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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풍양조씨호군공파 원문보기 글쓴이: 조일희
완도ㆍ해남 여행기
(2012. 10. 24 ~ 10. 26.)
24일
이번 全南 莞島旅行은 1개월여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莞島의 金在千先生께서 우리 문중 사람들을 완도에 놀러 오도록 간곡히 초청하였는데, 내가 여러 일정을 고려하여 보름여전에 대학의 중간시험 기간에 2박3일로 완도여행을 하기로 호산 김재천선생과 구체적 약속을 하였었다. 莞島人 小南 金榮炫先生께서 일제시대 때인 1919년부터 4년여간 경북 尙州에 와서 신교육기관인 朝明講習所의 敎師를 역임하셨는데, 우리를 초청한 호산 김재천선생은 소남선생의 차남으로 현재 항일운동완도군기념사업회 부회장과 원불교광주교구소남훈련원 고문을 맡고 계신다. 이번 여행을 같이한 사람은 하회아재(誠萬), 誠三아재, 南仁할배, 誠益아재, 그리고 나까지 다섯 사람이다. 大邱의 무실형님(昇熙)과 종동아재(誠河)께서 개인상의 바쁜 일정으로 인해 이번 여행에 동참하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다.
대구서 오후 2시에 출발하여 5시간 달려 완도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7시였다. 평일이라 교통이 원활하였지만 워낙 먼 거리라 결코 손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집에 온 후 枕泉金先生께서 쓴 상주여행기를 보니 1924년에는 莞島에서 출발하여 木浦, 大田, 金泉, 龜尾를 거쳐 尙州 養眞堂으로 가는데 4일이 소요되었다. 그나마 현시대가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김재천선생, 그 아들 김풍호씨, 이질녀 이종금씨, 그리고 완도문화원부원장이신 김의일선생께서 우리가 묵기로 한 그리스모텔 앞에서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청해나루횟집에서 신선한 회를 먹으며 김재천선생과 김의일선생으로부터 우리 豐壤趙氏 門中과 小南先生과의 각별한 인연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와 小南先生의 업적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를 대접하는 것이 너무나 극진하였는데, 김재천선생은 여러 번 나의 손을 꼬옥 잡으시며 더욱 반가움을 표시하신다. 김재천선생은 만84세의 고령임에도 혈기왕성하여 허리가 꼿꼿하고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있어 실제보다 10년 정도는 더 젊어 보이신다.
숙소로 돌아와 김재천선생께서 여러 자료들을 주시며 설명을 하여주셨다. 소남선생의 육성녹음을 들려주시려고 했는데, 녹음기의 고장으로 듣지 못했다. 『枕泉金先生自敍行錄』이라는 책자도 받았는데, 小南先生의 부친인 枕泉 金光善先生의 遺文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그 책에는 枕泉先生이 아들인 小南 金榮炫이 교사로 있는 상주지역을 1922년과 1924년 두 번 방문한 旅行記도 수록되어 있었다. 여행 과정에 대한 묘사가 워낙 세밀하여 당시의 교통상황, 물가, 상주지역의 문물, 상주지역 선비들의 바둑과 시회를 즐기는 모습 등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되었다. 그 외에도 小南先生의 연구 업적이나 활동상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小南先生의 최대 업적은 완도ㆍ해남지역의 新敎育을 이끌어 그로부터 영향받은 많은 제자들이 농민운동과 반일운동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소남선생은 辰韓國馬韓史와 淸海秘史를 저술하는 등 古代史와 張保皐와 淸海鎭 역사를 재조명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는데, 그중에는 일본의 求法僧 傳燈法師 엔닌(圓仁)이 張保皐大師에게 보낸 書翰을 발굴하여 세상에 알렸다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소남선생이 “忠武公 李舜臣 戰陣圖”를 발굴하고 이 戰陣圖에 대해 설명을 붙인 것도 있었다. 이것이 그가 최초로 발굴한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임진왜란 때 해상 전투 陳法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가치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남선생은 우리 言語에 대한 연구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우리 말이 그 발음에 따라 한자로 표기되고 다시 그 한자단어를 우리 말로 읽는 과정에서 그 의미나 발음이 왜곡되는 것을 밝혔으니, 다시 말해서 우리 단어의 語源을 탐구하는 연구라 할 것이다.
25일
아침 8시경 횟집에서 전복죽을 먹었다. 식사중에 하회(誠萬)아재께서 김재천선생께 “우리의 黔澗先祖께서 1608년 海南縣監으로 부임하여 치적이 있고, 고을 사람들이 遺愛碑를 세웠다고 하는데, 김선생님께서 지금 黔澗先祖의 遺蹟이나 文獻資料를 찾을 수 있는지 알아봐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부탁하니 김재천선생께서 해남문화원장에게 부탁하여 알아보겠다고 답하셨다. 아침 식사 후 김재천선생의 아들 김풍호씨의 승합차를 일행이 타고 완도 관광을 하였다.
첫 방문지는 小南先生의 墓所이다. 가족묘원인데, 특이하게 부부 合葬墓나 雙墳의 형태로 묘소를 배치하지 않고 세대별 및 남녀별로 구분하여 묘소를 배치하였다. 소남선생의 계획에 의해 조성된 묘원인데, 소남선생께서 1920년 朝明講習所를 개교할 당시에 兩班들이 명당터를 찾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연설한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될 만큼 소남선생의 혁신적인 사고를 이로써 알 수 있다.
이어 해남의 <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여러 해 선장생활을 한 한 개인이 수천 점의 어류, 파충류, 조개류, 산호류 등 25,000여점을 여러 해에 걸쳐 수집하여 전시해 두었는데, 모두가 진품으로, 수집가의 노력이 매우 놀랍다. 그곳에서 인천에서 온 한 관람객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인천에서 이런 규모의 해양자료 전시물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며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박물관 관계인으로부터 커피와 송편 대접을 받았다.
다음에는 차로 이동하여 해남 땅끝마을로 갔다. 이곳이 우리 한반도 육지의 가장 남쪽 끝이다. 5분여 걸어서 <해남땅끝마을전망대>에 오르니 아래 사방으로 작은 여러 섬들이 보였다. 하늘은 맑고 지평선은 아득한데, 저 멀리 지평선에도 산들이 마치 하늘에 떠있는 듯 아스라이 보였으며 가까이에 크고 작은 섬들 사이의 바다에는 김양식장인지 뭔지 모를 바다 어구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또한 여기저기에는 여러 척의 배들이 빠르거나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완도의 대표적 고찰인 대흥사로 향했다. 절 인근 식당에서 산채 비빔밥을 먹고 편백나무가 도로 양 옆으로 울창한 절 입구를 지나 頭輪山 大興寺로 들어섰다. 절의 규모가 꽤나 크다. 壬亂 때 西山大師가 거느린 승군의 총본영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입구에 사천왕상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절의 마당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頭輪山의 정상 바위는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이다. 누각 아래 냇물이 흐르는데, 누각 위 현판이 枕溪樓라 씌어있다. 계곡을 베개로 한 건물이라.... 이 枕溪樓의 현판과 대웅전의 大雄寶殿이라는 현판이 圓嶠 李匡師의 작품이란다. 대웅전 옆 건물에는 無量壽閣이라는 阮堂(秋史) 金正喜의 작품도 걸려 있었다. 비록 대웅전은 근년에 복원된 건물인지 문화재가 아니었지만, 大興寺는 千佛殿 등 수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枕溪樓에서 千佛殿 방향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있는 두 나무는 서로 뿌리가 붙은 連理根 나무이다.
이어서 <완도수목원>으로 갔다. 수목원에선 맑은 공기를 마시며 散步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렇게 하려면 한나절은 족히 소요될 것이므로 부득이 승합차를 타고 수목원 정상부근까지 올라갔다. 정상의 二層 樓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굽이굽이 흐르는 산세가 가히 일품이다. 이곳이 우리나라 유일의 暖帶性 樹木園이라 하는데, 가을임에도 가히 주변의 온 산이 짙게 온통 푸르기만 하다. 수목원 정상에서 下山하면서 산림박물관에 들렀는데, 신림해설사가 어제 우리 일행과 저녁식사를 함께한 이종금여사이다. 산림박물관은 韓屋으로 규모가 큰 □형태인데 외형이 아름다웠으며 山勢와 어울렸다.
이어서 승합차를 타고 TV드라마 "海神"의 촬영장으로 갔다. 드라마 <海神>의 방영이 끝난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현재 다른 무언가의 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해 준비하는 듯했다. 이곳 莞島가 張保皐가 淸海鎭을 설치하고 해상무역을 장악했던 곳의 중심지이니, 촬영지를 이곳으로 정한 것은 매우 의미있다. 소남선생께서 발굴한 자료중에는 일본의 傳燈法師인 엔닌(圓仁)이 장보고에게 보낸 書翰의 사본이 있었는데, 필시 소남선생께선 우리나라가 장보고가 활동하던 신라시대처럼 강성하고 번성하길 간절히 기원하였으리라고 상상해 본다.
바로 옆의 김재천선생이 別莊처럼 쓰는 아담한 규모의 건물로 갔는데, 堂號를 보니 老農堂이다. 거기서 김재천선생께서 “加里浦鎭僉使先生案”이라는 옛 문헌 복사물을 내놓으셨는데, 이것은 중종 22년(1522)부터 고종 31년(1894)까지 이곳 가리포(莞島)의 僉使(종3품 무관, 현재의 여단장급 지위)로 부임한 역대의 인물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전체를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지만 우리 일행이 대충 훑어본 바 이 자료에는 趙廷彦이라는 우리 豐壤趙氏 인물도 있었다. 여기에는 趙儐이라는 全羅道兵馬節度使가 1723년 기록한 別文이 있는데, 이 別文에는 “이곳이 국가의 雄鎭으로 朝廷에서는 僉使를 모두 軍務에 충실한 武官으로 嚴選하여 任命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김재천선생으로부터 이 귀중한 역사적 자료를 받았는데, 여기에 나오는 풍양조씨 인물이 족보를 통해 어느 파의 인물인지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바로 옆의 <완도소남훈련원>으로 갔다. 중심건물인 중강당 건물 현관에 소남선생의 생애를 설명하는 글이 큰 액자에 걸려있었는데, 그 글에 1919년에 대구교도소에서 소남선생을 만난 趙台衍께서 소남선생께 尙州로 가서 朝明講習所의 교사가 되도록 권유했다는 구절이 있었다. 그런데 趙台衍이라는 銜字 다음의 괄호안에 “趙誠河氏 先伯父”라는 보충설명이 있는데, 誠三아재께서 이를 발견하고서 무척 기뻐하며, 이곳에 “나의 형님의 이름이 나오다니!”라고 크게 감탄하였다. 그 건물에는 숙박이 가능한 방들이 여럿 있었다. 김재천선생께서 우리에게 다음에 완도에 오면 이곳에 숙박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어 소남훈련원 옆에 있는 <완도청소년훈련원>을 대충 둘러보고 나왔다. 입구의 완도마트에서 막걸리를 나눠 마셨는데, 완도마트는 오늘 우리를 승합차에 태워 관광 안내를 해주신 김풍호씨의 아내분(김재천선생의 子婦)이 경영하는 곳이다. 우리 일행에게 완도 특산품인 다시마와 톳을 선물해 주신다. 미역과 멸치는 우리가 구입하였다. 김재천선생과 아들 김풍호씨가 우리에게 베풀어준 배려가 너무나 고마웠는데, 우리 일행은 내년에 우리가 김선생 가족들을 상주로 초대해서 관광안내도 하고 대접도 제대로 해야겠다는 의견을 나누었다.
南海의 해산물이 푸짐한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고장난 녹음기를 고쳤으므로 어제 밤에 듣지 못했는 소남선생의 육성녹음을 들을 수 있었다. 소남선생께서 조명강습소를 개교할 당시에 대한 회고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養眞堂에 朝明講習所를 개교할 당시에 심환진 상주군수와 면장 등 지역의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였는데, 朝明講習所 설립자인 나의 조부님 晩堂公 諱 泰衍께서 연설하시고, 다음 심환진 郡守가 연설하고, 그 다음 面長이 연설하고, 끝으로 누군가의 권유에 의해 소남선생이 연설하였다고 한다. 녹음 내용을 귀 기울여 들어보니 당시에 소남선생을 남쪽의 섬지역 출신이라고 심군수와 상주지역 유림 인사들이 은연중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듯한데, 소남선생이 연설할 때 “양반이 명당을 찾는 것을 비판하면서, 자손들 교육을 잘 시키면 그것이 곧 명당이다.”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취지의 내용이 들어있었다. 숙소에서 술을 조금 더 나누며 이런저런 閑談을 나누다가 밤 10시반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26일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하회아재(誠萬)는 완도터미널로 가서 서울로 상경하셨다. 완도항 해변가로공원에 골프선수 최경주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최경주 선수는 완도를 빛낸 인물이다. 나머지 일행 4명은 대구로 오는 길에 康津에 들러 茶山 丁若鏞先生의 유적지를 둘러보기로 하였다.
<다산유물전시관>을 둘러보고 茶山圖錄集을 한권 구입하였다. 박물관 옆길을 따라 20여분간 걸어서 茶山草堂으로 갔다. 茶山草堂으로 오르는 초입의 한 가게(식당, 전통찻집) 앞에서 한 분이 『다산 정약용』의 저서를 소개하면서 인근의 다산 유적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해 주셨다. 그분은 바로 그 책의 저자로서 전 강진군수를 역임한 尹棟煥이란 분이다. 그 분은 다산선생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해서 스스로를 “다산초당 산직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분과 인사를 나누고 정중히 “다산선생의 정치사상이나 경제사상을 현시대와 관련하여 재조명할 수 있도록 윤선생님께서 직접 한 편의 논문을 써 주시거나 아니면 논문을 써 주실 수 있는 누군가를 소개해 주시길 부탁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분이 나의 부탁을 수첩에 메모해 두었는데, 추후 다시 연락하기로 하였다. 내가 편집책임을 맡고 있는 『유학과 현대』 내년 호에 싣기 위함이다. 다산초당은 다산선생이 많은 저술을 집필하신 곳이다. 초당 바로 옆 연못의 물이 매우 탁하여 보기에 민망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더없이 맑고 숭고한 학자가 사색하고 글 쓴 장소인 만큼 ‘연못의 물이 거울처럼 맑았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아쉽게 생각하였다.
대구로 향했다. 고속도로 보성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고속도로를 계속 달려 대구에 도착하니 오후 4시 30분이었다. 종동(誠河)아재께서 우리 일행에게 술과 저녁을 사주셨다. 종동아재의 권유로 다른 분들은 종동아재의 댁으로 가서 노래 부르고 술판도 더 벌일 모양이다. 나는 먼저 집으로 돌아왔는데 저녁 8시였다. 여장을 풀어 정리한 후 아내에게 지난 2박 3일의 즐거웠던 일정을 들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