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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소통운동본부(CCCC) 원문보기 글쓴이: 평택 소통 김평탁
8월 4일 오늘의 역사<말씀> : CCCC 국민소통운동본부
평택 소통 김 평 탁
8월 4일
오늘의 말씀
① 시편 4장 전문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시24:5, 렘33:16, 시17:6, 시39:12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호4:7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욥7:7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시89:15, 사9:3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② 잠언 4장 전문
○ 아들에게 주는 아비의 훈계
1.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2.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3.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대상29:1
4.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5.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잠16:16
6.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살후2:10
7.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찌니라 눅10:42
8.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삼상2:30
9.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
10.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
11.
내가 지혜로운 길로 네게 가르쳤으며 정직한 첩경으로 너를 인도하였은즉
12.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란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에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시91:11, 잠10:9
13.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14.
사특한 자의 첩경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찌어다
15.
그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찌어다
16.
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
17.
불의의 떡을 먹으며 강포의 술을 마심이니라 잠13:2
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19.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20.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21.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잠3:21
22.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24.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마12:35, 마15:18, 눅6:45
25.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26.
네 발의 행할 첩경을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히12:13
27.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오늘의 역사
① 신익희 제2대 국회의장 피선(1948) : 1948.5.31 제헌국회가 역사적인 개원을 하자 초대 국회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김동원을 각각 선출하여 대한 민국 최초의 법률제정을 시작하였다.
국회는 대통령 책임제의 헌법을 통과시키고 7월 17일 헌법 공포식을 거행하였으며, 7월 20일에 국회는 새 헌법에 의거,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였다.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가 당선되어 7월 24일 취임하게 됨에 따라 국회에서는 다시 신익희를 국회의장으로 선출하였다.
② 김활란 박사 막사이사이상 수상(1963) : 한국이 낳은 여성교육 지도자 김활란 박사는 1963.8.4 동양인 최초로 막사이상(필리핀)을 수상하였다.
박사는 1899년 인천에서 태어나 장학생으로 이화학당을 거쳐, 1922년에 도미유학, 유슬리언대학과 보스턴대학을 졸업 귀국하여 이화대학에 봉직하면서 평생을 독신으로 여성교육에 몸바쳤다.
일제 식민지 통치하 1927년에는 여성 독립운동단체 근우회를 창립하였고, YMCA 이사장,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유엔총회를 비롯하여 많은 국제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 국위(國威)를 선양하였다.
수상식은 8월 31일.
③ 6․25 전쟁포로 교환(1953) : 1953년 오늘 판문점!
6.25전쟁 중 잡힌 전쟁포로 교환이 시작됩니다.
6월 8일과 7월 27일 각각 체결된 포로교환협정과 정전협정에 따른 후속 조칩니다.
포로 교환 첫날 공산측이 유엔측에 인도한 포로는 4백명 ! 유엔측이 공산측에인도한 포로는 2천7백53명이었습니다.
포로교환은 9월 6일까지 33일 동안 계속됐습니다.
이 기간동안 공산측은 만3천4백64명의 포로를 유엔측에 넘긴 반면 유엔군측은 이보다 약 6배가 많은 8만2천4백93명을 공산측에 인도했습니다.
④ 국보위, 사회정화책 발표(1980) : 1980년 8월 4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를 발표하고 대대적인 군경 합동 검거작전에 돌입했다.
이는 사회정화책의 일환으로 각종 사회악을 단시일 내에 효과적으로 정화하고 사회개혁을 이루겠다는 명분 아래 진행되었다.
검거 대상은 폭력배와 사회풍토 문란사범으로서, 1981년 1월까지 4차에 걸쳐 6만 755명이 체포되었다.
피검거자들은 보안사령부 요원, 중앙정보부 요원, 검사, 경찰서장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A․B․C․D의 4등급으로 분류되었다.
A급 3,252명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B급과 C급 3만 9,786명은 각각 4주 교육 후 6개월간 노역을 하고 2주 교육 후 훈방조치되었으며, D급 1만 7,717명은 경찰에서 훈방되었다.
이들의 교육을 담당한 곳은 군부대 내에 설치된 삼청교육대로, 헌병들이 연병장을 둘러싸고 감시하는 가운데 교육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교육 대상자 가운데는 억울하게 검거된 사람들이 많았으며, 교육 중 가혹행위로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1988년 정기국회에서 이들 가혹행위에 대한 국정감사가 이루어졌다.
⑤ 훈 할머니 귀국(1997) :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뒤 이역 땅 캄보디아에서 살아온 훈 할머니 !
훈할머니가 1997년 오늘 50여년만에 고국땅을 밟습니다.
외손녀들과 동행한 할머니는 "혈육과 고향을 찾아달라"고 쓴 종이를 내밀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인천 길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고향 찾기에 나선 훈 할머니가 극적으로가족을 만난 것은 고국방문 25일째 !
(8월 29일) 유전자 감식 결과 혈육임이 확인된 동생 이순이씨와 올케 조선애씨를 병실에서 상봉합니다.
훈 할머니의 본래 이름은 <이남이>, 고향은 경남 마산시였습니다.
다음날 마산시 진동면 고향 마을을 찾은 훈 할머니 !
생가를 방문해 가재도구가 있던 자리 등을 자세히 기억해내며 감격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⑥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자살(2003) : 대북송금과 비자금 150억원 조성 의혹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아오던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2003년 오늘 서울 계동 현대사옥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몽헌 회장의 사무실에서는 '대북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됐다.
2000년 3월 이른바 '왕자의 난'을 통해 공식적으로 현대그룹의 법통을 이어받은 정 회장 !
의욕적으로 추진한 대북 사업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와 검찰의 잇따른 소환 조사에 중압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⑦ 남산 안기부 청사 폭파해체(1996) : 서울 남산의 국가안전기획부 청사 가운데 하나인 제1별관이 '남산 제모습찾기'사업의 일환으로 1996년 오늘 폭파해체됐다.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탄압과 인권유린으로 악명이 높았던 안기부청사는 남산 외인아파트, 하얏트호텔 등과 함께 남산의 경관을 해치는 흉물로 지적되어왔다.
이날 해체된 5층짜리 직사각형 회색 건물은 발파단추를 누르자 연쇄 폭발음과 함께 내려 앉았다.
건물 잔해 위로 남산타워가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지켜보던 폭파해체팀과 시민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팽팽한 긴장의 순간도 잠시. 정문 초소에서 폭파 단추를 눌렀다.
“쾅” 하는 굉음에 이어 연쇄 폭발. 높이 18.5m(5층), 연면적 2581㎡(약 781평) 규모의 직사각형 회색 건물이 도미노식으로 내려앉았다.
건물 외벽에 둘러친 차단막을 뚫고 뿌연 회오리 먼지가 치솟았다. 10여 분 뒤. 먼지가 가라앉은 잔해 위로 남산타워가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1996년 8월 4일.
남산의 옛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청사 제1별관이 서울시의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의 하나로 폭파 해체됐다.
민주화 탄압과 인권 유린으로 악명 높았던 안기부 청사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5초. 30여 년 공포정치의 무소불위 권력은 무상했다.
이보다 앞선 1995년 9월. 안기부가 서울 서초구 내곡동 신청사로 이전해 23년간의 ‘남산시대’가 막을 내렸다.
안기부는 5·16군사정변 직후 김종필 씨 주도로 창설된 중앙정보부의 후신.
러시아혁명 뒤 레닌이 만든 체카(KGB의 전신)나 히틀러가 조직한 게슈타포가 그랬듯이 ‘반정부세력’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정치사찰, 정치공작, 언론탄압이 이뤄졌던 곳이 안기부 청사였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장세동 안기부장이 한때 이곳의 주인이었다.
군사독재의 절정기에는 음습한 정치공작과 고문이 벌어졌다.
유신헌법 반대 시위 대학생들의 체포에 항의하던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가 1973년 의문사한 곳도 여기다.
남산시대가 끝나자 ‘남산’이란 단어 자체만으로도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시절은 기억 저편으로 묻혔다.
안기부는 어두운 이미지를 씻고 국민에게 다가가겠다고 약속했다. 제1별관 폭파는 새 출발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1999년 그 이름도 국가정보원으로 바꿨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국정원은 어떤가. 민주화 이후에도 정치사찰, X파일 유출, 도청 등 독재정권의 구태를 다 정리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처남의 부동산 자료 열람 등을 놓고 공작정치 논란을 빚고 있다.
지난해 8월 한 달 동안에만 정부 전산망으로 수천 건의 개인정보를 열람한 사실도 드러났다.
남산 안기부 청사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본관은 그대로 남아 세계의 젊은 대학생들이 모여드는 서울유스호스텔로 바뀌었다.
3일 총지배인에게 물으니, 21개국 젊은이 300여 명이 이곳에 머물며 미래 지향적 국제교류에 여념이 없다고 한다.
조직과 사람은 아직 옛 버릇을 못 버렸는지 몰라도 건물만은 환골탈태한 셈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2007)
⑧ 독립기념관 화재(1986) : 1986년 8월 충남 천안시 목천읍 흑성산 자락. 오룡쟁주(五龍爭珠)의 명당인 이곳에선 민족자존의 성전인 독립기념관을 짓는 대역사가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121만 평의 터 한가운데에 우뚝 선 겨레의 집은 길이 126m, 폭 67m, 높이 45m의 단층 구조였다.
4만1316장의 구리기와를 얹은 맞배지붕 면적만 3000평이나 됐다.
겨레의 웅혼한 기상을 나타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15일이면 대통령이 참석하는 광복절 기념식 겸 개관식이 이곳 겨레의 집에서 성대히 치러질 참이었다.
밤늦게까지 마무리 작업이 이어졌다.
역사적인 날을 열하루 앞둔 4일에도 그랬다.
그런데 이날 오후 9시 50분 이 성스러운 곳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치욕의 불꽃이었다.
불꽃은 삽시간에 지붕을 삼켰다.
붉게 빛나던 구리기와가 속절없이 녹아 내렸다.
웅대한 겨레의 집만큼이나 치솟던 겨레의 자존심도 함께 녹아 내렸다.
독립기념관이 어떤 곳인가.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분노한 온 국민이 벽돌 한 장 쌓는 심정으로 모은 정성의 총화였다.
신문팔이 소년은 신문 대금을, 강원도의 산골 중학생들은 약초를 캐서 모은 돈을, 독립유공자 유족은 몇 달치 연금을 맡겼다.
8월 31일부터 연말까지 단 넉 달 동안 353억6464만2300원이 모였다.
모금기간이 끝났어도 성금 행렬은 이어졌다.
경제인 성금에다 기념배지 판매이익금과 이자를 합쳐 1986년 5월까지 모두 691억9158만2490원이 모였다.
1년간의 토목공사에 이어 1984년 8월 15일엔 건축물 기공식이 열렸다.
3년 뒤엔 이곳이 겨레의 성전이 될 터였다.
여기에 정권이 끼어들었다.
1986년 열릴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이전에 준공하기로 한 것이다.
공기(工期)를 무려 1년이나 앞당겼다.
치욕은 여기서 비롯됐다.
시간에 쫓긴 시공업체는 6월 공사장에서 심부름을 하던 한 청년에게 전선 연결 작업을 시켰다.
도면에 그려진 대로 선을 이어 가던 무자격 전공이 그만 380V 선에 110V 선을 연결하고 말았다.
40여 일이 흘렀고 전기 설비에 대한 검사도 받지 않은 채 불법으로 조명등을 켰다.
불꽃이 튀었고 가연성 자재로 뒤덮인 천장으로 번졌다.
부랴부랴 끌어 온 소화전의 호스에서 나온 물줄기는 겨우 30cm를 뻗어 나갈 뿐이었다.
그나마 1분을 넘기지 못했다.
총체적 부실이었다.
정권의 과시욕이 온 국민의 가슴을 까맣게 태운 사고였다.
결국 개관은 처음 계획대로 1987년 8월 15일로 미뤄졌다.
(여규병 기자 3springs@donga.com.2006)
⑨ 케냐 육상선수 특수 훈련(1965) : 아프리카 케냐의 중거리 육상선수 윌슨 키프러거트 !
1965년 오늘 !
특별한 방법으로 육상연습을 합니다.
키프러거트의 연습상대는 케냐에서 흔히 볼 수있는 야생 타조 !
키프러거트는 타조를 좇아 이러저리 뛰어다니면서 지구력과 순발력을 기릅니다.
초원에서 연습을 한 키프러거트 선수에게 육상트랙은 수월한 연습장소처럼 보입니다.
⑩ 영국 모터사이클 경기(1967) : 1967년 오늘 !
영국에서 열린 브랜즈 해치(Brand''s H) 모터사이클 경기대회 !
모터사이클 선수들이 트랙을 돌며 결승점을 향해 질주합니다.
일부 선수들은 연습할때 만큼 실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모터사이클과 함꼐 트랙을 벗어나는 선수들!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모터사이클 경기지만 출전 선수들은 스릴을 만끽하면서 또다른 경기를 준비합니다.
⑪ 세계 첫 슈퍼마켓 뉴욕 변두리에 등장(1930) : 뉴욕시 변두리 퀸즈의 자메이카 거리.
번잡한 쇼핑가에서 몇블 럭 떨어진 한적한 이곳, 어제까지 헌 차고였던 낡은 건물엔 '킹 컬렌'이란 빨강 글씨 간판이 드높이 매달렸다.
2백평이 넘는 매 장은 골목 골목 선반이 줄을 이뤘고 그 위엔 통조림과 빵, 과일 등 식품이 넘쳐났다.
손님들은 점원의 안내없이 스스로 필요한 물건을 찾아 바구니에 담았다.
장보기 역사를 새로 쓰게 된 순간 이었다.
미국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슈퍼마켓'은 대혁신이 란 말이 아깝지 않은 큰 변화였다.
창업자 마이클 컬렌은 상점에 서 잔뼈가 굵은 사업가.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의 아들로 태어나 18살부터 상점 점원으로 일해온 그는 대공황과 대도시화, 자동차 의 대량 보급이란 시대 변화에서 소매 상점의 일대 혁신 중심어 를 찾아냈다.
값싸게, 빠르게, 대량 구매를!
손님과 물건 사이 를 가로막는 장벽을 철폐하라!
컬렌의 아이디어는 명확했다.
'가격 파괴'란 말은 이때 이미 등장했다.
켈런은 스스로를 '가격파괴자(price wrecker)'라고 불렀다.
가게 넓이를 당시 식 품점 평균보다 3배 이상 확대하고 셀프 서비스로 점원 수를 대 폭 줄여 상품가격을 확 낮췄다.
판매 이윤도 낮췄다.
자동차 타 고 와서 한번에 많이씩 사가라고 매장보다 더 넓은 주차장 (parking lot)을 만들었다.
창업 2년만에 킹 켈런은 미국 최대 슈퍼마켓으로 성장했다.
종업원 서비스가 없는'노 프릴(장식없 는)' 상점으로 빅 베어가 뒤이어 등장했고, 식품 뿐 아니라 자 동차용품, 문구류, 그릇, 생활용품, 라디오까지 파는 대형 상점 들이 30년대 중반까지 미국 전역에 생겨났다.
⑫ 영국, 프랑스․독일에 선전 포고(1914) :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 발발 !
1914년 오늘 !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마침내 유럽전역으로 전쟁이 확대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입니다.
이에 앞서 40여일전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부부를 암살함으로써 유럽에 전쟁 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과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군 지원소에 몰려드는 영국의 젊은이들.
당시 영국은 지원병 제도였지만 참전희망자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들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어떤 전쟁에 참가하는지도 모른채 애국심때문에 전쟁터로 향합니다.
당시 유럽의 전선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연합국측과 독일, 오스트리아등의 동맹국측으로 나뉘어져 치열한 전투를 전개합니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만 4년여에 걸친 제1차 세계대전은연합국측의 승리로 끝을 맺습니다.
1차 세계대전으로 9백만명이 숨지고 3천3백억 달러의 재산피해가 발생했습니다.
⑬ <제3차 세계 대전> : 가상 다큐먼터리.
영국에서 베스트 셀러.
전 영국 장군이 체험을 토대로 집필.
자료 수집에 군인들 참여.
군부(軍部) 입김 담긴 정치 소설이다.
1985.8.4. 일요일 새벽 4시 47분.....
마침내 제3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이다...
..
⑭ 아시아 독트린 천명(1969) : 닉슨 미국 대통령.
⇨7월 25일.
⑮ 미국 조종사 비행기록 도전(1939) : 1939년 오늘 ! 미국인 조종사 두명이 연속비행기록에 도전합니다.
모험을 좋아하는 조종사들은 갖가지 비행기록에 도전했습니다.
1939년 오늘 모험에 나선 두 명의 조종사는 자동차와 급유 파이프를 이용해 24시간 연속비행에 성공합니다.
⑯ 위스키 반란 : 1794년 8월4일, 워싱턴 대통령이 민병대 소집령을 내렸다.
목적은 펜실바니아 농민 반란군 진압. 정규군이 없어 민병대에 의존할 만큼 연방정부는 가난하고 힘도 없었다.
워싱턴은 각 주가 지원한 민병대 1만3,000명을 직접 이끌었다.
독립전쟁 당시 어떤 단위부대보다 더 큰 규모의 진압군은 농민반란군을 손쉽게 물리쳤다.
10월경에는 반군 세력이 완전히 소멸됐다.
‘위스키 반란’은 말 그대로 위스키로 인해 발생한 반란. 예산부족에 허덕이던 연방정부가 위스키에 대해 소비세 25%를 부과한 게 발단이다.
조세 저항이 따르자 재무부장관이던 해밀튼은 사치품에 대한 과세와 함께 지나친 음주로부터 미국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문제는 위스키가 사치품이 아니라 일종의 물품 화폐였다는 점. 특히 서부지역에서 농민들은 곡물을 수확하면 바로 증류했다.
술로 만드는 게 수송비를 아끼는 첩경이었기 때문이다.
대용화폐로 쓰이는 위스키에 대한 과세는 실질적으로 화폐와 상거래에 대한 과세였으니 불만이 컸을 수 밖에.
1791년 초부터 조세저항으로 시작돼 군사반란으로 막을 내리기 까지 3년 간 진행된 위스키 폭동은 교통인프라 확충이라는 뜻밖의 결과물을 낳았다.
대규모 병력의 이동에서 겪었던 불편이 수많은 유료도로와 운하를 탄생시켰다.
연방정부가 최소한의 힘을 가져야 한다는 공감대까지 확산됐다. 연방정부로서는 반란 덕분에 꿩 먹고 알 먹고 둥지까지 땐 셈이다.
타협보다는 무력에 의존하는 기질도 위스키 반란을 통해 더욱 굳어졌다.
전쟁을 경험할 때마다 국력이 일취월장한 미국은 유일한 초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요즘에는 보다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 국민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의 작전설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걱정스럽다.
(2007.서경.<저작권자 ⓒ 한국아이닷컴)
⑰ 통킹만(바크보만) 사건(1964) : 8월 2일 베트남의 동쪽 통킹만 에서 북베트남과 미국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다.
이것이 미국의 북베트남 폭격과 확전으로 이어진 통킹만 사건이다.
통킹만은 중국 남해안과 레이저우(雷州)반도ㆍ하이난섬(海南島) 및 베트남 북부 해안으로 둘러싸인 남중국해의 만이다.
통킹만 사건의 실상은 그 당시에도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지금도 말끔히 해명되지않았다.
처음에 미국 국방부는 미국의 구축함 매독스호와 터너조이호가 각각 1964년 8월2일과 4일에 통킹만 공해상에서 초계 중에 북베트남의 어뢰정 3척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북베트남 외교부는 매독스호가 북베트남 영해 안에서 북베트남 초계정을 먼저 공격했다고 반박했다.
뒷날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언론이 폭로한 미국 국방부의 베트남 전쟁비밀보고서(펜타곤페이퍼)에 따르면, 이미 1964년 2월1일부터 사이공(현 호치민)의 미군 사령부의 지휘 아래 북베트남에 대한 광범위한 비밀작전(A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작전은 정보 수집, 파괴활동, 연안시설 폭격으로 시작해 궁극적으로는 북베트남 경제의 기초를 허물어뜨리는 ‘선전포고 없는 전쟁’의 밑그림이었다.
요컨대 이 보고서는 남베트남에서 정치적ㆍ군사적상황이 여의치 않게 전개되자 전쟁을 베트남 전역으로 확대하기 위해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도발했다는 북베트남측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셈이다.
8월5일부터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에 나섰는데, 이 북폭은 하노이, 하이퐁등 북베트남의 심장부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단계적으로 확대했다.
미국은 그 나라의 역사상 유일한 패배를 기록할 길고 치욕스러운 전쟁으로 점점 더 깊이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⑱ 조지 워싱턴 ‘마스터 메이슨’ 승급(1753) : 프리메이슨.
고대 성채와 신전을 건설하던 건축가들을 뿌리로 내세우는 중세 유럽 석공들의 길드(동업조합)에서 시작된 조직이다.
성당 건축이 시들해지자 석공이 아니더라도 회원 자격을 부여하면서 신대륙은 물론 전 세계로 퍼져나가 거대한 결사조직으로 발전했다.
서양 근현대사에서 온갖 음모론의 중심에는 프리메이슨이 항상 있었다.
프랑스혁명, 미국의 건국, 러시아혁명, 케네디 암살 등의 배후가 프리메이슨이며 세계적인 기업과 언론, 학술, 정보기관이 모두 프리메이슨의 관할 아래 있다는 식이다.
최근 영국에서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25%는 ‘프리메이슨과 그 동맹조직 일루미나티가 세계 지배를 꾀하고 있다’는 소문을 사실로 믿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런 음모론이 터무니없다고만 들리지 않는 것은 몇 가지 단초가 되는 사실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미국의 건국. 미국 독립전쟁을 이끈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을 비롯해 당시 상당수 인사가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사실은 거대 음모론의 주요 배경이 됐다.
1753년 8월 4일, 21세의 젊은 농장주 워싱턴은 버지니아 주 프레데릭스버그 프리메이슨 제4지부의 ‘마스터 메이슨(숙련석공)’이 됐다.
마스터 메이슨은 프리메이슨의 3단계 기본등급 중 도제와 장인에 이은 고위 등급이다.
워싱턴은 마스터 메이슨이 된 뒤 버지니아 의용군 소령으로서 첫 군사작전을 지휘하면서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1788년 대통령 취임 직전엔 알렉산드리아 제22지부의 ‘고명한 마스터’로 선출됐다.
당시 신대륙 엘리트 그룹에 유행하던 프리메이슨이 되는 것은 워싱턴에겐 일종의 통과의례였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 프리메이슨의 철학과 의식을 흡수한 그가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겼다는 추론이 무리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는 취임식 때 프리메이슨의 상징인 컴퍼스와 직각자가 새겨진 의복을 착용했으며, 이 상징은 미국의 1달러짜리 지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을 딴 수도 워싱턴DC 역시 프리메이슨의 과학에 기초해 세워진 도시라는 주장도 나온다.
소설 ‘다빈치 코드’로 큰 논란을 야기했던 작가 댄 브라운이 지난해부터 집필 중인 작품 ‘솔로몬의 열쇠’의 소재도 프리메이슨이라고 한다.
소설의 무대도 워싱턴DC. 또 한 차례 거센 논란을 불러올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부터 무성하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2008)
⑲ 샴페인 :‘1693년 8월4일,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 동 페리뇽(Dom Perignon) 수사가 샴페인을 발명해냈다.’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서 주장하는 샴페인의 기원이다.
구전(口傳)은 보다 극적이다.
‘오비레 수도원은 고민을 갖고 있었다.
미사에 쓰일 포도주를 쌓아놓은 포도주 창고에서 가끔 병들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농부들은 이를 미친 와인이라고 불렀지만 장님으로 남다른 미각을 가진 페리뇽 수사는 달랐다.
연구 끝에 맛이 기가 막힌 발포성 와인을 성공적으로 빚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별을 마시고 있다.’
사실은 이와 다르다.
발포성 와인이 최소한 1544년부터 존재했으며 영국인 물리학자 크리스토퍼 메렛이 1687년 발포성 와인 제조법을 책자로 펴낸 적도 있다.
페리뇽 수사도 장님이 아니라 눈을 감고 포도주를 음미했을 뿐이다.
‘별을 마신다’는 문구 역시 19세기에 등장한 광고다.
다만 페리뇽 수사가 없었다면 샴페인이 명성을 얻기 힘들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두께가 두터운 영국제 유리병을 수입하고 코르크 마개를 사용해 발포성 와인 주조의 최대 난점인 병의 폭발을 막았기 때문이다.
해마다 8월4일이면 국제샴페인축제가 열리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오늘날 고급 발포성 와인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동 페리뇽’에는 진실과 과장이 섞여 있는 셈이다.
정작 동 페리뇽의 ‘가치’를 가장 높게 치는 나라는 프랑스가 아니라 따로 있다.
‘명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 나라에서는 불경기에도 아랑곳없이 와인 수입만큼은 여전히 폭증세다.
‘세월 속에 굳어진 거대한 착각 구조’ 탓일까.
고급 샴페인의 수입도 증가일로다.
1980년대 중후반 반짝 호경기에 따른 과소비 열풍 당시 외국 언론의 비아냥이 떠오른다.
‘한국은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렸다.’
(서경.2008.인터넷한국일보).
⑳ 에브샴 전투(Battle of Evesham)발발(1265) : 영국의 배런 전쟁(Barons' War) 중 시몬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가 미래의 에드워드 1세(Edward I)인 왕세자 에드워드의 왕당파에 의해 패했던 전투이다.
에브샴 전투 승리로 헨리 3세가 왕권 회복
에브샴(Evesham) 전투는 잉글랜드 헨리 3세의 아들 에드워드(Edward) 왕자를 중심으로 한 왕권과 헨리 3세의 매제이자 레스터 백작이었던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 1208 - 1265)를 위시한 귀족 세력간의 대결이었다.
1264년 서쎅스(Sussex) 동부의 '루어스(Lewes)' 전투에서 드 몽포르 백에게 패한 뒤 포로가 된 에드워드가 탈출에 성공, 1265년 에브샴에서 재대결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에드워드는 1264년 루어스 전투 승리 후 분열된 드 몽포르 백작의 세력 가운데 웨일즈 국경 지대의 귀족을 규합하여 드 몽포르 군의 절반을 전멸시키는 압승을 거두었다.
에브샴 전투의 승리와 드 몽포르 백의 처형으로 헨리 3세는 왕권 완전 회복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㉑ 경제회복 감세법 : 1981년 8월4일, 미국 상원이 ‘경제회복 세법(ERTAㆍEconomic Recovery Tax Act)’을 통과시켰다.
발의한 의원들의 이름을 따 켐프-로스 세법(Kemp-Roth Tax Cut)으로도 불리는 이 법의 골자는 감세. 부유층을 중심으로 3년 동안 소득세를 25% 인하하고 인플레이션만큼 추가로 세금을 깎아준다는 내용을 담았다.
법 제정 목적은 법안의 이름대로 경제회복. 법은 목적을 달성했을까.
정반대의 평가가 존재한다.
1983년부터 가시화한 경기회복이 감세 덕분이라는 주장과 경기회복은 1982년 2차 오일쇼크로 연 16%까지 치솟았던 연방기준금리가 한자릿수로 떨어진 금리인하 덕일 뿐이라는 해석이 맞서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후자의 견해가 설득력을 인정 받는 가운데 분명한 사실은 빚이 급증했다는 점이다.
레이건 대통령 집권 직전 9,302억달러였던 국가채무가 첫 임기가 끝난 1985년에는 두 배 이상 불어났다.
문제는 불균형. 감세와 함께 2대 정책목표 가운데 하나였던 ‘작은 정부’는커녕 과도한 국방비 지출로 재정규모가 더 늘어났다.
수입을 줄이고 지출을 확대하는 경제정책은 부시 부자(父子) 행정부에서도 이어져 미국은 헤어날 수 없는 재정적자에 빠져들었다.
임기 초반 부유층 증세를 강행한 클린턴 대통령이 이룬 흑자재정도 레이건에 버금갈 정도로 감세를 감행한 아들 부시 대통령에 이르러 구조적 적자로 돌아섰다.
지난해 노벨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는 글로벌 경제위기의 원인을 레이건과 부시 부자의 감세로 지목했다.
부자 감세와 재정지출 확대는 남의 일도, 옛날 얘기도 아니다.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한국경제의 현주소가 딱 이렇다.
국가재정이 날로 어려워지는 가운데 서민증세 방안이 솔솔 나오고 있다.
(인터넷한국일보, 2009/08/03)
㉒ 기타 오늘의 역사㉓㉔㉕㉕㉗㉘㉙㉚
1467 이시애(李施愛)의 반군 토벌
1735 뉴욕신문발행인 존 피터 젱거, 명예훼손혐의가 무죄로 판명나 미국에서 언론자유 확립
1896 전국을 13도로 지방행정제도 개혁
1914 미국, 1차대전에 중립선언
1916 미국,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 매수조약 성립
1919 불가리아 공산당 결성
1930 임시정부, 국무원 개편, 국무령 김구
1944 안네의 일기 발견
1947 서울방송국 적화공작사건 적발
1949 그리스, 대한민국 정식 승인
1950 낙동강 방어선 구축
1953 델레스 미국 국무장관 내한
1957 전국에 수해(사망 247명, 이재민 6만여명)
1960 민주당 신구파 결렬
1964 미군기, 월맹기지 폭격
1964 월남파병안 국회 통과
1970 키엠 월남수상 내한
1975 이태영변호사, 막사이사이상 수상
1977 세계최대 단일공장 남해화학 여수공장(7비) 완공
1978 경북도 교사자격증 부정사건. 8명 구속
1983 이탈리아 첫 사회당 정부 수립
1984 우루과이 민정이양 합의 발표
1984 정부, 여성차별철폐 유엔협약 비준키로
1984 오토볼타 아프리카공화국, 부르키나파소로 국명변경
1986 독립기념관 화재
1991 그리스 여객선 남아프리카해안서 침몰. 승객 571명 전원구조
1994 구세군 사령관 김성활정령 발령
1994 장애인 대학특례입학제도마련
1996 남산 안기부청사 철거
1996 이봉주 선수,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서 은메달 획득
1996 일본 국민배우 '남자는 괴로워'의 아쓰미 기요시 사망
1931 미국의 의사 다니엘 윌리엄스 사망
1997 세계 최고령자 프랑스의 잔 칼망 할머니 122세로 사망
1996 애틀란타올림픽 폐막, 한국 종합10위
1998 박찬호, 미프로야구 내셔널리그 7월 투수부문 최우수 투수로 선정
1999 치사율 80% 에볼라 바이러스 독일서 첫 출현
오늘의 인물
① 김여기(金礪器 ; ? ~ 1644.8.4)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상주.
자 희숙(熙叔).
철산(鐵山) 출생.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철산에서 전공을 세웠다.
미곶진첨절제사(彌串鎭僉節制使)가 되고, 왕에게서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성진첨절제사로 웅골성(熊骨城)에서 청나라 군대를 대파, 명장 모문룡(毛文龍)의 추천으로 명나라로부터 유격(遊擊)에 임명, 은패(銀牌)를 받았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강화(講和)가 성립되어 청나라가 군사를 징발할 때 중영장(中營將)으로서 임경업의 휘하에 있었으며, 1641년 벽동(碧潼)군수가 되었다.
1644년 선사포(宣沙浦)첨절제사로 있을 때, 임경업이 명나라와 밀통한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하였다.
철산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철산의 충무사(忠武祠)에 제향되었다.
② 안희제(安熙濟 ; 1885.8.4 ~ 1943.8.3) : 일제강점기 때 활동
한 독립운동가.
⇨8월 3일
③ 조오련(趙五連 ; 1952.10.5 ~ 2009.8.4) :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이다.
195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68년 해남고등학교를 중퇴해, 1972년 서울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76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1981년 고려대학교 사학과 학사 과정을 받았다.
1970년에 제6회 아시안 게임 자유형 400미터와 1500미터 1974년 제7회 아시안 게임 자유형 400미터와 1500미터 1위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78년에 수영 부문 한국신기록 50회 수립되었고, 1980년 대한해협 1982년 영국 도버해협에 거쳐 2002년에 대한해협, 2003년 한강 700리 종주, 2005년 독도를 횡단했으며, 2008년 독도 33바퀴 헤엄쳐 돌기 프로젝트를 성공하였다.
1989년 조오련 수영교실, 1993년 조오련 스포츠센터를 세웠고, 1998년 2월부터 대한수영연맹 이사를 맡았다.
2001년 아내가 사별한 후, 2009년 4월 지금의 아내 이성란을 만나 사랑을 싹틔우고 재혼하였다.
2009년 8월 4일 오전 11시 32분 전남 해남군 계곡면 법곡리에 있는 자신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급하게 해남종합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후 약 12시 45분경에 사망하였다.
“ 바람이 멈추고 마음이 멈추고
독도 도전에 시계추도 멈추고
배위에서 독도를 뒤돌아 보며
지나온 나날들
줄렁거리는 멋진 위에 나를
나를 흔들지만
마음은 성취감 속에 희열이 강강수월래 하네
온 국민들의 손을 잡고
독도를 만지고 온 삼부자의 손을 잡고
강강술래하고 싶어라 신발이 닳도록
[출처 필요] ”
—조오련 일기, 2005년 8월
슬하에 2남을 두었으며, 그 중 차남인 조성모도 수영 선수이다.
상훈 [편집]
1970년 대한민국 체육상
1980년 체육훈장 청룡장
2003년 양정총동창회 자랑스런 양정인
⇨8월 11일(대한해협 횡단).
④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 : 1792.8.4 - 1822.9.
19) : 바이런․키이츠와 더불어 영국 낭만파 3대 시인.
극작가.
옥스퍼드 재학 당시 <무신론의 필요성>이란 팜프릿을 내었다가 퇴학당함.
서정시(抒情詩)의 본령적(本領的) 작품을 발표한 그는 이상미(理想美)의 추구와 인간의 자유․해방을 노래했다.
대표작은 <구름에><종달새에(To the Skylark)><서풍(西風)에 부치는 노래(Ode to West Wind ; 西風賦)><알라스터(Alastor)><사슬에서 풀린 프로메데우스(Prometheus)>.
⑤ 암스트롱(Louis (Daniel) Armstrong ; 1901.8.4 - 1971.7.6) : 미국의 대표적인 재즈 음악가이자 트럼펫 연주자.
가수로서 레코드를 취입하고 영화에도 출연했으며 코미디언으로도 활약했다.
그는 기존의 앙상블 위주의 재즈 전통에서 벗어나 훗날 재즈 스윙 필링이라고 알려진 즉흥적 리듬 연주를 대중화시켰다.
또한 노래 가사를 줄이고 대신 의미 없는 음절을 반복함으로써 기악 즉흥연주와도 같은 느낌을 살린 '스캣'이라는 창법을 고안했다.
이 독특한 창법을 이용해 많은 노래 음반을 취입했으며, 이는 다른 가수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1925~28년 그는 자신의 밴드인 '핫 파이브', '핫 세븐'과 함께 재즈사에 남을 만한 탁월한 음반들을 취입했다.
그의 연주는 악기의 넓은 음역을 이용한 아름다운 음색과 선율 변주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재즈로 끌어들였다.
⑥ 테니슨 출생(1809) : ⇨10월 6일
⑦ 윌리엄 로언 해밀턴(William Hamilton ; 1805.8.4 - 1865) : 아일랜드의 수학자 겸 물리학자.
더블린에서 태생.
해밀턴은 수학의 역사에 점점이 흩뿌려져 있는 조숙한 천재들 가운데서도 퍽 두드러진 예에 속한다.
19세에 더블린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수석으로 입학할 때까지 그는 정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지만, 3년 뒤인 1827년에 파격적으로 이 대학의 천문학 교수로 선임되었다.
이듬해에 그가 광선계의 이론 제1부를 발표해 광학의 수학적 바탕을 마련하자, 영국 자연과학계는 또 다른 뉴턴이 나타났다는 흥분으로 들썩였다.
물론 해밀턴이 해석역학을 비롯한 몇몇 분야에서 특기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고 해도, 자연과학의 역사에서 그를 뉴턴에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조숙에서는 해밀턴이 뉴턴을 훨씬 앞질렀다.
이미 세 살 때 영어를 쉽게 읽을 수 있었던 해밀턴은 다섯 살 때 라틴어 그리스어 헤브라이어를 읽고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드라이든이나 밀턴의 시를 줄줄 외웠다.
여덟 살이 되자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읽을 수 있었고 라틴어로 육보격(六步格) 시를 지었다.
열 살이 채 못 되어 아랍어와 산스크리트어를 읽고 쓸 수 있었고, 열네 살 때는 더블린을 방문한 페르샤 사절에게 보내는 환영사를 페르샤어로 썼다.
해밀턴은 태어날 때부터 10대 중반까지 해마다 외국어 하나씩을 정복했던 셈이다.
해밀턴을 이런 언어들의 바다로 밀쳐넣은 것은 그의 백부 제임스 해밀턴이었다.
그러나 제임스 해밀턴은 조카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입증하는 기쁨을 누리느라 자연과학의 진보를 늦췄다는 비판도 받을 만하다.
윌리엄 해밀턴이 학문적으로 별 의미가 없는 외국어 학습에 성장기를 탕진하지 않았다면, 그가 과학사에 남긴 업적은 실제보다 훨씬 더 컸을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고종석,2003).
⑧ 야세르 아라파트(Y?sir Araf?t ; 1929.8.4 ~ 2004.11.11) : ⇨8월 11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의장.
원어명 Y?sir Araf?t
이집트 카이로에서 출생했다.
카이로대학교를 졸업하고, 토목기사가 되었다.
그후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학생연합에 가입, 1952~1956년 회장을 역임하고, 쿠웨이트로 건너가 알파타(팔레스타인민족해방운동)를 결성하였다.
1969년 PLO 의장이 되었으며, 1971년 팔레스타인혁명군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974년 라바트의 아랍정상회의에서는 PLO가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대표로 인정받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해 11월 국제연합 정기총회에서는 처음으로 비정부조직인 PLO의 대표로 연설하였다.
그러나 1982년 이후에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PLO 내의 시리아파 반란군의 공격 등으로 팔레스타인의 민족주의 지도자로서의 입지가 한때 약화되었다.
그후 PLO 지도부 내의 갈등이 해소되면서 지도력을 회복하여 1988년 11월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PNC)를 통하여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영토로 하는 팔레스타인 독립국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대(對)서방외교를 강화하여 서방국가 60여 개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다.
또한 1993년 9월에는 이스라엘 총리 Y.라빈과 팔레스타인 자치원칙선언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1994년 라빈과 이스라엘 외무장관 S.페레스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하였다.
팔레스타인 첫 총선이 실시된 1996년 1월 20일 대통령 선거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2004년 11월 11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⑨ 필리프(Charles Louis Philippe ; 1874.8.4 ~ 1909.12.21) : 프랑스의 소설가.
⇨12월 21일.
⑩ 몽포르(Simon de Montfort ; 1208경 프랑스 일드프랑스 몽포르 ~ 1265.8.4 잉글랜드 우스터셔 이브셤) : Earl of Leicester라고도 함.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에 대항해 일어난 귀족전쟁의 지도자.
거의 1년간 잉글랜드를 다스렸다.
출신이나 받은 교육으로 보아서는 완전히 프랑스 사람이었다.
이단인 알비파(派)를 정벌했던 원정군의 지도자 시몽 드 몽포르라모리의 아들로 성년이 되었을 때 가문의 영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 큰형 아모리에게 넘겨주었고 그 대신 영국의 레스터 백작령에 대한 몽포르 가문의 상속권이 되살아날 경우 그에 관한 권리를 혼자 차지하기로 했다.
이 상속권은 보몽 가문의 마지막 레스터 백작이었던 로버트 4세(1204 죽음)의 딸이며 시몽의 할머니인 아미셔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로버트 백작의 영지는 아미셔와 여동생인 윈체스터 백작부인 마거릿이 나누어가졌고, 존 왕은 시몽의 아버지를 백작으로 인정해주었다(1205경).
⑪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4.5 - 1875.8.4) : 오늘날 온 세계 어린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미운 오리 새끼><성냥 파는 소녀><벌거숭이 임금님>을 비롯한 수많은 동화를 지어내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 준 덴마크의 동화 작가.
11세때 아버지를 잃은 후 품팔이로 생활을 이어 나가는 어머니와 함께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독학하여 문필가가 된 후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를 많이 써 근대 「동화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⑫ 기타 오늘의 인물
1540 스캘리저 출생.과학적 연대학의 창시자이며 문헌학자.성 바돌 로매 축일의 대학살 후에 고국을 떠났다.
1667 칸쉬타인 출생.할레에 있는 칸쉬타인 성서공회의 설립자.
1707 에르네스트 출생.라이프치히의 신학교수.그의 부친은 작센공 국의 설교자이자 감독임.
1744 쿤제 출생.루터교 목사.그는 미합중국에서 출판된 최초의 영 어판 루터교 찬송가 책일 편집함.
1758 니콜 출생.주목할 만한 프랑스의 교육자.
1793 말레트 출생.독일의 설교가.1834년에는 브레멘 최초의 청년협 의회 창설에,그리고 구스타프-아돌프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 함.
1859 노르웨이 소설가 크누트 함순 출생
1868 한기근 출생.천주교 신부,성서번역자.세례명 바오로.1924년명 동 샤르트르성바우로수녀회 지도신부직 겸해 수녀들의 신앙 을 지도.
1870 스코틀랜드 희극배우 해리 로더 경 출생
1882 오건영 출생.장로교 목사,교육가 호는 청구.원삼고등공민학교 를 설립함
1883 윌리엄즈 출생.미국 감리교 선교사,교육가.한국명 우리 암.1906년 부인과 함께 내한.
1897 일본 정치가 고토 쇼지로 사망 -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
1903 조병기 출생.장로교 장로,사회운동가.야간성경구락부를 설치 하여 문맹퇴치운동을 벌임.하천부지를 개간 양잠업을 경영 함.
1906 영국 정치가 러틀랜드 사망
1920 UPI통신 백악관출입기자 헬렌 토머스 출생
1992 중국 문화혁명 주도한 4인방 왕홍문 간암으로 사망
오늘의 샘터
① 인생에 있어서 <행복의 3대 조건>은 ?
첫째 정삼각형법 : 정삼각형을 만들려고 한다면 3개의 똑같은 변이 필요하다.
넓이가 넓고 또 크기가 큰 정삼각형을 만들려고 한다면 변의 길이만 크게 해서 삼각형 그리는 법에 따라 그리면 될 것이다.
아마 이것은 초등학교 학생보고 성냥개비 3개를 주며 세모꼴을 만들어 보라고 해도 누구든지 만들 것이다.
어쨌든 크고 넓은 정삼각형을 만들려면 3개의 변이 길어야만 된다.
둘째 물통법 : 물통을 반들려고 할 때, 가령 한 말 드는 물통을 만드는 경우 그 높이를 50㎝로 할 때 판자가 20개 든다면, 그 20개의 판자의 길이가 똑같이 50㎝가 되어야 할 것이다.
49개는 전부 50㎝인데 유독 1개만 45㎝라고 하자, 그러면 그 통을 물은 한 말이 못차고 아무리 계속 부어도 45㎝밖에 못채울 것이다.
셋째 건축법 : 건축가가 건축을 할 때에는 반드시 설계도와 등등 재료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설계도와 재료가 아무리 훌륭하고 좋다고 해도 대지가 없으면 건축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 「정삼각형법」․「물통법」․「건축법」 3가지를 예로 들었다.
행복하려면 3대 조건으로 「건강」․「사랑」․「빵」이 절대 필요 불가결하다고 본다.
이 3가지 중 어느 하나만이라도 작으면 물통법에 적용하여 볼 때 그것은 정삼각형이 못되고 다른 삼각형이 됨과 동시에, 건축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고로 저자는 결론적으로 우리 인간이 일생을 통해 행복하려면 크게 3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10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