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의 조치
삼상15:32-35
(삼상 15:32) 『사무엘이 가로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가로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삼상 15:33)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삼상 15:34)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본집으로 올라가니라』
(삼상 15: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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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어 쪼갠다’는 것은
보기 싫은 물건을 없애고자 할때
가해지는 조치입니다.
즉 곱게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분개와 분노가
과도할때 표현하는 말입니다.
결코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할 때
쓰는 말이 아닙니다.
아각도 비록 적이지만
사무엘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인간을 같은 인간인 사무엘이
머리를 찍어 쪼갭니다.
산 채로 말입니다.
선하고 진실된 사무엘의 마음 속에
그런 잔인함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잔인해 보입니다.
죽이면서 그냥 죽이면 되지
저주까지 합니다.
즉 “네가 여럿 여인네들을 죽여서
자식없이 저주스럽게 생을 마감시켰으니
이번에는 당해보라는 겄입니다.
네 어미가 애초에 자식을 낳지도 못한
저주스러운 여인으로 변할 것이다”
는 겁니다.
일말의 자비심이란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꼭 이렇게 잔인하게 처형해야만이
사무엘의 분이 풀립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이런 잔인한 처단이
얼마나 많이 치러져야
세상을 피바다로 만들어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이에 비교한다면 사울은
양반입니다.
별로 잘못한 일도 없으면서도
사무엘의 권위에 순종해서
자기에게 심한 말을 써가며
결별을 선언한 그 사무엘을
끝까지 따라가면서
결국 여호와께 경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31절)
아무리 독한 사람이라도
이 정도 성의를 보여주면
마음이 풀어질 만도 한데
본문 끝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누가 악한 쪽인지
누가 선한 쪽인지
혼동스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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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보면
하나님과 사무엘만
악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결과때문에
더욱더 하나님은
사울왕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점에서 사울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존재로
아말렉 왕 아각을 보고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는 분이라고 말하면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천국으로 가게하실 분이라고 하면 모두들 좋아합니다.
좋은게 좋은데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오느냐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하나님의 분노를 격발시키기 됩니다.
창세기 6:5-7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이 구절을 보면서 평하기를,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처럼
실수를 무지무지하게 많이 하시는 분이기에
결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알고
믿지 말라고 합니다.
즉 참된 신은 장래에 대해서도 모르고
사람 볼 줄도 모르고
그냥 일을 해가면서
그때그때마다 일을 수정해나가는 식으로
인간과 협력하여 진리를 찾아나서는
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신이 전지전능하다고 여기고
묻고들 하지만
실은 신도 답변할 내용도 없고
도리어 인간에게 물어가면서
더불어 진리를 찾아나서는
허약하고 무지한 상태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신에게 협조하지 아니하면
신은 아무 일도 못하고 손놓고 있으니
우리가 신에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 할 일만 잘해서
신의 신됨을 우리가 추대하는 형식으로 만들어드리자라고 주장합니다.
본문 구절을 보면
그 사람도 똑같은 주장을 할것이 뻔합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점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애초부터
“쪼갤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왕되게 하심을
후회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 구원하는 것을
쉽게 생각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하시는 비난과 오해와 슬픔을
같이 겪는 과정을 밟을 사람을
따로 마련해주셨다는 말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5:7-10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때
어떤 심정으로 구원하시는지가 나옵니다.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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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하나님은
냉정하게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는데
마치 오늘날 어버이가 자식을 아끼는
그런 애초로움으로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번민 안까지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시름과 괴로움을
모르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알고 계시면서
늘 이해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기 사랑의 정을
이런 인간적인 심정이 되셔서
표현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이나 양심이나 정성이나 성의로
구원되지 못하고
예수님의 희생으로만 구원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도끼나 톱으로 쪼개져야 할
대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상대하려고 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1:18-19에 보면,
“우리가 구원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보배로운 피”로 되었고 했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은
이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은과 금 앞에 정신을 못차린다는 겁니다.
따라서 썩어질 것에 덮혀있는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은 도끼들고 달려드십니다.
그래야 ‘썩지 아니할 씨’로 인하여 구원됨을
알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초능력이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10:29-31에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말씀들이,
돈만 밝히고 챙기는 아각왕 같은 우리를
찔려 쪼개는 말씀의 초능력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진정한 초능력은
가시적인 기적이 아니라
세상이 싫어함으로부터 불구하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가
은과 금보다 귀하다는
복음을 전하는
바로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