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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진(현 산서성 북부)과 동여진(현 요령성 등)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초부터 서여진(西女眞)과 동여진(東女眞)에 관하여 많은 기록들이 남아있다.
즉, 1017년 8월 27일 서여진(西女眞)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017년 8월 27일 서여진(西女眞)의 개신(揩信)이 거란(契丹) 동경(東京)에 있는 숭성사(崇聖寺)의 승려 도준(道遵)을 사로잡아 왔다."
상기한 기록을 시작으로 서여진(西女眞)에 관한 기록이 1017년 8월 27일부터 1114년 2월 20일까지 97년간 총 85건이 기록되어 있다.
또 동여진(東女眞)에 관하여 948년 9월부터 1391년 9월 22일까지 443년간 총 310건이 기록되어 있다.
즉, 948년 9월 동여진(東女眞)에 관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한편, 동진(東眞) 또는 동진국(東眞國)에 관한 기록이 1218년 12월 1일부터 1287년 9월 12일까지 69년간 총 48건이 기록되어 있다.
동진(東眞)은 동여진(東女眞)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진(東眞)과 동여진(東女眞)이 서로 별도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주의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간 고려시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고려 개경과 서경, 천리장성(노란 줄), 대금(大金)의 건국지(상경) 등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1] 고려시대 주요 지명의 추정지역
그런데 대금(大金, 1115~1234년)의 건국지(상경)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대동시 주변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태조 아골타[또는 안춘 구룬(여진어: Anchun Gurun, 만주어: Aisin Gurun)가 대금(大金)을 1115년에 건국했으나, 119년 후 1234년에 망했다.
즉,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서여진은 대금(大金)이 1115년에 건국하기전 약 100년 동안 『고려사』 기록에 나타나다가 1114년 2월 20일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서여진(西女眞)은 대금(大金)을 건국한 세력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간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에 관하여 연구한 결과,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대동시 앞을 흐르는 상건하를 흑수로 추정할 수 있었고, 그 강을 따라 길게 뻗은 현재의 항산을 백산으로 추정할 수 있었으므로, 서여진은 흑수말갈과 백산말갈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금사』 지리지에 따르면, 그 당시 혼돈강이라고 불렸던 현재의 상건하를 흑룡강이라고도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백산이라고 불렸던 현재의 항산을 장백산이라고도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중화인민국측은 『금사』 지리지에 근거하여 혼돈강이 현재의 흑룡강성 흑룡강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백산이 길게 뻗은 장백산으로서 현재의 이북 백두산이 장백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무튼 당(唐) 대의 흑수말갈과 백산말갈이 고려 시대에는 여진으로 불렸음을 알아챌 수 있다.
즉,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흑수말갈과 백산말갈은 여진 중에서도 서여진(西女眞)이었음을 알아챌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고려사』에 실려있는 서여진(西女眞)에 관한 기록 총 85건 중에서 78건은 '고려에 내조(來朝)했다.', '고려에 내투(來投)했다.', '토산물을 바쳤다.', '좋은 말을 바쳤다.' 등 고려와 서여진 간에 상호 우호적이었다는 내용들이지마는 매우 단순한 기록들이다. 그러나 그 외 7건은 아래와 같이 구체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1017년 8월 27일 서여진(西女眞)의 개신(揩信)이 거란(契丹) 동경(東京)에 있는 숭성사(崇聖寺)의 승려 도준(道遵)을 사로잡아 왔다."
"1022년 12월 18일 서여진(西女眞)의 어니저(魚尼底)가 와서 아뢰기를, '저의 고모가 일찍이 귀화한 매나(昧那)를 따라와서 귀국의 도읍에 머문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는데, 본국을 그리워하고 있으므로 토종말로 누이를 바꾸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라고 하자, 곧 놓아주어 돌아가게 하고 그 말도 돌려보냈다."
"1033년 11월 29일 서여진(西女眞)의 우화(亏火) 등 156인이 관성(關城, 천리장성)을 개척할 때 모두 공로가 있었으므로 관작(官爵)을 1급씩 더하였다."
"1064년 5월 10일 참지정사(叅知政事) 이유충(異惟忠)에게 명령하여 서여진(西女眞)의 영원장군(寧遠將軍) 고지지(高之知) 등 13인에게 예빈시(禮賓寺)에서 잔치를 베풀고 전례에 따라 물품을 하사하게 하였다."
"1070년 8월 22일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서여진(西女眞)의 추장(酋長) 회덕(懷德)의 부친 이우불(尼于弗)이 선조 때부터 변방에서 공이 있으니, 회덕에게 봉국장군(奉國將軍)을 제수하라.'고 하였다."
"1073년 5월 5일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아뢰기를, '서여진(西女眞)의 추장(酋長) 만두불(漫頭弗) 등 여러 번인(蕃人)이 요청하기를 동번(東蕃)의 사례에 의하여 주군(州郡)을 나누어 설치한다면, 길이 번국(藩國)이 되어 감히 거란(契丹)의 번인들과 통교하지 않겠다고 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내조(來朝)를 허락하라.'고 하였다. 이어서 명령하기를 뒤에 투화(投化)하는 자가 있거든 초유(招諭)하여 오게 함이 가하다고 하였다."
"1081년 1월 19일 지서북면병마사(知西北面兵馬事) 왕저(王佇)가 아뢰기를, '서번(西蕃) 추장(酋長) 아부환(阿夫渙) 등 9인은 마음을 다하여 변방을 지켰으므로, 마땅히 관작과 상을 더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명령하여 아부환(阿夫渙) 등 3인을 유원장군(柔遠將軍)으로, 산두(山豆) 등 6인을 회화장군(懷化將軍)으로 삼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즉, 상기한 기록들에 따르면, 서여진과 고려는 서로 우호적이었으며, 서여진이 관성(關城, 천리장성)을 쌓는다든지 변방을 지키는 일에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동번(東蕃)의 사례에 의하여 주군(州郡)을 나누어 설치한다면,'이라는 구절로부터 고려가 동여진 지역에 주군(州郡)을 설치했었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즉, 그 당시(1073년)는 윤관(尹瓘)이 예종(睿宗) 2년(1107년) 10월에 여진(女眞)을 정벌하기 전이었지마는 고려가 동여진 지역에 주군(州郡)을 설치했었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동여진에 관한 기록 310건 중에서 대금(大金)이 건국된 1115년 이후부터 1391년 9월 22일까지 276년간의 기록은 단지 7건에 불과하다.
즉, 대금(大金)이 건국된 1115년 이후의 동여진에 관한 기록 7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 기록들이 소중한 이유는 지명들이 몇 개 나타나므로 동여진의 주 거주지를 추정하는데 있어서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1116년 8월 13일 동번(東藩)의 사신 아이(阿伊) 등이 내조(來朝)하였다."
"1118년 윤911월 29일 수사공 좌복야 판상서병부사(守司空 左僕射 判尙書兵部事) 최정(崔挺)이 사망하자, 시호(諡號)를 정의(貞毅)라 하였다. 문종(文宗)이 무사를 선발하였을 때 최정은 빼어난 활솜씨로 뽑혔으며, 동여진(東女眞)의 정벌에 공이 있었다."
"1122년 11월 12일 동여진(東女眞)의 추장(酋長) 실현(實現)이 와서 말을 바쳤다."
"1236년 8월 4일 동여진(東女眞)의 원병(援兵) 100기(騎)가 요덕진(耀德鎭)과 정변진(靜邊鎭)에서 출발하여 영흥창(永興倉)으로 향하였다."
"1270년 4월 22일 동계안집사(東界安集使)가 보고하기를, '동여진(東女眞)이 변방을 침략하여 90여 인을 포로로 잡아갔다.'고 하였다."
"1391년 7월 이 달에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가 의논을 올려 사람을 보내어 방문(牓文)을 가지고 동여진(東女眞) 지역의 여러 부락을 초유(招諭, 정책설명)하게 하였다. 이에 여진인 중 귀순(歸順)한 자들이 300여 인이었다."
"1391년 9월 22일 전 상원군사(祥原郡事) 이용화(李龍華)를 보내어 알도리(斡都里)와 올량합(兀良哈)을 선위(宣慰)하게 하였다. 알도리는 곧 동여진(東女眞)이다."
상기한 7건의 기록 중에서 앞 3건은 대금(大金, 1115~1234년)이 존재하던 시기이고, 네번째와 다섯번째 기록은 원(元)이 고려를 침입하던 시기(1231~1260년)이며, 마지막 2건은 조선 개국(1392년) 직전에 해당한다.
그런데 상기한 기록 중에 나타나는 요덕진(耀德鎭)과 정변진(靜邊鎭)은 『고려사』지리지에 따르면, 동계(東界)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등주(登州)에 속하는 지명들이다. 즉, 동쪽에 있어야 할 동계(東界)에 속하는 지명들로부터 동여진이 출발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동여진은 동계(東界)의 동쪽 인근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다.
또 동계(東界)에 속하는 '등주(登州)'란 지명은 『고려사』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공민왕 5년(1356년)에 쌍성을 공격하여 수복한 지역으로서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 및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 여러 성(城)과 인접해 있었던 지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간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원(元)이 쌍성총관부를 두었던 화주(和州)와 등주(登州)등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화순현과 하북성 형태시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즉, 『고려사』지리지에 기록되어 동계(東界)에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개성부(평양, 낙랑) 동쪽의 명주(溟州) 등 동부 해안 지대와 개성부 서쪽에 있는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등주(登州)에 속하는 지명들과 북쪽에 있는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에 속하는 지명들이 함께 포함되어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등주(登州)와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에 소속되어 있는 지명들이 모두 동계(東界)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들 지명들이 모두 동쪽 해안지대에 있는 지명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음을 알아챌 수 있다.
따라서 동여진의 거주 위치가 동계(東界)의 동쪽에 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으며, 서쪽의 등주(登州) 또는 북쪽의 함주(咸州) 등에 인접하고 있는 지역이 결코 아님을 알아챌 수 있지 않은가?
한편, 동여진에 관한 기록 중에서 1115년에 대금(大金)이 건국되기 이전시기에 해당하는 303건의 경우, 서여진과 마찬가지로 대부분(286건)은 '고려에 내조(來朝)했다.', '고려에 내투(來投)했다.', '토산물을 바쳤다.', '좋은 말을 바쳤다.' 등의 상호 우호적인 기록들이다.
그러나 그 외 고려와 동여진간에 전투를 하거나 침략 또는 내부한 기록으로서 지명이 나타나는 기록이 아래와 같이 17건이 있다.
즉, 지명의 위치를 추정함으로써 동여진의 주 거주지역을 밝힐 수 있지 않겠는가?
"1005년 1월 동여진(東女眞)이 등주(登州)를 침략하여 주진(州鎭)의 부락(部落) 30여 곳을 불태우자 장수(將帥)를 보내 그들을 막았다."
"1010년 5월 6일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화주방어낭중(和州防禦郞中) 유종(柳宗)을 먼 섬으로 유배보냈다. 하공진이 일찍이 동여진(東女眞)을 공격하여 패배를 당하자 유종은 그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는데, 마침 여진족(女眞族) 95인이 내조(來朝)하여 화주관(和州館)에 도착하자 유종이 모두 죽였으므로 함께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여진족이 (이 일을) 거란(契丹)에 참소하자, 거란주(契丹主)가 군신(群臣)에게 말하기를, '고려(高麗)의 강조(康兆)가 임금을 시해한 것은 대역죄이므로 군사를 내어 죄를 묻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1011년 8월 동여진(東女眞)의 배 1백여 척이 경주(慶州)를 침략하였다."
"1012년 5월 동여진(東女眞)이 청하현(淸河縣)·영일현(迎日縣)·장기현(長鬐縣)을 침략하였다.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강민첨(姜民瞻)·이인택(李仁澤)·조자기(曹子奇)를 보내 주군(州郡)의 군사를 독려하고 (동여진군을) 공격하여 달아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