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파(白波) 김학규 (金學奎) (1900 ~1967)】 "광복군 3지대장"
현충원에 모신 수백 명의 독립운동가 중에 부모와 자녀, 형제, 부부 등 가족이 함께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있다. 그 중 혹독한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광복’이라는 같은 꿈을 꾸고 한마음으로 노력했던 부부. 광복이 되는 순간까지 독립투쟁 최일선에서 함께 활약했으며, 광복 이후에도 조국과 동포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김학규, 오광심 선생이다.
∎ 만주의 무장 항일투쟁, 조선혁명군으로 활약하다.
1900년 평안남도 평안군에서 태어난 김학규 선생은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자 만주로 건너가 1919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로 활동하던 중 1920년 일제의 간도 학살로 무장활동이 어려워지자 문회고급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동명중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을 맡았다. 1931년 조선혁명당에 가입하고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32년 한중연합군으로 일본 관동군을 상대로 영릉가, 통화현에서 큰 전공을 올렸다.
1910년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출생한 오광심 선생은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남만주로 이주한 뒤 1929년, 민족학교인 화흥중학교를 졸업하고 배달학교와 동명중학교에서 교사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조선혁명당에 가입하여 조선혁명군 총사령부 군수처 유격대원과 지하 연락 공작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혁명군으로 활동하던 두 사람은 결혼했고 더욱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다.
∎ 일본의 검문, 어떻게 뚫을 것인가.
1930년대에 일본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고 상해에서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가 성공하면서 우리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중국에 있는 여러 독립운동단체는 하나로 힘을 모으기 위해 한국 대일 전선 통일 동맹을 결성하였다.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상황이 악화하자, 군사 활동이 어려워진 독립군 일부가 중국 관내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조선혁명군은 관내 이동이 아닌 만주에서의 항전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난징의 임시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고자 김학규 장군을 파견하는데, 오광심 선생도 동행하였다. 1934년 5월, 김학규, 오광심 선생은 허름한 옷을 입은 농부로 변장하고 임시정부 측에 부족한 인력과 물자를 지원받기 위해 난징으로 떠난다. 임시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고 관내 지역 독립운동 상황을 보고서로 작성한 김학규 선생은 이 보고서를 조선혁명군 본부에 전달하는 중요한 임무를 부인 오광심 선생에게 맡겼다. 200쪽 분량의 문서를 지닌 채 난징에서 만주에 이르는 1,500km를 검문에 걸리지 않고 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오광심 선생은 보고서를 사나흘 만에 외워서 산길을 걸을 때나 기차에 타고 있을 때나 되뇌이면서 만주의 본부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본부에 도착한 오광심 선생은 외운 내용을 구술로 보고했는데, 틀린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
∎ 광복군창설과 제3지대의 활동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광복군 창설계획을 세운다. 1940년 충칭으로 이동한 임시정부는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사령부와 지대를 편성한다. 김학규 선생은 사령부 참모와 제3지대장을 맡았고 오광심 선생은 3지대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주요 활동은 대일선전, 정보수집 및 초모공작이었다. 푸양에 거점을 두고 지하활동으로 전개된 초모공작은 일본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이로 인해 160명에 달하는 조선 청년들을 광복군으로 모집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초모공작: 중국 내의 한인 청년들과 일본군으로 징집된 조선인 학도병을 포섭하여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는 활동
한국광복군 창설식에서 오광심 선생을 비롯한 여성 광복군들은 군복을 입고 참가하였다.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광복군을 홍보하고 기관지 ‘광복’을 간행하는 선전사업을 담당하였던 오광심 선생은 ‘광복군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는 것이다’라며 남녀 구분 없는 참여를 독려하였다.
1941년 1월 1일 광복군 제5지대 창설 기념사진. 일제 때 중국은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조직된 항일군대. 해체일시 1946년 6월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광복군의 조직을 찬성했지만, 한편으로 임시정부와 분열 상태에 있는 김원봉(金元鳳)계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와 이미 합동하여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이에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韓國光復軍總司令部)의 성립전례를 가지고 우선적으로 광복군을 발족시켰다.
발족일을 전후하여 광복군 조직의 포고문, 선전 전단 등이 배포되었고,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는 관계법규를 정비하였다. 총사령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이 취임했다.
광복군은 3개의 지대(支隊)로 편성되었다. 제1지대장에 이준식(李俊植), 제2지대장 공진원(公震遠),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가 취임했다. 또 1941년 1월에는 제5지대가 편성되어 나월환(羅月煥)이 통솔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9일 대일선전(對日宣戰)을 정식으로 포고했다. 이를 계기로 분열상태에 있던 공산진영과 협업하는 작업이 추진되어 1942년 7월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했다.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던 광복군은 1944년 8월에 임시정부로 이관되어 임시정부 통수부(統帥府)가 통할하기 시작했다. 광복 직전에는 한미합동작전으로 국내 정진대(挺進隊)를 편성하여 진격하려다가 출동 시기가 임박해 일제가 항복하면서 실현하지 못했으며, 해방 후 일부는 귀국했다.
귀국한 광복군의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의 창군과정에서도 주역이 되지 못하고 만주사관학교나 일본사관학교 출신들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김학규, 오광심 부부
∎ 광복
김학규 선생은 중국 중앙훈련단과 중국 내 미군사령부에 한국광복군 훈련반을 설치하고, 미국 OSS와 연합작전을 위한 정보원과 한국 내 진공작전 요원을 양성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꿈에도 그리던 광복이었지만 선생은 상해로 가서 광복군 총사령부 주호판사처 처장으로 활동하며 3만여 교포의 안전, 재산 보호, 안전한 귀국을 위해 노력했고 오광심 선생은 심양에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김학규, 오광심 선생은 1948년 4월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정부는 김학규 장군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오광심 선생에게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학규, 오광심 선생은 한 묘비(독립유공자 50, 50-1호)에 함께 안장되어 계십니다.
김학규, 오광심 선생 묘비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