 <편지>가 듣고 싶습니다.
당당하게 훌륭하게 살아가는 그의 아내
양명남 집사가 자랑스럽습니다.
훌륭하게 올곧게 자란 현주가 대견하고 고맙습니다.
첫댓글 세상엔 참 슬픈일이 많아요 그분을 통한 주님의 계획하심은 무엇이었을까요?그분을 훌륭히기억하시는 장로님같은분이있어 그분이나 그분가족들이 위로받으실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