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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서구(仁川 西區)
미래도시로 변화하며 성장하는 명품도시 개발
인천경제자유구역 중 한 곳이 청라국제도시이다. 청라국제도시는 금융과 국제업무기능, 첨단레저시설, 첨단화훼단지를 조성해 외국인과 수도권 시민들이 함께 거주하며 업무를 할 수 있도록 개발되고 있다. 인구 9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청라국제도시에는 날씨가 좋을 때는 북한까지 조망이 가능한 높이 450m의 시티 타워가 건설되고 있다. 72만 6,000㎡의 중앙호수공원과 33만 6,000㎡의 주운로(캐널 웨이·Canal Way)에는 전통공간, 레저공간, 예술문화공간, 생태공간, 타워공간 등 5개 테마별 공간이 조성된다. 서구 가정동 오거리 일대는 국내 최초의 입체복합도시인 루원 시티가 개발되고 있다. 구도심을 헐어내고 77층짜리 쌍둥이 빌딩을 세우는 등 미래도시의 패러다임을 이끄는 최첨단 명품도시로 조성된다. 서구 검단동과 불로동, 마전동 등 1812만㎡에는 검단신도시가 개발되고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인천도시공사가 각각 7조 7,000억 원씩 투자해 23만명이 거주할 검단신도시에는 중앙대학교의 캠퍼스와 병원 등이 입주할 계획이다.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느낄 수 있는 문화유산
서구 경서동에는 녹청자도요지 있다. 이곳에서는 서민들이 애용하는 대접과 완접시, 자배기, 반구장경병 항아리가 출토됐다. 녹청자를 굽던 도요지는 아래로 갈수록 굽받침이 높아져 그 위에 놓여진 그릇들이 평형을 이루도록 굽받침을 조절하고 있다. 이 같은 구조는 일본에서만 두 곳이 발견돼 일본의 독자적인 도요지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같은 형태의 도요지가 발굴돼 국내 도요기술이 일본으로 전수됐을 가능성도 있어 귀중한 유산이 되고 있다. 인천 최초의 문화재로 등록된 녹청자도요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관, 전시하기 위해 녹청자박물관이 건립됐다. 이곳에서는 옛날 도자기 제작과정과 직접 도자기를 만들어 볼 수 있는 도예 일일체험장이 마련돼 있다. 1999년 서구 검단과 원당, 불로지구 등의 도시개발과정에서 선사시대의 유물인 골각류, 금속류, 옥석유리류 등이 발굴됐고 이를 보전하고 있는 검단선사박물관이 원당지구에 자리잡고 있다. 박물관에는 청동기시대 집터와 돌널무덤(석관묘)이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이전, 설치됐다. 이밖에 서구 신현동에는 높이 22m, 둘레 5.3m, 수령 500여 년의 회화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 나무는 윗부분에서 꽃이 피기 시작해 밑으로 내려오면 풍년이, 반대로 피면 흉년이 든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귀족이 아닌 서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대접과 접시 등을 굽는 녹청자 가마터. <출처:인천 서구 제공>
주민과 함께하는 축제와 어촌체험 관광마을 세어도
서구에는 매년 9월 ‘서곶문화예술제’가 열린다. 지역예술인들과 지역주민이 한 자리에 모이는 축제는 연령대와 요일별로 행사가 다르다. 토요일에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피아노경연대회, 서구문화예술인회 작품전시회, 연극공연, 청라학생예술대회, 구민백일장, 청소년가요제 및 주말 영어광장, 도자기 등 체험행사가 개최된다. 일요일은 노인들을 대상으로 국악과 농약, 무용 등 등 전통공연과 장수 가족 사진촬영이 진행된다. 서구 원창동 세어도는 서구에 있는 유일한 유인도이다. 세어도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서구는 관광객들이 자연 속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즐기며 어촌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52만8000㎡에 어촌체험관광마을을 조성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갯벌과 산림욕, 습지를 체험할 수 있는 체험지구와 바다 낚시를 할 수 있는 낚시지구, 산책로와 숙박, 편익시설지구 등을 조성해 친환경 자연체험과 휴양를 할 수 있다.
인재육성을 위한 명품교육도시 건설
인천 서구는 2005년 4월 외국어교육특구로 지정받았다. 인천국제공항과 청라국제도시가 있어 국제도시로 부상함에 따라 국제감각과 외국어 능력을 겸비한 인재를 길러내고 학생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외국어를 익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외국어교육특구지역으로 서구영어마을, 거점형 영어교육센터 3개소를 운영하며 영어 말하기 대회 등의 행사를 통해 외국어 체험 기회를 확대 운영하고 있다. 또한 명품교육도시 건설을 위해 서구 예산의 10%를 교육지원예산으로 편성하여 친환경 무상급식, 1학교 1발명교실 운영, 서동이장학회, 평생학습도시 조성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인천 부평구
인천의 관문도시·경제의 축
부평은 인천의 동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부천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흔히 부평을 부천과 혼동하거나, 인천의 부평이 아닌 경기 부천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인천을 연결하는 경인고속도로와 경인전철, 인천지하철 1호선이 관통하고 서울외곽순환도로와 가까운 수도권 교통의 요충지이자 인천의 관문도시로 사통팔달의 교통망이 구축된 지역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부평은 인천보다는 서울의 생활과 문화를 빨리 받아들였다. 옛날 인천에서 부평으로 가는 길은 원적산과 만월산을 넘어야 해 거리감이 존재했다. 이 거리감 때문에 부평의 정서는 서울에 가까운 것이다.
수도권 교통 요충지, 경제중심지로 성장
지금 부평은 원적산과 만월산에 터널이 뚫리고 다양한 접근로가 생겨 송도국제도시와 인천국제공항 쪽으로도 접근성이 좋아졌다. 서울지하철 7호선 개통도 눈앞에 있어 서울길도 마찬가지이다. 인천 경제의 축은 동인천권과 부평권으로 나눠진다. 동인천은 인천항을 중심으로 한 항만경제권이다. 부평은 넓고 풍부했던 곡창지대였던 부평 평야를 중심으로 미곡상들이 모여든 곳이다. 부평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주부토군으로, 통일신라때는 장제군으로, 고려시대에는 수주·안남·계양·길주·부평 등으로,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로 불렸다. 1914년 부천국 부내면에서 1940년 인천부로 처음 편입됐다. 부평은 1970년대 이후 산업화와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곳곳에 조성돼 인구가 급속히 팽창했다. 서울과 인접해 위성도시 역할을 했던 부평구는 1988년에 서구, 1995년에는 계양구가 분리되며 축소됐다. 구 명칭도 인천 북구에서 부평구로 변경됐다. 수도권의 편리한 교통여건을 기반으로 부평은 부평수출산업단지와 GM대우 부평공장 등이 지역경제를 이끌고 있다. GM대우에는 1만 2,000여 명의 근로자와 수천 개의 협력업체가 있어 사실상 부평뿐만이 아니라 인천지역 산업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 지난 2005년 조성된 수도권 최대의 아파트형 공장인 우림라이온스밸리와 남광센트렉스에 첨단업종이 대거 입주해 있다.
교통의 요지인 만큼 국내 최대 규모인 부평지하상가와 재래시장을 중심으로 유통과 서비스산업이 매우 발달돼 있다. 또한 부평구는 산업화 과정에서 오염의 대명사였던 굴포천을 친환경 생태하천으로 조성하고, 도심 속의 쾌적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곳곳에 공원을 조성해 살기 좋은 정주여건을 마련하고 있다. 특히 저탄소 녹색성장을 선포하고 자연친화형 생태도시로의 변모를 꾀하고 있다.
1 부평구청 전경.
2 도심 속 체험공간인 인천나비공원 전경.
3 부평지하상가는 친구들과 연인이 쇼핑하기에 좋다.
4 GM대우 부평공장 조립라인.
5 인천과 부천의 중간에 위치한 부평은 사통팔달의 교통망이 구축돼 1970년대부터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됐다.
국내 최대의 지하도시 부평지하상가
경인전철 부평역 인천지하철 1호선 지하에 있는 부평지하상가는 전체면적이 4만 3,000㎡이다. 총 연장 길이만 1.8㎞에 달한다. 지하상가에는 점포가 1,500여 개 있다. 하루에 이곳을 통과하는 유동인구만 12만 명에 이른다. 부평의 대표적 명소인 지하상가에는 최신 유행하는 패션과 잡화, 신발, 화장품, 액세서리 등 브랜드 상품이 즐비하고 다른 곳보다 값싸고 실속 있는 보세제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천시민뿐만 아니라 중국관광객과 지방 주민들도 원정쇼핑도 온다. 지하철과 시내·시외·마을버스가 편리하게 연결된 교통요충지로서 젊은 층이 주 고객이다. 지하상가만이 아닌 지상에도 수천 개의 점포가 밀집돼 있어 인천지역 최대 쇼핑가이다.
노점상과 상점이 일궈낸 문화의 거리
부평구 부평동 롯데백화점 맞은편 부평시장 인근엔 270m 거리의 ‘문화의 거리’가 있다. 차 없는 거리로 양쪽엔 상가가 있고 거리 한 가운데는 노점상이 일렬로 정렬돼 있다. 거리가 끝나는 한평공원에는 먹을거리 노점이 줄지어 있다. 낡은 분수는 그 모양을 살려 새로운 바닥분수로 만들어 쇼핑 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로 탈바꿈했다.
14년 산고 끝에 태어난 이 거리는 행정기관이 아닌 상점들과 노점상이 힘을 합쳐 조성한 거리라는 점에서 남다르다. 잘 정돈된 거리답게 ‘2009년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공공디자인 정비사업의 표본으로 일본 가나가와현, 브라질 쿠리치바시 등에서 벤치마킹했다. 국내외 도시들의 순례지로 ‘한국적 상업거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책과 평생친구가 되는 기적의 도서관
부평구 부개동에 2006년 개관한 부평 기적의 도서관은 수도권에 있는 유일한 어린이 전문 도서관이다. 책 읽는 문화재단과 함께 MBC <느낌표>와 함께 지어진 도서관으로 전국에서 아홉번째이다. 이곳에는 점자도서를 포함해 그림책과 동화책 등 어린이 도서 5만권을 소장하고 있다. 낮은 서가와 온돌 마루, 영유아방 등 모든 시설은 내 집 같은 편안한 독서공간을 구성하는 등 어린이 눈높이에 맞췄다. 연령별로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독서문화 상설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어린이들이 자유로운 상상과 발견의 기쁨을 통해 책과 평생 친구가 되는 곳이 바로 부평기적의도서관이다. 도서관에는 방학 때면 하루 1,000명이 넘게 방문하고 있다.
농경생활을 재현한 부평역사박물관
부평구 굴포로에는 부평의 과거를 재현한 역사박물관이 있다. 3056㎡에 지하 1층 지상 2층의 역사박물관에는 부평 평야를 중심으로 농사를 짓는 옛 농경시절부터 근대화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빼곡한 아파트 숲과 굴뚝 공장, 즐비한 상가로 어울려진 부평이 옛날 농사짓던 평야라는 것을 역사박물관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2007년 3월 개관한 역사박물관은 기획전시를 통한 다양한 문화체험과 어린이 관람객을 위해 재미있는 체험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교육박물관이라고도 한다. 지역예술인의 역량과 재능을 펼 칠 수 있는 장소도 제공하고 야외전시장 및 박물관 공원에 다채로운 문화공연을 개최해 주민 쉼터로도 이용된다.
문화예술인들의 보금자리 부평아트센터
부평구 십정동에 2010년 4월 문을 연 부평아트센터는 문화예술인들과 지역주민들에게 문화향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하철 1호선 백운역 부근에 위치해 편리한 접근성과 최첨단의 무대시스템, 최적의 관람 환경을 갖춘 대공연장인 해누리극장(893석)과 소 공연장 달누리극장(338석), 전시장인 갤러리 꽃누리(361㎡)를 갖추고 있다. 또 국내에서 유일한 야외옥상공연장인 별누리극장(431㎡)과 구름마당 광장을 통해 다양한 문화혜택을 누릴 수 있다. ‘참여와 나눔, 더불어 사는 따뜻한 부평’이라는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계층별 눈높이에 맞춰 누구나 다양하게 즐길 수 있도록 여러 장르의 공연, 전시와 함께 참여형 전문 예술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국내 최초로 추모와 휴식이 가능한 공간으로 재탄생한 인천가족공원.
자연친화적 테마공원으로 거듭난 인천가족공원
부평구 부평2동에 있는 인천가족공원(옛 부평공동묘지)은 현대식 장사시설과 편익시설을 갖춰 혐오시설에서 시민공원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전체 168만㎡의 부지에 1단계로 648억 원을 들여 4만 5000기의 납골을 수용할 수 있는 봉안당과 관리사무소, 홍보관을 새롭게 마련하고 생태하천과 진입로를 정비해 국내 최초로 추모와 휴식이 가능한 공원으로 조성됐다. 2단계로는 2015년까지 봉안당(4만기), 옥외 봉안담(2만기), 외국인특화묘역(2만기)와 함께 자연장(수목장과 정원장)을 할 수 있는 테마공원으로 거듭나고 있다. 묘지를 없애고 현대식 납골당을 공원화시키고 있다.
나비를 보고 직접 만질 수 있는 나비공원
부평구 청천동 장수산자락에 자리 잡은 부평숲 인천나비공원은 살아있는 나비를 주 테마로 조성된 곤충 생태공원으로 가까운 도심에서 자연을 느끼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수도권 유일의 체험학습장이다. 18만㎡의 공원 안에는 자연교육센터, 나비생태관, 나비숲길 등이 있어 어린이와 가족단위 관람객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연 25만명이 방문한다. 1,500개의 표본과 멸종위기의 붉은점모시나비 등 희귀나비들도 다수 있다. 봄과 여름에는 나비를 직접 보는 것은 물론 만질 수도 있으며, 겨울엔 전시관과 3D영화로 나비를 만날 수 있다.
한국 자동차의 서막을 연 GM대우 부평공장
부평구 청천동 한 복판 100만㎡(30만평)의 노른자위 땅을 차지하고 있는 GM대우 부평공장은 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 현대화의 서막을 연 곳이다. GM대우의 주력공장으로 1962년 자동차 조립공장, 1971년 엔진공장을 준공한 부평공장은 국내 최초의 현대식 자동차 공장이다. 1985년 세계 7번째로 디젤승용차 생산, 1986년 르망 생산에 이어 1993년 아시아 업계 최초로 ISO 9001 인증을 획득하는 등 한국자동차 산업의 메카라 할 수 있다. 이 곳에서는 젠트라, 토스카, 윈스톰, 알페온을 생산하는 승용 1, 2공장과 엔진 및 변속기를 생산하는 엔진구동 공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만 2,000명의 근로자가 연 44만 대의 승용차를 생산하고 있다.
오염천에서 시민휴식공간으로 되돌아온 굴포천
부평구 갈산동에서 부천 원미구 상동까지 14㎞의 굴포천은 원래 인공하천이다. 옛날에는 한양으로의 원활한 물자수송을 위한 교역로로 쓰였고 일제시대에는 주변 평야에 농업용수를 제공했다. 산업화시대에는 공업용수를 제공했고 홍수조절 기능도 했다. 부평 등 도시중심부 일부를 아일랜드로 둘러싸는 형태로 흔치않은 환형의 도심하천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생활하수와 공장 오·폐수의 유입으로 오염됐지만 90년대 후반 하천살리기 운동을 벌여 2008년 자연친화형 하천으로 복원되면서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굴포천을 따라 산책로와 휴식공간이 만들어졌으며 시민들은 역사문화적 체험과 친환경생태체험 등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도록 했다.
출처:(신택리지, 박준철, 경향신문)
인천 차이나타운
자장면의 발상지
거리는 활기가 넘친다. 붉은 바탕에 한자로 쓰여진 간판들. 차이나타운의 특징이다. 양꼬치 굽는 냄새가 지나가던 발걸음을 붙잡는다. 그 앞엔 ‘칭다오 맥주’까지 놓여있으니 군침이 돈다. 꼬치를 구우며 연신 중국말을 내뱉는 장사꾼. 거리를 구경하느라 출출하고 목마른 행인들의 속사정까지 간파한 것이 틀림없다. 내심 ‘중국인의 상술은 대단해’라고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건너편 2층 건물 문간에는 듬성한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넘긴 노인이 앉아있다. 노인은 통달한 표정으로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은근슬쩍 노인 옆에 앉아 수다를 시작했다.
68년 전 중국청년이 겪은 질곡의 역사
어눌한 말투가 연로하기 때문인가 했더니 중국인이란다. 열아홉에 중국 산둥성에서 누나 찾아 인천으로 왔다가 길이 막혀 돌아가지 못했다. 결국 14년 만에 인천에서 재혼했고 화교들이 인천을 떠날 때 노인 역시 뉴욕으로 떠났었다. “첫 부인은 40살까지 기다리다 재혼을 했다네…”, 노인의 회상하는 모습은 마치 질곡의 역사를 가진 인천의 모습과도 같았다. 거리에 대해 묻자 깜짝 놀랄 대답들이 이어진다. “요 앞집은 일본헌병대장 집이었고 여기는 독일영사 관사였지.” 앉아서 설명을 듣자니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하다. “저 아래는 담배 팔던 곳인데 요즘엔 음식점이 됐네.” 보이는 거리와 건물 모두 노인의 추억이 담긴 곳이다. “그때는 공화춘, 중화루, 송죽루가 제일 유명한 음식점이었고 진짜배기 일본사람, 중국사람이 여기서 살았지.”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은 청나라를 비롯한 열강이 첫발을 내디딘 곳이었다. 1884년엔 청국 조계지가 설정됐고 이후 러시아, 미국,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이 몰려들었다. 1888년엔 최초의 서양식 공원 ‘자유공원’이 만들어졌다. 이후 1914년 일제강점기에 조계제도가 폐지되기까지 인천은 한반도의 출입구였다. 조계는 폐지됐어도 사람들은 남았다. 1920년대 ‘청관거리’라 불리던 이곳 차이나타운에 공화춘, 중화루가 들어섰다. 이후 1967년 ‘외국인 토지소유권 제한조치’가 실행돼 장사하기 힘들어진 중국인들이 해외로 떠나가기 전까지 차이나타운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북적이는 도시 중 하나였다.
아픈 역사가 남긴 근현대문화유산
일찍이 열강들의 출입문으로 홍역을 앓은 인천에는 아직도 여러 흔적이 남아 있다. 등록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된 인천 중구청 건물은 1883년 2층 목조건물로 지어진 ‘인천부청사’였다. 또한 1890년대에 지어진 답동성당, 일본18은행 인천지점, 1892년 지어진 일본58은행 인천지점을 비롯해 수많은 건축물들이 120년 전 인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제물포를 중심으로 뻗어있던 건물들은 6.25 전쟁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1905년 영국인 제임스 존스톤이 별장으로 지었던 건물은 1950년 인천상륙작전 시 포화로 소실됐고 1897년 지어진 영국영사관 역시 전쟁 통에 사라졌다. 지금 인천의 근현대문화유산은 교육과 관광을 위해 개발됐다. 일본18은행 건물을 개조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이 마련되어 주말이면 700~800명이 찾는다. 살아있는 역사의 교육장인 것이다. 이곳에서는 당시의 건물들과 인천 개항장의 모습을 비롯해 인천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중국사람, 일본사람 그리고 한국사람
근대화를 겪으며 여러 나라의 문화가 섞인 인천 차이나타운.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옛날 얘기를 듣기 위해 경로당을 찾았다. 북성동 노인회장 문순희(77) 할머니는 “중국사람들은 중국학교 다니고, 일본사람들은 일본학교 다니고 그랬지 뭐… 별로 서로 왕래하고 그런 거 없었어”라며 시큰둥한 반응이다. “6.25 때 피난 갔다 와서도 중국사람들은 돈도 많고 장사도 잘했어.” “차이나타운이라고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60년대에 다 (해외로) 나가버리고 그냥 우린 다른 마을처럼 살았지. 회사 다니고, 장사도 하고….” 옆에 있던 다른 노인은 “인천에서 상권은 중국인이 장악했었고 일제강점기에 대해서는 더 말해 뭐하나…”라며 탐탁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시큰둥하던 문할머니가 칭찬할 것이 있다고 했다. 얼마 전 차이나타운에 개업한 한 중국인이 매달 노인들을 초청해 음식을 대접한다는 것. “옛날엔 장사만 할라고 하더니 요즘엔 이렇게 좋은 사람들도 있어, 세상이 바뀌긴 했나 봐.” 해방 이후 중국인들이 빠져나가면서 쇠락했던 차이나타운은 최근 다시 부흥하고 있다. 근현대문화의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고 차이나타운이 부활하면서 대한민국 최초의 짜장면 발상지로 알려졌다. 2002년 35만 명에 불과하던 관광객이 2006년엔 67만5천 명으로 늘어나더니 최근에 주말이면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게다가 중국과 이어지는 인천항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관문 인천국제공항까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함께한 인천은 세계로 뻗어가는 발판이 되고 있다.
출처:(소읍기행, 이다일, 경향신문)
2024-09-07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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