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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바다의 비경(祕景), 세존도 갈도를 가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석가모니섬 세존도
해벽의 웅장함에 숨을 멈추게 하는 섬 갈도
수도권 기준으로 보면 남해는 참으로 멀다. 편도 약 6시간의 여정. 1박2일의 일정에서는 왕복 12시간을 길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쉽지않은 일이다. 섬동호인들 중 직장에 묶여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주말 일정으로 잡아야 하니 강행군이 부득이하다. 이번엔 남해바다에 위치한 두 개의 무인도인 세존도 및 갈도를 돌아봤다. 섬여행전문카페인 ‘섬으로’(대표 이승희) 회원들과 함께 했다.
남해 미조항 미조리조트펜션(055-867-6799)에서 1박 후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출을 보기 위해 남망산을 올랐다. 몇 년 전 남해에 내려와 망산에서 일출을 보고 응봉산 등산을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와보니 망산까지 올라가지않고도 20분 내외에 산봉우리에 올라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 또 있다. 바로 남망산이다. 남망산은 미조리조트펜션에서 좌측으로 100m정도 가면 일출명소가는 목제계단을 오르면 400m, 20분 내외면 남망산전망대에 오를 수 있다. 또, 펜션 우측 수협위판장길 코너에서 600m 올라가도 된다. 정상에는 정자가 세워져 있고 뒤로는 망산과 미조항, 앞으로는 남해 바다가 펼쳐져 있어 조망이 탁월하다. 미조리조트펜션 바로 앞바다에는 호도,조도, 죽암도 등이 나란히 늘어서 있어 경관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방파체 역할도 하고 있다. 필자가 남망산에 오른 날은 일기가 맑지않아 일출광경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아침 일찍 남해 바다와 섬들을 내려다보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하다.
남망산 오르는 길은 ‘남해바래길’중 ‘섬노래길’ 일부 구간이기도 하다. ‘바래’는 옛날 남해 어머니들이 바다를 생명으로 여기고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바다가 열리는 물때에 맞추어 갯벌에 나가 파래나 미역, 고동 등 해산물을 손수 채취하는 작업을 말하며, 그때 다니던 길을 ‘바래길’이라고 부른다. 남해바래길 중 섬노래길은 미조항을 중심으로 송정솔바람해변과 미조항 앞바다 여러 섬들을 내려다보며 걸을 수 있는 코스로, 수협위판장-남망산 정상-망상 정상-송정솔바람해변-설리-수협위판장 회귀로 총 12.4km, 약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등산로좌우에는 진달래꽃들이 활짝 피어 있어 봄을 실감나게 한다.
오늘은 드디어 세존도 및 갈도 가는 날이다. 당초 계획은 갈도 방문 후 세존도로 갈 예정이었는데 선장이 파도가 약한 오전에 먼저 세존도를 가야 한다고 한다. 세존도는 주변에 섬들이 없어서 날씨가 조금 만 나빠도 파도가 심해 못가기가 일쑤라 한다. 우리 일행이 탄 배는 4.99톤, 8명이 정원인 조그만 낚싯배다. 날씨는 맑고 파도 역시 잔잔하다. 예감이 좋다. 미조항에서 세존도까지는 약 1시간 10분 정도 걸린다. 1시간 남짓이라면 사실 먼 섬은 아닌데도 정기여객선이 없고 낚싯배로만 가야 하기 때문에 쉽게 갈 수 없는 섬이다. 중도에 좌측 멀리 두미도가 실루엣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세존도까지는 계속 망망대해다. 뒤로는 미조항, 그리고 남해 금산과 망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약 40분 쯤 갔을까? 선장이 세존도가 보인다고 알려준다. 파도 만 출렁이는 바다 한 가운데 멀리 흐릿한 점 하나가 보이기 시작한다. 300mm망원렌즈를 당겨본다. 바위섬 가운데 하얗게 동굴도 보인다. 세존도는 2011년에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편입되었다. 면적이 3만3천㎡인 이 섬은 지형경관이 매우 우수하고 자연성이 높으며, 멸종위기인 매가 서식하고 있어 독도 등 도서지역의 생태계보전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 2000년에 ‘제 33호 특정도서’로 지정된 무인도다. 세존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불교와 연관된 전설이 전해오는 섬이다. 석가세존이 남해 금산에서 득도한 후 돌로 만든 배를 타고 보리암 아래 쌍홍문을 지나 세존도의 바위섬을 뚫고 지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흔적이 바로 쌍홍문과 세존도의 바위 동굴이다. 처음에는 ‘유혈도’라고 불렀는데 후에 석가세존이 지나간 섬이라 하여 세존도라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금산 상봉에서 남쪽 바다를 바라보면 멀리 희미한 점으로 보이는 섬, 그나마 보통 때는 보이지 않다가 가을철 날씨가 맑은 날 그것도 눈 밝은 사람이라야 만 볼 수 있는 섬이 바로 세존도다. 선상에서 함께 한 섬전문가 중 한 분이 남해 주변 섬이름들을 묶어 “연화세계(연화도)를 머리에서 발끝까지(두미도) 알고 싶으면(욕지도) 세존에게 물어보시게(세존도)”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어낸 말이기는 하겠지만 남해 섬들의 불교적 명칭을 재미있게 엮은 것 같다.
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드디어 배가 세존도에 접근한다. 섬이라기 보다는 바다 위에 솟아오른 거대한 고성(古城)처럼 보인다. 백마 탄 왕자가 공주를 맞으러 성문으로 뚜벅뚜벅 나올 것 만 같다. 조물주가 빛은 걸작중 하나. 정말 신비스럽다. 홍도의 남문바위나 굴업도 옆 선단여, 독도의 구멍바위 등도 비슷한 모양들이지만 이보다는 오묘함이 덜 하다. 특히 세존도는 망망대해에 홀로 바다를 지키고 있어 더욱 고고(孤高)하게 느껴진다. 석가모니가 도를 깨우치기 위해 바다 한가운데에서 홀로 좌선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아니면, 바위섬 동굴은 전설 이야기처럼 극락세계로 가는 통천문(通天門)일런지도 모른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시고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이신 오세영 시인은 그의 시 '남해 금산'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저 고해 苦海를 건너면 미타찰彌陀刹에 다다를까.
빈 선창 가득히 달빛을 싣고
창망히 떠가는 돛배 하나,
서西로 가는 달빛을 좇아 무심히
노를 젓는 가랑 배 하나,
누가 남해바다에
암벽과 초목으로 지어 한 척 배를 띄웠나.
부처 하나 가슴에 안고
달빛 화안한 봄밤에 노를 저어 하늘을 간다.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창망히 떠가는 돛배 하나.
시인은 쌍홍문 동굴 사이로 세존도가 보였을까 아니면 마음 속 창망히 떠가는 돛배 하나 찾으셨을까?
또, 류병구 시인(가천대 명예교수)은 그의 시 '세존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필자가 아는 한 세존도 자체를 오브제로 직접 쓴 시는 류병구 시인의 시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쪽빛 바다에 취해
가출한 바위가
남해 밖 멀리에 둥지 튼 섬
그곳엔 묵은 침묵이 산다
멈춘 시간이 같이 산다
여래도 거쳐 갔다
둘이면서 둘이 아닌 문으로
바닷새들이 들락이며
거센 물결을 눌러 앉힌다
물비늘이 곱게 돋고
망망 시방에 연꽃 한송이 핀다
묵언의 빛살도 수북 쌓인다
해풍에 쫓긴 성근 파도가 누워 있는
그 섬은 지금
청정한 그리움이 자욱한
적멸의 꽃밭을 꿈꾸고 있다
배가 섬을 두 바퀴 돈다. 처음에는 섬 가운데 동굴이 하나 만 있는가 싶더니 정면으로 보니 거대한 동굴구멍이 두 개다. 섬도 하나가 아니라 큰 섬과 작은 섬이 형제처럼 나란이 붙어 있다. 섬은 보는 방향에 따라 계속 모양을 달리 한다. 등대 쪽에서 보면 촛대바위처럼 정상이 뾰족하게 보이다가 남해 금산 쪽 정후면에서는 기기묘묘한 바위봉우리들이 나란히 도열하듯 그 모습들을 보여준다. 석가세존의 다양한 형상들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숙연한 마음으로 날카롭게 솟아오른 바위봉우리들을 올려다 본다.
세존도를 돌아본 후 갈도를 향해 뱃머리를 돌린다. 필자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마치 성지순례를 한 듯 설레는 마음을 뒤로 하고 돌아선다. 갑자기 홀로 구순금족(九旬禁足)의 겨울수행을 하고 있는 스님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봄은 이미 와 있는데 석가모니섬은 언제쯤이나 동안거(冬安居)에서 깨어나실까? 깨어나서 다시 세속으로 돌아오실까?
다음 일정은 갈도(葛島). 면적 약 25만평, 해안선 길이 9.6㎞의 갈도는 통영의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한때 남해군 소속이었는데 1973년 통영시 욕지면 서산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갈도는 욕지도에서 8.4km, 남해 미조항에서 20㎞ 거리다.
세존도에서 10여분 갔을까? 멀리 일자(-) 형의 섬 하나가 보이기 시작한다. 선장은 저 섬이 갈도라고 말해준다. 세존도에서 30여 분 걸려 갈도 도착. 갈도는 먼 거리에서 본대로 일자형 섬이기는 하지만, 장구 모양으로 남북 양쪽에 볼록한 구릉(丘陵)이 있고 중앙에는 안부(鞍部)로 움푹 들어가 있어서 마치 두 개의 섬이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섬 최고봉은 북쪽 정상으로 103m. 단순 높이로만 보면 동네 야산 정도이다.
선착장에 배를 댄다. 선착장 시멘트 제방이 심하게 무너져 있고 주변에 쓰레기더미가 여기저기 밀려와 있어 무임도임을 실감나게 한다. 선착장 좌측에는 오래된 폐교가 보이고, 우측 해안가와 시누대숲 속에는 폐가 (廢家) 서너채도 눈에 들어온다. 또, 남쪽 구릉 초입에는 경비초소인 듯한 건물도 보인다. 모두 사람이 산 흔적들이다.
이재언 저 <한국의 섬-통영시> 편에 의하면, 갈도는 1973년도에는 27가구 178명, 분교생 31명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2003년 9월, 강력한 태풍 매미가 갈도 섬을 관통하면서 집과 건물들이 모두 파손된 뒤 주민들은 가까운 통영과 욕지도로 이주했다. 현재는 경비초소 자리에서 이병문 씨라는 분 만 어장 관리를 위해 오고갈 뿐 사실상 무인도다. 갈도는 약 140여 년 전 전주 이씨가 귀양살이 때문에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갈도(葛島)’라는 이름은 1896년 개척 당시 칡덩굴과 갈대가 무성했던 것에서 유래한 토박이 지명이다.
마지막으로 전교생 1명에 교사 1명이었던 욕지도 원량초등학교 갈도분교는 지난 1996년 폐교됐다. 그 어떤 조형물도 남아 있지 않다. 학교 건물은 달랑 한 채다. 1970년 2월 23일 자 경향신문에서는 ‘105년 만에 국민교 졸업식’ 기사를 통해 갈도분교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남해 외딴 섬 갈도에 사람이 산 지 105년 만에 졸업생이 생겨 큰 잔치가 벌어졌다. 25가구 162명이 살고 있는 낙도에 지난 2월 21일 김다도(15), 박남열(15) 등 2명의 초등학교 졸업식이 베풀어져 졸업의 노래가 파도를 가르며 멀리멀리 울려 퍼졌다. 12평짜리 단칸 교실(전교생 14명, 남4, 여10)을 메운 학부형과 섬사람들은 일손까지 모두 놓은 이 경사에서 마치 무지에서 해방된 듯한 감격을 누린 것. 이 섬에는 이 날 군청에서 보내준 태극기를 집집마다 걸어 또 하나의 첫 경사 풍경을 보였다. 졸업장 제1호 김다도, 위의 사람은 스승인 이을봉 교사(27) 부부로부터 졸업장을 받아 들자 김군의 아버지 김현조 노인(63)은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갈도분교는 1968년 개교하여 졸업생 30명을 배출하였다. 이 갈도분교가 만들어질 당시 고려시대 검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28년 동안 3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는 갈도분교의 교적비가 홍수에 쓰러져 누워 있다. 이 분교는 교실 한 칸이 전부로 지금은 어구와 그물이 가득차 있고, 칠판에 어지럽게 쓰인 낙서에는 외지에서 온 선원들의 외로움이 그대로 묻어 있다.
갈도가 무인도가 되다시피 한 것은 최악의 교통 사정과 물 부족이다. 1970년대에 욕지도에서 유일하게 5일에 한번씩 들어오는 여객선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나마 외해이기 때문에 파도가 조금 높게 일어나면 결항하여 5일을 더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아예 주민들의 배를 타고 다니면서 고통을 많이 겪었다. 우체부도 오지 않아 5일 만에 한번 오는 객선에서 욕지면에 편지가 왔다고, 나가면 찾아가라고 전달해주는 것으로 끝난다. 이 섬의 또 하나 단점은 물 기근이다. 바위와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 먹는 식수가 늘 부족해서 이곳을 방문하는 손님에게 하는 첫 인사는 “제발 물을 많이 좀 먹지 마시오”였단다. 갈도에는 모두 세 개의 우물이 있지만, 두 개는 늘 말라붙어 한 동이의 물을 얻기 위해 두세 시간 차례를 기다리는 게 보통이었다고 한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전기는 물론 교통과 식수난에 시달리면서 마음이 강퍅해져서 주민들끼리 싸움을 자주 하였다. 격리된 섬 생활이 따분해서 그런지 주민들이 거칠어서 ‘해적섬’이란 별명을 얻었다.
갈도에는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는 해괴한 풍습이 하나 있었다. 믿기지 않는 전설 같지만 갈도 주민들은 쥐를 신으로 모셨다. 그런 탓인지 해적섬에 이어 쥐섬이라는 좋지 않는 별명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1974년 3월 13일 자 동아일보에 ‘통영군 욕지면 갈도 25가구, 쥐를 모시는 섬이 있다’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인터뷰에서 주민은 “쥐를 잡으면 재앙이 생긴다고 생각해 삼년마다 쥐에게 제사를 지내며 밭농사를 짓밟아도 피해 없도록 기원만 한다”고 했다.
갈도는 먼 바다에 위치하여 갯바위가 낚시가 잘 되며 미역, 돌김, 우무 등 해조류가 풍부하다. 이 섬의 경지면적은 3만평 정도에 다다랐는데, 지금은 모두 억새와 잡초에 묻혀 묵은 밭이 되었다. 그 당시 육지의 부랑아들을 동원해서 개간을 많이 했는데 그 농지들이 섬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해마다 춘궁기가 되면 식량난에 시달렸다. 섬에서 심는 작물은 보리와 옥수수, 고구마가 주류였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서 수확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극성스런 쥐떼들이 마을의 밭농사 곡식을 먹어 치웠기 때문이다. 쥐가 마을과 야산, 집안 등을 가리지 않고 괴롭히고 망쳐도 주민들은 쥐 잡는 것을 포기하고 쥐에게 피해가 없도록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냈다. 쥐약이나 덫, 고양이로 쥐를 잡겠다는 의지는 없고 쥐에게 드리는 구서제(驅鼠際)를 행한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그 유래를 아는 사람은 없다.
우리 일행은 산 정상에 올라와서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는 현장을 살펴볼 수 있었다. 쥐를 잡아야 해결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잡아 죽이면 큰 재앙이 따른다고 믿었다고 한다. 구서제가 가까이 다가오면 평소 고요한 마을은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동네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는 것이다. 이 행사는 백일동안 부부생활을 하지 않은 정결한 여자가 제주로 뽑힌다. 제주가 된 사람이 함부로 부부생활을 하면 큰 재앙이 따른다는 걸 믿어서 조심했다고 한다. 제주는 일곱 가지 색깔의 현란한 제복을 입고서 육지 무당이 행하는 원시적인 춤과 주문을 외운다. 이 제사 의식이 다 끝나면 칠색 옷은 항아리 속에 넣어 돌무덤 속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갈도 정상의 돌무지 속에 들어 있는 단지를 보고 열어보니 실과 색색의 옷이 곱게 놓여 있었다. 옛날 같으면 성스러운 제단과 성물을 침범했다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10시 반경, 통영인뉴스 김상현 기자의 안내에 따라 남쪽 섬 트레킹을 시작한다. 김 기자는 갈도 방문은 3월이 최적기라고 말한다. 겨울철에는 바람과 파도가 심해 쉽지않고, 4월 이후 찔레꽃, 칡넝쿨 등이 자라기 시작하면 걸음을 옮기기가 어려울 정도라 한다. 또, 섬에 뱀이 많은데 대부분 독사들이어서 위험하기도 하다고 한다. 이래저래 우리 일행은 운좋게 이 섬에 온 것 같다.
갈도는 배 위에서 멀리 바라보면 밋밋한 섬으로 보이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새로운 모습으로 변한다. 서쪽 해안은 비교적 완만한 반면, 동쪽 및 남쪽 해안은 거대한 절벽으로 방문자들의 몸과 마음을 움츠러들게 한다. 초입 비탈에 있는 (폐)경비초소 쯤 오르면 서서히 그 해벽의 웅장함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먼저 선착장 안부 북쪽의 직벽이 방문객들을 놀라게 한다. 마치 칼로 자른 듯한 형상이다.
남섬 동쪽 해안은 더하다. 보기에도 아찔한 수직절벽이 점점 높이를 더한다. 무인도이기 때문에 특별히 등산로는 나있지 않지만 절벽위 능선으로 희미하게 사람이 다닌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절벽 위를 칼날을 밟듯 조심조심 걸어올라간다. 조금만 방심하거나 발을 헛디디면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추락할 수 있다. 절벽 아래 바다에는 드믄드믄 고기를 잡는 어선들이 보이기도 한다.
섬 대부분은 오래된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빈 공간은 억새밭이 능선을 덮고 있다. 억새를 잘못밟으면 미끄러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한다. 고도를 높여가자 북섬의 윤곽이 점점 확연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북섬의 능선 자체는 완만하고 여성적으로 보인다. 한반도 지형을 수평으로 뒤집어놓은 형상 같기도 하다. 아름다운 전경이다. 북섬까지 돌아보고싶지만 이번엔 일정상 부득이 남섬 만 걸어보기로 한다.
선착장으로부터 30여 분 쯤 올라왔을까? 역광으로 실루엣을 이루면서 동쪽 해벽에 거대한 사람얼굴 형상이 나타난다. 이마, 코, 입, 목이 사람얼굴을 꼭 닮았다. 사람 키 수십배 높이의 암벽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얼굴. 이마 위 머리털까지 사람 모습이다.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조각가가 일부러 절벽 바위를 사람얼굴 모양으로 깎아놓은 듯 하다. 자연의 예술성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여수 앞바다 사도(沙島)의 얼굴바위나 하의도 대섬의 얼굴바위 모습과도 매우 흡사하다.
얼굴바위 절벽에서 20분 쯤 더 가면 계단식 바위절벽을 만난다. 이곳을 오르면 일단 남섬 정상이다. 바위가 층계모양으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워낙 수직이어서 걱정이 된다. 좌측은 수백길 낭떠러지. 아슬아슬하다. 암벽등반 수준의 루트인데 다행히 바위가 각져서 층마다 손잡을 모서리가 괜찮다. 여자 산우들도 무리없이 잘 올라가서 숨을 돌린다.
이제부터는 정상을 치고 내리막길이다. 좌측은 여전히 수직절벽이지만 정상능선은 평평하고 완만하다. 절벽 능선을 타고 걸음을 옮긴다. 산우들 중 일부는 마당바위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고 가져온 캔맥주로 정상주를 나누기도 한다. 절벽 아래 바다 지척에 작은 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삼각형 모양의 무인도 바위섬. 갈도의 새끼 섬 중 하나이다. 일행중 누군가가 ‘똥섬’이라고 소개한다. 그러고 보니 대변 모양이다. 진짜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모양은 영락없는 그 모양이다. 군산 선유도 옆 무녀도 앞에도 ‘쥐똥섬’이 있다. 쥐가 눈 똥이란다. 모두 재미로 붙인 이름들 같다.
동쪽 해벽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로 기암괴석들의 연속이다. 바람이라도 불면 떨어질 것 같은 바위가 절벽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기도 하고, 입석바위 형태로 절벽에 2단으로 세워져 있는 모습도 보인다. 일행 중 덩치 큰 산우가 흔들바위를 힘껏 밀어본다.
또, 여자 산우 한 분은 바다를 향해 스틱으로 활쏘는 시늉도 해본다. 이래저래 즐거워하는 모습들이다.
정상능선의 끝 역시 절경이다. 아래로 내려가다가 다시 치고 올라간 지형이다. 바위봉우리라 꽤 가파르다. 산우 한 분이 시범으로 끝까지 올라가 봉우리 끝단에 선다. 태극기 휘날리듯 두 팔을 벌리고 환호한다. 카메라 셔터가 이를 놓치지않는다.
수백년된 동백군락지 숲으로 들어간다. 동쪽 해안절벽의 멋진 장관은 이젠 끝이겠지, 서쪽 완만한 지형을 돌아 선착장 쪽으로 돌아가겠지 하고 후미에서 긴장을 늦추고 뒤따라 내려간다. 몇 분 쯤 갔을까? 갑자기 앞이 열리면서 거대한 협곡이 펼쳐진다. 나도 모르게 함성이 터진다. 거의 알려지지않은 외딴 무인도에 어찌 이런 절경이 있단 말인가? 필자도 우리나라 섬들을 많이 가본 편이지만 이건 너무나 의외다. 남쪽 절벽해안이 남섬 깊숙이 갈라지면서 작은 그랜드 캐년같은 협곡을 만들어 낸 것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일부러 일행과 떨어져서 망원렌즈로 바꾼다. 일행 대부분은 우측 봉우리 끝까지 올라가 정상 테라스에 선다. 마치 하늘다리 위에 서 있는 모습들 같다. 수직절벽의 높이는 70-80m 쯤 될까? 그러나 고도감은 이보다 헐씬 크고 높다. 보는 사람이 오히려 오금이 저릴 정도.
유럽 노르웨이의 스타방게르 여행코스에는 피오르(피요르드)위에 솟아오른 세계적인 수직절벽인 프레이케스톨렌(Preikestolen)이 있는데 규모는 그보다 작지만 갈도 협곡도 절벽 자체는 매우 흡사하다.
필자도 마지막으로 정상 테라스에 올라가 본다. 막상 그곳에 서보니 2-3m 정도의 폭이 있어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것보다 그렇게 아슬아슬할 정도는 아니다. 다만, 펜스나 난간 등 안전시설이 전혀 설치되어 있지않기 때문에 고소공포증이나 어지럼증이 있을 경우에는 위험천만이다.
정상테라스에서 서쪽 비탈로 가는 산허리를 바라본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전망 역시 장관이다. 협곡의 거대한 해벽이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것 같은 지형이다. 멀리 동료들의 모습이 작은 점들로 보인다.
협곡 테라스에서 내려와 서쪽 해안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협곡 초입 좌측은 비탈도 완만하고 바람도 별로 없어 안온하다. 걷다보니 낮은 돌담 등 여기저기 사람 산 흔적들이 눈에 띈다. 선착장 앞과 함께 이곳에서도 전에 사람이 살았던 것 같다. 꽤 연륜이 있는 듯한 무화과나무 몇 그루가 쓸쓸히 옛 섬마을터를 지키고 있다.
마을터를 뒤로 하고 언덕을 넘어 선착장 쪽으로 내려간다.
마지막 하산길의 관문은 시누대숲. 혹시 길이 있나 찾아봤지만 전혀 길은 없다. 동백숲 쪽으로 돌아서 내려갈려면 너무 멀다. 직선거리로 50m내외 됨직한 시누대 숲을 통과하는 게 최선이다. 앞에서 먼저 내려간 동료들도 그렇게 하라고 한다. 앞이 거의 보이지않을 정도의 시누대 밀림을 젖히고 부러뜨리면서 나아간다. 방향도 알 수 없다. 짐작으로만 선착장 쪽으로 방향을 잡을 뿐이다. 손에 상처가 나고 시누대가 얼굴을 때리기도 한다. 얼마쯤 갔을까? 앞에 간 산우가 소리친다. 우물터가 보이고 계곡이 보이니 계곡을 타고 오라고 한다. 50m가 아니라 시누대밀림을 500m는 간 것 같은 느낌이다. 암튼 이렇게 해서 갈도 트레킹을 마무리했다.
선착장 해안길로 나오니 좌측으로 완전 폐가 한 채가 보이고, 비교적 형태가 보존된 집 두 채도 만난다. ‘갈도길 45’라는 도로명이 붙어 있는 집. 현재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가정집 형태를 갖춘 갈도의 유일한 집이다. 앞에 있는 집은 경비초소처럼 보인다. 이 집이 바로 이병문 씨가 어장관리를 위해 종종 들르는 임시숙소인 것 같다.
불과 3시간 반 정도의 짧은 트레킹이었지만 먼 길을 다녀온 듯 가슴이 뿌듯하다. 미조항으로 귀항하는 배 위에서 다시 생각해본다. 얼마나 살기가 어려웠으면 섬주민 모두가 이처럼 아름다운 갈도를 버리고 육지로 이주했을까? 이 섬을 다시 살릴 수는 없는 것일까?
천혜의 경관을 가진 갈도, 극히 소수의 방문자들만 비밀스럽게 즐기고 탄성을 지르기에는 너무 아까운 섬이다. 지자체에서라도 적극 나서서 갈도를 비경(祕景)의 섬, 관광의 섬으로 다시 살리고 개발할 수는 없는 것일까? (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