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본관 |
가구수 (1985발표) |
인구수 (1985발표) |
남자 |
여자 |
가구비율 |
인구비율 |
계 |
16 |
17,142 (11,622) |
54,667 (48,643) |
27,628 |
27,039 |
| |
1 |
추계 |
12,622 (5,229) |
39,994 (21,421) |
21,096 |
18,898 |
73.6% |
73.1% |
2 |
전주 |
841 (5,212) |
2,670 (22,141) |
1,364 |
1,306 |
4.9% |
4.8% |
3 |
나주 |
649 (241) |
2,103 (1,000) |
957 |
1,146 |
3.7% |
3.8% |
4 |
강화 |
593 (1) |
1,929 (5) |
760 |
1,169 |
3.4% |
3.5% |
5 |
경주 |
464 (87) |
1,516 (374) |
636 |
880 |
2.7% |
2.7% |
6 |
안동 |
300 (121) |
1,007 (500) |
439 |
568 |
1.7% |
1.8% |
7 |
달성 |
268 (67) |
880 (256) |
342 |
538 |
1.5% |
1.6% |
8 |
개성 |
203 (5) |
568 (21) |
249 |
319 |
1.1% |
1.0% |
9 |
밀양 |
197 (43) |
707 (188) |
302 |
405 |
1.1% |
1.2% |
10 |
양지 |
178 (208) |
654 (863) |
304 |
350 |
1.0% |
1.1% |
11 |
진주 |
179 (17) |
555 (80) |
236 |
319 |
1.0% |
1.0% |
12 |
해주 |
139 (6) |
443 (27) |
191 |
252 |
0.8% |
0.8% |
13 |
해남 |
137 (8) |
431 (47) |
190 |
241 |
0.7% |
0.7% |
14 |
한양 |
115 (16) |
345 (68) |
165 |
180 |
0.6% |
0.6% |
15 |
원주 |
106 (6) |
314 (27) |
128 |
186 |
0.6% |
0.5% |
16 |
파주 |
104 (4) |
344 (22) |
160 |
184 |
0.6% |
0.6% |
17 |
월산 |
4 |
10 |
8 |
2 |
| |
18 |
아산 |
2 |
6 |
2 |
4 |
| |
19 |
완산 |
2 |
6 |
2 |
4 |
||
20 |
문천 |
2 |
4 |
3 |
1 |
||
21 |
추성 |
1 |
3 |
2 |
1 |
||
22 |
의주 |
1 |
2 |
1 |
1 |
||
23 |
수원 |
1 |
1 |
1 |
0 |
||
24 |
괴산 |
1 |
1 |
0 |
1 |
||
25 |
대구 |
0 |
3 |
0 |
3 |
||
26 |
양양 |
0 |
1 |
0 |
1 |
||
27 |
충주 |
0 |
1 |
0 |
1 |
||
28 |
평강 |
0 |
1 |
0 |
1 |
| |
29 |
함안 |
0 |
1 |
0 |
1 |
| |
30 |
기타 |
2 (332) |
26 (1,417) |
20 |
6 |
| |
31 |
미상 |
31 (19) |
141 (186) |
70 |
71 |
|
-추씨의 본관에 대하여-
Ⅰ. 종합
가을 추(秋)자를 쓰는 추성(秋姓)은 본관(本貫)을 달리 쓴다 하여도 모두 같은 일가(一家)입니다. 시조 추엽조(경자보에서는 시조 이전 元祖로 秋子平공으로 보기도 하였습니다)의 후손이며 중시조 노당추적(秋適)조-추계본관 또는 세심당 추수경(秋水鏡)조-전주본관으로 크게 분류하여 본관으로 후손들이 정하였고, 세심당선조의 아들 5공자(휘 -노,적,국,지,란)의 은거소인 나주를 본관으로 하기도 하였으나 기타지역은 거개 집성촌을 본관으로 분류한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Ⅱ. 추계본관전말
추계(秋溪)가 추씨의 본관으로 사용하게 된 내력의 금석문은 1864년 고종원년 갑자년 대구인흥서원(仁興書院) 앞의 노당(露堂)추적(秋適)선생 신도비(神道碑)에 나타나는데 증보문헌비고에 근거한다 하였습니다. 이후 조선 고종2년 1865년 추씨 48본관을 추계(秋溪)단본으로 합관(合貫:본관을 하나로 통일함)하고자 이를 추진하여 예조참의 김응균의 제사(판결)로 예조의 승인을 1865년 을축년 3월 18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합관 이후에도 본관을 추계(秋溪)로 전국적으로 일치시키지는 못하였으며 일제시대 호적제도가 시행되면서 본관을 거소지 별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여러 본관으로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인 듯 합니다. 때문으로 해방 이후 1984년 10월 1일 경제기획원 통계에도 추씨가 18본관으로 되어 있었다 합니다. 2000년 조사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우리 추씨는 54,667명으로 추계본관 사용이 39,994명으로 73.1%를 차지하고 있다. 기타 전주 2,670(4.8%), 나주2,103명(3,8%), 강화1,929명(3.5%) 기타 1명 이상 30개 본관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추계(秋溪)본관을 시조가 정착한 곳인 함흥(咸興)으로 합관(合貫)해야 바르다면서 주장하기도하고(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는 법원의 판결로 함흥으로 바꾼 사례도 있습니다), 완산부원군 추수경장군의 은거소이며 묘소가 있는 완주(完州) 즉 전주(全州) 본관이 바른 본관이라고 주장하는 종친(전주추씨 본관사용: 충남 부여군 외산면 삼산리 충현사 중심)들을 비롯하여 추계(秋溪)가 아닌 다른 본관으로 다시 결정하여 합관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추계(秋溪)라는 지역의 역사성과 문헌비고의 저자(이만운)에 대한 비난(향.소.부곡의 문제-추계라는 지역이 옛 천민 거주집단지역인 향, 소, 부곡에 해당된다하여, 노당선조와 같은 명현의 본관으로는 부적하며 이는 문헌비고를 저술한 이만운이라는 사람의 역사인식오류라는 시각)으로 추계(秋溪)본관에 대한 부정적인 여러 견해들을 피력하는 등 우리 추문(秋門)내에서도 상당히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러한 부분들에 대하여 현명하고도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칫 일가 종친간에 본관의 상이점에 대한 과격하고도 극단적인 인식으로 인하여 동근화수(同根花樹:추씨들은 모두 한 나무이며 뿌리가 같다는 의미)의식이 희석되거나 퇴색된다면 이는 우리 추문으로서는 극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겠습니다.
우리 추씨는 모두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 추씨 이외 타 성씨(姓氏)에서도 시조는 한 분인데 본관을 달리하고 있는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 우리와 비슷합니다. 그리하여 그 분들도 다 일가라 하고 한 본인데, 집성촌을 기준으로 되었다 하기도하고, 호적체계 등의 잘못으로 그리 되었다 하기도합니다. 조사한 바로는 우리나라의 각 성씨가 쓰고 있는 본관이 무려 400여개가 넘는 다는 사실입니다.
Ⅲ. 추씨 본관 관련 문헌
1. 조선씨족통보의 기록입니다.
1924년 윤창현이 지은 조선씨족통보 37장에는 추씨는 천수(天水:중국 양자강 상류부근)가 본관이며 기원전 250년 춘추시대 노(魯)나라 대부 추호(秋胡)라는 분의 후손이다라고 적었습니다(자료출처- 추삼술의 추씨900년사).
2. 1865년 합관 이전의 추씨 48 본관입니다.
(증보문헌비고 제53권 씨족편) 개성(開城)추씨,강화(江華)추씨,파평(坡平,파주)추씨,금천(衿川,시흥)추씨,충원(忠原,충주)추씨,서원(西原,청주)추씨,단양(丹陽)추씨,태안(泰安)추씨,홍산(鴻山)추씨,직산(稷山)추씨,해미(海美)추씨,예안(禮安)추씨,영춘(永春)추씨,아산(牙山)추씨,전주(全州)추씨,나주(羅州)추씨,능주(綾州)추씨,순천(順天)추씨,고부(古阜)추씨,낙안(樂安)추씨,임피(臨陂)추씨,강진(康津)추씨,흥양(興陽)추씨,해남(海南)추씨,경주(慶州)추씨,안동(安東)추씨,상주(尙州)추씨,진주(晉州)추씨,대구(大邱)추씨,김해(金海)추씨,밀양(密陽)추씨,하동(河東)추씨,개령(開寧)추씨,고령(高靈)추씨,하산(夏山,창녕)추씨,원주(原州)추씨,평창(平昌)추씨,평강(平康)추씨,횡성(橫城)추씨,해주(海州)추씨,풍천(豊川)추씨,수안(遂安)추씨,길주(吉州)추씨,등주(登州,안변)추씨,철산(鐵山)추씨,순천(順川)추씨,양지(陽智)추씨,추계(秋溪)추씨
3. 1984 .10 .1 경제기획원통계 추씨18본관입니다.
추계(秋溪),전주(全州),수안(遂安),안동(安東),영천(永川),평강(平康),교하(交河),양지(陽智),경주(慶州),함흥(咸興),횡성(橫城),초계(草溪),나주(羅州),개성(開城),해남(海南),성주(星州),완산(完山),김해(金海)
4. 1865년에 예조에 올려 합관 판결을 받은 합관문의 국역문입니다.
예조에 올린 합관문(국역문Ⅰ)
업드려 생각건대 자손이 선조를 따름은 관적보다 더 중한 것은 없고 이어받는 도리와 돈목하는 풍속이 여기에 과계한다. 고로 같은 무리는 백세가 한 집안이나 왕왕 그 전수를 유실하여 산란하여 계통이 없이 되니 동조의 손인데도 관향이 틀리면 그 인륜이 폐함이 무엇이 이보다 심함이 있겠는가. 송나라 소흥 때 였다. 선생조 자부라 벼슬한 휘 엽이 중국으로부터 동국에 와 고려에 대대로 살아서 문정공 휘 황 문헌공 휘 적 같은 분이 있으니 이학으로 세상에서 존경받는 스승이고 충효공 휘 진은 병부상서 벼슬하고 운심재 휘 유에 이르러 명태조 창업공신이 되어 호부상서 벼슬하다가 황명에 의하여 동토를 태조 태종 때에 위안시키고 그 후손이 이어 가며 황명조에 벼슬했으니 휘 귤은 좌복야 벼슬 하고 휘 섭은 안찰사 벼슬하고 휘 서는 병부상서 벼슬하고 연월당 휘 천일은 이부좌시랑 벼슬을 하고 시호가 문효이다. 임진왜란이 이름에 미쳐 무강자사 휘 수경은 5자를 거느리고 동방을 구원 적장을 초멸하고 마침내 몸을 전주에서 순절하여 그 땅에 예장하고 완산부원군을 증봉했고 그 장자 안찰사 휘 노는 4제와 함께 묘를 지켜 효성을 이룬바 금수마저 감흥하고 학업이 올바르니 선비의 본보기가 되고 뒤에 검상사인에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끝내 여러 동생과 초야에서 잘 늙고 고향을 떠난 자손이 각처에 산재하여 혹은 전의(傳疑)로 관향을 하고 어떤이는 사는 곳으로 관향을 하니 실로 후생이 한탄을 했으나 일의 관계가 삼가기 어려워 급히 의논하여 하나로 정할수 없더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답답한 심정을 호소하여 펴는 날이 있었으니 문헌공 신도비 명문을 좋은말을 남기는 군자의 손에 찬성(纂成)키로 하고 휘찬려사와 문헌비고를 널리 고찰하니 공의 관향은 추계라고 써 있었다. 추계는 양지 구호고 사적에 기재하여 있음이 명백하니 의심이 없고 상서공 무강공 큰 공훈이 조금이나마 밝혀졌으니 황단에 참반하는 큰 은전과 충량과에 나가기를 허락한 성전이 이에 후손이 선조의 빛을 남겨줌에 미치니 어느 것이 이보다 큰 것이 있으리오. 다만 업드려 생각컨데 은혜를 입은 일가는 다 같은데 만약 전과 같이 관향을 달리한즉 떳떳한 질서에 어긋남이 이처럼 심한 것이 없다. 사람의 자손이 되어서 시조의 관향을 확실히 안즉 의당 잘못 익힌데서 안주 할수없다. 곧 바르게 돌아가지 않는 고로 일제히 모여 의논하여 문헌공은 추계 조상이니 선조를 좇아 한데로 합하여 족보할 뜻으로 감히 이에 우르러 부르짖으니 특별히 이치를 논하여 제사를 허락하여 내려서 근원을 바르게하고 떳떳이 차례를 펴게 하소서. -제사(판결)- 이같은 명현 후예로써 각처에 산재하야 한미하게 살고 떨치지 못함은 향관이 각자 달리함은 진실로 이것이 흠사나 다만 문헌비고에 노당선생은 추계로 관향을 했다하고 또 비명 고증이 명적하고 금차 합보한다는 의논이 진실로 사리에 합당하며 또 황단에 참반의 명령을 특강한즉 같은 일가인데 참석하는 사람이 관향을 달리할 수 없으니 한결같이 추계로 정할 일
5. 국역문은 그 해석을 약간씩 달리 할 수 있습니다.
춘조(예조)에 올리는 합관국역문(Ⅱ)
자손된 사람이 조상을 따르는 길은 본관 본적만큼이나 뚜렸함이 틀림없을 진데 세습을 계승하는 진리로 보나 친척끼리 화목한 것과 동족끼리 화목 되게 하는 풍습으로 보나 본관의 중요함이란 이루 말할수 없거늘 여러 줄기로 흩어진 동족을 한 족보에 올리려 함은 실꾸러미의 헝클어짐과도 같이 안타까운 일 이거니와 하물며 한 할아버지의 자손으로서 관향을 저마다 다르게 한다면 도리에 거슬리고 풍습에 어긋남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중국 송천자 소흥시대에 우리 시조 자부라 벼슬을 하신 휘 엽께서 중국 고향을 마다하시고 동방(한국)으로 오시어 고려의 조정을 대물려 받들었고 문정공 휘 황 문헌공 휘 적이 유학에 능통함으로써 온 나라의 스승으로 계시었던 것이던지 충효공 휘 진께서 병부상서에 오르심이라든지 운심재 휘 유께서 명 태조 시대의 호부상서에 까지 올랐다가 태조 태종 때 명 황제 사신이 되어 우리나라에 오시어 이조의 초창기를 위안함이라든지 그 후손들이 모두 중국에서 중국벼슬을 역임 하시었다. 휘 귤의 좌복야 휘 섭의 안찰사 휘 서의 병부상서 휘 천일 연월당의 이부좌시랑과 문효공 시호를 받음이나 모두가 다 인연을 맺게되어 임진왜적의 변을 당할 때에 무강자사 벼슬에 있던 휘 수경께서 다섯 아들을 거느리고 구원 나오시어 적장까지 죽이는 승전을 올리시었으나 끝내는 전주에서 순직하여 국가의 예장을 받으며 완산부원군의 증시를 받았고 안찰사 벼슬에 있던 휘 노를 따라 네 분 아우가 효성극진하게 분묘를 지키니 짐승도 감흥되게 할뿐 아니라 도덕을 잘 지킴으로 선비들의 모범이 되도록 승정원 사인 벼슬을 내림에도 응하지 않고 네 아우와 함께 풀속에 늙기를 다한 나머지 유락된 자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혹은 짐작으로 혹은 지방명 그대로를 본관으로 신청받아 허가 받으니 후세로 내려올수록 한탄만 컷 지 한 본으로 환원되지 않던 때에 다행스럽게도 세문공의 상소하던 그날 문헌공의 신도비문을 당시의 문장가에게 명령하시니 역대 역사의 보감 까지 들추어 질 때 공의 기록으로 본관이 추계라는 것이 들어 났다. 무강자사 상서공등의 공훈 충렬이 또한 이날에 비로소 빛을 보게되어 대보단에 자손망배와 충절후손만의 과거 참여도 허가 받은 은혜와 영광이 더 이상 클 수가 없게된 이 자손들이 뿔뿔이 헤어져 본관을 따로 따로 쓴다면 이것이야말로 천륜질서를 어김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시조의 본관을 알고도 옛 버릇에만 얽매여 시정치 않는다면 잘못을 면치 못함직하여 각도의 종친들이 한곳에 모여 의론 끝에 문헌공을 시조로 적어온 추계를 따라서 한 본관으로 하는 뜻을 감히 받들어 고하노니 관청에서 올바르다고 인정한 근본을 바로잡고 질서를 널리 퍼지게 하옵기를 바라노라. 고종 을축 서기 1865년 3월 18일 백성들의 상소에 대한 -판결문 고종2년 판결관 예조참의 김응균- 이름이 나고 어진 모든 명현들의 후손들이 멀어지고 흩어져서 뭉치지 못하다 보면 본관 역시 흩어지게 됨이 크나큰 잘못이거니와 문헌비고에서 노당선생의 추계본관이 나왔음을 비석 고증으로도 분명하고 정확하게 뒷받침되고 한 조상의 자손으로 한 족보를 갖는다는 논리 또한 사리에 합당하니 황단 참반의 은혜로운 명령을 받들은 한 일가 참석자답게 본관을 각각으로 쓰지 말고 한결같이 추계로써 통일본관 쓰게 하라.
6. 문헌비고씨족고의 기록입니다.
추계(양지구호)추씨 시조 추적은 고려 충렬왕때 좌복야를 지냈다(秋溪秋氏始祖秋適高麗忠烈王時左僕射)
7. 문헌공 노당 추적선생 신도비문(예조판서 신석우찬)중의 본관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본관을 밀성, 경산, 영순(지금의 문경, 상주지역), 추계 등으로 써왔던 것은 대개 자손들이 사방에 흩어져 살게 됨으로 인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동국문헌씨족고를 살펴보면 공의 본관을 추계로 하였은 즉 대개 공의 후손들도 추계로 본관을 써 온지가 오래 되었다고 보겠다(貫籍則曰密城曰慶山曰永順曰秋溪盖因子孫之散居焉按東國文獻氏族考公之貫謂之秋溪則凡爲公之後者以秋溪爲籍舊矣).
8. 문헌비고의 저자 이만운은 문헌공 추적선생을 추씨의 시조로 보았습니다.
추씨의 본관을 추계라고 문헌비고에 적은 이만운이란 사람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이만운(李萬運) 1723(경종 3)~1797(정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중심(仲心). 아버지는 진사 경갑(慶甲)이며, 어머니는 함양여씨(咸陽呂氏)로 경주(慶周)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박학다식하였으며, 이덕무(李德懋) 등의 실학자와 교유하였다. 서울사람으로서 과거에 급제하지 아니하고 정조 6년(1782년)에 음관(蔭官)으로 돈녕부참봉(敦寧府參奉)직에 있다가 문헌비고 보수의 명을 받은 것이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군서표기(群書標記)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조에, "마침 음관 이만운이 동국전고(東國全故)에 익숙하다는 것을 듣고 이 사람에게 문헌비고 보수의 일을 맡겼다." 라고 하였다. 1790년(정조14년)에 이만운이 문헌비고의 보수를 완료한 뒤, 좌의정 김종수(金鍾秀)와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교열을 명하자, 두 대신은 말하기를 , "이만운의 박학다식(博學多識)한 것은 당세에 비할 사람이 없는데, 그가 편찬한 것을 신(臣)등이 어찌 감히 논의하겠습니까?" 하고 사양한 것을 보면, 이만운은 당시에 비할 만한 사람이 없는 큰 학자였던 것이 명백하나, 아직 그 전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만운은 문헌비고를 보수하는 동안에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과 사도시첨정(司導侍僉正)으로 승진하고 각신(閣臣)과 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정조14년(1790년) 강화경력(江華經歷)을 제수하고, 20년(1796년)에는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여 오위장(五衛將)에서 접견하고, 이어 돈녕부도정(敦寧莩正)에 임명하였는데, 21년(1797년)에 사망하였다.
9. 무엇보다 가장 오래된 문적은 1591년에 저술한 대동운부군옥입니다.
대동운부군옥이란 조선시대의 백과사전입니다. 예천권씨 초간 권문해선생의 저술한 것인데, 여기에 적자인명조에 보면 노당선생의 본관이 추계라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Ⅳ. 추계(양지)에는 없는 추씨(秋氏) 토성 의 문제
토성(土姓)이란 고려시대 이래로 과거(科擧) 또는 서리직(胥吏職)을 거친 벼슬 품관(品官 : 품계(品階)의 성씨입니다. 토성을 제외한 다른 성종(姓種)은 귀화 성이나 새로운 사성을 제외하면 모두 토성에서 분화된 것이며, 15세기라는 시기를 기준하여 볼 때 이른바 거족(鉅族)이나 신흥사족 및 상급 향리층을 막론하고 그들의 출신 뿌리는 각기 군 현 토성에서 나왔다라고 하는데, 즉 어느 한 지방에서 행세(行勢)하는 성씨(姓氏)라 할 수 있습니다.
1452년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재된 우리 추문(秋門)의 토성 조사사항과 1482년 동국여지승람상의 성씨를 살펴보면, 토성으로 대대로 살아온 지역은 황해도 수안, 강원도 횡성, 강원도 평창으로 나와 있으며, 경기도 금천(시흥)에는 과거에 토성으로 살았으나, 현재에는 없는 성씨 즉 망성(亡姓)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추씨의 본관으로 된 추계(秋溪)나 양지(陽智)에는 추성(秋姓)의 토성 등이 없는 것으로 조선 초기의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는 기록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세종조에 조사된 바로는 조선의 황해도 수안, 강원도 평창, 강원도 횡성에 추씨들이 토성으로 살고 있었다는 기록인 바, 이는 우리 추씨 제족들의 족보연구나 추씨 역사연구에 중요한 준거가 될 듯합니다.(출처 이수건 교수의 한국의 성씨와 족보)
Ⅴ. 추계(秋溪)의 본관(本貫)관련 새로운 근거 문적 발견
서울 추계추씨대종회사무실에서 옛 호적문서(경북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에 거소하시는 추기환 종친께서 소장하고 계시는 선대 교지류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호적문서와 고서류)에 의하면 조선영조 건융27년(1762년), 건륭36년(1771년)의 상주목사의 직인이 날인된 호적문서에 추씨의 본관을 양지(陽智)라고 표시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추계(秋溪)가 곧 양지(陽智)의 고호(古號:옛날이름)이니, 현재까지 나타난 바로는 우리 추씨가 양지(추계)를 본관으로 사용한 근거로 가장 오래된 문적이라 하겠습니다. 이 문서는 이만운이 문헌비고 보수를 완료한 시점보다 38년이나 앞서는 것으로서, 이만운(李萬運 1723년 경종3~1797년 정조21)이 정조6년 1782년에 왕명을 받아 1790년(정조14년)에 문헌비고의 보수를 완료하였다 하였으니, 우리 종문내의 혹자는 이만운이 문헌비고를 보수하면서 우리 추씨를 폄할 목적으로 향, 소, 부곡으로 분류된 추계향(秋溪鄕)을 추씨의 본관으로 정하였다라고 이만운을 비난하면서 추계(秋溪)본관이 잘 못되었다고 주장하였으나, 이와 같은 내용은 설득력이 없다 할 것입니다. 이만운은 근거에 의하여 추씨의 본관을 양지(추계)로 하였음이 이 문적의 발견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추성(秋姓)득성(得姓)과 추계(秋溪)본관(本貫)에 대하여
성(姓)은 혈족관계를 위하여 발생된 것이라 합니다. 성씨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민족은 중국(中國) 민족으로 하(夏), 은(殷), 주(周) 시대에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추씨(秋氏)문중의 사적을 살펴보면 추씨는 성씨의 근원을 중국에서 찾고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삼황오제1)에서 하, 은(상), 주2)를 거쳐 진시황의 진나라, 한나라3), 삼국시대를 거쳐 동진과 서진, 16국시대, 남북조, 수, 당, 오대십국, 북송, 남송, 요, 금, 원, 명, 청,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등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추성(秋姓)은 중화의 시조로 기원전 2679년에 제왕이 된 헌원(軒轅) 황제(皇帝)의 직계후손이라 하였습니다. 황제로부터, 황제의 둘째아들 후손인 전욱, 황제의 장남 후손인 제곡, 그 뒤를 이은 소호 의 후손으로 동주(東周-기원전 770년~ 476년)시대에 백(伯)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의 관직은 사구(司寇)이셨는데 현세의 법무부장관쯤에 해당한 대부(大夫)급의 벼슬이었습니다. 이는 형벌을 관리하는 형부(刑部)라 할 수 있는데 추관(秋官)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예조판서를 춘관(春官)이라 한 것과 같이 형조판서에 해당하여 사법과 형옥을 관리하였습니다. 공자께서도 사구벼슬을 한 적이 있음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역사의 기록입니다.
성씨의 기원을 살펴보면 벼슬이름 즉 관직명이 성씨로 된 경우가 많은데 추씨 성도 이 추관(秋官)에 의해 그 후손들이 추씨로 성을 쓰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많은 이씨(李氏) 성의 경우 그 직접적인 기원을 상조(商朝-은나라)의 관명(官名)인 대리(大理)에서 비롯된 이관(理官)이라 하였습니다. 고자(古字) 이(理)는 이(李)와 상통(相通)하는 글자로 관직명이 성씨로 된 경우로 설명이 되어 지는데 이를 볼 때 추관(秋官)이 추성(秋姓)으로 되었다는 주장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보겠습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추씨의 기록을 보면 역시 춘추시대에 노나라 대부로 추호(秋胡)라는 분이 있으며 이분에 대한 소개는 추호자(秋胡子)로 많이 소개되는데 이름 뒤에 선생의 칭호인 자(子)를 붙였습니다. 공자나 맹자라 할 때의 자(子)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연산조에 추호자의 시(詩)를 승정원에 뜻을 풀이하란 전교가 있음이 조선왕조실록에 그 기록이 있습니다.
한(漢)나라 시대인 기원 20~ 220년 사이에 동한(東漢)에 추군(秋君)이라는 분이 회계수(會稽守)라는 벼슬을 한 바가 있으며, 중국의 기록에는 이 분이 추씨의 시조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이 분이 감숙천수4)에 거주를 정하였다 하였고 중국의 추씨 본관의 연원을 천수(天水)로 소개하고 있는 문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전거(典據)로는 명나라 이일화(李日華)의 성씨보찬, 청나라 웅준운(熊峻運)의 증보고금성씨족보전역 등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1591년 초간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이나 조선씨족통보에도 추씨는 본래 중국의 천수 사람이라고 하였고, 휘어운(彙語韻)에서는 중국의 농서인(隴西人)5) 이라 하였습니다. 천수와 농서는 감숙성 내에 인근하여 한수(漢水)를 끼고 있는 군(郡)의 명칭입니다.
남북조시대의 송나라 무제(劉義隆-기원 424년~ 453년) 시 추당(秋當)이란 분이 있었다합니다. 이 분의 관직은 서사인(書舍人)인데 조명(詔命)을 작성하고 전달하는 오늘날 장관급의 벼슬입니다. 이분을 중국에서는 추씨의 중시조쯤으로 보고 있습니다. 추씨구백년사(秋氏九百年史)에서는 송(宋)나라와 추당(秋當)이라는 분을 오대십국에 이어지는 960~ 1277년 사이의 송나라(북송 960~ 1126 과 남송 1127~ 1277)로 보고 또한 이름을 추부(秋富)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분야에 대한 추후 식견 있는 후손들의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이후 추씨들은 송나라가 1126년 정강(靖康)의 변(變)으로 강남(江南)으로 옮겨 임안(臨安-杭州)에 천도할 당시 감숙천수로부터 다른 지방으로 가솔을 이끌고 이거를 하였는데 도중의 금나라(여진족) 군대에 쫓겨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합니다. 이때 동쪽 고려국으로 유입된 추씨를 한국의 추씨로 보고 있는 설과 당시 남송으로 가 송 고종 소흥 11년 1141년 신유에 문과 급제하여 적부라 벼슬을 한 후 고려 인종조(재위1123~ 1146)에 동래하여 고려 함흥 연화도로 이거 하였다(추계추씨 기사보)는 양설이 있습니다.
추씨들의 선조의 원류를 중국에서 찾을 때 우리나라의 가을 추(秋)자를 쓰는 추성(秋姓)은 본관(本貫)을 달리 쓴다 하여도 모두 같은 일족(一族)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조 추엽(秋饁)의 후손이며 추씨 3세인 중시조 노당 추적(秋適)의 추계(秋溪) 본관 또는 세심당 추수경(秋水鏡)장군의 전주(全州)본관으로 크게 분류하여 본관으로 후손들이 정하였고, 세심당의 다섯 아들 노(蘆), 적(荻), (菊), 지(芝), 란(蘭)의 은거소인 나주(羅州)를 본관으로 하기도 하였으나 기타지역은 거개 집성촌을 본관으로 분류한 것입니다.
한편 1960년 경자년에 대구지역에서 발간한 족보에서는 추씨의 시조를 신라 박혁거세왕 53년 건평2년인 기원전 5년 신라 개국공신으로 대사도인 추자평(秋子平)으로 세계(世系)를 정하였습니다. 이는 1904년에 편찬된 신라박씨선원대보(新羅朴氏璿源大譜)에 근거한 것인데 박씨족보상의 개국공신 기록이나 군부인(郡夫人)으로 추씨의 기록이 보인다 하여 박씨족보상의 2000년 전의 기록을 근거로 혈통을 연결 지어 시조로 설정한다는 것은 실로 무리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시각입니다. 그러나 이 경자보에서도 1세조를 중국에서 동래한 추엽(秋饁)으로 세계를 정한 것을 볼 때 추씨 선조가 중국으로부터 왔다는 인식에는 일반적으로 추씨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추계(秋溪)가 추씨의 본관으로 사용하게 된 최초의 금석문(金石文)은 1864년 고종원년 갑자년 대구 인흥서원(仁興書院)의 노당(露堂)추적(秋適)선생 신도비(神道碑)에 나타나는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근거한다 하였습니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추씨의 시조를 노당 추적으로 보았고 추적선생의 본관을 추계로 기록하였습니다. 이후 조선 고종 2년 1865년 전국의 추씨들의 대표들이 인흥서원에 모여 수십여 추씨 본관을 추계(秋溪)단본으로 이른 바 합관(合貫)을 추진하여 예조(禮曺)의 승인을 1865년 을축년 3월 18일에 받았습니다.
그 판결내용을 보면 이름이 나고 어진 모든 명현들의 후손들이 멀어지고 흩어져서 뭉치지 못하다 보면 본관 역시 흩어지게 됨이 크나 큰 잘못이거니와, 문헌비고에서 노당선생의 추계본관이 나왔음이 비석 고증으로도 분명하고 정확하게 뒷받침된다 하겠다. 한 조상의 자손으로 한 족보를 갖는다는 논리 또한 사리에 합당하니, 황단 참반의 은혜로운 명령을 받들어 한 일가의 참석자답게 본관을 각각으로 쓰지 말고 한결같이 추계로써 통일본관 쓰게 하라고 제사(판결문)하였습니다.
문헌비고의 씨족고를 보면 추계(양지구호)추씨 시조 추적은 고려 충렬왕때 좌복야를 지냈다6)라고 기록하였고, 예조판서 해장 신석우선생이 찬한 문헌공 노당 추적선생 신도비문 중의 본관 관련 기록에는 그 본관을 밀성, 경산, 영순(지금의 문경, 상주지역), 추계 등으로 써왔던 것은 대개 자손들이 사방에 흩어져 살게 됨으로 인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동국문헌씨족고를 살펴보면 공의 본관을 추계로 하였은즉 대개 공의 후손들도 추계로 본관을 써 온지가 오래 되었다고 보겠다7)라고 찬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도 본관을 추계(秋溪)로 전국적으로 일치시키지는 못하였으며 일제시대 호적제도를 시행할 때 본관을 거소지 별로 기록하면서 다시 여러 본관으로의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인 듯 합니다. 때문으로 해방 이후 1984년 10월 1일 경제기획원 통계에도 추씨가 18본관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1865년 합관 이전 증보문헌비고 제53권의 씨족편에 나타나는 추씨를 보면 개성(開城)추씨, 강(江華)추씨, 파평(坡平,파주)추씨, 금천(衿川,시흥)추씨, 충원(忠原,충주)추씨, 서원(西原,청주)추씨, 단양(丹陽)추씨, 태안(泰安)추씨, 홍산(鴻山)추씨, 직산(稷山)추씨, 해미(海美)추씨, 예안(禮安)추씨, 영춘(永春)추씨, 아산(牙山)추씨, 전주(全州)추씨, 나주(羅州)추씨, 능주(綾州)추씨, 순천(順天)추씨, 고부(古阜)추씨, 낙안(樂安)추씨, 임피(臨陂)추씨, 강진(康津)추씨, 흥양(興陽)추씨, 해남(海南)추씨, 경주(慶州)추씨, 안동(安東)추씨, 주(尙州)추씨, 진주(晉州)추씨, 구(大邱)추씨, 김해(金海)추씨, 밀양(密陽)추씨, 하동(河東)추씨, 개령(開寧)추씨, 령(高靈)추씨, 하산(夏山,창녕)추씨, 원주(原州)추씨, 평창(平昌)추씨, 평강(平康)추씨, 횡성(橫城)추씨, 해주(海州)추씨, 풍천(豊川)추씨, 수안(遂安)추씨, 길주(吉州)추씨, 등주(登州,안변)추씨, 철산(鐵山)추씨, 순천(順川)추씨가 있고, 1984. 10. 1 경제기획원 통계 추씨 18 본관으로는 추계(秋溪), 전주(全州), 수안(遂安), 안동(安東), 영천(永川), 평강(平康), 교하(交河), 양지(陽智), 경주(慶州), 함흥(咸興), 횡성(橫城), 초계(草溪), 나주(羅州), 개성(開城), 해남(海南), 성주(星州), 완산(完山), 김해(金海) 등이 있습니다.
근세에 와서 추씨들은 추계(秋溪)본관을 시조가 정착한 곳인 함흥(咸興)으로 합관(合貫)해야 바르다면서 주장하기도하여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는 법원의 판결로 함흥으로 바꾼 사례도 있으며, 완산부원군 추수경장군의 은거소이며 묘소가 있는 완주(完州) 즉 전주(全州) 본관이 바른 본관이라고 주장하는 종친들을 비롯하여 추계(秋溪)가 아닌 다른 본관으로 다시 결정하여 합관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합니다.
추계(秋溪)라는 지역의 역사성과 문헌비고의 저자 이만운(李萬運 1723∼1797)에 대한 비난으로 향(鄕). 소(所). 부곡(部曲)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추계라는 지역이 옛 천민(賤民) 거주 집단지역인 향, 소, 부곡에 해당된다 하여, 노당선생과 같은 명현(名賢)의 본관으로는 부적하며 이만운이라는 사람의 역사 인식 오류라는 시각으로 추계(秋溪)본관에 대한 부정적인 여러 견해들을 피력하는 등 추문(秋門)내에서도 상당히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만운 이전 1591년에 편찬된 초간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에도 노당선생의 본관이 추계라는 사실의 기록이 있으며, 이만운이 증보문헌비고를 완료한 시점인 1790년 이전인 건융27년(1762년), 건륭36년(1771년)의 상주목사의 직인이 날인된 호적문서에 추씨의 본관을 양지(陽智)라고 표시되어 있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이만운이 문헌비고 보수를 완료한 시점보다 38년이나 앞서는 것으로서 대동운부군옥이나 상주지방의 양지본관 사용 등을 미루어 볼 때 그의 잘못으로 탓할 수는 없는 듯 합니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군서표기(群書標記)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조에, "마침 음관 이만운이 동국전고(東國全故)에 익숙하다는 것을 듣고 이 사람에게 문헌비고 보수의 일을 맡겼다." 라고 하였다 하였고, 정조임금이 이만운이 증보문헌비고를 완료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당시의 좌의정 김종수(金鍾秀), 우의정 채재공(蔡濟恭)에게 교열을 명하자 당시 두 대신은 말하기를 , "이만운의 박학다식(博學多識)한 것은 당세에 비할 사람이 없는데, 그가 편찬한 것을 신(臣)등이 어찌 감히 논의하겠습니까?" 하고 사양한 것을 보면, 이만운은 당시에 비할 만한 사람이 없는 큰 학자였던 것이 명백하나, 아직 그 전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합니다.
추계(秋溪)는 경기도 양지(陽智)의 고호(古號) 즉 옛날 이름입니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추계리이며, "양지읍지(1899)"에 의하면 양지군은 고려 때 등원군수를 지낸 사람이 터를 잡고 등촌(藤村)이라 하였다 하는데, 1914년에 용인군과 통폐합시 주동면(朱東面)의 산매(山梅), 공세(貢稅), 평촌(坪村), 도창(都倉), 식송(植松), 금곡(金谷), 추계(秋溪)의 7개 동리, 주북면(朱北面)의 정수(定水),대대(大垈), 계장(桂庄), 임원(林院), 박성(朴成), 갈현(葛峴)의 6개 동리, 주서면(朱西面)의 반정(盤亭), 정문(旌門), 송동(松洞)의 일부, 읍내면(邑內面)의 교동(校洞), 암곡(岩谷), 서촌(西村), 등촌(藤村), 월곡(月谷), 남촌(南村), 용곡(龍谷)의 7개 동리 등 4개 면을 합하여 내사면(內四面)이라 하였습니다. 1996년 용인시로 승격되면서 내사면은 다시 양지면으로 개칭되었다. 현재 용인시에는 양지리(陽智里), 남곡리(南谷里), 평창리(坪倉里), 제일리(霽日里), 추계리(秋溪里), 식금리(植金里), 대대리(大垈里), 주북리(朱北里), 송문리(松門里), 정수리(定水里) 등 10개리가 있습니다.
추계 지명의 유래를 추정하건대 추계가 양지의 옛 이름이라 하였고 양지읍지에 양지의 이름이 고려 때 처음 등촌(藤村)이라 하였다면 고려 중후기(中後期) 노당 추적선생이 향, 소, 부곡에 해당하는 이 고을을 다스리는 관리(官吏)로 부임하셨거나 추적선생이 고려 조정(朝廷)으로 부터 받은 사패지지(賜牌之地)에 기인되어 추씨 성을 가진 관리가 다스렸던 치소(治所)로서 고을이름이 추계(秋溪)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부터 온 성씨를 제외하고 본관을 이야기 할 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참고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일반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세종실록지리지상의 토성(土姓)의 문제인데 우리나라 각 지역별 토성으로 분류된 성씨가 바로 본관이라는 것입니다.
토성이란 그 지역에서 행세(行勢)하는 성씨를 의미한다고 볼 때 추씨의 경우 황해도 금천, 경기도 시흥, 강원도 횡성, 평창 등지를 추씨의 토성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 지역명이 추씨의 본관으로 분류함이 마땅하다는 보학자들의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고려말엽 운심재(雲心齋) 추유(秋濡)께서 중국으로 들어 가셔서 200여년 후 그 후손인 추수경장군이 임진왜란(壬辰倭亂)시 조선으로 다시 돌아 올 때까지 우리나라에 남았던 잔류 추씨들의 세거지로 보는 것이 추씨 문중 내에서 지배적 시각입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추씨 본관은 추씨들의 중시조인 노당 추적(秋適)선생이나 추씨들의 치소지(治所地)가 지명화(地名化)가 된 고려조 추계향(秋溪鄕)의 추계(秋溪)로, 조선조 1591년의 초간 권문해선생의 대동운부군옥이나 1762년의 호적문서, 1790년 증보문헌비고, 1864년 노당추적선생의 신도비명, 1865년 합관문 등에 의해서 정착되었고 오늘날 2000년 인구 통계에 의하면 80%정도가 추계로 관(貫)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