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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우리의 추억들 스크랩 정순왕후약전(貞純王后略傳)[경주김씨 태사공파대종회지] 좌랑공파종회 김기홍 기고
떡메의 명인 추천 0 조회 173 14.10.21 12: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정순왕후약전(貞純王后略傳) [경주김씨 태사공파대종회지] 좌랑공파종회 김기홍 기고
                    
                                          정순왕후 생가 충남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충남 지방문화제 68호  
      서언(緖言)
우리 慶州金氏 桑村公 후손으로 도덕 문장 효자 충신이 배출하였으며 國家의 유공한 신하가 許多하였으나 國婚하기는 끄리하였다.
그러나 勢不得하여 條件附로 두번 국혼이 있었으니 모두 英祖朝때 일이다.
英祖大王의 제2녀 和順翁主가 諱 興慶의 넷째 아들 諱 한신(漢藎)에게로 강가(降嫁)하시여 하종(下從)까지 하셨으니 여로 옹주 중(翁主中)에 으뜸 이였고 諱 한구(漢耉)의 따님이 英祖大王 계비(繼妃)로 책봉(冊封)되시어 입궐(入闕)하여 王后 大妃 大王大妃로
英祖 正祖 純祖 3대동안 뛰어난 치적이 찬란하여 歷代 王后中 뛰어나셨으니 곧 정순왕후이시다.

一. 탄강(誕降)하시기 前까지

桑村公 후손 홍욱(弘郁) 2자 계진(季珍) 자 斗光 2자 선경(選慶) 장자 한구는 才氣가 지나치게 한번보면 열가지를 해석(解釋)하여 20세 未滿에 모든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공은 과거에 응시하려고 서울로 올라와서 머므르고 있었다.
당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이 홍봉한(洪鳳漢)(官判書)은 영조대왕과 사돈인 동시에 신임받는 재상이었다.
홍봉한은 공의 재주를 흠모하여 공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매일 수십통의 상소(上疏) 상전(上箋) 차등(箚等) 각수령(各守令) 방백(方伯)과의 연락 편지를 代書 시킬 뿐 아니라 자기집 선대 모든 문헌을 정리하는데도 협조를 청하였다.
공은 풍부한 문장으로 정력을 기우려 주인집 일을 잘 보살펴 주었다. 공의 년치(年齒)는  겨우 20대였으며 가세는 넉넉하지는 못하고 집은 서산 한다리였고 서울은 객지로서 홍봉한의 집에서 수년동안 숙식하며 대과에 급제하여 국사를 멋지게 해보려는 초지(初志)는 변함없이 객지 고생을 달게 여겼으며 부친 휘 선경(選慶)은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재직 중인 한다리 본가에는  부인 原州元氏가 어린 아들과 딸을 거느리시고
집을 지키고 계셨다.
당시 부친은 목천현감으로 임지에 재직중이었고 공은 出世하여 가업을 빛나게할 목적으로 유경(留京)하셨고 부인 원주원씨는 서산 한다리;에이ㅐㅆ는집을 지키고 게셨으니
많지 않은 家眷(가권)으로 세곳에 분산하여 장래 영화를 꿈꾸고 계셨다.

二. 탄강(誕降)후 이사하실 때 이주서의 은혜

정순왕후께서는 영조21년 을축(서기1745년) 11월 10일에 서산 한다리(현 서산군 음암면 유리) 구기(舊基)에서 탄강하셨다. 탄강하실 때 한다리 일경(一境)에 서기(瑞氣)가 돌고 평시에 보지못하던 아름다운 새(鳥)가 많이 날라와서 집 주변을 싸고 돌며 지저거리기를 한동안 하다가 날라간 일이 있어 보는 사람들은 「상서러운 일이라」고하며
무병장성하기를 기원한 사람도 있었으며 母夫人 元氏는 지극히 귀엽게 길렀다.
공은(휘 한구(漢耉)) 여러해 객고에 시달리는 끝에 洪鳳漢은 서울로 이사하기를 권하였다 공은 木川으로 나려가서 父子分이 이사할 것을 의결(議決)하고 南山밑에 조그만한 집을 마련하고 한다리로 나려가서 家産을 정리하고 이사의 길을 떠났으니 이사하는 行次가 초라하기 限이 없었다. 단폐 마마에 부인 원씨와 어린아들과 돌이 막 지난 따님
을 동승(同乘)케하고 길을 떠났으니 때는 삭풍(朔風)이 불어 살을 에워내는듯 매섭게
차가운 병인년(丙寅年) 12월이었다. 이사행차는 당진(唐津) 한나루턱에 도착하였다.
先時에 武臣大家로 名門인 訓練大將이었던 이여발장군(李汝發將軍)의 손자 이사관(李思觀)은 천성이 순훈하면서도 괄괄한 까닭에 그의 世業인 武科는 손쉽게 入格할것이나 언제나 文臣이 부러워서 文科試에 응시(應試)하여 文臣이 되어보려는 굳은 決心으로 經史를 硏究하기에 열심(熱心)하여 20대부터 문과시에는 무슨 과거(科擧)던지 하나도 빼지않고 모조리 응시 하였으나 번번히 급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사관(李思觀)은 초지일관(初志一貫)하고 글 읽기에 더욱 열중했다.
무신대가(武臣大家)의 후예(後裔)들은 『자네는 문과시(文科試)를 보려고 그렇게 헛수고를 하지말고 자네 代代로 나려오는 世業인 武科를 본다면 당장에 及第하여 바로 無職으로 청환인 선전관(宣傳官) 비변랑(備邊郞)은 떼어 놓은 당산인데 왜 쓸데없이 文科試에 熱中하는가 그리고 宣傳官 비변랑(備邊郞)을 거쳐 兵水使가 될것이 아니가 천행으로 文科에 급제한다 하여도 弘文館員은 차례가지 못할것이오 한껏해야 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의 官員에 지나지 못할것이니 다시 생각을 돌려 자네 世業을 짘미는 것이 옳을것일세』하고 忠告하였다. 李思觀은 「자네 말도 옳기는 옳은 말이나 나는 기어코 文科에 올라 정승까지 하여 멋지게 政治를 해볼것일세」하면서 호언 장담하는 바람에
친구들은 기가 질려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李思觀은 33세때에야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이사관의 평생 소망은 이루어 졌다. 문과에 급제하면 하객이 물밀듯 문전에 열요하것만 이사관의 집은 하객 한 사람도 없이 쓸쓸하기 한이 없었다. 그것은 문신이나 무신들은 본분을 망각한 사람이라고 괘심하게 여기는 까닭이었다.
이사관은 평생 소원이던 문광에 급제는 하였으나 承文院 正字란 벼슬이 차례 갔을뿐이었다. 이사관은 正字로 수년을 지났으나 승진은 까마득 하였다. 그럴 뿐 아니라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은 「문과 못할 사람이 문과에 급제하니 아가운 과거만 썩이는 것이라」고 비웃던 것이다 李正字는 권문세가(權門勢家)에 出入도 하고 吏曹判書 吏曹參判의 집도 찾았으나 효과없이 4년만에야 겨우 承政院 假注書에 올랐다 또다시 5~6년이 지났으나 등과한지 10년이 되어서야 成均館 전적(典籍)이란 6품관이 되었다.
李思觀은 창피하였다. 등과한지 10년만에 겨우 6품으로 전적(典籍)에 올랐을 뿐이요
나이는 43세의 장년으로 동방(同榜)들은 벌써 정삼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堂上官은 물론이요 正二品階에 올은 사람도 많이 있다 李思觀은 벼슬자리가 죽기보다 싫어졌다.
등과10년에 겨우 6품계에 오르고 더 올을 희망도 없었다. 李思觀은 무과를 보지않은것이 한스러웠다. 무과를 보았으면 입격은 물론이요 벌써 兵水使는 되었을것이 아니겠는냐고 한탄하고 벼슬을 다 치워버리고 여생(餘生)이나 한가롭게 보내겠다고 결심하고 전장(田庄)이 있는 충청도 당진(唐津)으로 낙향(落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사관(李思觀)의 家産은 대대로 장신(將臣)집이라 풍요하였다. 이주서(李注書)는 가권(家眷)은 먼저 보내고 뒤에 집채같은 말을 타고 앞뒤로 구종별배를 거느리고 길을 떠나 한 나루를 건너 당진(唐津)땅에 도착하였을 때였다.
서울로 이사하는 어느 행차와 이주서(李注書)의 낙향(落鄕)하는 당진 한 나루터에서
만났다. 삭풍(朔風)은 몹시 불어 살을 에워 내는 듯 하였다. 이주서는 털옷을 입었으나
한기(寒氣)가 살에 스며들어 몸이 떨였다 나루터 술집에서 두어잔술을 마시고 다시 길을 떠나려는 찰라 길옆에 가마 한채가 놓여 있고 그 앞에 낡고도 척박한 옷차림으로 寒氣를 견디지 못하는 한 靑年이 있었다 그 청년의 행색은 초라하나 그러나 비범(非凡)한 얼굴에 가위(可謂) 옥골선풍(玉骨仙風)이다 이주서는 그 얼굴이 비범한데 취하여 그 청년의 앞으로 다가서면서 「여보 어디로 가시는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추위에 고생이 적지 않겠구려」하며 안타갑게 물었다 청년은 「서산(瑞山)서 서울로 이사하는 사람이요」라고 대답하니 이주서는 「서산 어디서 서울로 가시며 뉘 댁이요」하고 인사를 청하였다. 그 청년은 「나는 서산 한다리에서 사는 김서방이오 댁은 누구신지」하고 金書房과 李注書는 이렇게 인사를 교환하였다. 가마안에서는 어린아이의 꿍꿍거리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오는데 기진(氣盡)한 소리였다.
李注書는 한다리 김서방이라는데 심리적 충격도 났으려니와  가마안에서 흘러 나오는 신음소리는 참아 들을수 없어 김서방에게 「저신음소리는 누구의 신음소리요」하고 물었다. 김서방은 「돌이 겨우 지난 어린 딸이 한기를 못 이기는 모양인가 보오」하고 대답하였다 이주서는 자기가 입고 있던 모피옷을 벗어서 김서방에게 전하며「체면에는 틀렸지만 이 털옷은 차가운 外氣를 막을 것이니 아기를 싸주시오」김서방은 감격하여
「寒氣가 심(甚)한 이때에 노형은 어찌하려고 모의(毛衣)를 남에게 준단말이요 미안한 일이오 염치불구하고 받기는 하오만은 이 은혜(恩惠)를 무엇으로 갚겠어」하며 더 사양치 않고 가마안에 아기를 싸주었다. 아기는 진정되어 꿍꿍대는 소리는 끝쳤다. 이주서는 하인에게 명령하여 더운 음식을 가마안에 들이게하고 김서방과 교정에게도 酒食을 대접하고 자기가 낙향하는 이유도 대강이야기 했고 작별할 때 不少한 금품을 김서방의 허리에 채워 주었다. 김서방은 구지 사양했으나 이주서도 지지않고 채워주고야
말았다.
김서방은 事實上 로비(路費)가 넉넉지는 못하였다 피차(彼此) 첫 인사이었으나 어쩐지 통하는데가 있는듯도 하여 작별하기 섭섭해하며 이주서는 남으로 김서방은 북으로 한
 나루를 건너 서울로 향하였다. 이주서는 마상에서 「김서방은 글을 배웠을 것이요 과거에 급제할 것이요 급제하면 가주서(假注書)로 시작하여 술넝술넝 堂上官이 되기는 여반장(如反掌)일터이지 학주선생(鶴洲先生)의 음덕(陰德)이 내리기 시작하는 때이니 나같은 무신의 후예로는 대과급제(大科及第)한지 10년에 겨우 6품관으로 이모양일까」
하고 한탄함을 마지못하며 김서방을 흠모하기로 하였다.
김서방은 뜻밖에 활명은인(活命恩人)을 만나 가마안 세 사람이 한기(寒氣)를 극복(克服)하고 무사이 서울에 안착하였으니 그 운덕을 갚을 길이 없었다 네 가권(家眷)이 뫃여 앉으면 李注書의 은혜(恩惠)를 갚을 것을 결의하기 거듭하였다 공은 홍봉한(洪鳳漢)  에게 이사한 것을 고하고 여전히 소임을 다하였다. 洪鳳漢도 공의 學問과 지조(志操)를
흠모하기를 날이 갈수록 더욱더 깊었다.

三. 성장(成長)하실때까지

공의 따님은 병없이 잘 자랐으며 자랄수록 총명하고 영리하며 덕기(德氣)가 넘처흘러 보는 사람들은 청송이 자자하였다.
母夫人 元氏는 따님이 너무 영리한 것을 염려하여 항상 경계하고 法度있게 훈육하였으며 13세에 春秋左氏傳을 읽어 意義를 해석(解釋)하였으며 백집사(百執事)에 능하여 백렁백리하고도 신중(愼重)하여 모부인 원씨와 더부러 가난한 살림을 극복하고 부지런하여 老成人에 뒤지지 않으셨다 그럭저럭 서울로 이사한지 벌써 14년이나 되었다.

四.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승하(昇遐)와 계후(繼後) 책봉문제(冊封問題)

英祖33년 정축(丁丑)에 영종의 초비(初妃)이신 정성왕후(貞聖王后) 徐氏 승하하시니 영조대왕의 보령(寶齡)이 63세였다.
宮中에 中殿에 비여서는 법이 아니므로 重臣들은 王妃 冊封 하시기를 주청(奏請)하였으나 英祖는 『내가 中殿과 금슬(琴瑟)은 대단치 않았으나 결발(結髮)한 夫婦로 70이 가깝도록 해로하다가 中殿이 먼저 승하(昇遐)하여 골육(骨肉)이 채 사러지기도 전에 다시 왕비를 책봉하는 것은 人間情理上 할 수 없는 일이니 다시 의론할 필요가 없다는 비답(批答)이 나렸다』 그런중에 世子의 生母인 선희궁(宣禧宮) 영빈이씨(暎嬪李氏)는 은연중에 자기의 권세가 추락될가 염려되어 찬성은 아니했다 그러나 국가 법도에 있어 中宮이 비울수없는 일이다 貞聖王后가 승하하신지 삼년후인 영조35년 己卯에 계비책봉문제(繼妃冊封問題)는 다시 일기 시작하였다 영조은 國家法度를 어찌할수 없이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은연중 반대에도 불구하고 洪鳳漢을 편전(便殿)【임금이 항상 거처하는것】으로 불러 『내나이 70이 不遠한데 冊封이란 不可하나 국법을 어찌할수 없은즉   슬그머니 德氣있는 규수(閨秀)를 탐문해보라』고 분부하셨다 홍봉한은 퇴궐(退闕)하여
뉘 집에 國母로 받들만한 규수가 있나를 탐색하기에 心血을 기우렸다.

五. 王妃로 冊封된 經路

홍봉한은 자기집에서 宿食하는 김한구(金漢耉)의 딸이 있어 숙성하고 法度가 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홍봉한은 君主의 命令을 거역(拒逆)할수도 없을뿐 아니라 중매(仲媒)를 잘하면 자기의 權力도 전과같이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는 방도(方途)를 연구하기에 心神이 피로할 지경 이었다 사색(思索)에 잠긴 홍봉한은 피로한 심신을 풀기 위하여 정원(庭園)에 나려가서 넓은 마당에서 산책(散策)하였다. 그때 글방에서는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소리가 귀결에 들린다 洪判書는 가까이가서 들으니 김서방과 어떤 사람이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었다.
김서방의말 자네 四柱보는 법이 뚫어지게 맞는다더니 내게는 헛자랑뿐일세 今年안으로 一品宰相 이 된다더니 一品커녕 無品 김서방 그대로일세 客의 말 금년이 다 간줄아나 서달 그믐날 子正까지는 금년일세 그날이 지나거든 그때 나를 조롱하게 김서방의 말 구품도 못한 위인이 뛰어서 일품이 된다는 것은 황당한 자네 말일세하며 두사람은 껄걸 웃을 뿐이었다. 홍판서는 꿈을 깬 듯이 새로운 計策이 생각났다.
『김서방은 名賢 鶴洲先生의 玄孫으로 글 잘하고 人物 잘 생겼겠다 훌륭한 士族으로 여러번 대과에 應試하여 아직 入格은 못하였으나 將來가 有望하며 또 몇해동안 내집에 있어 혜택을 입은 사람이니 내 말을 거절(拒絶)하지는 아니 하겠지 김서방의 딸이 있어 나이는 어리나 덕기(德氣)있고 재조(才操)있어 每事에 능소능대(能小能大)하다니 中宮으로 뫼시면 四柱쟁이 말과 같이 1품 府院君이 될것이오 府院君이 되면 나를 괄시는 아니하겠지 그리고 내 권력도 존속(存續)하겠지 정약적(政略的)으로 우익(羽翼)이 될것이 아닌가』하고 사랑으로 들어가면서 상노(床奴)를 시켜 김서방을 불러드렸다.
김서방은 主人 홍판서의 부름을 받고 큰사랑으로 올라간즉 主人은 안면(顔面)에 기뿐 빛을 띠우고 맞으며 친절한 말로 『자네 따님이 있다지 몇 살이나 되었나 매우 영리할뿐아니라 숙덕(淑德)이 있다는데 맛당한데로 혼인할 생각은 없는가』하고 물었다.
김서방은 『아직 나이도 어리고 배운것도 없으니 혼인할때가 아닌듯합니다』라고 主客이 한담중(閒談中) 안으로 들어오라는 전갈이 나왔다 주인 홍판서(洪判書)는 안으로 들어가고 김서방은 자기방으로 내려갔다. 홍판서는 안으로 들어가서 부인의 청입(請入)한말을 듣기도 전에 먼저 말한다.
『김서방의 딸을 잘둔 모양인데 내일 일직이 늙고 눈치빠른 침모(針母)한사람을 김서방집에 보내어 슬그머니 간선하고 오도록하라』고 부탁하였다 부인은 『나도 들은즉
달의 나이는 어리나 숙덕(淑德)이 있어 훌륭하다는 말은 들은적이 있는데 대관절 누구의 혼담(婚談)이냐』고 하며 남편 홍판서를 청(請)한 이야기를 하였다.
다음날 홍판서의 부인은 지각있고 눈치 빠른 침모 한사람을 골라 남산밑 먹적골 김서방집에 간선차 보냈다. 침모는 먹적골 김서방집에 갔다 와서 부인에게 복명(復命)하였다. 『김서방댁은 코딱지만한 집이나 정결하고 보잘것없는 세간이긴 하나 제자리에 정돈되었고 떨어진 옷이긴 하지만 깨끗하고 얌전하게 침선하여 몸에 맡게 입었고 모녀분의 말씀과 行動이 士大夫宅 婦女子나 달음이 없으며 그런 중에도 규수(閨秀)는 얼굴이 군데가 없고 활달(活達)한 행동에 덕기(德氣)가 넘쳐흘러 高貴한 기상은 흔히 볼수 없는 규수이며 숙성하기도 열다섯살로는 볼사람은 없을것이라』고 칭찬이 굉장하였다.
그날 홍판서는 대궐에서 公務를 치르고 퇴궐하려는 차에 편전(便殿)으로 들나는 英祖大王의 분부가 내렸다.
홍판서를 보신 영조는 『前日에 알아보라는 中宮될만한 규수(閨秀)를 物色하였는가』를 물으셨다 홍판서는 『物色中이라』아뢰고 퇴궐하여 官服도 벗을사이 없이 부인에게
김서방집에 갔다온 與否를 물었다 부인은 침모의 말을 일일이 고하였다 홍판서는 김서방집에 갔다온 針母를 불러 다시 물었다 침모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홍판서는 만족한 氣色으로 사랑으로 나와 곧 김서방을 불러 전에 없이 예대(禮待)하며
김서방의 귀에 입을대고 『3년전 中殿께서 승하(昇遐)하신뒤 中宮이 비었는데 國法에 중궁이 공석인데 자네도 잘 알다시피 더 말할 것없고 重臣들이 여러 번 妃 冊封을 주청(奏請)하여 윤허(允許)가 나리고 특히 나에게 넌 주시 규수(閨秀)를 物色하여 천거할 것을 분부가 내렸네 方今 宰相의집 규수가 많지만 별로 고를만한 곳이 없어 걱정 중이라네 들으니 자네 따님이 있어 숙덕(淑德)이 겸비(兼備)하다기에 천거하려하니 자네 의사(意思)가 어떠한가 국법에 의하여 간택령을 내리고 간택하면  될 것이나 자네와 미리 말하는 것일세 만일 成事만 되면 자네 친구(親舊)인 四柱 쟁이 말이 꼭 맞는것일세』하며 대답하기를 재촉(再促)하였다 김서방은 意外라 『인윤대사(人倫大事)를 경솔하게 할수없은즉 內外가 의론(議論)하고 決定할것이라』고 대답했다 홍판서는 그러면 今日이라도 내외분 의론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김서방은 집으로 가서 문전에 당도하니 이상하게도 자기집 집웅에 五色 구름이 떠들고 瑞氣가 어리었다 김서방은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내외분이 난망상의하고 홍판서의 말을 득기로하고 홍판서집으로 가서 홍판서와 對面하고 간택에 응하겠다고 말하였다. 홍판서는 一大成功이나 한 듯이 희색(喜色)이 만면(滿面)하였다 이튼날 홍판서는 이직이 예궐(詣闕)하여 승후(承候)할 것을 청했다 영조는 작일 분부하신 생각이 나셔서 즉시 입시(入侍)를 명령하셨다
홍판서는 편전으로 들어가서 규수를 물색한 일을 품달(稟達)하였다 영조는 국법에 의항여 즉일(卽日) 간택령을 내리도록 정원(政院)에 命하셨다.
英祖大王께서는 지밀상궁나인(至密尙宮內人)을 불러 절대비밀이 김서방집에가서 간선하라 분부하시고 茶菓를 갖어오라고 하셨다 尙宮은 즉시 차반에 다과와 젓가락을 받쳐 막 올리는 찰라 난데없이 五色깃이 영농하고 아름다운 새(鳥)가 날러와서 한짝을 물고 날러가버렸다.  나인(內人)들은 황황하였다 목숨이 달어날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영조는 그 광경을 목도하시고 웃으셨다 主上의 웃으시는것을 본 宮人들은 마음이 진정 되었다. 尙宮들은 홍판서를 원망하기도 하였다.
김서방의 따님은 그 부친이 婚事를 議論하고 간 익일(翌日)에 前과같이 일직 일어나서
부엌일을 한는중에 平日에 보지못한 오색이 영농하고 예쁜새(鳥)가 날러와서 재재거리다가 무엇인가를 떠러트리고 날러갔다. 김규수(金閨秀)는 이상하여 무엇인가하고 집어
본즉 젓가락 한짝인데 위는 黃金으로 아래는 銀으로 龍을 새기고 파란을(七寶) 놓았으니 貴重한 물건이다 마루 끝에 앉아 드려다보고 있는판이었다.
一方 간선命令을 받은 尙宮內人 은 먼저 홍판서집으로 가서 그 부인과 침모의 前後 수말을 자세히 듣고 그집 下人의 案內로 김서방집에 도착한 때였다 마루 끝에 앉은 貴人格인 규수(閨秀)가 첫눈에 들었다 규수는 낯선 夫人이 大門안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젓가락을 마루끝에 놓아 둔채로 방으로 피신했다 尙宮은 마루 끝에 놓인 젓가락 보니경련이 일어날지경으로 놀랬다 分明히 잠시전에 大內에서 세가 무러간 젓가락이다 몇번씩 다루던 것을 몰라볼리 없었다 尙宮內人은 主人 夫人과 對話하며 그 젓가락의 出處를 물었다. 夫人은 「五色이 영농한 새가 떠러트리고 날러갔는데 처음보는 물건이라 집어서 보는찰라」라고 출처를 말하였다 尙宮內人은 「天定배필」이라 생각하고 더 짖체할 必要을 느끼지않고 곧 대궐(大闕)로 도라와서 규수(閨秀)의 貴人格읹 인상과 젓가락 이야기를 자세히 품달(稟達)했다. 英祖는 들으시고 불필타구(不必他求)라고 心定하셨다 그러나 國法대로 간택은 形式이라도 치러야한다 김서방의 따님과 재상들의 따님들도 수십명이 간택에 걸렸다.  
간택(看擇) 날은 돌아왔다 간택에 걸린 규수(閨秀)들은 각각 화려한 옷차림에 깊은 단장으로 대궐(大闕)서 보낸 찬란한 등을 타고 대궐로 뫃여 들었다. 김규수도 대궐로 들어갔다. 내전(內殿) 넓은 대청(大廳)에는 수십개의 방석(方席)이 놓여있고 방석위에는 간택에 걸린 규수 父親의 姓名을 쓴 명패(名牌)가 붙어 있다 女官의 안내로 여러 규수들은 自己父親의 성명이 붙어있는 방석을 찾아 앉았다 그러나 김규수는 방석에 앉지않고 마루바닥에 앉았다. 여관은 「방석위로 앉으라고」권하였다 그러나 김규수는 『어버이의 성함(姓銜)을 깔고 앉는 것은 자식(子息)의 道理가 아니라』고 하였다 여관들은 경복(敬服)하였다 다른 방석을 갔다가 옆에 까러놓고 앉기를 請 하니 그제야 방석위에
앉었다 모든 일은 영빈이씨(暎嬪李氏)가 主張하였다 예(例)의 음식상(飮食床)이 나왔다
다른 규수들은 저를 들뿐 먹지 못하였으나 김규수는 천연스럽게 단정히 앉아 여관들이 권(勸)하는대로 먹을 것을 다 먹었다. 暎嬪李氏와 상궁이하(尙宮以下) 모든 여관들은 부지부식중(不智不識中)에 머리가 숙여졌다 法度에 어그러짐이 없고 大內의 法規를 잘 아는 老成한 사람으로도 좇을수 없을만한 行動에 …… 초간택(初看擇)에 5名이 入選하였으니 김규수도 한목끼었고 재간택에 3명이 입선(入選)되었는데도 김규수도 뽑혔고 최종(最終)으로  삼간택에는 當當히 입선하여 영관(榮冠)은 김규수가 차지했다.

     六 대혼 결정 공포 (大婚 決定 公佈)

대혼은 김한구(金漢耉)의 딸로 결정했다고 公佈되었다 김규수는 즉시(卽時) 어의동(於義洞) 어의궁(於義宮)(현 서울於義洞 초등학교자리) [孝宗大王이 大君時代에 거처(居處)하던 宮家임]으로 나가시게 되었으니 곧 貞純王后로 有名하셨으며 英祖大王이 승하(昇遐)하신 뒤에 항간에서는 한다리 大妃로도 有名하셨다 그 父親 諱 한구(漢耉)는 卽時로
正三品 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에 제수(除授)되고 數日後다시 正二品 자헌대부지(資憲大夫知) 돈영부사(敦寧府事)로 승진(昇進)되었다,
어의궁(於義宮)은 속칭 別宮인데 看擇에 뽑힌 處女를 별궁(別宮)에 거처(居處) 하게하고 왕후(王后)로 시급(時急)하게 알아야할 왕궁역대(王宮歷代)와 보약(譜略) 言語 行動
거지(擧止) 모든 예의범절(禮儀凡節)을 가르치는 곳으로 使用하는 곳이니 別宮에 한번 들면 私第에는 갈수 없게되는 法이다 그래서 어의궁(於義宮)으로 나가실 때 母夫人 元氏는 「오늘 榮貴하게 되신 것은 無病 長成하신것이오 無病 長成하신 것은 唐津으로 하향(下鄕)하던 이주서(李注書) 사관(思觀)의 毛皮옷 까닭입니다 그런즉 그 깊은 恩惠를 잊을 길이 없습니다 잊지마시기 바랄뿐이라」고은밀히 부탁(付託)……〔딸이라도 王后가 되면 존경하는 말을 쓰는法 따님은〕『뼈에 색인 李思觀의 은혜를 잊을리 없으니 安心하시라』고 決心한 듯이 대답하시고 母女분은 기쁨에 넘치는 눈물로 흘리셨다
政院에서는 大婚의 擇日을 결정발포(決定發佈)했다 大婚은 順成했으니 《大婚의 節次는 번거러워서 약한다》때는 英祖35年 己卯(서기1759) 6월이오 貞純王后의 보령(寶齡)은 15歲였으며 父親 諱 漢耉는 正一品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領 돈영부사(敦寧府事)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으로 승진되고 夫人 元氏는 府夫人의 職位에 올랐다.

        七. 王后로 在位中

영조(英祖) 38년 임오(壬午) 5월에 사도세자(思悼世子)를 廢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降等)하고 주려서 서거(逝去)하기까지 이르렀을때 왕후(王后)의 심적(心的)으로 느낀바
컸으며 자부(子婦)인 원빈홍씨(元嬪洪氏)[洪鳳漢의따님][정조(正祖)의 어머님]을 위무(慰撫)하기 힘쓰고 세손(世孫)[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 장래(將來) 정조대왕(正祖大王)]을 책봉(冊封)하기까지의 노심초사는
18歲의 보령(寶齡)으로 온 정력(精力)을 쏟았다.
19세시 흉년(凶年)으로 길에 헤매는 주린 백성(百姓)은 數를 헤아릴수 없으며 더욱이 호남지방(湖南地方)에는 50만의 기아민(飢餓民)이 있어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왕후
깨서는 궁중에 절량(節粮)을 엄명(嚴命)하시고  일방으로 5品 以上의 夫人을 급(急)히 궁중으로 명소(命召)하셨다 5품이상의 부인들은 시간을 지체치않고 대궐(大闕)로 뫃여들었다 왕후께서는 「호남지방(湖南地方)의 기민(飢民)을 구(救)해야 할것이니 매일(每日) 양차(兩次) 죽으로 연명하고 양곡(糧穀)을 절약(節約)하여 호남으로 운송하여 하루바삐 구휼(救恤)하여 백성(百姓)들과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할것」을 엄숙(嚴肅)히 명령(命令)하셨다. 공경(公卿)의 부인들을 부만(不滿)이 있으나 거역(拒逆)할길은 없었다 수일(數日)이 채 못되어 궁중(宮中)과 각가(各家) 절양곡(節糧穀) 수천석(數千石)이 해로(海路)로 호남지방으로 떠났다 이말은 삽식간에 도성(都城)안밖에 퍼졌다 서민(庶民)들도 왕후의 분부에 감동되어 함줌씩 곡식을 모아 보냈다.
호남기민(湖南飢民)을 무난(無難)이 구휼 하였다 군신상하(君臣上下)와 전국민(全國民)은 왕후의 성덕(聖德)을 우러러 찬송하였다 왕후께서는 항상 이사관의 은혜가 멀속에 떠난때가 없었다. 그러나 조정형편(朝廷形便)을 알기이 없고 겸하여 보령(寶齡)이 어리시니 때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호남지방 구휼에 어리신 왕후의 횡대(宖大)하신 뜻으로 백성들과 사생동고(死生同苦)하자는 표어(標語)로 지존(至尊)이신 왕후로도 간난(艱難)을 극복(克服)하시고 아사(餓死)한 백성이 없게하신 성덕(聖德)이 전국(全國)에 떨치게되고 영조대왕(英祖大王)깨서도 감동(感動)하심이 컸던 것이다.
영조는 경연(經筵)이 끝나면 내전(內殿)에 듭시와 어린 왕후와 정사(政事)ㄹ르 의론하시는 일이 자주 있었다 王后깨서는 「인의(仁義)는 천지(天地)의 대도(大道)이며 보은(報恩)은 인간(人間)의 윤리(倫理)이니 천명(天命)을 받은 제왕(帝王)은 인의(仁義)로 백성을 다스리고 은혜를 갚을 줄 알도록 지도(指導)하여야 선성(先聖)의 이른바 五倫을 밝히게되고 백성들이 오윤을 밝히므로 천하가 태평할것이라」고 품달(稟達)하셨다.
영조은 더욱 놀라셨다 어린 왕후는 치민(治民)의 도리(道理)가 철학적(哲學的)으로 심오(深奧)한 식견(識見)이 있는것에 감탄하셨다 영조는 부부(夫婦)라기보다 국사(國師)로
생각하였다.
왕후께서는 이사관의 깊은 은혜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자세히 고(告)하시고 또
무신자손(武臣子孫)으로 문과 급제 한 것을 밉게 여겨 적소(適所)에 임용치 않는 것은
파당적(派黨的) 처사이니 탕평(蕩平)을 주장하신데 위배되는 일이며 문신(文臣)의 자손(子孫)으로 무과(武科)에 오르거나 무신(武臣)의 후예(後裔)로 文科에 오르는 者를 各各
登用하여야 天下의 사람이 天性의 품부에 따를 것이며 그리하여 天下의 才士들이 모여보필하여 전국백성(全國百姓)이 모두 요순(堯舜)때의 百姓이 될 것이니 이사관을 召命하시여 적소(適所)에 任用하심을 바라며 그렇게 하므로 글 읽은 사람들이 君主를 원망치 아니 할 것이요 따라서 반역(反逆)할 생각이 나지 아니 할 것이라고 거듭 아뢰었다.
王后의 이 말씀은 충간(忠諫)이었다. 이튼날 英祖大王께서는 李思觀의 거취(去就)를 탐지(探知)케 하시고 正三品 通政大夫로 召命하셨다.
李思觀은 당진(唐津)으로 낙향하여 한가로운 세월을 보내며 글 읽어 쓸데없는 것을 恨
하고 조정(朝廷)의 편파적(偏頗的)인 처사(處事)를 원망하기도 하였다 뜻밖에 일이다 正三品으로 召命하시는 전교(傳敎)를 받고 감읍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벼슬을 버리고 하향한지 근20년에 이런일이 어찌된일이냐 필시 꿈인가』하였다.
이사관(李思觀)은 주야로 길을 재촉하여 서울에 올라와 즉시(卽時) 예궐(詣闕)하여 사은(辭恩) 숙배(肅拜)하고 봉직(奉職)하여 불과 수년에 좌상(左相)에 배명(拜命)되었으며
명상(名相)으로 유명(有名)하였다.
20세시에 女子의 가발(假髮)하는 풍속(風俗)을 엄금(嚴禁)하는 언서(諺書)로 칙령(勅令) 을 내려 女子들의 활동(活動)을 민첩(敏捷)하게 하였다 또 宮中에 친잠(親蠶)하는 규모(規模)를 형식(形式)을 떠나 실질적(實質的)으로 규모를 대확장(大擴張)할 것을 호조(戶曹)에 명하시고 준비단계로 대궐(大闕)안 공허(空虛)한곳에 뽕나물르 다량 심게하고 가꾸는데 하셨으며 양잠시절(養蠶時節)에는 매일(每日) 잠실(蠶室)에 나시여 친잠(親蠶)에 열심(熱心)히 하셨다. 한가롭기만하던 궁인이하(宮人以下) 여러 사람들은 한달동안 양잠에 분주하였다 고치를 大量으로 生産하여 宮中所用의 견직물(絹織物)을 보충(補充)하셨으며 이 사업은 승하 하실 때까지 계속하셨다. 각궁가(各宮家)에서도 넓은 마당에
뽕나무를 심고 가꾸어 소량(少量)이나마 고치를 생산하여 각가정(各家庭) 재산절약(財産節略)에 큰 도움이 되었었다
26세시 宮中을 비롯하여 항간(巷間)에 이르기까지 부여자(婦女子)의 의상(衣裳)감으로  
        주단사용(紬緞使用)을 엄금(嚴禁)하고 外國으로 부터
     주단(紬緞)의 수입(輸入)을 금할 것을 主上께 품고(稟告)하여 실시(實施)하였으며
28세시 조정(朝廷)에서는 처음으로 「예순(睿順)」 이란 존호(尊號)를 올렸다 대내(大內)에 소장(所藏)되어있는 한글로된 임진왜란일기(壬辰倭亂日記)를 분실하였다 임진일기(壬辰日記)는 타왜정신(打倭精神)을 고취코저 한글로 번역하여 대내에서 복무하는 下流배에게 읽었던 것이다 王后께서는 홍문관(弘文館)에 「임진일기(壬辰日記)를 한글로 번역하여 대량(大量) 인간(印刊)하여 방방곡곡에 반포(頒布)하라」고 언서(諺書)로 전교(傳敎)
를 내리셨다. 홍문관(弘文館)에서는 국가(國家)의 재정(財政)이 허락(許諾)되는 대로 년년히 인간하여 널리 분포(分布)하였다
30세시 친히 효제(孝悌) 권유문(勸喩文)을 저술(著述)하시여 인간(印刊)하여 널리 배포
   (配布)하여 인윤대도(人倫大道)를 밝혀 효과가 지대(至大)하였다.
32세시 두번째로 「성철(聖哲)」이란 존호(尊號)를 가상(加上) 하였다.
무녀(巫女)들의 도성내(都城內)에 거주(居住)를 불허(不許)게 하셨으며 공경(公卿)의 夫人에게 「무녀로 하여금 복을 비는等 허황한 일로 물자(物資)를 허비(虛費)하지 못하도록」엄칙(嚴勅)을 내렸다 3월에 영조대왕(英祖大王)께서 승하(昇遐)하시고 세손(世孫)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즉위(卽位)하셨다.

 

                   八. 왕대비(王大妃)로 재위중(在位中)

세손(世孫) 정조대왕(正祖大王)의 즉위(卽位)하시니 왕후(王后) 깨서는 大妃로 추존(追尊)되셨다. 대비 깨서는 망극하신 중에도 신왕 정조에게 「선대왕(先大王) 在位中에 정당(政黨)의 파쟁(派爭)을 탕평(蕩平)하시려고 심력(心力)을 기우리 셨으니 국난(國難)이 많았던 것은 당파(黨派)의; 여세(餘勢)가 남어 있었음은 더 말씀할 것없은즉 이 점(点)을 깊이 통촉 하시여 당파(黨派)를 초월하고 公平하게 人才를 등용(登用)하시고 형정(刑政)보다 덕치(德治)로 치민(治民)할 것은 물론(勿論)이요 자주 민정을 살펴 善政을 펴기를」부탁 하셨다 32세시(정조2년) 세번째로 『장희(莊僖)』란 존호(尊號)를 加上하였다.
홍국영(洪國榮)의 매(妹)를 빈으로 삼을 때 대비께서는 찬양할 일은 ㅁ봇된다고 하셨으나 윤허(允許)하시고 익년(翌年) 35세시에 「홍국영이 비록 공(功)이 이다하나 사람됨이 방자한듯하니 十分 헤아려 알맞은 자리를 맡기라」고 正祖께 말씀하셨으나 정조는
「사람이 過히 투미하지는 않고 공도 있은즉 훈련대장(訓練大將)을 제수(除授)하겠다」
고 품신(稟申)하며 「다른 일은 처분을 받들겠으나 홍국영에 대(對)한 일은 처분을 받들지 않겠다」고 아뢰었다. 五月에 원빈홍씨(元嬪洪氏)(정조의 어머님) 서거(逝去)하니
대비께서는 비참해 하시며 內人을 총동원(總動員)하여 홍씨가 생전(生前)에 저술(著述)한 읍혈록(泣血錄)과 한중록(閑中錄)을 등사하여 각 가정(各家庭)에 반포하였다.
36세시 홍국영이 방자무례한 행동(行動)으로 삼사(三司)에서 규탄하는 상소(上疏)가 비빨치듯 올라오고 조정(朝廷)은 발끈 뒤집혔으나 정조(正祖)는 유예 미결하셨다.
대비께서는 대비처소(大妃處所)인 경복전(景福殿)으로 정조를 듭시기를 청(請)하였다.
정조께서는 즉시 듭셨다 그때 대비께서는 「거년(去年)에도 말씀함과 같이 洪國榮은 재주가 있어 민첩하기는 하나 德이 不足한데다가 주상 총애하시는 힘을 믿고 행동은 날이 갈수록 심(甚)하여 항상 영려 되더니 三司가 동원하여 상소(上疏)가 있고 조정(朝廷)이 물끓듯하며 도하(都下)백성이 不安에 쌓여 있으나 처분(處分)을 나리시지 못하고 유예하심은 甚히 유감된 일이니 내가 정사(政事)에 참여하려는 것이라 아니라 만조정(滿朝廷)이 소란하니 急히 처분(處分)을 내려 신민(臣民)의 마음을 안돈케 하라」고 간곡히 말씀하셨다 정조대왕은 「황송한 일입니다 소손(小孫)의 시안(視眼)이 좁아 년전(年前)에 할머님의 명철하신 분부를 봉승치못한일 죄만합니다 今日은 엄칙(嚴勅)을 내려 엄형(嚴形)하겠다」고 답신(答申)핮니 대비께서는 「동궁시절(東宮時節)에 洪國榮의 공을 생각하시고 관작(官爵)이나 삭(削)하시고 도성내(都城內) 거주를 못하게할뿐 好生之德(호생지덕)으로 살벌(殺伐)을 삼가라」말씀하셨다. 정조는 대비의 말씀대로 방축(放逐)하였다.
37세시 『혜휘(惠徽)』이란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였다.
38세시 『익열(翼烈)』이란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였다.
41세시 『명선(明宣)』이란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였다.
49세시 『수경(綏敬)』이란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였다.
56세시 정조대왕(正祖大王)께서 승하(昇遐) 하시고 순조대왕(純祖大王)이 즉위(卽位)하시니 보령(寶齡)11歲(세)셨다 大妃께서는 大王大妃가 되셨다.
        九. 大王大妃로 섭정(攝政) 5年

어리신 임금 순조대왕(純祖大王)은 정치 할수없게 되어 대왕대비(大王大妃)께서 섭정(攝政)하시여 만기(萬機)를 총람(總覽)하시게 되었다 만조백관(滿朝百官)의 하례(賀禮)를 받으신 섭정(攝政) 대왕대비(大王大妃)께서는 「전왕(前王)의 재궁(梓宮)이 아직 이궐내(闕內)에 계시고 창황한中 어리신 주상(主上)께서 등극(登極)하시니 만기(萬機)를 총람(總覽) 하실수 없어 부득이(不得己) 내가 섭정(攝政)하게 되었다 구중(九重)궁궐 깊숙이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 여인(女人)으로 제세안민(濟世安民)할 정략(政略)이 없고 오직 원노공경(元老公卿)과 하리(下吏)에 이르기까지 합심(合心)하여 치사(侈奢)로운 마음 수탈(收奪)할 생각을 버리고 어리신 주상을 받들어 백성(百姓)의 생업(生業)이 안도(安堵)되도록 할 것을 바라는 바이다.」라고 섭정 대왕대비의 첫번 칙어(勅語)가
내렸고 이어 「내가 듣는 바에의(依)하면 대내(大內)에 진공(進供)을 맡은 각관청(各官廳)이 있어 허비되는 실소용(實所用)보다 몇 배나 더하여 남용(濫用)되는 일이 있다하니 왕실용(王室用) 미곡(米穀)을 맡은 사도시(司導侍)와 어류(魚類)를 맡은 사재감(司宰監)과」포목(布木)을 맡은 내수사(內需司)와 주류(酒流)을 맡은 사온서(司온署)와 각궁가(各宮家)에 진공(進供)하는 곡물(穀物)을 맡은 내자시(內資寺)와 채소를 맡은 사포서(司圃署)등 육처(六處)의 관서(官署)를 사옹원(司饔院)에 합병(合倂)하여 제비(諸費)를 절약하고 남용(濫用)치 않도록 하여 왕실중심(王室中心)의 사치로운 것을 없애고 빈곤한 백성(百姓)들의 질병(疾病)을 치료한다는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는 유명무실(有名無實)하여 국재(國財)만 허비한다니 이 둘 관서(官署)를 대확장(大擴張)하고 지방(地方)에는 관장(官長)이 겸무(兼務)케 하도록 기구를 쇄신(刷新)하고 일품관원(一品官員)으로 통활 하게하여 질병(疾病)으로 허덕이는 백성(百姓)들은 치료하고 재난(災難)을 구호에 힘써 만민(萬民)의 행복(幸福)의 길을 열어 줄것과 왕실에 진상(進上) 하는 제도(制度)를 폐함과 동시(同時)에 진상물(進上物)을 처리(處理)하는 제용감(濟用監)을 폐지(廢止)할 것 등 정부기구(政府機溝)를 대개혁(大改革)하여 백성(百姓)의 생활을 향상(向上) 케 할 것과 왕실중심(王室中心)의 비용(費用)을 절감(節減)하고 백성을 중심(中心)한 제비(諸費)를 배가(倍加)할 것을 명하시고 즉시(卽時) 시행(施行)토록』하셨으니 조신(朝臣)들은 감읍하여 기구(機構) 개혁(改革)의 법절차(法節次)를 정(定)하였다.
정조(正祖) 재위시(在位時)부터 영남지방(嶺南地方)에서는 무식한 대중(大衆)속에 파고들어 민심(民心)을 현혹(眩惑)시키는 사학(邪學)이 성행(盛行)하여 민심(民心)이 황황하며 한 가정에 부모(父母)가 사교(邪敎)에 도취하는 일면(一面) 자식(子息)이 사교(邪敎)를 반대하고 또 자식(子息)이 邪敎에 도취하는 반면(反面)에[ 부모가 반대하여 남편이 도취하는가 하면 아내가 반대하는 등 한 가정이 소란하니 자연(自然)이 가산(家産)은 파멸되어 흥분에 쌓인 백성들은 극도로 혼란만 거듭하였다 사학(邪學)의 괴수(魁首)들은 문구(文句)를 암송(暗誦) 또는 고창(高唱)하며 이 문구(文句)ㄹ르 비방하는자는 천벌(天罰)을 받는다는등 황당무게한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떠돌고 민심(民心)은 흉흉하였다. 정부(政府)에서는 진무(鎭撫)정도로 발본색원(拔本塞源)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섭정 대왕대비께서는 각도 감사(監司)에게 『사학(邪學)의 근원(根源)을 철저히 수탐하여 그 수괴(首魁)를 잡고 금부(禁府)에 품신(稟申)하여 금부(禁府)의 지시(指示)에 의(依)할것이며 백성(百姓)의 원성이 없도록 할것과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이 주체(主體)가 되어 사학(邪學)에 빠져 부모처자(父母妻子)가 유리(流離)하는자를 뫃아 자각(自覺)하도록 선도(善導)하여 가정(家庭)에 돌아가서 안도(安堵)한 생계(生計)를 유지 하도록 할 것이며 지방관(地方官)으로 사학(邪學)의 무리를 금부(禁府)에 상신(上申)치 않고 은익하거나 동정하여 용서하거나 또는 가혹한 형벌(刑罰)로 치죄(治罪)하는 관장(官長)은 엄중(嚴重)이 처벌(處罰)하겠다』고 엄중(嚴重)한 칙령(勅令)이 내렸다.
각지방(各地方) 관장(官長)들은 섭정(攝政) 대왕대비(大王大妃)의 엄칙(嚴勅)에 감동되어 신속(迅速)히 수색하여 괴수(魁首)를 잡아 금부(禁府)로 압송하고 무리들은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에서 선도(善導)케 하였으며 정부(政府)에서는 그 괴수를 해도중(海島中)에 미리 안치하고 외부와 연락을 끊게 하여 일사불난(一絲不亂)하고 과감하게 처리하여 일년내에 사학의 무리는 머리를 들지못하였으니 민심은 안도(安堵)되었다.
섭정2년 신유년(辛酉年)에 사학의 잔당(殘黨)은 다시 움직이었다.
섭정 대왕대비께서는 사학이 발생하는 지방관(地方官)을 삭탈관직(削奪官職)하여 귀양보내고 신속(迅速)하게 엄중처리(嚴重處理)하여 백성의 정신적(精神的) 피해(被害)를 적게하였다.
58세시에 김조순(金祖淳)의 따님을 왕비로 책봉하셨다. 익년(翌年)에 『광릉(光陵)』이란 존호를 가상하였다 동년에 평양과 함흥에 대화가 있었다. 섭정 대왕대비께서는 대내에있는 친용 패물을 특사(特賜)하시여 재민을 구호(救護)하셨고 군자감(軍資監)의; 부정을 들으시고 대노(大怒)하시여 제도를 대개혁하게 하시고 관원들을 엄벌에 處하시고 수시(隨時)로 감찰하여 일호(一毫)부정이 없도록 하였으며 국고(國庫)가 가득하였다.
60歲時 순조4년에 「융인(隆仁)」이란 존호를 가상했고 동년에 또 「소숙(昭肅)」이란
존호를 가상하였다 정월(正月)에 환후(患候)가 계시여 국구(國舅)인 김조순(金祖淳)을 소명(召命)하시고 늙고 병들어 만기(萬機)를 총람(總覽)할 기력(氣力)이 없고 또 주상께서 15세에 보령으로 지각이 있으니 경이 주상을 보좌(補座)하여 국사가 어지럽지 않도록 힘쓸 것을 분부하시고 이어 대소관원을 뫃아놓고 「대정을 환정할터이니 어린 주상을 보좌하여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루도록 하라」고 칙어(勅語)를 나리시고 오년간(五年間) 섭정을 끝내고 환정의 절차를 맞첬다.
환후는 항상 미령하셨다  삼월에 평양에 대화로 관공서와 민가가 회진(灰塵)되어 작년 화재에 비 할것이 아니고 참혹한 현상이었다. 대왕대비께서는 환후중 이 말을 들으시고 근심 하시여 섭정은 아니시지만 조정의 공론도 들으시고 의론도 하였으나 국가재정상 복구는 막연하였다 대왕대비께서는 各 공경대부(公卿大夫)의 부인들을 소명하시고
「젊었을 때 호안기민을 구휼하는데 상하가 힘을 뫃아 굶주려 죽은 백성이 한사람도 없게함은 각가(各家)의 협조로 무난 하였는데 이번 평양화재 천고미증유(千古未曾有)한 참상(慘狀)이며 평양은 우리나라 서관(西關)에 중요한 곳이니 복구 시급한 일이다 각가에서 가지고있는 귀중한 패물을 전부 출연(出捐)하여 시급 복구토록 하는것이 어떠한가」물으시고 또 『작년 함흥 평양 두곳 화재로 내가 간직했던 패물(佩物) 전부로 구호하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한가지도 없으므로 특히 말하는 것이라』고 거듭 분부하셨다 공경의 부인들은 감읍하고 돌아가 있는 대로 뫃아 받쳤다.
대왕대비께서는 호조(戶曹)와 공조(工曹)에 명령하시어 평양 복구공사를 시급히 서두르게 하시고 간일하여 복구공사의 진첩상황을 하문하시고 독촉(督促)하셨다 공조(工曹)에서는 주야(晝夜)로 공사를 서들러 일년내에 복구가 끝났다 대왕대비 천세(千歲)소리는 전국 방방곡이 일었났고 전국민은 밤을 새워 대왕대비의 환후(患候)가 평복하시고 萬壽無疆(만수무강) 하심을 기원하였다.
슲으나 61세되시니 정월 순조5년 을축에 높으신 德을 남기시고 승하(昇遐)하시니 천하 백성들은 망극(罔極)해하며 높은 山에 올라 서울을 바라보고 통곡하는 하늘도 슲어하였다.
조정에서는 『정헌(靖憲)』「정순(貞純)」이란 시호(諡號)를 추상(追上)하였으니 예종(睿宗) 성철(聖哲) 장희(莊僖) 혜휘(惠徽) 익렬(翼烈) 명선(明宣) 원경(媛敬) 광헌(光獻)
융인(隆仁) 소숙(昭肅) 정헌(靖憲) 정순왕후(貞純王后)이시다.
옥책(玉冊) 애책(哀冊) 행장(行狀) 영 정 순실록(英 正 純實錄) 장음년보(長陰年譜)
익재집(翼齋集) 오백년기담가화(五百年奇談佳話) 천상궁수기(千尙宮手記)등을 참고(參考)하여 간추려 익환(翊煥)은 삼가 엮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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