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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그건 사람이 아니냐)
함석헌
어머니의 성은 김씨, 이름은 형도(亨道)입니다. 그 이름도 우리나라 대개의 여자가 다 그랬던 것같이, 어머니도 인생의 절반을 넘기도록 가지지 못했고, 일본한테 나라가 망하고 총독 정치 밑에서 호적을 전부 새로 갈 때 여자도 모두 이름이 있어야 한다 해서,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얻으신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동리 어른들이 사랑방에 모여 네집 내집의 여자들 이름을 떡 빚듯이 모조리 지어 붙이던 그 때 광경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형(亨)자는 아버지 이름이 형택(亨澤)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한 자를 따온 것이고 도(道)자는 왜 붙였는지 모르나, 어머니의 일생으로 보아 잘 맞는 글자라 하겠습니다. 글은 몰랐지만 어머니는 과연, 도리에 밝으셨고, 또 중년 후부터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었기 때문입니다.
1898년 음력 2월19일 평안북도 용천 진고지(辰串) 농가집 둘째 딸로서 남쪽으로 30리나 떨어져 있는 사점(獅子島)에 역시 가난한 소작농의 외아들인 같은 나이의 아버지와 결혼하여 7남매를 낳아 맨 위와 아래 둘을 낳자마자 곧 잃어버리고, 우리 2남 3녀를 키워 장성시켰습니다.
여자로서 보통 키였고 미끈하고 균형잡힌 체격에, 침착한 몸가짐이었고, 얼굴은 미인이라기보다는 맑고 점잖은 타입이었습니다. 말 적고, 감정에 자기를 잃는 일 별로 없고, 의지는 굳센 편이었습니다. 두뇌는 퍽 명석했던 분으로 아마 요즘 세상에 나셨다면 누구한테 뒤지지 않는 지식인이 되지 않았을까 고 생각합니다. 손 재주도 좋으셔서 가난한 살림이면서도 명절 때 내 옷차림은 동무들 속에서 뛰어나서 동리 부인들이 몰려와 일부러 그 바느질 솜씨를 구경하며 감탄하던 것을 나는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명절날 밤엔 흔히 밤을 밝히면서 바느질을 했고 나도 곧잘 옆에서 지켜보곤 했습니다. 결코 남에게 떨어지는 이 아니었습니다.
불효, 그 앞에 절망없이
세상에 나같은 불효는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임종을 못 했습니다. 아버지는 1940년 내가 평양 시외 송산리(松山里)에 고등농사학원을 맡아 나갔다가 그 해 8월 계우회(鷄友會) 사건이 터져 대동경찰서 유치장에 일년 들어가 있는 동안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맏상주 노릇도 못했습니다. 경찰서에서 돌아와 보니 집안은 말이 아니됐고 어머니가 한없이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있는 정성을 다해 남은 해를 모셔 보려 했는데 한해를 지나니 이번에는 성서조선 사건이 또 터져 서울로 잡혀와야 했습니다. 그래 서대문 형무소에 일년을 있다가 돌아와 땅을 파먹는 농사꾼이 되어있는데 해방이 됐습니다. 해방이 됐어도 나는 일할 생각이 없었는데 세상은 나를 끌어 내세워 신의주 학생사건의 책임을 지고 소련군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몇 번을 죽었습니다. 우선 사건나던 그날 소련 군인의 총과 우리 공산당원의 몽둥이에 50일을 죽었다 살아났고, 다음은 그 감옥에서 영원히 죽어, 나오려니 생각은 못했고, 50일을 있다가 뜻밖에 놔 주기에 살았나보다 하고 집에 와 있으니 일년만에 또 크리스마스 밤에 잡아가서 이번은 정말 마지막인가 했는데 한달 후에 또 다시 나왔습니다. 그러니 그 동안 어 머니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마흔다섯이 되도록 시(詩)라고는 할 줄도 써본 일이 없던 내가 노래를 쓰게 된 것은 감옥 안에서 어머니 생각을 하면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시를 쓰자 해서 쓴 것이 아니라, 어머니 생각을 하니 자연 내 마음 자체가 애절한 시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내 앞에 영원한 슬픔의 형상으로 서 계십니다.
감탕흙 딛고 올라가자던 분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맨 먼저 느끼는 것은「끊임 없이 올라가자는」뜻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머니만 아니라 우리집 전체가 그렇다 해야할 것입나다마는 그래도 어머니의 노력없이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 아니라 감탕물 먹는 바닷가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맨 서북 모퉁이, 압록강이 황해로 들어가는 바로 그 지점, 아주 구석지고 하잘 것 없는 농사꾼들이 사는, 천대받는 곳이었습니다. 이상한일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이 살고 남긴 찌꺼기,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려 영원한 어머니 가슴인 바다 밑에 가라 앉혀 이룩된 것이 감탕흙입니다만 어머니도 그 속에서 났습니다. 아마 그랬기 때문에, 다시 더 가라앉을 데가 없기 때문에, 올라오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짓밟힌 것이 다 올라오려는 정신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 때 그 지방에 살던 사람을 다 생각해봐도 인간다운 의식(意識)을 가지고 꿈틀거려 본 것은 몇이 못 됩니다. 대부분 그저 감탕 속에 꿈지럭이다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점에서 보면 어머니는 이름 없이 났다 이름 없이 갔지만, 결코 보통이 아닙니다. 보통이 아니라고 무슨 지배의식이라도 가졌던가? 아닙니다. 도리어 그 보다는 일반이 그렇게 눌린 속에서 내로다 하는 생각조차 못하기 때문에 그 무지함이 마차 내려가는 기압이 수은주를 올리듯 몇 되지 않는 깬 마음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50이 될 때까지 글자는 한자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소작농의 집에 났으면서도 일찍부터 한의술을 배워 의사로 일생을 마치면서 흙은 만져보지도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40대까지 글자대로 손톱 발톱이 닳도록 일하는 농부였습니다. 그러나 그저 썩지 말자는 생각은 강했습니다. 그러므로 글이 없을 뿐이지 지식은 없지 않았습니다. 나는 행동의 세세한 지도에 관해서는 어머니께 받은 기억이 많습니다. 처음으로 절하기를I 배우던 데서부터 옷고름을 매고 대님을 묶고 수저를 들고 놓는 것을 자세히 가르쳐주시던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퍽 감격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여나문 살 되던 때 일인데, 그 때 아버지는 하시는 약국 관계로 집을 떠나 외가에 가서 계셨는데, 내가 어느 날 외가에 가게 됐습니다. 유달리 수줍음이 많은 나를 붙잡고 어머니는 단단히 일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람 있는 데라고 부끄럽다고 아버지한테 절을 아니 해서는 못쓴다. 사람의 자식이 그래서는 못쓴다 하셨습니다.
솔직한 말로 상놈들이 사는 지방이라, 양반들이 하는 모양으로 어려서부터 원숭이 가르치듯 까다롭게 틀에 박힌 인사를 가르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집안끼리에서 인사란 별로 없는 것이 일반 풍습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내가 행여 버릇없는 자식이 될까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그 때 벌써 글의 지식으로는 어머니 위에 섰었던 만큼 그것이 한없이 고맙고 존경스럽게 생각되어 속으로 기뻐서 평소의 약점을 이기고 가서 하라는 대로 깍듯이 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어머니는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1915년에1) 내가 태어난 사점을 떠나 어머니의 고향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동안 아버지의 약방이 잘되어 살림이 좀 넉넉해졌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 그 지방에서는 10리20리가야 하나 있을까 말까 하던 두루거리 큰 기와집을 사가지고 간 것입니다. 이때 어머니는 퍽 기뻐하셨고, 그 때까지 하던 김매기를 그만두고, 아주 판박힌 중류 살림의 어엿한 주부가 되셨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집에서 40리 떨어진 양시(楊市)에 가서 첨으로 남의 집 밥을 먹으며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평양에 나가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3학년을 다 마치게 됐다가 3.1운동에 앞장서서, 학교를 나오게 됐고, 결혼을 했고, 이태동안 공부가 중단된 것 때문에 속을 썩히다가 오산(五山)학교에 들어가 일생을 통하여 큰 전환점이 됐고, 1923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동경서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집 살림도 많이 늘어 움직일 수 없는 중류충이 되기도 했지만, 그 보다도 놀랄 것은 아버지,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집 옆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아버지는 장로가 되셨고 어머니는 권사가 되신 것입니다.
한 촌로의. 영적 체험,
어려서부터 나는 교회 안에서 자랐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신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거의 온 동리가 다 믿는데도 교회는 가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반대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두 분이 다 그저 남 따라 무엇을 하기에는 너무도 자주적이었고 이성적(理性的)이었습니다. 내가 난 이후 나는 우리집에서 다툼이 있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언성을 높이고 감정을 써서 말을 하거나 상스러운 욕을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아버지 어머니도 다 그러했습니다. 어느 면으로는 아주 찬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러나 속을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동리에서 누구와도 잘 사괴며 지냈고 어려운 사람을 동정하는 면에서도 우리 집이 늘 앞섰습니다. 나도 자란 후에야 알았지만 그 미신 많던 시절에 우리집에는 귀신 사괸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집의 누구가 점을 치러 다니거나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하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이성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감사합니다.
그런 분들이 어떻게 종교를 믿게 됐을까? 우리는 부자끼리도, 모자끼리도 별로 토론이 없는 것이 보통입니다. 제각기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믿어 말하기 전에 벌써 합의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든다면 전문학교에 들어갈 때도 아버지나 어머니가 너는 무얼 하려느냐, 무엇을 해라 한 일도 없고 내가 또 무엇을 전공할까요 물은 일도 없습니다. 그랬어도 잘못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기독교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모님도 믿으셨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언제 한번 권해본 일 없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신앙에 들어가신 것은 누가 권해사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것을 하기 위해서 한 일입니다. 생각이 많으셨던 것을 내가 압니다. 그 말 없으신 분들도 때때로 말 끝에 내비치신 것을 들었습니다.
첫째는 인생의 마지막 귀절에 들자 공(公)을 위해서 어떤 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양심이 아주 날카로운 분이었습니다. 이런 시골 구석에 태어났으면서도 말년에는 명의라는 소문이 나서 서울, 만주 북지에서까지 환자가 왔던 일이 있는데도 돈 모을 생각은 아니 하셨습니다. 「돈을 모으려면 그거 못하겠느냐? 그러나 사람이 그 래서는 못쓴다.」
어머니는 더구나 그런 것만 아니라 깊은 영적 체험까지 얻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조금도 그 성신과 같은 태도를 나타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둘째는 자녀 교육을 생각해서 그중에서도 나를 생각해 하신 점이 많습니다. 나는 17세에 나보다 한 살 아래인 내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전혀 부모님 의견에 따라 했습니다. 어느 때평양에 있는 내게 아버지가 결혼하면 어떠냐고 묻는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때 이미 나는 무조건 관습대로 따르는 지경은 지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형편을 보아서 부모님 의 견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잘한 일은 못됩니다. 그후 오래지 않아서나는 결혼을 너무 이르게 했다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지식 청년사이에 유행했던, 이혼 같은 것은 그때도, 그후도 생각해본 일조차 없습니다.
아내는 전연 교육을 받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 내가 졸업을 하고 돌아오기 전에 그에 대한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듯합니다. 그 때 두 분이 교회에 나가시며 며느리까지 데리고 나가셨고 아버지, 어머니가 손수 며느리 교육하기를 시작 하셨습니다.
이리해서 어머니는 해방 직전까지 그 지방여성 에서는 지도적인 인물이 되신 것입니다.
채마밭에서 느낀 母情
끝으로, 내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내 사상의 밑돌을 어떻게 어머니가 놔주셨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는 본래 인자해서 나는 억울한 꾸중을 듣거나 매를 맞거나 한 일은 한번도 없습니다. 단 하나 예외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잘못은 아닙니다. 아마 서너살 때의 일이 아닐까, 하룻밤은 자다가 깨니 갑자기 까닭을 모르게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앉아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자다 말고 웬 지둑이냐고 꾸짖으셨습니다.
그 때 내 생각에도 아버지 어머니가 잘못해주었다는 것 아니었습니다. 그때의 감정을 나는 지금도 못잊습니다. 후년에 학교에 선생이 된 다음의 소감으로는, 그때 내혼은 어떤 영혼의 엉클어짐이 있어 그러지 않았을까, 그때에 만일 누가 그것을 잘 물어주었다면 나는 혹시 좀더 위대한 혼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도 어머니는 나를 억지로 틀어막지는 않았습니다마는 그 어느 때도 나를 마구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내가 크게 한 침 맞은 일이 있습니다. 7,8살 때의 일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본래 맏아들이었으므로 자연 특권이 붙어 있었습니다. 위에에 고모도 있고 누님도 있었지만 먹는데서는 언제나 내가 제일 위입니다. 가난한 농촌 살림에 맛나는 간식 자료가 있을 리는 없고, 누룽지나 채마밭의 오이나 옥수수가 최고입니다.
어느 늦어가는 가을날 궁금한 생각에 채마밭에 들어가니 다 늙어가는 넝쿨 밑에 오이가 하나 달렸는데 아직 어려서 먹을 나위가 없었습니다. 그래 며칠 기다렸다 따먹으리라 하고 보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럴만한 날이 되어서 가보니 없습니다. 우리집에 불문율로 당연히 내 차지인 것을 감히 누가 먹었을까? 알아보니 내 바로 밑의 여동생이 따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여동생은 우리 5남매 중에서도 좀 못난 편이어서 모든 것에 남한테 뒤지지를 싫어하시는 어머니가 그 때문에 속도 적잖이 썩혔습니다.
물론 내가 언제 내것이다 선언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나의 특권의식에서 나온 횡포였습니다. 그래서 그 불쌍한 것을 나는 구박을 했습니다. 나는 어머니도 당연 내편을 들 줄 알았는데, 뜻 밖에도 어머니는 부드럽고 미는듯 하면서도 단연한 목소리로「얘, 그건 사람이 아니냐?」했습니다.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그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못잊습니다.
「그건 사람이 아니냐?」그 음성은 늘 살아있어 내속에 몇번을 부르짖어졌는지 모릅니다. 나는 이제 자유(自由)와 평등(平等) 사상을 내놓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씨 사상을 부르짖고, 스스로 타고난 민주주의자라 하기도 합니다마는 나는 그 밑바닥의 반석은 어머니가 놓아주셨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가 지금은 어디 계실까? 1947년 2월 26일, 영원한 마지막이 될 줄은 모르고 월남의 길을 나서던 날 어머니는 대문에 기대 나를 보내주셨습니다.「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가거라!」하셨습니다. 내가 감옥에 가 있을 때 추운 겨울밤 잠은 아니 오고 견딜 수 없이 물레질만 하셨다는 어머니, 그것도 부족한듯해「이 추운 밤 저애가 불도 없는 감옥에서 자니 얼마나 추울까? 나도 저처럼 견뎌보자」는 생각에 밖에 나가 밤을 새워보았다는 어머니가 자기 생각은 말고 가라니 그 가슴이 어떠했겠습니까, 나를 살리기 위해서는 자기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도 참으시겠단 말 아닙니까?
나는 어머니 생각을 하면서 어머니의 슬픔의 물레에서 끝없이 풀려나오던 실 같은 내 생각을 여기서 끊고 나도 이 시대의 아들 딸들을 향해 부릅니다.
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갈 길 가거라!
1) 원문에는 38년으로 기록, 저작집30(한길사2009)에는 1918년으로 기록, ssialsori.net 생애기록에는 1915년으로 기록되어 있음. 상황으로 보아 1915년이 타당하다.
주부생활 1975. 7 11권 7호
저작집30 ; 7-63
전집20 ; 4-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