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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챙기기 백성호의 예수뎐2
옷 벗겨진 채 못 박혔다…차마 못 그린 그날의 예수
카드 발행 일시2023.07.15
에디터
백성호
백성호의 예수뎐2
관심
(42)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간 길은 800m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갔던 길을 ‘비아 돌로로사’라고 부른다. ‘십자가의 길’이란 뜻이다. 십자가의 길에는 모두 14처가 있다. 예수가 재판을 받았던 빌라도 법정이 제1처,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짊어진 곳이 제2처, 예수가 처음 쓰러진 곳이 제3처다.
그런 식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가 일화를 하나씩 남긴 곳마다 ‘처(處)’가 남아 있다.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순례객들이 ‘십자가의 길’을 찾는다. 그리고 각 처에서 걸음을 멈추고 기도를 드린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진 장소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골고타 언덕까지는 직선 거리로 800m였다. 백성호기자
예수가 마리아를 만난 장소는 제4처다. 그 장소에는 지금 아르메니안 교회가 세워져 있다. 교회 지하층에는 모자이크로 된 신발이 있다. 마리아가 그곳에 서서 예수를 기다렸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교회 정문 위에는 예수와 마리아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십자가를 짊어진 채 죽으러 가는 예수와 그런 자식의 손을 잡고서 무언가 말을 하려는 마리아. 한눈에 봐도 애틋하다. 나는 그 아래 서서 한참 동안 조각을 바라봤다. 예수는 눈을 감고 있고, 마리아는 눈을 뜨고 있다. 예수는 가고 있고, 마리아는 붙들고 있다. 예수는 고요하고, 마리아는 요동친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우리의 가슴도 요동친다.
불과 800m였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진 곳에서 못 박혀 숨진 곳까지 말이다. 직선거리로 고작 800m였다. 건장한 젊은이라면 한달음에 달려갈 거리였다. 그러나 그 길은 짧지 않았다. 14처 중에서 어느 한 곳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무너지는 가슴 없이 지나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800m. 오히려 아득한 거리였다. ‘순간’에서 ‘영원’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갔던 길은 야트막한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지금은 길 양옆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백성호 기자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었던 길은 평지가 아니었다. 골고타 언덕을 향해 약간씩 경사가 높아지는 오르막길이었다. 70㎏ 무게의 십자가를 짊어졌으니 경사는 더욱더 가파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은 그 길이 예루살렘 성안의 시장통을 통과한다. 길 양옆에 온갖 잡화를 파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가게가 늘어서 있었다. 그런 십자가의 길 중간중간 예수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
얼마나 무거웠을까. 지칠 대로 지친 예수는 쿵 하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 직후의 장면이 루카 복음서에 기록돼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어떤 키레네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23장 26절)
예수는 기진맥진했다. 로마의 병사가 아무리 채찍을 내려쳐도 다시 일어나 십자가를 짊어질 기력이 없었다. 결국 병사들은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했다. 예수는 그 뒤에서 비틀거리며 걸었으리라. 자신이 못 박힐 나무 십자가를 앞세운 채 말이다. 그때가 아침이었다.
'비아 돌로로사'는 '십자가의 길'이란 뜻이다. 전 세계 그리스도교인들의 순례지이기도 하다. 백성호 기자
예수가 가야 하는 목적지는 골고타 언덕이었다. ‘골고타’는 ‘해골터’라는 뜻이다. 당시 예루살렘의 사형장과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이윽고 예수는 골고타에 도착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에게 쓸개즙을 탄 포도주를 건넸다. 일종의 진통제였다. 예수는 맛만 본 뒤 이를 거절했다.
병사들은 땅바닥의 십자가 위에 예수를 눕혔다. 그리고 못을 박았다. 두 손과 두 발. 쾅! 쾅! 쾅! 못이 살을 관통할 때마다 예수는 고통에 겨워 이를 악물었으리라.
유대인 가이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알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죄수의 옷을 모두 벗겼습니다. 예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실과 달리 후대 화가들은 속옷도 걸치지 않은 예수의 알몸을 차마 그릴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장소에 성묘교회가 세워져 있다. 그리스도교 성지 중의 성지다. 이 교회를 차지하려는 명분으로 유럽과 이슬람이 전쟁을 벌였다. 그 전쟁이 십자군 전쟁이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했던 골고타 언덕에는 성묘교회가 세워져 있다. 골고타 언덕에는 지금도 십자가상이 서 있다. 백성호 기자
나는 골고타 언덕 위에 서 있는 성묘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예수의 손과 발에 못을 박은 장소가 나왔다. 바로 옆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던 곳이다. 그곳에 십자가 예수상이 서 있었다. 순례객들은 줄지어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땅은 모두 유리로 덮여 있었다. 오직 한 군데, 십자가 예수상 앞에만 바닥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 구멍으로 깊숙이 손을 넣었다. 마치 내 안의 심연으로 두레박을 던지듯이 말이다. 그러자 땅이 만져졌다.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의 땅, 2000년 전의 그 숨결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짧은 생각
골고타 언덕은
예루살렘의
공동묘지였습니다.
사막 기후인
이스라엘에서
무덤은 주로
자연적으로 생겨난
동굴이었습니다.
골고타 언덕도
그랬습니다.
여기저기 생겨난
자연 동굴들이
공동묘지의 무덤으로
쓰였습니다.
예수 당시
골고타 언덕에는
무덤 외에
또 하나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처형장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사형수에게
십자가형을 집행할 때는
골고타 언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공동묘지에 있는
처형장,
예수는 바로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근처 동굴 무덤에서
부활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에는
도시의 처형장에,
혹은 동굴 무덤 위에
교회를 세우는
전통이 있습니다.
예수가 숨을
거두었던
골고타 언덕에도
성묘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로마의 바티칸 시국에도
베드로가 처형당한 뒤
묻힌 동굴 무덤 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교황이 머무르는
성 베드로 성당입니다.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도시
아시시도
그런 곳입니다.
수도자 프란치스코가
처형당하고
묻힌 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교회는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심장으로 기능합니다.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왜 하필
공동묘지나
처형장이었던 장소에
교회를 세우는지 말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더군요.
그리스도교인에게
골고타 언덕은
죽음의 장소이자
부활의 장소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그 위에 교회를 세우는
전통이 생겼더군요.
눈을 감고
묵상해 봅니다.
예루살렘의 성묘교회,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이 모두가
우리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 메시지의
본질이 뭘까요.
그건 다름 아닌
죽음과 부활이 일어나야 할
본질적 장소를
말하는 게 아닐까요.
그게
어디일까요.
저는 그게
우리의 마음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바깥에서
죽음과 부활의 장소를
순례한다고 하더라도,
내 안에서
죽음과 부활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니 예수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했던,
그 골고타 언덕은
다름 아닌 ‘내 안’입니다.
눈을
바깥으로 향하면
찾을 수 없고,
안으로 돌려야만
보이기 시작하는
나의 골고타입니다.
에디터
백성호
관심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770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