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민사유지비음기(鎭民祠遺址碑陰記)
서산선생문집권지십육(西山先生文集卷之十六)
公諱龍庇本新羅宗妵(공휘용비본신라종성)自王子諱錫食菜義城(자왕자휘석식채의성)
공의 휘는 용비인데, 본래 신라의 宗姓으로 경순왕자 휘 석이 의성읍 식읍을 받고부터
* 종성(宗姓) : 임금의 성
子孫世襲其封(자손세습기봉)至公有大功德於民(지공유대공덕어민)邑人追思慕之(읍
인추사모지) 設位牌以時修祀(설위패이시수사)
그의 자손들이 봉토를 대대로 이어왔다. 공에 이르러 고을에 큰 공덕이 있어 사람들이 이를 추모하여 위패를 설치하고 때맞추어 향사 지냈다.
正德間傍裔慕齋先生安國按本道(정덕간방예모재선생안국안본도)爲致力於精祠申蠲復之令(위취력어정사신견지령) * 정덕(正德)은 명 제10대 황제 무종(武宗)의 연호로 1506~1521까지 재임
정덕(명나라 무종)간에 방손 모재 안국이 본도의 관찰사로 부임하여 사당에 정성을
드리고 부역을 면제하는 명령을 내렸다.
萬曆初 誠一議于諸宗(만력초성일의우제종) 立廟司之東揭號鎭民祠(입조사지동갈호진민사) * 만력(萬曆)은 중국 명(明) "신종(神宗)"황제가 다스리던 시기로 1573 ~ 1619년까지 재임.
만력 초에 족후손 문충공 성일이 여러 종친들과 의논하여 사당을 현청 동쪽에 세우고 묘호를 ‘진민사’로 하였다.
孝廟丙申安矦應昌來莅是邑(효묘병신안후응창래리시읍)纔下車就公墓(재하거취공묘)
具像設立齋堂官供祭羞以爲恒式(구상설립제당관공재수이위항식)
효종 병신년(1656년)에 안후응창이 이 고을 현령으로 부임하여 공의 묘소에 나아가 석물을 갖추고 재당을 세운 후 官廳(官衙)에서 제수를 보내도록 하였다.
以祠介衢路隘輪蹄不合妥靈之所(이사개구로애윤제불합타령지소)乃改卜舊基之東而重建之(내개복구기지동 이중건지)
사당이 길 사이에 있어 수레바퀴 소리와 말발굽 소리로 어지러워 신령을 받드는
장소로는 합당하지 않으니 이에 옛터 동쪽에 자리를 마련,중건하고
設齋庖置祭田 爲永久之圖(설제포치제전 위영구지도) 諸賢所以興慕景嚮之者(제현소이흥모경향지자)蓋如此其至矣(개여차기지의)然祠之設亶由於邑人崇報(연사지설단유어읍인숭보)
재사의 부엌을 세우고 제전을 마련하고 영구히 유지하기로 도모하였다. 제현이 사모하고 우러렀던 바가 대개 이와 같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사당을 세운 것은 진실로 고을사람들이 공의 공덕을 보답하는 연유에서 이루어졌다.
而祝號薦祼 皆用子孫私享之儀(이축호천과 개용자손사향지의)書院之出於儒林揭虔者
(서원지출어유림게건자) 名實自不同(명실자부동)
축을 일고 강신제를 올리는데, 모든 자손들이 사사로이 쓰는 향례의식과 유림이
받드는 것에서 나온 서원의 향례의식은 서로 같지는 않다
耳不幸數十年前 混入毁籍一例掃蕩(이불행수십년전 혼입훼적일례소망)夫以千年景慕之地(부이천년경모지지)而一朝廢爲墟莽過者傷心(이일조폐위허망과자상심)
듣건데, 불행히도 수십 년 전 서원철폐령에 흽쓸려 모두 없어 졌으니, 대저 천년토록 우러러 그 공덕을 기리던 곳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고 잡초가 우거져 지나는 사람들은 상심케 하였다
豈人事之失有以致之耶(기인사지실유이치지야)抑氣數之迫於不已耶(억기수지박어불이야) 誠未可知也(성미가지야)
어찌 인사의 잘못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궁색한 운수를 막는 것은 그치지 못하는 것인가? 진실로 이를 알 수가 없다.
歷歲旣久 耳目寖遠(역세기구 이목침원)霜露之所翳 耕犂之所(상로지소예경리지소)及敗礎頹垣 雖欲髣髴 (급폐초퇴원 수욕발불) 而不可得(이불가득)
세월이 흘러 백성들의 관심이 멀어지니, 서리와 이슬이 내리고 보습쟁기 밭가는 곳이 되었다. 부서진 주춧돌과 무너진 담장에서 비록 어림풋하게 옛 자취를 살피고자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將何以慰邑人之思(장하이위읍인지사)而托子孫無竆之感也(이탁자손무궁지감야)
於是議立石遺址爲閣以庇之(어시의입석유지 위각이비지)
장차 어떻게 이 고을 백성의 생각을 위로하고 자손들의 무궁한 감회를 받쳐 주겠는가? 이에 비석을 세우고 그 유지에 비각을 지어 이를 보호할 것을 의논하니
令興洛記其事于石(령흥락기기사우석)使來者知聞韶之有鎭民祠(사래자지문소지유진민사) 卽以寓峴山之慕云(즉이우현사지모운) * 문집원문임
令興洛記其事于石(령흥락기기사우석)使來者知聞韶之有鎭民祠俎豆(사래자지문소지유진민사조두) 雖撤而尙卽卽以寓峴山之慕云(수철이상즉이우현사지모운)
서산 흥락에게 부탁하여 비석에 그 사실을 기록하게 하고, 후인으로 하여금 문소의 진민사에서 향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였으나 비록, 철거하더라도 바라건데 현산에 양호를 추모하는 비석을 세운 것을 알게 하였다.
* 의성김씨 세보 갑자보 기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김흥락은 본관이 의성(義城)으로 1827년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맹(繼孟), 호는 서산(西山)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종손으로 한말 퇴계 학통을 잇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 문화권의 핵심 지도자이며, 위정척사론을 견지하고 안동 지역의 전기 의병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1895년 12월 30일 내려진 단발령 소식이 안동에 전해지자 김흥락은 의병을 일으키려는 논의를 이끌어 냈다. 논의 과정에서 김흥락은 1차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지병과 대묘(大廟: 학봉 김성일의 사당)를 모시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봉화 닭실[酉谷] 출신의 참봉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권세연이 이끄는 1차 의진이 결성되자 안동부성에 머물며 여러 문중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데 주력하였다.한편, 안동의진은 1896년 1월 하순 안동부성 탈환에 성공하고, 3월 7일 지휘부를 포(砲)를 중심으로 하는 전투적인 편제로 편성하였다. 일주일 뒤 권세연이 의병장에서 스스로 물러나자, 김흥락은 후임으로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를 선출하고 하회의 류도성(柳道性)과 함께 지휘장(指揮將)을 맡아 안동의진의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의병이 해산된 뒤 검제 서산재(西山齋)에서 병약한 몸으로 학문에 몰두하다가 1899년 세상을 떠났다.
참고 :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번역원 서산선생문집 , 의성김씨오토산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