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육 직전의 나른한 일상
지난해 깐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한꺼번에 수상한 「엘레펀트」(Elephant 2003)는 참으로 소름끼치는 영화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이 영화는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사건과 같은 실화에서 소재를 얻어 제작된 것이지만, 감독은 피가 튀기는 살육의 현장보다는 그러한 살육이 자행되기 직전의 평범하고 나른한 일상을 관찰하는 데 훨씬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주인공도, 별다른 플롯도 존재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거의 우연적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선택에 의거해 관심의 초점을 바꾸어가며 이 인물 저 인물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뒤쫓는다. 이때 스테디캠(Steadicam)-손으로 직접 들고 촬영하더라도 화면에 흔들림이 없도록 특수 고안된 카메라-촬영과 장시간 촬영의 결합으로 특징지어지는 「엘레펀트」의 미학적 스타일은 단번에 눈에 띈다.
구스 반 산트가 「엘레펀트」를 통해 다시금 작가영화, 혹은 예술영화의 영토로 복귀했다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다. 혹은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제리」(Gerry 2002)-이 작품은 구스 반 산트 최고의 걸작으로 꼽혀야 마땅할 것이다. 다행히 몇몇 나라에서 DVD로 출시되어 관심 있는 이라면 이제 손쉽게 구해볼 수 있다-에서부터 이미 변모의 조짐이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제 한 영화작가의 예술적 도약을 지켜보는 경이로움에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좀더 냉정하게 영화「엘레펀트」를 생각해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고등학교 내에서의 총기난사라는 끔찍한 사건에 대해 섣불리 원인을 분석하고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대신 객관적인 혹은 모호한(?) 태도로 접근했다거나, 보는 이의 눈을 홀리는 스테디캠과 롱테이크의 미학을 끌어들였다거나 하는 것은 여기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런 것들만이 문제시된다면「엘레펀트」는 과시적인 스타일과 지식인들에게 아양떠는 윤리의식으로 다시 포장된「제리」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가장 무시무시하고 우습고 추상적인 영화,「제리」
「제리」는 존 포드(John Ford)의 서부극과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의 「탐욕」(Greed 1924) 같은 고전영화의 자장 안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여기엔 존 포드의「수색자」(The Searchers 1956)와 「3인의 대부」(Three Godfathers 1948)처럼 '사막의 포로'(La Prisonnière du désert)-「수색자」의 프랑스 개봉제명이기도 하다-로 간주될 만한 인물들이 등장하며, 또한 후반부의 살인장면은, 사막이라는 공간, 인물들이 취하고 있는 자세 및 숏 사이즈 등을 고려할 때 명백히 스트로하임의「탐욕」의 클라이맥스를 떠올리게 한다.
스트로하임의 「탐욕」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일체의 가치판단이나 도덕적 명제들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중립적이고 냉담한 세계의 시선, 탐욕으로 인해 부서져가는 인간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존재할 뿐인 무심한 세계의 시선이다. 스트로하임은 이런 비정한 세계의 시선, 숨은신의 시선을 영화적으로 형식화할 가능성을 처음으로 탐구한 인물이었다. 구스 반 산트는 포드적인 '사막의 포로'들과 「탐욕」의 인물들을 중첩시키고 베케트(Samuel beckett)적인 유머와 부조리를 끌어들이는 한편, 비정하고 사악한 숨은신의 시선을 끝나지 않을 듯한 기나긴 트래킹 숏(long tracking shot)과 결합시킨 헝가리 영화감독 벨라 타르(Béla Tarr)- 그의 대표작인 「사탄탱고」(Satantango 1994)는 상영시간이 무려 7시간 30분에 달한다. 이 점에서 그는 지독히도 긴 러닝타임의 영화를 만들기로 악명 높았던 스트로하임에 견줄 만한 현대감독 가운데 하나다-의 미학을 참조한다. 그 결과 「제리」는 영화사상 가장 무시무시하고, 우습고, 추상적인 아방가르드 로드무비가 되었다.
살인을 추억하는 유령의 시선
한편「엘레펀트」는 「제리」식의 비극적 세계관에 입각한 고전주의로부터 멀찍이 떨어진다. 이 영화에는 비정한 숨은신의 시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총기난사사건이 벌어지기 직전의 특정한 시기에 각각의 인물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었는가를 차근차근 보여주었다고 해서, 다중적 시점을 도입한 영화라고 주장하는 것도 별로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엘레펀트」는 놀랄 만큼 일관되게 하나의 시점을 견지하는 영화다. 「엘레펀트」는 구스 반 산트가 「제리」에서 보여주었던 '세계-신의 시점'과는 별 관련이 없는 대신, 약간은 먼 미래에 속해 있으면서 과거의 한때를 추억하는 한 불특정한 인간의 시점에서 찍혀진 영화로 보인다. 그는 과거에 끔찍한 총기난사사건이 벌어졌던 한 고등학교 이곳저곳을 유령처럼 배회하면서, 곧 닥쳐올 비극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하나씩 관찰한다. 그의 시선은 이 아이에서 저 아이에게로, 한 아이의 현재에서 다른 아이의 과거로, 한 아이의 과거에서 다른 아이의 현재로 계속해서 이동한다. 그런가 하면 그는 같은 시간의 같은 공간을 반복해서 오가기도 하는데, 한번은 이 아이의 움직임을 따라 또 한번은 다른 아이의 움직임을 따라서 움직인다.
그는 미래에 속한 사람이기에 누구도 그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한다. 이처럼 「엘레펀트」는 특정한 사건이 벌어진 당시가 아니라 그보다 더 먼 미래에 고정점을 두고 있는 영화로, 여기서 구스 반 산트가 차용하고 있는 시선은 결국 살인을 추억하는 유령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 이 시선은 끔찍한 비극을 용케 피해 살아남은 누군가의 것일 수도, 혹은 비명에 죽어나간 누군가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특정한 개인의 시선으로 환원되지 않는 불특정하고 비개인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감정이입은 과거의 비극을 담아내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과거의 비극을 그 시간을 살았던 한 인물의 관점에서 체험하도록 강요한다. 그러한 체험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지만 플롯이라는 강력한 구성논리는 그것이 정교할 때, 일종의 환각과도 같은 거짓체험을 가능케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에 대해 언제나 유령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엘레펀트」를 특징짓는 플롯의 소멸과 유령처럼 떠도는 카메라는 같은 논리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상상
동시대의 영화에서 유령의 시선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을 활용한 또 다른 사례는 벨라 타르의 「베르크마이스터 하모니즈」(Werckmeister Harmonies 2000)나 알렉싼드르 쏘꾸로프(Alexsandr Sokurov) 의 「러시아 방주 」(Russian Ark 2002) 같은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가능하게 한 것은 스테디캠과 디지털카메라라고 하는 기술적 혁신이었다. 영화이미지가 비가시적인 유령적 존재의 유동하는 시선을 모방하기 시작하면서 숏의 길이는 점점 길어지고 그에 따라 영화들은 점점 괴물스러워진다. 러닝타임 145분의 「베르크마이스터 하모니즈」는 불과 서른일곱 개의 숏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숏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퀀스가 된다. 그런가 하면 「러시아 방주」는 아예 영화 전체가 단 한 개의 숏으로만 구성되었다.
구스 반 산트의 「엘레펀트」에는 이들 영화를 감싸고 있는 짙은 노스탤지어와 회한의 안개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퇴락하고 사라져가는 문명을 근심하는 유럽감독과 좀더 동시대적인 미국감독 간의 차이 때문일까? 여하간 이처럼 유령화되어가는 카메라, 그것은 더이상 촉각적으로 전체를 감지할 수 없으며 우리의 의지로 변화시킬 수도 없을 만큼 비대해져버린 세계, 말 그대로 코끼리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세계에 대한 절망적인 몸짓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때 콜럼바인 사건은 그 덩치 큰 짐승 옆구리에 난 터럭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참으로 불길하기 짝이 없는 상상이다. [창비 웹매거진/2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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