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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묘(素描)
박 완 서
별채의 내 방 창에서 시선을 아래로 빗금으로 내리꽂으면 안채의 밝고 넓은 거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안채는 남향이었고 별채는 안채에서 기역자로 꺾인 서향이었다. 별채는 단층이고 안채는 이층이었지만 별채가 마당에 본디부터 있던 암반 위에 신축한 거여서 안채의 이층하고 높이가 같았다. 별채가 들어서기
전의 암반 위엔 운치 있게 자란 노송이 한 그루 독야청청, 신식양옥의 이마에 드리워져 고풍스러운 기품을 더해줬다고 했다.
내가 이 집의 외며느리로 들어오기 전 시부모님은 아들 며느리를 이층을 쓰게 하느냐 별채를 지어서 뚝 떼어내느냐로 많이 고심한 모양이었다. ‘젊은것들 저희끼리 제멋대로 자유롭게’ 살아보도록 별채를 지어 내보내자는 데는 두 분 다 이의가 없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암반 위의 소나무를 베어야 한다는 게 차마 못할 노릇이었다고 했다. 결국 어떤 경험 많은 정원사가 선뜻 나서서 그 노송의 자태와 목숨을 조금도 다치지 않고 마당으로 옮겨 심어줄 것을 장담해서 별채의 신축은 이루어졌다.
지금도 이백 평 가까운 정원 한 귀퉁이에 그 노송이 서 있지만 옮겨 심자마자 죽었는지 잎은 갈색으로 타들어가고 가장귀는 삭정이가 된 노송은 기품은커녕 괴기스러웠다. 아름다운 잔디와, 값비싼 정원수와, 기암과 괴석으로 운치 있게 꾸민 정원에 암만해도 안 어울리는 그 고사목(枯死木)을 시어머니는 베어 없앨 척도 안 했다. 시어머니는 오는 손님마다 붙들고 그 죽은 노송에 대해 이야기하길 즐겼다.
그것이 살아 있을 적엔 얼마나 정정하고 기품 있었던가를, 풍류를 알고 나무를 볼 줄 아는 부자들이 보통 사람의 상식으론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싼 값을 부르며 그 나무를 탐낸 적이 얼마나 여러 번 있었던가를. 또한 그 대지를 살 적에 남들은 흠을 잡고 외면한, 평지에 돌출한 암반과 그 위의 노송에 한눈에 반한 당신의 안목이 그런 유혹을 얼마나 가볍게 물리쳤던가를. 그 다음에 한바탕 장탄식을 뽑고 나서야 결론에 도달했다. 결론은 ‘젊은것들 저희끼리 제멋대로 자유롭게’ 살게 하기 위해 당신이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던 걸 희생했나 하는 거였다. 그러니까 그 고사목은 그 생생한 희생물이 되어서 ‘젊은것들 저희끼리 제멋대로 자유롭게’ 사는 생활을 증거하면서 오래오래 거기 서 있어야만 했다. 시어머니의 이런 고통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증언을 들은 사람들 중 아무도 이 넓으나 넓은 세상, 하고많은 집들 중에 ‘젊은 것들 저희끼리만 제멋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터전이 왜 하필 그렇게 값비싼 희생을 치러야 하는 암반 위의 여남은 평이어야 하나 하는 의문을 나타내지 않았다. 어쩌면 단 한 사람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으니까 그것은 저절로 금지된 의문이 되어 나 홀로 의심하기가 두려웠다.
나는 수시로 안채 이층과 기역자를 이루면서 꼬부라진 별채의 ‘젊은것들 우리끼리만 제멋대로 자유롭게’ 살라고 허락된 내 방창에서 아래층 거실까지 시선의 빗금을 긋고 그 길이를 내 자유의 길이로 삼았다. 정원에는 고사목 외에도 많은 관상목과 기화요초가 어우러져 무성 했지만 나의 방과 시부모님의 거실을 잇는 빗금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회할 필요 없이 곧장 뻗은 직선은 두 점 사이를 가장 짧게 했고 나에게 허락된 자유의 길이도 그만큼 인색한 셈이었다. 나는 자주자주 결코 늘어날 리 없는 빗금의 길이를 재느라 헛되고 헛되이 시간을 보냈다.
정남향의 안채 거실의 밝고 넓고 유리창은 늘 티끌만한 얼룩한 점 없이 반짝거렸다. 그 유리창가를 온통 아프리칸 바이올렛의 시렁이 차지하고 있었다. 모양도 빛깔도 가지각색의 바이올렛은 휴면기도 없이 사시장철 꽃을 피웠다. 나는 아직 어떤 애호가네 집에서건 화원에서건 심지어는 바이올렛 전시회에서조차 그렇게 화려하게 다발로 핀 꽃을 본 적이 없다. 신접살림 난 친구들이 창가에 놓고 한두 분(盆) 기르는 그 꽃은 대개 가련하다 못해 비실비실했지만 시어머니가 기르는 것은 전혀 딴 종류처럼 사치스럽고 극성맞았다. 가장자리에 프릴까지 달고, 철쭉꽃만한 크기로 무리져 피어난 진분홍 바이올렛 같은 건 요괴롭다 못해 독기까지 느껴졌다.
그런 화분이 거실 창가에서 안방 창가로 이어져 자그마치 오백 분이 넘었다. 시어머니는 칠백 분이라고 했지만 내 창가에서 내려다보면서 하는 나의 셈은 항상 오백을 고비로 헷갈리고 지쳤다.
당연한 얘기지만 내 방 창으로 보는 것보다 들어가서 직접 보면 더욱 장관이었다. 손님들마다 자지러진 탄성을 질렀다. 처음 오는 손님 아니라 두 번 세 번 보는 손님도 우선 탄성 먼저 지르게 돼 있었다. 그러고 나선 으레 그렇게 탐스러운 꽃을 사시장철 키울 수 있는 비결을 물어보았다. 시어머니는 그런 물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망설이지 않고 자못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사랑이라고.
사랑을 듬뿍 추면 그렇게 예쁜 꽃을 피운다는 시어머니의 대답에 손님들은 더욱 감동하는 것 같았다. 오오라, 고개를 크게 끄덕이기도 하고 자기의 사랑의 부피를 돌이켜보듯이 심각해지기도 하고 더러는 사랑에 자신이 없는지 부끄럼을 타기도 했다. 나라고 사랑으로 그런 꽃을 못 피울까보냐고 사랑에 자신이 만만한 사람은 화분을 한두 개 나누어주기를 간청하기도 했다. 시어머니는 당신이 만든 그런 사랑의 신도에게 매우 후하게 굴었다. 그 거대한 꽃시렁의 해가 덜 드는 아래쪽 단은, 뿌리를 내리기 위한 잎이나, 뿌리가 내려 새잎이 대여섯 장쯤 되는 어린 포기들의 투명한 인큐베이터 차지였다. 시어머니는 그 어린 포기 중에서 그중 될 성부른 걸 골라 흰 플라스틱 화분에 정성스럽게 옮겨심어주면서 ‘루비’ 니 ‘데라웨이’ 니 ‘자이언트 버터플라이’ 니 하는 그 꽃의 문벌을 일러주고 나서 또 한바탕 사랑 설교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랑의 평신도들은 그 어린 포기에서 꽃을 보기는커녕 살리지도 못했다. 이래저래 시어머니는 사랑의 절대적인 교주였다. 그러나 나는 그 꽃이 그렇게 기를 쓰고 피어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알고 있었다. 화원에서 파는 엉성한 꽃시렁이 아니라 실내의 가구와 잘 조화되도록 설계해서 맞춘 튼튼한 목제 꽃시렁의 맨 밑의 단은 문이 달린 수납장이었다. 그 수납장 속엔 바이올렛 재배를 위한 온갖 신기하고 세련된 도구와 비료와 약품이 들어 있었다. 광도와 습도를 함께 측정할 수 있는 광습도 측정계를 비롯해서 비실비실한 포기를 밑에 놓고 불을 켜주면 상태가 회복되고 꽃을 빨리 피게 하는 촉진등, 각종 분무기, 물조리개, 번식용 케이스, 잎받침대, 흙삽, 그리고 어린 포기를 키우기 위한 인큐베이터까지 있었다. 그 밖에 용토를 배합하기 위한 ‘피이트 모니’ 니 ‘비너스 라이트’ 니 하는 어려운 서양 이름을 딴 재료들이 베개만한 비닐봉지에 들어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추수가 끝난 부농의 곳간의 쌀가마처럼 욕심스럽게 차곡차곡 쟁여져 있었다. 또한 그 많은 바이올렛이 한시도 쉬지 못하고 사시장철 꽃을 피우게 하는 비결엔 최신의 도구와 적절한 용토만이 다가 아니었다. 그 장 속엔 외국에서 수입한 갖가지 비료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싸라기 같은 입자로부터 막대기같이 생긴 거, 정제 분말, 액체, 유탁제 등 갖가지 신기한 영양제를 갖추어놓고 적절한 때 적절한 양을 주는 걸 보면 시비라기보다는 투약이었다. 사랑 이외의 비결을 한 번도 입 밖에 낸 일이 없기 때문일까, 시어머니가 투약하는 모습은 남의 눈을 꺼리듯이 비밀스럽고도 잔혹해 보였다. 나는 무심히 엿보다가도 또 독을 치는군, 하면서 전율할 적이 있었다. 잠시의 나태나 휴면도 허용하지 않고 만개(滿開)의 지속만을 강요하는 약이 독약이 아니고 무엇이랴. 나는 시어머니의 사량의 효험은 믿지 않았지만 독의 효과는 믿었다. 아침마다 그 많은 바이올렛이 일제히 살아 있기와 꽃 피기를 그만두고 폭삭 썩어 문드러져 있기를 기대했지만 시어머니의 유리벽은 허구한 날 난만한 꽃밭이었다. 매번 기대에 어긋나자 나는 그까짓 허구한 날 만개한 꽃이라면 플라스틱 조화와 다를 게 없다고 무시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사랑의 설교만은 그렇게 둔감해지지가 않았다. 처음 들을 땐 그냥 가슴이 쓰렸지만 사랑이란 말이 마치 점액질의 고약한 오물이 되어 나의 고운 살갗에 묻어나는 것 같아 펄쩍펄쩍 뛰고 싶게 기분이 나빴다.
시어머니가 거실에서 하는 일은 바이올렛 사랑하는 것 말고도 전화 받기가 있었다. 잘 닦아놓은 은촉대처럼 교만하게 생긴 전화기는 폭신한 안락의자 옆에 있는데도 시어머니는 전화를 받아봐서 이야기가 길어질 상대 같으면 잠깐 기다리게 해놓고는 보조의자를 갖다놓았다. 그리고 안락의자에 편안히 파묻혀 보조의자 위로 발을 뻗고 나서 다시 전화를 받았다. 통화는 오래오래 계속됐다. 가끔 주먹으로 무릎이나 어깨를 치기도 했고, 가정부에게 마실 것을 갖다달라고 손짓을 하기도 했다. 통화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볼일이 있어 거실에 들러도 통화 내용을 짐작할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시어머니의 목소리는 간지럽도록 낮았고, 남이 들어서 거북한 소리는 일본말로 했다. “아노꼬가 하잇다요.” 시어머니가 우리말을 일본말로 바꿀 때 시작하는 말이었다. 그분의 통화 내용을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의 상관없이 길고 긴 통화를 바라다보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그 동안에 꼭 어디서 애타게 나를 찾는 이가 있어 계속되는 통화중 신호 때문에 쓸쓸한 좌절감을 맛볼지도 모른단 생각은 어쩌면 몽상일 수도 있었다. 그것보다 훨씬 생생한 현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게 방 안에 충만하는 정보였다. 증권 시세, 사채시장 정보, 부동산 전망, 누구라면 다 알만한 댁 자녀의 결혼 예물, 예단 소식, 그리고 며느리 다루는 법 등의 정보가 눈에 보이진 않지만 방 안에 가득 충만한 걸 나는 피부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분의 정보욕은 한이 없었다. 걸신들린 것처럼 탐해도 탐해도 충족을 모르고, 늘 아쉬워했다. 드물게 정보에 접할 수 없는 날은 불안해서 안절부절을 못했고, 그 좋은 살집이 다 초췌해졌다. 그런 날은 으레 외출을 해서 생기를 회복해서 돌아왔다. 그분에게 있어선 정보는 정신의 공기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 그런지 그분의 정보에 대한 탐욕은 좀 도가 지나쳤다. 예의도 염치도 없었다. 이를테면 어쩌다 나한테 오는 전화도 엿들었다. 별채의 내 방으로 연결해 주고 나서도 수화기를 계속 귀에 대고 있는 그분의 긴장한 표정을 나는 전화를 받으면서도 빤히 바라볼 수가 있었다. 안채의 거실 유리창과 별채의 내 방 유리창을 잇는 빗금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까. 그분의 예민한 청각에 의해 일단 걸러지고 나서 나에게 도달한 정보는 맹물보다도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분처럼 정보에 걸신들리지 않았으므로 그건 그닥 고통스럽지 않았다. 정작 고통스러운 것은 외부를 향해 자신을 표현할 수없는 거였다. 그분의 전화기가 외부와 나 사이를 둑처럼 차단하고 있는 걸 빤히 바라보는 위치에서 나는 거의 절망적인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외부에서 가장 궁금해 하는 것도 그랬지만, 내가 외부에 대해 표현하고 싶은 것도 내가 결혼해서 새롭게 맺은 관계에 대해서였다. 남편과, 시부모와, 시댁 식모와, 그리고 시댁 분위기와의 관계를 외부에서 궁금해하는 것만큼 나도 표현해보고 싶었다. 표현함으로써 그 관계 속에서의 나의 위치를 이해하고 확보하고 싶었다. 그러나 표현의 길은 완강하게 막혀 있었다. 이를테면 “시집살이가 어떠니?”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가장 흉허물 없는 친구에게도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나타내지 못했다.
“얘는, 시집살이랄 것도 없어. 우리끼리 멋대로 살아. 시어른 들이 워낙 이해성이 많은 신식 분들이시거든. 우리의 프라이버시는 물론 당신들의 프라이버시를 위해서도 우리를 당신들의 집에 들이시지도 않았다면 말 다 했잖아. 우린 완전 별채에서 살아. 별천지야. 그래그래, 꿀과 참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별천지란다, 요것아.”
이렇게 나의 별채는 늘 닫힌 세계였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거실엔 늘 살아 있는 정보가 충만해 있다면 나의 방엔 돌파구 없는 정보가 고여서 썩어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놓인 이런 상황에 대해 늘 누구에겐가 구원을 청해야 할 것처럼 느꼈지만 그러기 위해선 정직해져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시어머니의 도청이 없을지라도, 설사 밖에서 직접 동기간이나 친구를 만날지라도, 나는 내가 자유스럽고 행복하다는 거짓에서 못 벗어났다. 나는 이미 누구보다도 자유스럽고 행복하게 사는 걸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 소문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나의 틀이었다.
안채와 별채를 잇는 것은 언제나 궁금할 때 곧장 닿을 수 있는 서로의 눈길만이 아니었다. 그분은 그분이 손님을 맞을 때 앉는 소파 옆구리에 비상벨의 단추를 달아놓고 있었다. 손님이 있을 때마다 별채의 내 방으로 신호를 보냈다. 한 번 울리면 한복을 차려입고 잎차를 내올 것, 두 번 울리면 홈웨어를 입고 커피를 내올 것, 세 번 울리면 슬그머니 점심 준비를 할 것 등등, 그분이 정해놓은 암호는 예닐곱 가지나 됐다.
“내가 며느리를 얼마나 잘 보았나 친구들이나 일가친척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야. 그렇지만 줄창이야 그러겠니. 신혼 시절 한때지. 이런 일도 지나놓고 보면 그땐 참 호강했다 싶을 테니 너무 번거롭게 생각하지 말거라.”
그분의 이런 말씀의 거짓 없음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내가 한복으로 곱게 갈아입고, 소반에 백자로 된 우아한 잎차 도구를 받쳐들고 나가면 거기엔 교양과 품위가 넘치는 손님이 와 있게 마련이었쿄 시어머니는 순전히 나를 추켜세우기 위해 거짓말을 잘도 했다.
“아유, 글쎄 우리 며느리가 이렇게 엽엽하답니다. 못 하는 게 없는 가정부가 있건만도 나한테 오시는 손님 시중만은 꼭 제가 손수 들어야 할 줄 알거든요. 그뿐인가요. 이애가 또 어떻게 능통한지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어떻게 대접해야 할 손님인지 알아서 척척 하거든요. 보세요, 사장님하고 사모님이 커피 안 하시는 거 알고 잎차로 내오지 않습니까. 마음이 그러하거든 자태라도 좀 두루뭉실했으면 흉을 잡을 텐데 한복 입은 저 맵시 좀 보십시오.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단 소리가 아마 며느리 본 내 마음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손님들 앞에서 하는, 며느리한테 홀딱 반한 시어머니의 연기는 일품이었다. 내가 그분의 넘치는 자애로움을 연기로밖에 여길 수 없는 건 손님들이 가고 나서 돌변하는 그분의 태도 때문이었다.
“수고했다. 잠시 잠깐 얼굴 내비치는 것도 시집살이라고 그렇게 쌀쌀맞고 정 안 붙게 굴 게 뭐냐? 다 저한테 이로우라고 시키는 노릇이건만. 그나마의 시집살이도 싫다면 안 시키마. 다시는 안 시키면 될 게 아니냐.”
이렇게 억울한 말씀을 했다. 나는 그분의 이런 특이한 며느리 다루는 법도 그분에게 수시로 흘러들어오는 정보에서 얻어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묵 둘 바를 몰랐다. 내가 비위 맞춰야 할 대상은 그분의 성미가 아니라, 다양하고 변덕스럽기 짝이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최신의 정보였기 때문이다. 뉘 집에선 며느리 버릇을 어떻게 고쳐놓았다든가, 아무개는 콧대 높은 며느리 기를 어떻게 꺾었다든가 하는 새로운 정보는 즉각 그분을 긴장시켰고 나를 보는 눈빛을 바꾸었다.
안채와 별채를 기역자로 연결하는 지붕 달린 다리 밑은 골목이었다. 나는 안채에 손님이 계실 때가 아니라도 아침 저녁 식사 때는 그 다리를 건너 안채 이층을 지나서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점심은 별채의 냉장고에 있는 과일이나 우유 따위로 간단하게 때웠다. 다리 밑 골목은 좌우가 한쪽은 안채의 벽, 한쪽은 별채가 올라앉은 바위의 가파른 단애(斷崖)로 되어 있었다. 바위의 경사 때문에 평지에서의 폭은 더욱 좁아져서 그저 두 사람 정도가 엇갈릴 만했다. 그 좁은 골목은 안채의 뒤란으로 통했고, 뒤란엔 뒷집과의 경계인 회색 블록담이 둘러쳐져 있었다.
퇴직하고 집 안에서 안락한 노후를 보내는 시아버님의 어쩌다 하시는 외출은 각별히 화려했다. 줄이 선 감색 바지에 크림색 상의라는 눈에 띄는 콤비 차림에다, 분홍이나 옥색 계통의 비단 와이셔츠에, 훨씬 더 대담한 색상의 넥타이를 매고, 상의 윗주머니엔 선글라스가 꽂혀 있지 않으면 넥타이와 세트로 된 손수건이 호랑나비처럼 현란하게 나풀대는 걸 보면 퇴직한 은행가라기보다는 아직도 현역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는 늙은 배우나 가수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그런 외출은 어쩌다나 있는 일이고 매일 한 번씩 하는 외출이 더욱 볼만했다. 유명 상표가 붙은 흰 농구화에 같은 상표의 흰 반스타킹을 신고, 흰 반바지에 역시 가슴에 상표가 붙은 티셔츠를 입고 정구채를 들고 현관을 나서서 마당의 우거진 푸르름 사이를 지나가는 그분의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우쭐대는 어깨가 젊은이보다 더욱 발랄해 보였다. 그렇게 폼 잡고 나가지만 번번이 동네 한 바퀴 돌 만큼의 시간만 지나면 되돌아왔다. 처음에 나는 약속한 파트너가 무슨 일이 생겨 안 나와 그분이 허탕을 쳤겠거니 했다. 그러나 번번이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치 어른이 때때옷을 입혀 내보내니까 나가서 한 바퀴 돌긴 돌았으되 아무도 거들떠봐주지 않아 허전해진 아이모양 풀이 죽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안채와 별채를 잇는 다리 밑의 골목으로 들어가 뒤란을 향해 공을 가볍게 쳤다. 공이 뒷집의 블록담을 맞고 되돌아오면 받아치기를 오래 계속했다.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밖에서 정구를 치는 일이 허탕을 치게 되니까 집에서 그런 방법으로 몸이라도 푸는 게 이상할 건 조금도 없었다. 골목 속이지만 라켓을 휘두르기에 불편함은 없어 보였고 되돌아 온 공이 멀리 빗나갈 수 없다는 이점도 있었다. 그러나 마당 안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에서 공치기를 하기엔 아래위로 화려한 상표가 붙은 새하얀 운동복 차림이 아까워 보였다. 혼자 공을 치더라도 넓으나 넓은 잔디에서 쳤으면 얼마나 보기 좋을까 싶었다. 혼자 치는 공치기 놀음에 지쳤는지 다리 밑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분의 모습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집에 들어가 쉴 수도 있으련만 다리 밑에서 넋 나간 사람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 있기를 잘했다. 그럴 땐 마치 막막한 들판에서 비를 만나, 사람 없는 원두막 밑에서 비를 긋는 올데갈데없는 노인네처럼 후줄근하고 청승맞아 보였다. 아무리 화창한 날이라도 다리 밑이 우중충해서 그런지, 그분의 어깨와 이마엔 두터운 구름 그림자와 눅눅한 습기가 서려 보였다.
그런 시아버지에게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친화감을 느꼈다. 그분의 화사한 운동복도 바람둥이 풍의 콤비도 그분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시어머니의 농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시어머니의 한 번 벨에 한복을 입고, 두 번 벨에 홈웨어를 입듯이 말이다. 같은 꼭두각시 신세끼리 마음만 통하면 반란을 꾀할 수도 있으련만. 그러나 무슨 수로 마음을 통할 수가 있을까. 나는 시아버지와 한 번도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버님, 진지 잡수셔요 아버님, 이런 내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오냐 소리도 했지만 서로의 의사가 통하는 대화를 한 적은 없었다. 나타낼 수 없는 친화감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렇다고 시아버지가 나에게 특별히 데면데면하다는 유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분은 누구하고도 말이 없었다. 식탁에서 꼭 필요한 말은 시어머니가 대신했다. 아버님은 닭고기를 안 잡수신다든가, 이 국은 아버님한테는 짤 것 같다든가, 아버님은 젓갈 든 김치를 싫어한다든가, 이런 잔소리를 시어머니가 대신했지만 그것조차 믿을 만한 그분의 의사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시어머니가 부재중일 때, 그분의 식욕은 다만 왕성했다. 당뇨기가 있으니까 식사의 양을 조절해서 드려야 한다고 시어머니로부터 들어둔 사전 지식만 아니었다면 그분이 평소 배까지 주린다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집엔 손님이 잦은 편이었지만 거의 다 시어머니 손님이었고 시아버지가 함께 어울리는 적은 없었다. 손님들은 시아버지의 존재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고 시아버지 역시 이층으로 재빨리 숨어버리는 게 잘 훈련된 것처럼 감쪽같았다. 손님이 온종일 있을 때는 그분도 온종일 이층에서 꼼짝도 안 했다. 나는 몰래 이층으로 식사를 나르면서 그분과 대화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단 기대로 가슴을 울렁거리곤 했다. 이층은 서재로 꾸며져 있었지만 그분이 책을 읽는 걸 본 적은 없었다. 아래층에 손님이 있을 때 그분은 이층에서 혼자서 소주를 마셨다. 소주를 마시다가 나를 보면 얼른 소주병을 책상 밑으로 감추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독한 소주 냄새와 새하얀 의치는 그분과 말을 하고 싶은 나의 소망을 비웃는 것 같았다. 서재의 장식장에는 양주병이 즐비하게 장식돼 있었으나, 그분이 마시는 건 언제나 소주였다. 콤비로 차려입고 외출했다 돌아오는 그분은 으레 서너 종류의 일간신문을 돌돌 말아 옆구리에 끼고 있었는데 그 안에 소주병이 들어 있다는 걸 안 건 시집살이를 서너 달 하고 나서였다. 그렇게 숨겨서 들여온 소주병을 서재의 술 두꺼운 책뚜껑 속이나 책 뒤에 숨겨두고 수시로 조금씩 마신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분에게서 늘 풍기는 소주 냄새는 마치 역한 체취처럼 가까워지고 싶은 나의 마음을 밀어냈다.
그러나 손톱을 뾰족하게 길러 진줏빛으로 매니큐어한 도툼한 손으로 시어머니가 당신의 코 앞을 부채질하면서,
“아유 냄새, 또 어디서 홀짝 하셨구려. 아유 창피해, 아유 지겨워. 며느리 부끄러운 줄이라도 좀 아슈.”
라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 시아버지가 그런 방법으로나마 마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속마음을 지키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분의 속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분의 속마음은 텅 비어 있을 수도, 아예 있지도 않을 수도 있었다.
어렴풋이 때로는 역하게 소주 냄새를 풍기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분은 거의 취한 티를 안 냈다. 말이 없으니까 주정도 없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취했다 하면 왕창 취했다. 물론 집 안에서가 아니고 밖으로부터 취해 들어오는데 골목 밖으로부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 동안의 실어증을 한꺼번에 만회하기 위해 들입다 마신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웃고 떠들었다. 그러나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시어머니가 재빨리 그분을 안으로 끌어들이고 주정 부리는 소리보다 훨씬 더 크게 전축을 틀어놓기 때문이다. 집의 뿌리가 다 들썩들썩할 것처럼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오케스트라가 집어삼킨 그분의 주정은 성대를 제거당한 맹수의 울부짖음보다도 더 비참하고 헛돼 보였다. 시어머니는 그분의 벼르고 벼른 주정을 그렇게 간단히 무화시켜놓은 뒤, 그 어느 때보다도 화평스럽고 품위 있게 바이올렛 화분을 돌보는 것이었다.
시 아버지의 주정을 통해 그분의 내면세계를 이해해보려던 나의 기대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새롭게 짚이는 게 있었다. 어렴풋하지만 그분이 평소에 왜 말을 못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분의 말을 한마디도 되돌려주지 않고 번번이 집어삼키기만 했을 시어머니에게 격렬한 적의를 느꼈다. 이래저래 마음 붙일 곳은 시 아버지밖에 없었다. 말이 통하기는 단념 했지만 마음을 붙인다는 건 일방적으로도 할 수 있는 편안한 기쁨이었다.
온종일 회색 블록담을 상대로 공을 치는 그분의 뒷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연민, 청천하늘에 비를 긋듯이 피해 어둑시근한 다리 밑에 마냥 서 있는 그분에게서 피어오르는 눅눅하고 막막한 느낌에 대한 공감, 그런 것들은 기쁨이라기보다는 비애에 가까운 거였지만 시집에서의 유일한 나의 살맛이었다. 나의 방 창에서 다리 밑까지는 소주 냄새를 안 맡고도 그분을 곰곰이 바라볼 수 있는 최적의 거리였다.
내 창을 통해 곧바로 바라볼 수 있는 가장 화사한 양지에서 시어머니는 항상 자신 있게 움직이고 말을 많이 했고, 정반대의 가장 음습한 음지에서 시아버지는 움직일 때도 가만히 있을 때도, 목적도 자신도 없어 보였고 말이 없었다.
나는 이런 시아버지의 모습을 곰곰이 바라보면서 늘 무언가 생각날 듯 말 듯하다가 말았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 어디서 본 듯한 눈빛, 어디서 본 듯한 막막한 표정이었다. 언제 어디서 보았을까? 언제 어디서긴?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도 바로 저 자리에서 보았을 뿐이야. 요즈음의 나에겐 새로운 경험이란 없고 반복이 있을 뿐이니까. 나는 십 년쯤 시집살이를 하고 난 것처럼 똑같은 일상의 반복을 이렇게 체념하면서 무언가 생각날 듯 날 듯한 느낌을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나야 할 것을 아주 잠재우진 못했다. 어느 날, 아! 하고 가슴의 통증을 느낄 만큼 느닷없이 그게 생각이 나고야 말았다. 시아버지의 모습과 표정과 몸짓 속엔 지울 수 없이 극명하게 남편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물려주어도 지워지거나 덜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핏줄의 특징을 통해 나는 남편의 모습뿐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나의 아이의 모습까지를 내다보고 있었다. 실상 나는 아직 아이를 갖기 전이었다. 아이를 갖게 될까봐 다달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중이었다. 왜 아이를 가질까봐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아울러서 알 것 같았다. 내가 다만 연민과 비애로써만 바라볼 수 있는 특징들이 마냥 이어지고 퍼지는 게 싫었던 것이다.
안 돼, 나는 격렬하게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아버지가 지금대로 살아도 안 되고 내가 그 핏줄의 특징을 잇고 퍼뜨리는 일을 해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두 가지 일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이 뒤죽박죽이 되어 나를 혼란시켰다. 나는 마치 혁명을 꿈꾸듯이 비밀스러운 정열로 시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분은 비록 살아 움직이고 있었지만 시어머니가 오래 전에 죽여서 행복한 노인의 표본을 만들어놓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분을 달라지게 한다는 것은 표본이 된 지 십 년이 넘는 나비를 푸드덕대게 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혁명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혁명을 믿을 수 있어야만 앞으로 올 내 아이를 두려움 없이 맞이
할 수 있을 테니까.
우선 시아버지를 자발적으로 다리 밑에서 잔디밭으로 나오게 해야 했다. 청천하늘을 긋는 게 아니라 거침없이 우러르게 해야 했다. 마침 길에서 파는 혼자서 공치기 할 수 있는 도구를 발견했다. 빨간 비닐가방 속에 무거운 추가 들어 있고 밖에는 끈 달린 공이 달려 있어 적당한 거리에서 혼자서도 얼마든지 공치기를 즐길 수가 있게 되어 있었다. 도시의 한복판 아스팔트 길 위에서 그것을 하고 있는 건 군중 속의 고독을 연출하고 있는 것처럼 보기 흉했지만 햇볕이 찬란한 내 집 푸른 잔디 위에서 옷 잘 입은 노인이 그걸로 혼자서 공치기를 즐긴다면 얼마나 보기 좋을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걸 사다가 시아버지에게 선물하기 전에 먼저 잔디밭 한가운데서 시범을 보였다. 그러나 정작 그분
은 한번 해보기도 전에 시어머니에게 들켰고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첫째 잔디가 망가질 테고, 둘째는 한길에서 빤히 들여다뵈는 잔디밭에서 노인이 혼자서 온종일 공치기를 하면 남 보기에 얼마나 청승맞아 보이겠느냐는 거였다. 청승맞기야 굴다리 밑이 훨씬 더하겠지만 거기는 행인의 시선이 안 미쳤다.
“그럼 제가 아버님하고 놀아드리겠어요. 저도 정구를 잘 치지는 못하지만 아버님 상대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그 소리를 하면서 비로소 하고 싶은 소리를 해보는 쾌감을 느꼈다.
“아서라, 효부 노릇 할 생각 반갑지 않으니 네 남편 걱정이나 해, 이 한심한 것아. 참말로 큰일이다, 네 남편 일이. 돈을 처들여서 결혼까지 시켜줘도 달라지는 게 조금이라도 있어야지. 남편 잘되고 못되고는 계집 하기에 달렸다는데 너희들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무심하냐. 남 다 하는 성공이 부럽지도 않아? 눈꼴사납지도 않아? 이 한심 한 것아.”
내가 자초한 시어머니의 화살은 내 허점을 정통으로 찔렀다. 모욕당한 자존심이 아프고 쓰렸다.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시어머니보다도 시아버지보다도 남편이었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결혼 전 중매쟁이를 통해 들은 거가 전부였고 중매쟁이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그는 명문 중고등학교와 명문 법대 출신이었고, 군대를 갔다 왔고, 고등고시에 삼 년을 내리 실패하자 법관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고 대학원에 다니면서 유학 준비를 하고 있는 점잖은 집 외아들이고 집안 형편은 대대로 물려내려오는 재산에다 적지 않은 퇴직금을 주로 시어머니 될 분이 잘 굴려 알부자로 소문나 있고, 시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 사람, 부처님 가운데토막 등으로 불릴 만큼 인자한 분이라고 했다. 시집 와보니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때때로 남편한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어디 내놓아도 조건만 버젓한 게 아니라 인물도 호남 축에 들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에겐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자신의 의지라는 게 없었다. 학벌이 좋고, 대학원까지 다니니까 아는 것은 많을지 모르지만 자기가 뭘 원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것까지 중매쟁이가 알고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알아내야 할 문제였지만 결혼 전에 나는 그가 유학을 가려 한다는 데 너무 솔깃했었다. 나는 이 땅에서 특별히 고통받거나, 원한 맺힌 일이 없건만 이 땅을 면해보는 게 소원이었다. 이 땅이 젊은이를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그 옹색한 사고의 틀을 일단 한번 면해보고 싶었다. 그걸 면하는 방편으로 그런 사고에 편승해도 상관없다고까지 생각했다. 가장 구역질나는 걸 면하기 위해 가장 구역질 나는 걸 이용할 수도 있다는 논리에 의해 나는 이 땅에 팽배한 정략결혼 풍습을 이용해 이 땅을 면할 작정이었고, 일단 비행기만 떴다 하면 그 더러운 것에 제일 먼저 침을 뱉어줄 작정이었다. 그가 비행기 못 탈 이유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보다 훨씬 못한 대학 나오고도 장학금 타서 유학 가는데, 그 학벌에다 자비로라도 우선 보내놓고 볼 각오를 부모네들이 하고 있다니 유학은 떼어놓은 당상인 줄 알았다. 나는 그때 너무 이 땅을 일단 떠보는 일에 급급했었다.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자주 만날 겨를도 없이 결혼 먼저 하고 나서 그가 전혀 유학 갈 의사가 없다는 중대한 결함을 발견했다.
유학뿐 아니라 고시 볼 뜻도 전혀 없었다고 했다. 고시뿐 아니라 법대 갈 뜻도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뒷바라지를 잘해주니까 공부를 잘했고, 어머니가 원하니까 법대를 갔고, 어머니가 법대 다니는 걸 자랑스럽게 아니까 조금도 마음에 없는 공부를 그럭지럭 할 수가 있었고, 어머니가 고시 붙기를 소원하니까 삼 년 간 고시공부 하는 척은 할 수 있었지만 그때부턴 이미 스스로의 의지 없이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단계였다. 삼 년 내리 고시를 실패하자 자존심이 몹시 상한 어머니는 유학 가서 박사 따오는 걸로 새로운 희망을 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유학 갈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 그는 미국이란 나라가 박사가 오렌지나무의 오렌지처럼 주렁주렁 달린 고장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만큼은 똑똑했다. 그는 거의 천진한 호기심으로 판검사 다음에 박사, 박사 다음엔 또 무슨 희망을 어머니가 그에게 걸까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가 바라는 건 어머니의 새로운 희망이 그에게도 희망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아니라, 우선 저절로 박사를 면할 수 있는 거였다. 박사 때문에 저절로 판검사를 면했듯이.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기 때문에 성취욕도 없는 게 당연했다. 한 번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려고 애써본 경험이 없는 그에게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무력감은 내가 원하는 걸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도 일맥상통해서 나의 나날을 헤어날 수 없이 침체케 했다. 그러나 시어머니한테 한심하단 소리까지 듣자 그 침체의 늪에서 꿈틀하는 안간힘이 생겼다. 한심하단 말보다 더 굴욕스러웠던 것은 불쌍해 마지않던 시어머니의 눈빛이었다. 좀처럼 남을 불쌍해할 줄 모르는 시어머니였다.
나는 간절하게 남편과 마음을 열어놓고 얘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양말이 어디 있냐든가, 배가 고프다든가, 커피 한잔 끓여달라든가 하는 용건이 있는 말 외의 말을 남편은 거의 안 했다. 남편의 마음을 모르겠으니까 일 년 가까이 살 대고 살았어도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을 적이 있었다. 오죽해야 시아버지 얼굴에 남아 있는 낯익은 걸 남편의 모습이라고 깨닫기까지 며칠씩 걸렸겠는가. 심지어는 같이 있을 때도 자기 얼굴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을 뭘로 가렸다든가, 밝은 데를 싫어한다든가 그런 얘기가 아니라, 마음을 안 나타내니까 표정을 종잡을 수가 없었고 흡사 일방적인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서로가 그런 느낌을 극복하고 새롭게 만나지길 바랐다. 그는 늘 바빴다. 아직은 유학 준비중으로 돼 있고 연내로 석사학위 논문도 써야 하니까 저녁 늦도록 도서관에 있다가 와야 명분이 서는 건 이해가 갔다. 그러나 저녁 먹고 나서의 오붓한 시간을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그는 부리나케 또 외출을 했다.
“뿅뿅 한 판 하고 올게, 딱 한 판만.”
그러고 나가면 자정이 넘었다. 시어머니에게 한심하단 소리를 들은 날 밤도 나는 그를 붙들지 못했다. 나라고 전자오락이라는 걸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서른 살 먹은 대학원생을 그렇게 지속적으로 열중케 하는 마력이 어디 있는지까지 안다고 할 순 없었다.
삼자대면을 하리라. 나는 그 전자오락 기구가 살아 있는 사람인 것처럼 이렇게 벼르며 그의 단골집으로 달려갔다. 그의 단골집은 아랫동네 상가 지하에 있었고 기계들의 차가운 울부짖음 같은 전자음향을 계단 위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어둑시근한 실내였지만 나는 곧 그를 발견했다. 그는 갤러그 앞에 앉아 있었다.
“나 좀 봐요.”
나는 숨을 죽이고 나직하게 불렀다. 왠지 큰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나마 한 번밖에 못 불렀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고, 암만 크게 불러보아도 그의 의식을 나에게로 돌이킬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는 깊이 열중해 있었다. 그가 무엇에 열중해 있는 걸 보긴 처음이었다. 푸르스름한 불빛 속에 드러난 그의 옆얼굴은 흡사 시퍼런 날을 세운 한 자루 칼날처럼 섬뜩하고 예리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왼손은 단호하고 그의 오른손은 눈부셨다. 아아, 나는 그의 새로운 모습에 경탄했고 절망했다. 입 속이 깔깔하게 탔다. 그가 지혜와 힘과 경협과 감각을 다해 뭔가에 도달하고자 하는 모습은 일사불란하고 감동적이었지만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건 토플 점수가 아니라 십만, 이십만 하는 갤러그 점수였고, 그가 도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건 박사학위가 아니라 눈앞의 화면에 난무하는 파리떼 같은 우주 괴물이었다. 그의 무아의 경지를 깨뜨리려는 건, 그를 영원히 무아의 경지로 떠다미는 만용이 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전자오락실을 물러났다. 그러나 인조 맹수가 울부짖는 것처럼 기계적이면서도 야성적인 음향은 나의 뒤를 줄창 뒤쫓아오는 것 같았다. 헐레벌떡 별채로 쫓겨온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그 울부짖음에서 못 놓여났다. 인조 맹수가 도시의 골목을 횡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그 괴수가 횡행하는 거리에서. 그 인조 맹수들은 거리거리에서도 뿅뿅댔고, 내 머릿속에서도 뿅뿅댔다.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싱싱한 욕망을 느꼈다.
자정이 지났나보다. 그가 돌아오는 기척을 느꼈다. 안채의 문을 따주면서 이 한심한 것아, 하고 바라보았을 시어머니의 얼굴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가 말없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굴욕적인 시선에 그를 다시는 내맡기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은 제법 단호했다. 나는 그를 안았다. 그의 온몸이 끈적했다. 피투성이인 것처럼. 인조 짐승들이 일제히 야성의 짐승으로 돌변해서 그를 상처 냈다고 생각했다.
꿈과 현실이 행복하게 화합했다. 그는 피투성이였다. 그가 피투성이인 게 겁나지도 싫지도 않았다. 나는 그의 상처를 정성을 다해 애무하고 그의 피를 핥았다. 그의 싱싱한 상처와 더운 피가 나의 더운 피를 불러일으켰다. 그가 피투성이인 채 왕성하게 살아 있음이 고맙고 신기했다. 나는 그와 화합하면서 기적을 믿었다. 인조 짐승이 야성 짐승으로 살아나는 판에 무슨 일인들 못 일어날까 싶었다. 안채 사람과 별채 사람과의 관계도 문득 살아나 불화하고 아우성치면 얼마나 살맛날까 싶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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