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23-26 주의 죽으심 2005. 9. 11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1)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지난주에 성찬의 전체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 중에 새 언약에 대하여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새 언약이 있다는 것은 옛 언약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새 언약으로 하시지 않고 왜 옛 언약을 주신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죄를 모르는 자는 은혜도 모르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전체를 통하여 인간이 어느 정도로 구제불능인지를 철저하게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직 자기 아들의 피로만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방금 자기 아들의 피로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시는 것이 새 언약입니다. 이 새 언약을 오늘 본문에서 다른 말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단어가 무슨 단어입니까? ‘주의 죽으심’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으로 구원받은 자는 주의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예수님 오실 때까지 기억하고 증거 해야 할 것은 주의 죽으심인 것입니다.
교회란 주의 죽으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의 죽으심을 벗어나면 그것은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28절에서는 교회를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피를 흘리심으로 교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만드실 뿐 아니라 유지하는 것도 친히 머리가 되셔서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땀과 피가 교회를 만들거나 유지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옛 언약인 율법 하에서도 인간의 땀과 노력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7:6절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을 때는 다듬지 않는 돌로 쌓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주어진 말씀인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에발산에 단을 쌓을 때에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들의 노력이나 애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다듬지 않는 돌로 신앙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에발산에 단을 쌓을 때에 다듬지 아니한 돌로 쌓은 것입니다(수8:31).
이뿐 아니라 인간의 땀을 거부합니다. 성경에서 땀이란 단어가 세 번 나오는데 첫 번째가 아담이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서 먹고 살기 위하여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땀 흘림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두 번째 땀이란 단어는 제사장이 땀 흘리지 못하게 하는 말씀에서 나옵니다.
에스겔 44:16-18절입니다. “16 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내게 수종들어 나의 맡긴 직분을 지키되 17 그들이 안 뜰 문에 들어올 때에나 안 뜰 문과 전 안에서 수종들 때에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 옷을 입을 것이니 18 가는베 관을 머리에 쓰며 가는베 바지를 입고 땀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를 동이지 말 것이며” 제사장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양털로 된 속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 옷을 입게 한 이유는 땀을 흘리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땀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땀만이 아니라 사람의 분비물을 다 부정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레위기 15장에 보시면, 남자나 여자의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은 병으로 나오는 것이든 정상적으로 나오는 것이든 그것이 고름이든 피 이든 간에 다 부정하게 여겨져서 정상적인 것은 몸을 씻어야하고 병적인 것은 치료가 되고 속죄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땀과 피는 누구의 땀과 피가 되는지는 자명 하게 드러납니다. 누가복음 22:42-44절입니다.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 감람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을 무엇을 하였습니까?
누워 잤습니다. 땀을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조차 바치겠다고 한 제자들이 누워 잤습니다. 깨워놓아도 또 잤습니다. 나중에는 다 도망 가버린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구원이란 인간의 땀과 노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결단과 각오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땀을 피 같이 쏟으시며 기도하신 후에 잡히시고 살을 찢고 피를 흘리며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유월절 만찬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19-20절입니다.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떡을 자신의 몸이라 하시고 잔을 자신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새 언약이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새 언약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완전하게 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백성의 특징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무엇을 증거 하는 사람입니까? 주의 죽으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누가 더 많이 주를 위하여 땀을 흘리는가를 경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땀만이 아니라 피까지 요구합니다. 어떻게 피까지 요구하는 것입니까? 사람의 땀과 피 같이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돈이란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람들이 피같이 여깁니다. 그런 돈을 교회에 바치면 축복받는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땀과 피는 소용없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 교회가 과연 주님 오실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을 증거 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제 금요일 성경공부 마치고 김 집사님 장유로 모셔드리면서 바로 앞의 교회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한 주에 수십 명씩 등록을 하는데 자기 교회는 부산에서 지원하기에 헌금의 부담도 없는데도 오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고 하기에 한 주에 수십 명씩 등록하는 교회가 어떤지 한번 가 보았습니다. 집사람과 함께 그곳에 가서 화장실과 필그림이라는 휴게실에 가 보았습니다. 화장실이 얼마나 좋은지 놀랐습니다. 그리고 필그림이라는 곳은 카페처럼 꾸며져 있는데 커피 한 잔에 천원에 팔고 있었습니다. 커피를 한잔 하면서 교회 안내장을 보니 문화교실이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다양하게 되어 있는지 헤아리는데도 한참이나 걸릴 정도였습니다. 다이어트 건강체조로부터 독서 논술지도, 퀼트, 토피어리, 악기교실, 어학교실, 모두 무료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동네 근처로 가면 어느 교회로 등록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주변의 작은 교회들이 무엇을 꿈꾸고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교회도 저렇게 될까를 꿈꾸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려면 사람이 많이 모여야 되고 돈도 많이 들어와야 하는데 사람이 많이 모이고 돈이 모이려면 무언가 매력적인 것을 제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그 십자가만 증거 하여 얼마나 사람이 모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교회는 그런 건물을 원하거나 돈을 많이 내라고 하지 않으니 괜찮은 교회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그런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는 우리는 그런 세상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니 우리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역시나 예수님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주님 오실 때 까지 그것만을 붙들고, 그것만을 증거하며 사시겠습니까? 이 교회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말입니다.
왜 주의 죽으심만을 주님 오실 때까지 증거 해야 하는지를 히브리서 10:1-18절을 보겠습니다. “봉독” 율법은 그 어떤 것도 온전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황소나 염소의 피로 되지 않습니다. 제사장으로도 안 됩니다. 왕도 안 됩니다. 오직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대로 한 몸이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은 것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온전케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옛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새 언약이기에 그렇습니다.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에 대한 말씀입니다. 16-17절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자기 백성의 마음에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저희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실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새 언약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어떻게 유혹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과 그의 백성사이를 이간질하고 갈라놓으려고 하는 것이 마귀의 최종목표인데 무엇으로 유혹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도 믿어야 되지만 그것만은 안 되고 너도 무언가 행함을 보태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습니까? 세상이 악한 자에 속하였기에 세상의 말을 듣게 됩니다.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예수님의 피 흘려주심만으로 구원된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우리의 땀과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땀과 피만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라서 우리의 땀과 피에는 죄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사람이 되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으심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며 바로 아들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 나라에 인간의 땀과 피가 찬양되지 않습니다. 그 아들만이 영광을 받게 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의 죽으심을 모독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받지 않고 모독하는 것이 죄가 됩니다. 히브리서 10:26-31절입니다. “봉독” 옛 언약인 모세의 율법 하에서도 범죄 하면 그 대적한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범죄 하면 두 세 증인을 인하여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고 합니다. 모세의 법을 어겨도 심판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아들, 그의 죽으심으로 이루어내신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증거 하는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는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자기의 땀과 피를 부인하고, 그 아들의 피, 그의 죽으심으로만 우리가 온전케 됨이 믿어지십니까? 그것이 바로 은혜의 성령이 임한 증거입니다. 세상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죽으심만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증거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의 증인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기를 바랍니다.
http://www.evergreen17.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