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1호 : 공주 갑사 석가여래삼세불도 및 복장유물
(公州 甲寺 釋迦如來三世佛圖 및 腹藏遺物) 2010.4.23 지정
공주 갑사 석가여래삼세불도는 18세기 초,중반 전라도를 중심으로 경상과 충청 지역에서 활동한 당대 대표적 화사인 의겸(儀謙)이 제작한 불화이다. 현재까지 작품을 비롯하여 화기, 사지, 발원문 등을 통하여 알려진 의겸의 작품은 39건으로 그 가운데 현존하는 불화는 21건 30점이며 작품을 통해서 볼 때 그의 활동 시기는 대략 1713년에서 1757년 무렵까지 약 40여 년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가운데 길이 4m에 이르는 3폭 형식의 삼불도는 갑사 삼세불도를 비롯해 운흥사 삼세불도, 화엄사 삼신불도 등 3건에 불과하며, 조선후기를 통틀어서도 이러한 대형의 3폭 삼불도 형식의 예는 희귀한 편이다. 비록 약사회 1폭은 없어졌지만, 450cm에 육박하는 대형의 화폭에 각 설법장면을 세련되고 유려한 필치, 짜임새 있는 구도와 조화롭고 안정감 있는 색채로 부처의 세계를 장엄하게 묘사한 18세기 전반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판단되었다.
제1652호 : 통영측우대(統營測雨臺) 국립중앙과학관
국립중앙과학관의 통영(統營)측우대는 수군통제영이 통영에 있을 때 설치했던 것으로 측우대 앞면 중앙에 ‘측우대(測雨臺)’라는 글자와 ‘신미 2월(辛未 二月)’이라고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서 1811년(조선 순조 11년) 또는 1871년(조선 고종 8년)에 만든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명칭뿐만 아니라 제작 년대가 확실하게 명기되어 있는 역사적 가지가 높은 귀한 과학유물 중에 하나로 평가되었다.
둥근 받침돌 위에 사각 기둥형 측우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받침돌에는 금이 가있으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측우대 혹은 측우기가 실물로 남아 있는 것은 5개(측우대 4, 측우기 1)뿐이며, 이 측우대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받침돌까지 남아있는 것은 이 측우대가 유일하다.
2010.6.28 (제1653-55호, 청주고인쇄박물관)
제1653호 : 자비도량참법집해(慈悲道場懺法集解)
이 『자비도량참법집해(慈悲道場懺法集解)』는 활자본을 번각한 목판의 인본(印本)이며 조판의 형식, 글자의 모양 및 크기 등을 비교하여 볼 때 이 책의 저본이 된 활자는 『직지(直指)』를 찍은 ‘흥덕사자(興德寺字)’로 추정되었다.
비록 고려후기에 찍은 바탕본(금속활자본)은 전하지 않지만 이 책을 통해 고려후기에 <직지>외에 또 다른 금속활자본의 존재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 간접적이나마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의 계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이 책은 동일한 판본이 공인박물관에 1부가 소장되어 있을 뿐 매우 희귀한 전적이다. 때문에 이 책은 우리나라 고려후기의 금속활자 인쇄본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이며, 또한 불교학의 교학적(敎學的) 연구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제1654호 : 신편산학계몽(新編算學啓蒙)
조선 초기의 과학관련 서적은 전해지는 것이 많지 않다. 『신편산학계몽(新編算學啓蒙)』은 원나라에서 수입한 산학서(算學書)로서, 『양휘산법(楊輝算法』, 『상명산법(詳明算法)』등과 함께 전문기술직의 고시과목으로 수학교육의 교과서적인 서적이다.
이 책은 15세기 전반 안평대군의 글씨로 주조한 경오자(庚午字)로 인출한 것으로 낙권(落卷)이나 결장(缺張)이 없이 완전한 상태인 점에서 매우 귀중한 서적이다. 또한 권말(卷末)에는 세종조(世宗朝)의 경자자(庚子字)와 갑인자(甲寅字)의 주자사실(鑄字事實)을 기록한 주자발문(鑄字跋文)이 있어 조선 초기 활자 인쇄술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더욱이 경오자로 인출한 책들은 전본(傳本) 중에 완질(完帙)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가 특히 소중하게 평가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책은 조선전기의 과학사 및 도서출판사 그리고 금속활자인쇄술과 서지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제1655호 : 노자권재구의(老子鬳齋口義)
『노자』에 대한 주석서는 수없이 많지만 본문만큼이나 주석도 난해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에 비하여 임희일의『노자권재구의(老子 口義)』는 서명에서 밝히듯이 말로 설명하듯이 쉬운 구의체(口義體) 문장으로 분명하고 뚜렷하게 서술한 관계로 초학자들이 이해하기에 쉽다는 평을 받으면서 동양에서 널리 읽혀졌다.
이 「老子 口義」는 조선에서 계미자(癸未字)에 이어 2번째로 주조된 경자자(庚子字)로 찍은 판본으로 완전한 형태의 전존본(傳存本)이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자권재구의』는 결장(缺張)이나 훼손된 부분이 없이 전권(全卷)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경자자(庚子字)의 인본(印本)과 전본(傳本)이 희소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판본학상(版本學上)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 인본(印本)을 통해 당시 활자의 모양, 조판의 개량 등 인쇄기술적인 발달상을 살펴 볼 수있어 조선 초기의 금속활자 인쇄술과 판본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한국서지학과 도서출판사 연구의 측면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었다.
제1656호 :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星州 法水寺址 三層石塔) 경북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은 신라 애장왕(800~809년) 때 창건한 법수사지(法水寺址)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지는 가야산 계곡을 석축으로 단을 조성하여 자리 잡고 있다.
사역은 남북 150m, 동서 150m 정도이고 크게 세 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금당지로 추정되는 축대 아래에는 백운동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당간지주가 고목의 뿌리에 일부 쌓여 있다.
석탑의 높이는 5.8m이며, 상․하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부를 올린 양식으로 노반 이상의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으나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석탑은 규모가 작아지고 하층기단이 높고, 안상이 음각된 점 등의 9세기 후반기 특징을 보이고 있으나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5단인 점 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찰의 창건시기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 1657호 : 이형 좌명원종공신녹권 및 함(李衡佐命原從功臣錄券및 函) 국립고궁박물관
공신록권은 나라에 공이 있는 인물에게 공신으로 임명하는 증서를 말한다. 이 녹권은 태종이 잠저(潛邸,동궁)에 있을 때 밤낮으로 보좌한 신하들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포상하고 수여한 원종공신록권으로, 태종 11년(1411) 11월에 당시 통훈대부판사재감사였던 이형에게 발급한 3등공신록권이다.
크기는 가로 243㎝, 세로 34.7㎝이며, 종이질은 닥나무종이이다.
태조 이성계가 봉한 원종공신 이후 두 번째로 발급된 녹권으로, 조선 전기 공신에 대한 대우와 공신록 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된다.
제 1658호 : 재조본 유가사지론 권42(再雕本瑜伽師地論卷四十二) 고양시 원각사
이『재조본 유가사지론 권42(再雕本瑜伽師地論卷四十二』은 고려 高宗34년(1247)에 판각되어 그 무렵에 印出된 것으로 보이는 고려대장경 재조본으로서, 현재 보물 제969호(유가사지론 권제64) 및 보물 제972호(유가사지론 권제55) 지정본과 동일본으로 판단되었다. 또한 지정 대상본 권42는 현재 유일본이다.
최근 이 『유가사지론』의 경문에서 고려시대에 각필로 구결을 표시한 현상들이 밝혀지고 있어, 국어학계에서도 주목되고 있는 판본 중에 하나이다. 해인사대장경(팔만대장경)을 완성한 직후인 13세기 중후기에 인출한 초기간본으로 인쇄상태가 선명하고, 현전하는 해인사대장경(팔만대장경) 간본 중에서 고려 때 간인한 것이 드문데다 상태가 비교적 온전하여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었다.
제 1659호 : 천자문(千字文)
이 『천자문(千字文)』은 석봉 한호(石峰韓濩, 1543-1605)가 서사(書寫)한 필체(筆體)를 판하본(板下本)으로 하여 간행(刊行)한 목판본(木板本)으로 현전(現傳)하는 유일(唯一)의 초간본(初刊本)이라는 점에서 석봉서체(石峰書體)의 연구에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단되었다.
선조 16년(1583)에 처음 간행된 이래 왕실, 관아, 사찰, 개인에 의해 여러 차례 간행되면서 조선시대 천자문 판본 가운데 가장 널리 전파되어 초학자의 한자, 글씨 학습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 국어학, 서지학, 서예사 연구자료로서의 가치도 크다. 나아가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교육사(敎育史)와 국어사(國語史) 및 출판문화사(出版文化史)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제1660호 :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順天 松廣寺 木造觀音菩薩坐像 및 腹藏遺物)
이 송광사 관음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복장되어 있던 저고리와 별도의 백색비단에 적은 발원문을 통해 1662년 궁중나인(宮中內人) 노예성(盧禮成)이 경안군(慶安君) 내외의 수명장원(壽命長遠)을 위해 발원하고, 경안군 내외와 나인 노예성, 박씨, 당대의 고승(高僧) 취미수초(翠微守初) 등이 시주하여 17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조각승 혜희(慧熙)와 금문(金文)이 조각하여 조성한 관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발원문을 통해 경안군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던 나인 노예성이 경안군의 수명장원을 위해 발원 조성한 관음보살상이라는 데 그 역사적 의미가 크며, 특히 경안군의 것으로 추정되는 쪽빛 저고리 안쪽 면에 적힌 발원문은 당시 정세의 일 단면을 읽을 수 있는 함축적인 메시지가 담겨있어 이 상의 사료적 가치를 더 해주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이 관음보살좌상은 1662년이라는 제작시기와 조성주체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불상의 양식적 특징인 대중적인 평담한 미의식이 농후하게 반영된 가운데, 이 시기 불상중에서도 비교적 높은 조각적 완성도를 보인다. 한편 강인한 인상에서 오는 높은 정신성, 장엄이 강조된 독특한 착의형식, 역동적인 힘이 강조된 신체의 형태미 등은 조각승 혜희의 유파적 특징이여서 17세기 본격화된 조각유파 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발견된 복장유물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되었다.
한편, 섬유류의 유물이 존속하기 어려운 우리나라의 기후․환경 조건 등을 고려한다면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의 복장 섬유류 유물은 복식사뿐만 아니라 직물, 염색, 민속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어 역시 복장유물로서 불상과 함께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되었다.
제1661호 :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전적(順天松廣寺木造觀音菩薩坐像腹藏典籍)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전적(順天松廣寺木造觀音菩薩坐像腹藏典籍)”(보물 제1661호)은 위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에 복장되어 있던 복장유물 중 중요 불교경전 8점이다.
이 경전 중 대방광불화엄경합론(大方廣佛華嚴經合論)은 이권생(李權生), 박문손(朴文孫), 유약(柳約)등이 판하본을 쓰고, 전라도 광주목(全羅道光州牧)으로 하여금 판각, 간행하게 한 간경도감본 교장(敎藏)이다. 재조대장경은 해인사대장경(팔만대장경)의 15세기경의 인본(印本)으로 희귀한 자료이므로 복장유물 전체에서 독립하여 복장전적으로 별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보존 관리하여야 한다고 평가되었다.
제1662호 :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
『大慧普覺禪師書』는 중국 송나라의 大慧宗杲(1088~1163)가 편지글을 모은 책이다. 大慧가 주로 사대부들에게 禪에 관한 여러 가지 것들을 대답해 준 편지로 제자인 慧然이 기록하고 淨智居士黃文昌이 重編하였는데‚『大慧語錄』30권 가운데 25~30권에 해당된다. 총 62편의 서신 중 승려에게 보낸 2편과 여성에게 보낸 1편을 제외한 59편은 모두 당시의 관료나 지식인들과 주고받은 서신이다. 서명에 표시된 大慧는 그의 자이고, 普覺은 시호이다. 그 서명을 줄여서 ‘大慧書狀’, ‘書狀’, ‘書’등으로 쓰거나 부르기도 하나 주로 ‘書狀’이라 일컫고 있다.
이 책은 徑山妙喜庵宋本을 저본으로 고려 우왕 13년(1387)에 번각한 판본이다. 표지는 가철되어있고 표제를 ‘大慧語錄’이라 묵서로 썼다. 책머리에는 ‘大慧普覺禪師書’ 권수제가 있고 다음 행에‘參學慧然錄’ ‘淨智居士黃文昌重編’ 편찬자가 기록되어 있고 본문에는 구결이 있다. 권말에는 黃文昌의 후기와 1166년(乾道2) 8월 徑山妙喜庵에서 간행된 간기가 있으며, 또한 1387년(우왕 13)10월 李穡이 쓴 발문에 이어 주상전하를 위한 발원문과 施主秩이 있다.
조선시대 강원에서 학습교재로 널리 사용된 책으로 특히 현재 유일의 고려본으로 조선 사찰본의 모본이 되었던 귀중한 판본이다.
제1663호 : 대승기신론의기 권상, 하(大乘起信論義記卷上, 下)
『大乘起信論義記』는 당나라의 法藏(643∼712)이『大乘起信論』을 해석한 주석서로서 고려후기에 간행된 목판본으로 上下2권2책이다.
책머리에는 ‘大乘起信論義記卷上’의 권수제와 그 아래에 小字로 ‘幷序’라 기재되어 있고, 다음 행에 ‘西大原寺沙門法藏述’이라는 저자 사항이 있다. 판식을 보면 중앙의 판심에 위쪽에만 가느다란 흑 어미가 보이고 판심제 ‘義記’ 와 권·장차가 기록되어 있고, 사주는 단변이고, 계선이 없고, 1면은 9행 20자 배자되어 있다. 고려후기에 간행된 판본에서 흔히 보이는 판식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본문에는 구결이 있으며 상권의 표지는 훼손되었으나 후대에 보수하면서 표제는 묵서로 ‘起信論義記上’ 이라 써있다. 권말에는 발문이나 간기가 없어 간행연대를 알 수 없지만 판각 및 인쇄상태로 보아 판하본을 써서 판각한 것으로 보이며, 補板도 있어 고려말기의 판본으로 추정된다.
고려본 판식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 이 판본은 고려말 간본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없는 유일본으로 불교사 및 판본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제1664호 : 풍아익(風雅翼)
이 책의 편저자 유이(劉履: 1317-1379)는 주자를 숭배하는 학자로 주자의 뜻에 따라『문선』에 수록된 시에서 212편, 陶淵明의 시집을 비롯한 여타 서적에서 34수, 도합 246편의 시를 8권으로 편집하여『選詩補注』라 하였고, 堯舜이래 晉대에 이르는 옛 가요 42수를 뽑아 2권의『選詩補遺』를 엮었다. 이어서 唐宋시대 시인 13명의 시 132수를 뽑아『選詩續編』5권을 엮었다. 이 세 책에는 기존의 주석을 참고하고 부족한 부분은 자신의 의견으로 주석을 달고 이를 補注라 하였는데, 주석의 체재는 주자가 시경의 集傳을 편찬한 방식을 따랐다.
이들 3편 15권(420편)은 인간의 성정 도야에 있어서『詩經』의 보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을 묶어서 「시경의 나래(보조)」라는 뜻인『風雅翼』으로 명명하였다.
문학을 너무 철학적으로 해설한 점에서 후대의 평가는 높지 않지만 성리학이 학문과 정치의 중심이었던 조선시기에는 중요한 詩學교과서로 기능하면서 널리 읽혀졌고, 중국은 물론 조선에서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제15권 말에는 鑄字跋3편(權近의 癸未字주자발, 卞季良의 庚子字주자발, 金鑌의 甲寅字주자발)과 함께「正統七年(1442) 六月日印出」이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초주갑인자로 인출된 책이기는 하지만 판면을 살펴보면 補字가 다수 혼입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기록보다 뒤인 내사기에 기록된 1553년 경에 인출된 책으로 판단된다.
조선 전기에 금속활자로 간행된 서적 중 규모가 방대하고 詩學의 교과서적인 역할을 담당한 점에서 시문학의 연구 및 도서 출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아울러 국내에 전존하는 유일한 완질본이다.
제1665호 : 상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4(橡紙銀泥大方廣佛華嚴經周本卷四)
이 사경은 고려후기 14세기 중기에 橡紙에 銀泥로 寫成한 華嚴經80권 가운데 권4에 해당되는 殘卷1첩이다.
권수에 변상도는 없으나 표지는 연화문으로 장엄되어 있으며, 본문의 글씨는 해서체로 매우 정성껏 필사되어 있고 원형이 거의 온전하게 잘 보존되어 상태도 양호하다. 상지에 은니로 쓰여진 사경은 국내에 모두 10여점이 전존되고 있으며, 이 중 화엄경은 2점이 지정되어 기림사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장되어 실정이다. 따라서 국가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연구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되었다.
제1666호 : 봉화 청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奉化淸凉寺木造地藏菩薩三尊像)
지장보살상은 지옥중생의 구제를 위해 깊은 사유에 잠긴 듯 고요하게 처리된 相好에서 높은 종교성을 읽을 수 있고, 불신의 구성 요소요소가 상호 유기적이고 이지러짐이 없어 조각적 완성도도 높다. 불신에 표현된 선 역시 불필요한 선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힘과 강약이 있는 직선과 곡선을 적절하게 구사하여 유려하면서도 탄력 넘치는 세련된 선묘를 보여준다. 형태가 다소 둔중한 느낌이 없지 않으나 이러한 점이 오히려 중후한 안정감을 주어 보살상의 종교적 완성미를 이루는데 공헌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삼존상은 현존하는 16세기 불상 중에서 종교성과 조각적 완성도를 두루 갖춘 보기 드문 작품으로 판단된다.
비록 이 불상을 봉안한 사찰이나 작자, 다양한 시주층 등이 밝혀지지 않아 유감스럽지만, 다행스럽게도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과 양식분석을 통해 이 삼존상의 제작연대를 1578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지장보살삼존상과 비교할만한 상이 없을 정도로 이 시기에 조성된 불상이 매우 드물고, 뿐만 아니라 1578년이라는 제작시기에서 알 수 있듯 조선전기와 임진왜란 이후 전개되는 조선후기 불교조각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매우 귀중한 기준자료이다. 또한 불상에서 보이는 개성이 있는 표현이라든지 우수한 조형성 등을 통해서 볼 때 당대 최고의 조각가가 조성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제1667호 :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西山大師 行草 精選四家錄) 대흥사
조선중기의 고승 승병장인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이 송대 선문(禪門)을 대표하는 마조(馬祖)ㆍ백장(百丈)ㆍ황벽(黃蘗)ㆍ임제(臨濟)의 법문을 초록한 서첩이다.
서첩의 표제(標題)는 “四大師語”라 쓰였고 내제(內題)는 “四家錄精選”과 “精選四家錄”이라 쓰였는데 마지막 내제를 필적의 명칭으로 삼는다. 필적 사이사이에 [禪敎都總]이란 인영이 있어 ‘팔도선교대총섭(八道禪敎大總攝)’을 지냈던 그의 위치를 말해준다. 모두 15장 30면으로 구성되는데, 그중 제7~9장이 탈락되었는데, 그중 1장이 오세창이 편집한 《근묵 槿墨》(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에 실려 있다.
이 서첩은 분방하고 자유로운 필치는 그와 교유했던 초서 명필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84)의 서풍과 유사하여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특기할 만하다. 조선전기 고승의 필적이 매우 드물고 서산대사가 구국의 승병장이란 점에서 이미 보물로 지정된 그의 유품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발우(鉢盂)와 함께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지정하여 보존하고 연구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되었다.
제1668호 : 이지정 초서 취영구절(李志定 草書 醉詠九絶)
이지정(1588~1650)은 17세기 전반에 활동한 문인 명필로 본관은 여흥, 자는 정오(靜吾) 호는 청선(聽蟬)이다. 소릉공(少陵公) 이상의(李尙毅, 1560~1624)의 아들로 1616년 문과 급제하여 목사 등을 지냈다.
취영구절은 17세기의 초서 명필인 청선 이지정(1588~1650)의 서풍을 잘 대변해주는 서첩이다. 말미의 낙관에 “丁亥夏九月十七日東州爲喚魚亭主人翁醉詠九絶聽蟬書”라고 쓰여 있어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 1589-1670)가 환어정주인(喚魚亭主人)을 위해 지은 ‘취하여 읊은 아홉 수 절구[醉詠九絶]’를 이지정이 썼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서첩에는 일곱 수만 실려 있지만 뒤쪽에 오언절구 4수가 더 실려 있다. 소품이긴 하나 대폭처럼 키워도 필세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활달한 필치로 고산 황기로의 서풍을 계승하면서도 활달하고 거친 필법을 구사한 이지정의 독특한 개성이 돋보이는 서첩으로 서예사 연구자료로서의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연구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되었다.
제1669호 : 조문수 필적 위심수재서(曺文秀 筆蹟 爲沈秀才書)
‘조문수 필적 위심수재서’는 17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문인명필 조문수(1590~1647)의 필적으로 왕희지 서풍과 조맹부 서풍을 겸비했던 그의 명성을 잘 대변해준다. 이 서첩은 앞쪽에 송나라 범준(范俊)이 지은 「범씨심잠 范氏心箴」을 단정한 해서로 쓰고, 중간에 당나라 두보의 장시(長詩)「애강두 哀江頭」를 특유의 행서로 썼으며, 뒤쪽에 두보의 칠언율시 3수를 좀 작은 행초로 쓴 것이다. 말미에 “丁亥孟冬雪汀翁爲沈秀才書于城西草屋”이라 하여 58세로 사망하기 얼마 전인 1647년 10월에 심씨 수재를 위해 썼음을 알 수 있다.
‘조문수의 필적은 몇몇 간찰 외에 보기 드문데, 이 서첩처럼 서품이 뛰어나고 수증자(受贈者)와 연대까지 쓰여 있으며 보존상태까지 완호한 예는 아직까지 없다.
제1670호 : 조속 초서 창강필적(趙涑 草書 蒼江筆蹟)
‘조속 필적 창강필적’은 조속(1595-1668)이 벽성군수로 재임하던 1646년(인조 24) 7월에 당시(唐詩) 오언ㆍ칠언율시 등을 대중소로 크기를 달리하여 쓴 것이다. 일반 서책처럼 선장(線裝)되어 있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말미에 “丙戌初秋, 滄翁在碧城遣閑”이라 하여 52세 되던 1646년(인조24) 7월에 벽성에서 한가한 틈을 보내고자 썼음을 알 수 있다. 조속의 필적이 꽤 남아 있는데 대부분 단편이거나 여러 사람의 필적과 함께 묶여 전한다. 이에 비하여 《창강필적》은 조속의 단독 서책으로 그의 전형적인 서풍을 잘 보여주는데, 특히 당시로는 드물게 원나라 선우추(鮮于樞)의 서풍과 유사성을 보여 주목된다.
제1671호 : 윤순거 초서 무이구곡가(尹舜擧 草書 武夷九曲歌) 국립중앙박물관
윤순거 초서 무이구곡가는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 1596~1668)의 대표작으로 너그러운 짜임과 쾌속한 운필에서 16세기 초서 명필이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84)의 서풍과 연계되며, 또 중봉세(中鋒勢)를 유지한 둥그런 운필에서는 양사언도 지향했던 당나라 회소(懷素, 8세기 활동)의 광초(狂草)에도 맥이 닿는다. 이러한 서풍은 17세기 대자 초서풍의 새로운 면모를 이루었고 이후 18세기 초서풍에 상당한 영향을 준 점에서 주목되는 필적이다. 종이바탕도 조선중기 17세기 필적 가운데 가장 큰 예이다.
제1672호 : 송준길 행초 동춘당필적(宋浚吉 行草 同春堂筆跡) 한국학중앙연구원
“송준길 행초 동춘당필적”은 송준길(1606-72)이 남송 주희의 「학고재명」과 장인 우복 정경세의 「우곡잡영 20절」을 필사한 것이다. 앞쪽에 가지런한 행서로 쓴 <학고재명>은 퇴계 이황의 서풍을 수용한 면모를 보여주며, 뒤쪽의 <우곡잡영 20절>은 송준길의 전형적인 행초 서풍을 보여준다.
특히 송준길이 율곡 이이 이래로 김장생ㆍ김집 등의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맥을 이으면서도 영남학파 학자였던 장인 정경세를 통해 퇴계 이황의 학문을 수용하고 글씨까지 따랐던 것은 조선시대 유학사에서 특기할 만하다. 바로 이 서첩이 그러한 면모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서 송준길 노년의 서풍을 대표할 만한 필적이다. 서첩 규모도 크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제1672-2호 : 송준길 행초 서증손병하(宋浚吉 行草 書贈孫炳夏) 대전선사박물관
“송준길 행초 서증손병하”은 조선중기의 학자ㆍ문신ㆍ명필인 동춘당 송준길이 송(宋)나라 양시(楊時)의 칠언절구 「저궁관매기강후 渚宮觀梅寄康侯」를 장지(壯紙) 네 장을 이어 붙여 대자 행초로 쓴 것이다. 말미에 “崇禎己酉淸和春翁書贈孫炳夏”라 하여 1669년 사월에 64세의 할아버지가 손자 송병하(字子華)를 위해 써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서축(書軸)은 동춘당 송준길(1606-72)이 남긴 여러 필적 가운데 규모가 제일 큰 대폭으로 손자 송병하라는 수증자와 1669년이란 필사연대를 완벽하게 갖춘 예이다. 또 종택에 전해오던 필적으로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제1673호 : 이하진 필적 천금물전(李夏鎭 筆蹟 千金勿傳)
《천금물전》10첩은 매산 이하진(1628-1682)의 보기 드문 서첩으로 후손댁에 전해온다. 수록된 필적이 많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이 서첩은 17세기 한 문인ㆍ명필의 애호완상(愛好玩賞) 경향을 살필 수 있다. 이하진의 글씨는 선조 이상의ㆍ이지정의 서풍을 이어받아 아들 이서ㆍ이익과 제자 윤두서 등에게 전파시켜 남인(南人) 서풍의 한 계열을 이루었다. 수록 필적은 자신의 애호물에 관한 명(銘)을 비롯하여 대자서(大字書), 오언ㆍ칠언절구의 당시(唐詩), 십이방완(十二芳玩)에 관한 시(詩), 옛 문인에 관한 일화 등을 여러 크기의 해행초로 썼다. 이밖에 이하진의 인장이 여럿 찍혀있다
제1674호 : 박세당 필적 서계유묵(朴世堂 筆蹟 西溪遺墨) 한국학중앙연구원
《서계유묵》상․중․하 3첩은 17세기의 유명한 문신학자 서계 박세당(1629-1703)의 필적으로 문인(門人) 이정신(李正臣, 1660-1727)에게 써준 것이다. 상첩(上帖)은 이정신의 시를 차운한 자작시와 자연에 대한 사랑과 혼탁한 세상과 멀리 한 중국의 시문이다. 중첩(中帖)과 하첩(下帖)은 각각 29통과 25통의 간찰로 이정신에게 보낸 것이 대부분이다(中帖1통 사위 남구만에게, 下帖6통 박태보의 간찰). 1679~1702년에 쓴 것으로 대부분 『서계집』에 실리지 않았다. 그중 박세당이 이정신에게 중국 서화첩을 열람품평하게 한 것과 박태보가 <서계초상> 제작에 따른 제반사를 언급한 것이 주목된다.
상첩은 자연을 사랑하는 박세당의 심정과 그의 서예적 풍격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중첩ㆍ하첩의 간찰도 박세당과 이정신과의 사제 관계뿐 아니라 서화 감상과 초상화 제작에 관한 소중한 기록도 포함되어있다.
제1675호 : 박태유 필적 백석유묵첩(朴泰維 筆蹟 白石遺墨帖) 수원박물관
《백석유묵첩》은 17세기 후반의 문신ㆍ명필 박태유(1648-86)의 필적으로 다양한 크기에 여러 서체로 쓰여 있다. 해서ㆍ행초ㆍ광초ㆍ예서ㆍ행서가 실려 있으며 그중 해서는 소해(小楷)ㆍ중해(中楷)ㆍ대자서(大字書)로 다양하다. 특히 칠언배율의 시를 중자 해서로 쓴 글씨는 그가 안진경 해서풍을 적극 가미시켰음을 보여준다. 또 행초를 섞어 쓴 칠언절구는 아버지 박세당의 서풍을 따랐는데 그 바탕은 안진경의 행초 필적에 가깝다. 또 한 면에 두 글자씩 대자 초서로 쓴 “사지격절(辭旨激切)”ㆍ“이식현오(理識玄奧)”는 광초(狂草)의 대가 당나라 회소(懷素, 8세기 활동)의 서풍을 연상하게 한다. 이밖에 예서로 쓴 “서유육의(書有六義)”는 한자의 조자원리(造字原理)에 관한 기본개념인 육서(六書:六義)란 점에서 이채롭다.
이상과 같이 이 서첩은 박태유의 서예적 면모를 충분히 보여주는 예로 필사한 연유나 시기, 글씨를 받은 사람의 이름 등이 적혀 있지는 않지만, 어느 누구의 글씨학습을 위하여 써준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