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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목 감독의 《장마》
*출연 : 황정순, 이대근, 김신재, 김석훈
*스태프
제작/서정호, 기획/김승, 감독/유현목, 각본/윤삼육, 촬영/유영길, 조명/김태성, 음악/한상기, 녹음/손인호, 미술/조경환, 소품/이월호, 효과/손효신, 편집/이경자
6·25 전쟁이 터져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동만이네 친삼촌은 빨치산이고, 외삼촌은 국군이다. 이러한 연유로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사이가 좋지 않은데, 동만은 외할머니와 더 친하여, 친할머니의 미움을 받는다. 이 무렵 빨치산 부대가 읍내를 습격해 전원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동만의 아버지는 삼촌이 죽었을 거라 단정짓지만 할머니는 믿지 않는다. 아들이 죽지 않았으며 곧 돌아올 거라는 점쟁이 말을 믿는 할머니는 삼촌을 위한 음식 장만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삼촌은 오지 않고 구렁이 한 마리가 집안으로 기어든다. 집안을 맴돌다 살며시 대문 밖으로 나간 구렁이 탓에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오랜 다툼도 해소된다. 장마비가 그친 듯 마음이 활짝 개었지만, 끝내 삼촌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유현목 감독의 《장마》(1979)가 돋보였고 동시녹음영화가 출현하였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임권택(林權澤)의 《만다라》(1981)와 이두용(李斗鏞)의 《피막(避幕)》(1981) 등
한국적 소재의 작품들이 국제적으로 호평받았다.
영화란?
질문하신 내용과 일치하는지 모르겠으나 영화에 대한 설명입니다.
참고로 이내용은 "사이버 두산대백과사전"에서 발췌한 것임을 알려 드립니다.
영화(motion picture 映畵) - 연속촬영으로 기록한 필름상의 화상(畵像)을 스크린에 투영(投影), 움직임 있는 영상을 보여주는 장치 및 그렇게 만든 작품.
- 개관 -
초기에 한국과 일본에서는 영어의 ‘motion picture’를 직역하여 ‘활동사진(活動寫眞)’이라고 하였다. 그 밖에 무비(movie) ·시네마(cinema) ·필름(film) 등으로도 불린다.
- 역사 -
1. 영화의 발명
영화의 발명물체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재현코자 하는 인간의 꿈은 태곳적부터 있어 왔다. 지금부터 2∼3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에스파냐 알타미라의 라스코 동굴에는 다리가 8개인 황소의 벽화가 있는데, 이는 바로 인류의 그와 같은 꿈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1초에 24개의 정지된 화상(畵像:frame)을 연속적으로 돌려 인간의 잔상(殘像) 현상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영화가 발명되기까지는 기원 2세기부터 시작하여 무척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완구식(玩具式) 움직임을 보여주는 장치인 타우마트로프(thaumatrope)나 페나키스트로스코프(phenakistroskope), 그리고 주트로프(zootrope) 등 19세기에 들어와 움직이는 그림을 보여주는 기계가 나타났지만 영화의 발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사진술(寫眞術)의 발명이었다.
1823년 프랑스의 N.니에프스와 다게르 등에 의해 사진술이 발명되었고, 1878년 미국인 E.마이브리지가 24장의 달리는 말[馬]의 모습을 촬영한 데 이어, 프랑스인 J.E.마레이가 사진총(寫眞銃)을 고안해냈으며, G.이스트먼이 셀룰로이드에 의한 ‘롤 필름(roll film)’을 제조한 데 힘입어 에디슨이 혼자서 움직임을 볼 수 있는 키네토스코프를 1889년에 발명하였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완구식 원리와 사진술과 필름 및 위에 든 그 동안의 몇 가지 실험 등을 이용하여 프랑스의 L.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라프라는 촬영기와 영사기를 발명하여, 95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영화를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에디슨은 이보다 1년 늦게 여럿이 볼 수 있는 비타스코프를 발명했고, 이어 독일의 E.스클라다노브스키와 영국의 R.W.폴은 각각 독자적으로 비오스코프를 발명하였다. 이렇듯 영화는 19세기가 거의 끝날 무렵 비슷한 시기에 여러 나라에서 과학문명의 발달이 가져다준 필연적인 산물이었다.
2. 영화의 발달
카메라를 일정한 위치에 고정시켜 피사체를 촬영하는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는 영상의 사실성(寫實性)과 기록성(記錄性)이나 사건의 현장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나타났지만, 영화를 속임수(트릭)와 몽환적(夢幻的)인 이야기로서 구경거리로 만든 것은 G.메리에스였다. 영화 초창기의 이 두 가지 길은 전자가 후에 기록영화나 뉴스 영화 등의 길을 열었고, 후자는 극영화의 길을 개척케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연극적 방법이었고 영화상으로 전진시킨 것은 미국의 E.S.포터로부터 시작하여 미국 영화의 아버지요 영화문법(映畵文法)과 영화언어(映畵言語)의 완성자인 D.W.그리피스에 이르러 마침내 무르익었다. 《국가의 탄생》(1915) 《인톨러런스》(16) 등의 작품에 이르러 비로소 영화는 고유한 언어를 가진 예술적 표현의 매체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화는 예술이나 오락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자본이 필요했고, 이 자본은 급기야 영화기업을 탄생케 하였다.
프랑스의 파테나 고몽 등 초기의 영화 제작사들, 그리고 에디슨을 비롯한 미국의 독점업자들이 영화기업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했으며, 그 후 대제작사들에 의해 영화는 산업으로 발전, 미국에서는 한때 4대 산업의 하나로까지 부상하였다. 또한 영화에는 배우들이 중요한 매력으로 등장하여 미국에서는 ‘스타 시스템’을 이루기도 했다.
새로운 예술매체를 얻은 미국은 M.세넷의 희극을 비롯하여 서부극(西部劇) 등 독창적인 장르를 개척해나갔으며, 희극의 천재 C.채플린은 《황금광시대(黃金狂時代)》(25) 등을 통해 영화의 독특한 희극성을 살리면서 인간본능의 추구를 묘사해나갔는가 하면, 사실주의의 극치인 E.슈트로하임의 《그리드》(23) 등이 미국 영화예술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
‘포토제니(photog暴nie)’이론을 제창한 프랑스의 L.델뤽을 중심으로 모인 일단의 감독들은 이론과 작품제작을 겸하였으며, 그 중 A.강스는 《철로(鐵路)의 백장미》(23)와 3면화면(三面畵面)에 의한 《나폴레옹》(27) 등의 문제작을 발표하였다. 독일에서는 R.열었다. 이경손(李慶孫) ·안종화(安鍾和) ·윤봉춘(尹逢春) ·김유영(金幽影) ·방한준(方漢駿) 등이 활약했고 이월화(李月華)를 비롯하여 이금룡(李錦龍)에 이르기까지 많은 배우들이 한국영화를 수놓았다. 그러나 영화사는 여전히 영세자본과 협소한 시장으로 인해 기업적인 토대를 구축하지 못한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제의 심한 탄압, 즉 영화사의 강제 통합 및 영화인의 등록강요 등으로 통제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영화주식회사를 설치, 영화제작자를 묶어놓고 영화인들로 하여금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고 전의(戰意)를 고취하는 어용영화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요하는 친일영화를 제작케 하여 한국영화는 질식상태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인규(崔寅奎)의 《수업료》(40), 이병일(李炳逸)의 《반도(半島)의 봄》(41)이 마지막으로 주목을 끌었다. 뜻있는 영화인들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거나 지하로 숨어들어 암흑기를 보내야만 되었다.
- 오늘의 영화 -
1. 산업으로서 영화
과학과 자본, 그리고 예술의 3대 측면으로 이루어지는 영화는 자본의 필요성이 제작에서 크나큰 몫을 담당한다. 그리고 그것은 극장의 매표구를 통해서 다시 거둘 수 있다. 제작사(製作社)는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하나의 기업이나 나아가 산업으로까지 영화를 발전시킨 것이다. 미국의 대제작사(메이저 컴퍼니)들이나 일본의 대회사들의 영화는 영화를 국유화하는 공산권의 경우와는 달리 제작 ·배급 ·흥행의 과정을 거쳐 자유경쟁을 통해 영화산업을 발달시켜왔다. 그러나 미국의 영화산업이 급격한 발전을 이룩한 데 비해 유럽에서는 소자본에 의한 군소 프로덕션이나 개인 프로덕션에 의해 영화가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미국은 세계시장을 장악하는 영화산업의 종주국이 되다시피 하였다. 미국에서는 영화가 하나의 민속예술처럼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국민의 영화에 대한 사랑은 대단할 뿐 아니라 꿈의 공장 할리우드에서 생산해내는 영화는 전세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또 한편으로는 미국자본이 점차 유럽으로 흘러들어가 합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호황을 누리던 영화산업도 1950년경부터 텔레비전의 대량보급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영화는 사양의 길로 접어든 감마저 주었다.
제작자들은 텔레비전에 대항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 끝에 대형 스크린(wide screen)을 개발하였다. 시네라마 ·시네마스코프 ·비스타비전 ·토드 A.O.70mm 프로세스 등을 고안하여 막대한 제작비와 물량을 투입, 영화산업의 회생(回生)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결과 1980년대 G.루카스의 《스타워즈》, S.스필버그의 《조스》 《E.T.》 《인디아나 존스》, 1990년대 월트디즈니 프로덕션의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등의 만화영화, 스필버그의 《쥐라기 공원》 등의 흥행성공으로 미국의 영화산업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세계 각국에서는 자기 나라의 영화를 보호 ·육성하기 위한 진흥책을 펴고 있지만, 유럽이나 제3세계의 영화는 아직도 소자본으로 미국 같은 산업규모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다만 홍콩의 갱영화 ·무협영화가 붐을 이루어 동남아시아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그 외의 나라에서는 오히려 고도로 순화된 예술을 보여주며 영화의 매력을 텔레비전의 그것과 달리 특징지으려고 한다. 오늘날의 영화산업은 아이디어와 컴퓨터 그래픽 등을 이용한 촬영기술의 발전 등으로 밝은 앞날을 예고하고 있다.
2. 예술로서의 영화
영화의 발명은 인간을 시각적 인간으로 만들어주었고 영상을 통한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네오리얼리즘은 30년대식의 드라마의 틀이 인생의 진실을 규정지어주던 속박에서 벗어나 카메라를 현실과 작가 사이에 놓고 상황 속에서 작가의 주관에 따라 실체(reality)를 선택하는 새로운 영화사상을 전파시켰다. 즉, R.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45)《전화(戰火)의 피안(彼岸)》(46), V.데시카의 《자전거 도둑》(48), 그 밖에 L.비스콘티, L.잠파, G.데산티스 등의 작품들은 패전국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에너지로 현대 영화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낸 것이다.
영국은 《밀회(密會)》(45)의 데이비드 린, 《제3의 사나이》(49)의 캐롤 리드 등으로 만만찮은 저력을 보였으나, 50년대 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새로운 물결인 누벨 바그가 현대 영화예술의 획기적인 발화점이 되었다. C.샤브롤을 비룻하여 J.L.고다르, F.트뤼포, E.로머, G.리베트, A.레네, L.말르 등은 R.브레송의 또다른 세계와 함께 영화예술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영화를 하나의 ‘작가시대(作家時代)’로 돌입케 하였다. 소설가나 시인 또는 화가와 마찬가지로 1인의 작가에 의한 ‘작가의 영화’를 이룩함으로써 영화는 중요한 현대예술의 하나로서 부상하였다.
이것은 A.아스트뤽의 ‘카메라 만년필설(cam暴ra-stylo)’이나 A.하우저가 말하는 영화시대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제7의 봉인(封印)》(56)의 I.베리만이나 네오리얼리즘을 내적으로 승화시킨 《길》(54)의 F.펠리니, 《정사(情事)》(60)의 M.안토니오니 등은 신(神)이나 성(性)의 문제, 또는 현대에 있어서의 인간의 고독이나 소외, 사랑의 불모(不毛) 그리고 영혼의 구제를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
누벨 바그의 작가들은 현대인의 의식구조 속에서의 변화와 현대인이 처한 정신적인 위기의 상황을 그렸다. 영화는 다른 현대예술 분야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영상적 표현과 주제의 추구로 현대 예술의 또 하나의 새로운 면을 지니게 되었다. 영국의 ‘프리시네마’, 미국의 ‘아메리칸 뉴 시네마’, 그리고 독일의 ‘노이에 벨레’뿐만 아니라 발전하는 제3세계의 나라들, 그리고 동구(東歐) ·일본 ·인도 등의 영화적 개안(開眼)과 발전은 영화예술을 다양하고 개성있게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 특히 80년대 중반에 들어 영화의 후진국이던 중국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세계영화제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천카이거[陳凱介]의 《황토지(黃土地)》, 장이모[張藝謀]의 《붉은 수수밭》 《패왕별희(覇王別姬)》 등이 유명하다.
또한 프랑스는 60년대 초의 ‘시네마 베리떼(cin暴ma verit暴) 이후 80년대의 ‘누벨 이마주(nouvelle image)’의 영화 등이 등장하고, 신예 레오 까락스의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이 주목을 끌었다. 또한 순수예술파로 알려졌지만 서방에 망명 후 요절한 소련의 안드레이 타르코의 작품, 예컨대 《안드레이 루블료프》 《이반의 마을》 《망향(望鄕)》 등이 이목을 끌었다.
바야흐로 오늘의 영화는 일찍이 영화사(映畵史)의 그 어느 시기보다도 찬란한 제2의 기회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영화가 비록 산업으로서는 지금 쇠퇴하고 있으나 예술로서는 오히려 순화되어 현대의 온갖 정신적 상황을 추적하고 예술형식으로서도 순수함과 창의성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업적(分業的)이며, 동시에 종합적인 영화가 이제 개인이나 작가의 영화가 되어간다는 데에서 영화예술의 현대적 특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 한국의 현대영화
한국의 현대영화는 광복 직후 나라 찾은 기쁨이 최인규의 《자유만세(自由萬歲)》(1946)로 나타난 것을 필두로 광복영화(光復映畵)들이 잇달아 제작되면서 차츰 예술적으로 다시 개화되려는 때, 6 ·25전쟁을 맞게 되었다. 많은 영화인이 납북되어갔고 전쟁을 치르는 동안 한국영화는 또 하나의 정체기(停滯期)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휴전 후 서울 환도가 이루어지자 정부의 입장세 면세조처 등 일련의 영화 육성책에 힘입어 한국영화는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55년 이규환의 《춘향전》이 흥행에 크게 성공하자 영화제작의 열기는 한층 고조되어 새로운 중흥기(中興期)를 맞게 되었다. 1960년까지는 70여 개의 영화사가 난립한 가운데 이강천(李康天)의 《피아골》(1955), 이병일(李炳逸)의 《시집가는 날》(1956) 등 우수작들이 발표되었다. 한국영화는 민족분단의 비극과 동란의 상처를 영상에 투영하기 시작하였다. 제작자본의 영세성은 여전하였지만 4 ·19혁명을 맞고 이어 5 ·16군사정변을 겪을 때까지 《오발탄(誤發彈)》(1960)의 유현목(兪賢穆), 《하녀(下女)》(1960)의 김기영(金綺泳), 《사랑방손님과 어머니》(1961)의 신상옥(申相玉) 등이 트로이카를 이루며 한국영화의 새로운 황금기를 장식하였다.
5 ·16군사쿠데타 이후 당국은 기업의 육성을 위해 영화법을 제정하였다. 시설기준 ·기재 ·인적 자원 등의 요건을 갖추어야만 제작이 가능하였고, 속칭 ‘보따리장수’들은 영화계에서 사라졌다. 1960년대 초에서 60년대 중반에 걸쳐서는 《마부(馬夫)》의 강대진(姜大振), 《갯마을》(1961)과 《안개》(1965)의 김수용(金洙容), 《비무장지대(非武裝地帶)》(1967)의 박상호(朴商昊), 《남과 북》(65)의 김기덕(金基悳), 《시장(市場)》(1965)과 《만추(晩秋)》(1965)의 이만희(李晩熙), 《초련(初戀)》(1966)의 정진우(鄭鎭宇) 등이 주로 활약하였다.
1960년대에는 양적으로 팽창하여 세계 4대 양산국(量産國)의 하나가 되었다. 하길종(河吉鍾) ·이장호(李長鎬) ·김호선(金鎬善) 등이 젊은이들의 풍속도(風俗圖)를 그리며 새로운 상업주의를 전개시킨 70년대는 영화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저하되어 1960년대의 영광을 잃기 시작하였다. 영화법 시행상의 문제와 우수영화 제도는 한국영화보다 외국영화의 수입권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 한국영화는 뒷전으로 밀리는 풍토 속에서 영화기업도 토대를 굳히지 못하고 영화인들의 상상력 빈곤과 안이한 제작태도로 예술성도 잃어갔다.
70년대 말에는 유현목의 《장마》(1979)가 돋보였고 동시녹음영화가 출현하였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임권택(林權澤)의 《만다라》(1981)와 이두용(李斗鏞)의 《피막(避幕)》(1981) 등 한국적 소재의 작품들이 국제적으로 호평받았다.
이어 1980년대 중반을 계기로 젊은 감독들의 작품활동이 활발하여 외국비평가들로부터 ‘한국의 새로운 물결(The Korean New Wave)’이 일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즉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 이명세의 《첫사랑》,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 등이 그것이다. 1980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은 한국영화의 중흥기로서 각종 세계영화제에서 수상기록을 남겼는데, 89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비롯,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 《아제아제바라아제》 《아다다》는 각각 베네치아국제영화제, 모스크바국제영화제,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93년 《서편제》는 관객 100만을 돌파하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영화 예술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제작과 흥행, 그리고 배급을 위한 질서가 갖추어져야 컬러 텔레비전과 스포츠 붐, 그리고 다양해진 레저 붐의 틈바구니에서 영화는 소생할 것이다. 따라서 점차 감소되어가는 관객 속에서 어떻게 제2의 기회를 모색하느냐 하는 문제가 한국영화의 과제인 셈이다.
4. 영화와 사회성
영화는 사회에 대해 그 어느 예술 매체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화가 시각적이면서 청각적인 매체일 뿐 아니라 한 장소에서 많은 사람을 집단적으로 감동시킬 수 있는 막강한 전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통치자들이 영화를 그들의 이념이나 당(黨)의 선전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레닌은 일찍이 “모든 예술 중에서 영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면서 러시아 혁명 직후 영화사업을 즉각 국유화함으로써 영화를 통한 사회주의 혁명의 수행을 강요하였다. 히틀러나 B.무솔리니도 영화를 나치즘과 파시즘을 위한 한낱 선전도구로 전락시켰다.
무솔리니는 국립중앙영화실험센터를 창설하고 로마 교외에 영화도시 치네치타를 건설하였고, 히틀러는 영화를 보다 철저히 지배하고 활용하기 위해 검열제도의 강화와 유대인 및 자유주의적인 영화인의 탄압 ·축출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 군국주의자들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영화를 철저히 통제하면서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병기(兵器)’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처럼 의식적이고도 노골적인 선전수단화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미묘한 형태로 항상 대중에게 작용하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서부극은 인종적 편견과 인명 경시의 풍조에 은연중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이며,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가 전근대적인 봉건의식과 잔학심리(殘虐心理)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과제이다. 물론, 영화의 내용과 그것이 주는 감명은 매우 복잡하므로 어떤 경솔한 판단이 쉽사리 내려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영화가 사회나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의 한 단면을 줄곧 지켜본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의 수많은 상업주의 영화들이 대중에게 주는 효과란 반드시 긍정적인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대부분의 영화사들은 수입에만 눈이 어두운 나머지 성적(性的)인 장면을 보다 많이 다루려 하는 등 저속취미에만 영합하려 한다. 또한, 현실의 사회문제를 다룸으로써 그것을 똑바로 해부하거나 비판하려는 영화는 외면하려고 든다.
그러나 영화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확산될 때 이와 같은 상업주의 영화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고조되게 마련이다. 영화 예술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으며, 그래서 상업적인 시스템의 테두리 밖에서 가능한 한 자유롭고 자주적인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독립 프로덕션의 시도가 여러 나라에서 활발해지고 있다.
5. 영화의 미래
영화는 미래사회와 인류의 장래에 대해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우주시대에 사는 인간의 문제를 인류의 진화론적 변천으로부터 시작하여 우주시대까지를 다룬 S.큐브릭의 《2001, 우주 오디세이》(68)나 미래사회에서의 폭력과 성(性)의 문제를 다룬 《클록워크 오렌지:A Clockwork Orange》(71) 등은 이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다. 핵전쟁의 위험, 인류 문명의 위기, 인간성 말살의 시대에서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 등 인류의 미래가 자주 논란되고 있다.
영화의 미래는 우선 이와 같은 인류문명의 장래와 미래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다루어질 것이다. 또한 60년대부터 힘차게 발돋움하는 제3세계 여러 나라들의 영화가 강대국이 독점하던 세계영화에 새로운 에너지로 등장하였다. 미래의 영화는 강대국이나 약소국이나 할 것 없이 평준화(平準化)가 이루어질 것이다. 신흥국들은 그들의 고유한 역사 속의 인물들,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투쟁, 전후(戰後) 신생국으로서의 사회문제 등 서유럽 세계가 가지지 못한 그들만의 독특한 소재(素材)로써 지금 국제영화제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영화의 형식미(形式美)보다 소재나 아이디어의 신선함이 강력한 호소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미래의 영화에서 그와 같은 흐름이 시사하는 의미는 크다.
또한 50년대부터 활기를 띤 언더그라운드 영화나 실험영화도 영화 기재(機材)의 다량보급에 힘입어 활발하게 전개되어 나갈 것이다. 비네의 《칼리가리박사》(19)를 비롯하여 F.무르나우의 《최후의 인간》(24), F.랑의 《니벨룽겐》(24) 등 표현파영화가 등장하여 독일영화의 황금기를 장식하였다. 이것은 W.파프스트의 심리적인 기법에 의한 영화들로 이어졌다. 스웨덴에서도 V.셰스트룀, M.스틸레르 등의 장려(壯麗)한 인간 드라마가 북유럽의 독특한 자연풍경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혁명 이후 소련에서는 몽타주 이론을 중심으로 V.푸도프킨의 《어머니》(26), S.M.에이젠슈테인의 《전함(戰艦) 포템킨》(25), 그리고 시적 상징주의(象徵主義)의 감독인 우크라이나 출생의 A.도브젠코 등이 독특한 세계를 펼쳐갔다.
한편,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상업주의 영화에 반발하는 순수한 영화예술운등의 하나인 아방가르드 영화[前衛映畵]들이 나타났다. R.클레르의 《막간(幕間)》(24), L.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28) 등이 프랑스에서, 독일에서는 추상화가들인 H.리히터, O.피슁거, V.에겔링 등에 의한 기하학적 도형이나, 선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한 아방가르드 영화가 등장하였다.
이와 같이 무성영화시대(無聲映畵時代)에 꽃핀 각국의 영화예술을 마무리짓는 것은 프랑스의 문제작인 C.드레위에르의 《잔다르크의 수난》(28)이었다. 영화는 27년 소리를 갖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워너브러더즈사에서 창안해낸 발성영화(發聲映畵:토키) 《재즈 싱어》의 출현은 영화가 시각적인 면에다 청각적인 위력을 덧붙임으로써 이중의 칼날을 지니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초기의 발성영화는 R.클레르의 《파리의 지붕 밑》(30) 《파리제(祭)》(33) 등에서 화면과 음향의 예술적인 대위(對位)를 위해 합창 등을 도입하여 발성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발성영화기를 맞은 프랑스와 미국의 30년대는 시나리오가 중심이 된 시기였다.
극성(劇性)이 중요시되던 이 시기는 드라마적인 구성에 의해 약속된 틀 속에서 영화를 발전시킨 것이다. 프랑스의 시적 사실주의의 감독인 J.페데르의 《외인부대(外人部隊》(34) 《여자만의 도시》(35), J.르누아르의 《위대한 환영》(37) 《게임의 법칙》(39), J.뒤비비에의 《망향(望鄕)》(37) 《무도회의 수첩》(37), M.카르네의 《안개 낀 부두》(38) 등 사실적인 작품이 등장, 시대적인 우울과 염세적인 사상을 담은 C.스파크와 J.프레베르 등의 시나리오에 의해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를 장식하였다.
미국에서는 뉴딜정책 이후 미국 사회의 낙관주의가 주조(主潮)를 이루며 F.캐프라의 《어느날 밤에 생긴 일》(34), J.포드의 사실적인 작품 《밀고자(密告者)》(35)나 《분노의 포도》(40), W.와일러의 《공작부인(孔雀夫人)》(36) 등이 R.리스킨과 D.니콜스의 시나리오에 의해 제작되어 발성영화의 성숙기를 이루었다.
미국의 천재 오손 웰스가 감독·각본·주연한 《시민(市民) 케인》(41)은 디프 포커스(deep focus, 또는 pan focus)를 사용, 공간의 깊이를 추구하여 영화미학적(映畵美學的)인 혁신을 이룩한 문제작이었다. 이 영화는 그 독특한 소급법(遡及法)에 의한 스토리 진행방법과 함께 시간의 지속성을 유리시키는 기법으로 영화사에 영원히 기록될 금자탑을 쌓았다. 마침내 영화는 예술적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매체로 성장한 것이다.
3. 한국영화의 발달
한국에서는 1903년경부터 외국영화가 공개되었으나 필름이 사용된 첫 영화가 제작된 것은 19년 신극좌(新劇座) 김도산(金陶山) 일행의 연쇄극(連鎖劇)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와 그 때 함께 공개된 실사영화(實寫映畵) 《경성(京城) 전시(全市)의 경(景)》이었다. 이것은 모두 한국영화의 효시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2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극영화인 윤백남(尹白南)의 《월하(月下)의 맹세》가 발표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저축장려 계몽영화였으나 한국인 감독과 배역에 의한 최초의 극영화라는 점에서 한국영화는 이로부터 무성영화시대의 막이 오른 것으로 본다. 초기에는 일본 제작자와 기술진에 의한 영화들이 제작되었지만, 이에 자극받아 민족자본에 의한 《장화홍련전》(24)이 박승필(朴承弼)에 의해 제작되었다.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영화사 윤백남 프로덕션을 비롯하여 여러 영화사들이 출현했으나 단명(短命)했고, 기업적으로 토대를 굳히지 못한 채 한국영화의 무성영화시대는 나운규(羅雲奎)의 등장으로 예술적인 개화(開花)를 보게 된다. 배우로 데뷔한 나운규는 《아리랑》(26)에서 민족적인 저항의식을 통해 한국영화예술의 새경지를 이룩하였다. 이어 《풍운아(風雲兒)》(26) 등의 문제작과 여러 편의 작품을 직접 연출하고 각본을 쓰고 출연하는 등 영화작가(映畵作家)다운 의지로 전력투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기의 작품들은 《아리랑》과 같은 힘을 잃고 있었고 마지막 작품인 《오몽녀(五夢女)》(37)에서는 인간의 원색적인 본능을 추구하며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려 했으나 35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37). 나운규의 영화정신은 이규환(李圭煥)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임자없는 나룻배》(32) 《나그네》(37) 등에서 서정적이며 향토색 짙은 사실주의를 전개하였다.
한편 1920년대 말에는 좌익사상의 경향파(傾向派) 영화들이 등장했으나 관객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1935년 이필우(李弼雨)의 기술에 의한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공개됨으로써 한국영화는 발성영화시대의 막을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는 과학의 산물인 만큼 기술의 발달은 영화를 크게 변모시킬 전망이다. 벌써 컴퓨터에 의한 영화 《트론》이 제작되었는데, 이는 컴퓨터가 영상을 조정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예고이다. 그런가 하면 1967년 몬트리올 박람회에는 360 ° 화면(畵面)의 영화가 등장했고 그 밖에도 확대영화(擴大映畵:expanded cinema), 멀티 화면(畵面), 환경영화(環境映畵:environment cinema) 등이 등장하였다. 음향기술의 발달은 영화의 청각적 요소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비디오산업의 발달로 비디오테이프에 의한 영화의 수록이 가능해지고 안방에 필름라이브러리를 꾸밀 수 있게 되었다. 그 밖에도 영화산업을 위한 여러 시도가 모색되겠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문제를 다룰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상을 통한 커뮤니게이션은 계속될 것이다.
lV. 영화제작
영화는 필름이 필요하며 과학적인 기재(機材)에 의해 촬영, 영사된다. 따라서 그 제작과정은 과학적인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제작은 작품이 이루어질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 영화는 종합적 예술이지만 영화제작은 3단계의 과정을 거쳐 분업적으로 이루어진다. 다른 예술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막대한 비용과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하는 영화제작은 상업적인 과정을 통해 영화기업이나 산업으로 되어 가는 것이다. 영화제작은 기술적인 과정과 그 결과로 얻어지는 예술적 성과를 뒷받침하게 된다.
영화 제작자는 영화를 기획하고 완성하기 위한 제작비를 제공하고 작품을 완성케 하는 사람으로서 감독 ·시나리오 라이터, 그 밖에 스태프 ·캐스트 등을 감독과 상의하여 선정하며 이에 따르는 일체의 제작비를 부담한다. 그러나 영화 제작자는 단순한 다른 산업의 메이커들과는 달리, 아이디어와 상상력에 따라 기획되는 예술이나 오락의 담당자인 만큼 문화적 차원에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훌륭한 제작자가 없을 때 좋은 영화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실내활영과 옥외촬영으로 구분된다. 영화미술은 장치나 세트, 그리고 소도구 ·의상 ·머리형(型) 등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조형적인 면을 포괄하며, 감독의 지시에 따라 이것을 설계하고 제작하여 영화의 배경과 실제에 있어 영화의 이미지에 알맞게 배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술감독은 단순한 장치와 세트의 설계자나 제작자의 자리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가여야 한다. 표현파 영화(表現派映畵) 《칼리가리 박사》에서는 3명의 표현주의 화가들이 미술을 담당했고, 초현실주의 화가 S.달리도 영화미술을 담당한 일이 있다.
영화를 실질적으로 완성케 하는 4대 요소는 시나리오, 연출, 카메라(촬영), 편집이다. 영화감독은 단순히 영화를 시나리오에 따라 연출하는 입장이 아니고 시나리오를 촬영대본인 콘티뉴이티(continuity)로 작성하여 공간별로 촬영해야 한다. 콘티뉴이티에서는 촬영 앵글, 화면의 구도(構圖), 영화의 리듬과 템포까지를 설계한다. 즉 영화가 제작되는 3단계(준비 ·촬영 ·완성단계)를 총지휘하는 사령탑으로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 비유할 수 있는 감독은 자기의 독특한 개성과 아이디어로 한 작품을 창조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예술은 감독의 예술이며, 영화사(映畵史)란 감독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현대 영화예술에서 영화감독은 작가(作家:film auteur)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분업화된 상태의 단순한 테크니션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개성 있는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
영화연기의 기본은 물론 무대연기라고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 영화는 독자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제작되는 것인 만큼 그것은 무대연기와 다른 성격도 지닌다. 영화는 신(scene:場面)별로 촬영된다. 또 무대와 달리 지속적인 시간을 갖고 있지 않다. 연기자의 모습은 쇼트에 따라 클로즈업되기도 하고 전신(全身)이 포착되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편집에 따라 순서가 결정 ·연결되기 때문에 영화의 콘티뉴이티상의 자기 위치와 편집 후의 자기 모습이 결정되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드라마틱한 연기력을 필요로 하는 작품에서는 고도의 연기력을 필요로 하며, 연기훈련을 위해 미국에서는 액터즈 스튜디오(actor’s studio) 같은 기관을 두고 훈련시킨다. 궁극적으로 영화배우는 영화연기의 바탕 위에서만 참된 매력을 발산할 수 있다고 하겠으며, 특히 발성영화가 시작된 이후로는 외모만이 아니라 목소리에 의한 연기도 크게 작용하게 되었다.
감독이 구상하고 있는 화면의 구도와 이미지를 필름에 담는 작업을 촬영이라 한다. 촬영기재를 조작해야 하고 조명이나 자연광선에 의해 피사체를 포착하는 한편, 화면의 톤(tone)과 앵글, 쇼트와 구도에 맞게 감독의 지시에 따라 기술적으로 필름에 충실히 담아야 한다. 또한 흑백(黑白)과 색채(色彩)에 따라 명암이나 색채 설계를 해나간다. 색채영화인 경우, 각 회사의 필름의 성질에 따라 그 특색을 살린다. 시네마스코프는 애너모픽 렌즈(anamorphic lens:歪曲렌즈)를 사용한다. 그러나 촬영기사는 촬영의 독특한 개성과 자신의 특성을 살릴 수 있다.
촬영이 끝나고 피사체가 필름에 수록되면 공간별로 촬영된 필름을 시간과 창조적 순서에 따라 연결 ·조립시키는 것이 편집이다. 한때 러시아에서는 영화의 본질이 몽타주(montage:편집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에 있다고 주장할 만큼 편집은 중요한 몫을 한다. 이것은 영화제작의 제3단계에서 영화를 완성시키는 과정이다. 편집기사는 독립적으로 일하지만 감독의 지시를 받으며 감독이 편집을 직접 담당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는 소리가 없었으며, 이와 같은 무성영화시대는 오래 계속되었다. 발성영화가 출현하게 되자 소리는 화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되었다. 소리의 녹음에는 동시녹음(同時錄音:synchronization)과 후시녹음(後時錄音:post synchronization)이 있다. 한국영화는 8 ·15광복 전에는 동시녹음이었으나 6 ·25전쟁 이후 줄곧 후시녹음 일변도였다가 70년대 말에 다시 동시녹음 영화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또한 영화녹음의 방법에는 광학녹음(光學錄音)과 자기녹음(磁氣錄音)의 두 가지가 있다. 광학녹음은 음(音)을 전기(電氣)로 전환시키고 빛의 강약을 영화의 필름 위에 기록하여 사운드트랙(soundtrack)을 이루는 것이다. 자기녹음은 테이프 이용의 원리와 같이 음의 변화를 자기의 변화로 치환(置換)시켜 자기테이프 위에 녹음하는 것이다. 70 mm 시네라마나 시네마스코프 등은 여러 개의 자기 트랙을 가지고 새로운 녹음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녹음이 완료된 재료를 정리하여 현상실에서 네거티브필름[陰畵]을 음향과 결부시켜 영사용(映寫用) 포지티브필름[陽畵]으로 만들어낸 것을 프린트라고 한다. 이것이 곧 최종적으로 완성된 작품으로서 극장에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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