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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者)와 부자(富者)
최근 들어 누가 문서(Luke-Acts)에 연구는 누가의 사회 정치적 또는 사회 경제적 관심을 탐구하는 데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경향의 한 면을 Richard J. Cassidy가 쓴 두 권의 누가문서 연구서의 제목에서 엿볼 수 있다.
먼저 나온 그의 누가복음 연구서의 제목은 『예수. 정치. 사회』 였고, 후에 그 책의 속편으로 나온 사도행전 연구서의 제목은 『사도행전에서의 사회와 정치』였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보다 사회적, 경제적 이슈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누가복음에는 “사회복음”,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 “여자들을 위한 복음” 이란 별명들이 붙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누가복음의 이런 특징에 대해, (김경진,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신 주님」, (서울: 한국성서학 연구소, 2000), 제 2, 7장을 참조). 예수께서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배고프고, 병들고, 죄인인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메시아적 언어로 그 자신을 선포(宣布)하고 있다. 이 전문은 ‘상황설정’, ‘가난한 자’, ‘복’에 대한 언급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어느 사회에서나 무시(無視) 받는 계층의 사람들이다. 가난이란 하나님의 의도한 삶에 충분히 충족되지 않은 상태의 사람이며, 스스로 자립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가난한 자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선포(宣布)는 이제 그의 눈을 들어 주린 자를 향하여 축복을 선포하는데 그 선포를 받는 주린 자들의 정의에 대해 놀랜드(Nolland)는 그들의 ‘가난’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 하며, 예수와 함께 동행(同行)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지켰던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였다.
마샬(H. Mashall)은 하나님의 요청을 바라는 경건한 사람들을 가난한 자의 부류에 포함 시켰다. 놀랜드(J. Nolland)는 현재에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가난한 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가난한 자는 물질적, 정신적으로 ‘가난’한 현실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관심은 ‘가난’한 자를 강조하는 것 같다. 또한 누가는 예수를 이사야의 예언의 완성으로 보았고, 가난한 자, 억눌린 자, 눈먼 자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메시야로 부각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이 부자가 아닌 가난한 자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샬(Marshall)은 마태복음이 누가복음의 표현에서 야기될 오해를 감소시키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누가만이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 편에서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 1장 44절, “보라 네 문안(問安)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腹中)에서 기쁨으로 뛰 놀았도다”
누가복음 1장 47절-48절,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救主)를 기뻐하였음을 그 계집종의 비천(卑賤)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後)로는 만세(萬世)에 나를 복(福)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이는 누가당시 그의 공동체(共同體)에서 빈부(貧富)의 심한 차이로 많은 문제가 있었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빈부의 갈등(葛藤)속에서 오직 가난한 사람들만이 더 많은 고통(苦痛)과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에 누가는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누가복음 6장 20절-21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弟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福)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주린 자는 복(福)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가난한 자와 주린 자를 축복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누가는 ‘가난’과 ‘주림’을 문자(文字)적으로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가난’과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굶주림’을 의미하고 있다.
누가복음서는 특히 사회적 문제, 경제적 문제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누가복음의 저자(著者)가 사회의 갈등(葛藤)구조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한 내용에서 엿볼 수가 있으며 억눌린 사람이나 사회에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 세리, 창기, 주린 자, 소경, 앉은뱅이) 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하고 있다. 특히 누가복음서의 자료(資料)에 이러한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누가의 삶의 철학(哲學)은 가난한 계층과 부유한 계층 모두를 포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누가복음서에 관련된 많은 연구들이 누가의 관심이 가난한 자에게 있음을 주장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누가는 풍족한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의 복음서(福音書)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부자(富者)들에게 경고(警告)하는데 할애한다.
마리아의 찬가에서 하나님은 부자(富者)를 빈손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누가복음 1장 53절,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富者)를 공수(空手)로 보내셨도다”.
누가는 부자는 높이고 가난한 자는 천대하는 사회 질서를 용납하지 않는다.
큰 잔치의 비유에서,
누가복음 14장 21절, “종이 돌아와 주인(主人)에게 그대로 고(告)하니 이에 집 주인(主人)이 노(怒)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市內)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者)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회적 구분을 깨뜨리시고 예기치 않던 장소(場所)에서 성도들을 찾으시는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축복,
누가복음 6장 20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弟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者)는 복(福)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를 기록하고, 부자(富者)들을 향한 화(禍)도 기록했다.
누가복음 6장 24절, “그러나 화(禍) 있을진저 너희 부요(富饒)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慰勞)를 이미 받았도다”
누가복음에서 예수가 말한 가난한 자는 물질적(物質的)인 의미의 가난에 더 가깝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경우는 물질적, 경제적(經濟的)인 빈곤을 말하기보다 가난을 영적(靈的)으로 해석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자를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자로 해석한 것은 마태의 견해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누가에게 있어서 ‘가난’이란 용어(用語)는 예수의 축복을 이미 받은 추종자들로 경제적으로는 하층계급의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하나님 없는 곳에서는 소망을 찾을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결과론 적으로는 구원의 필요성을 갖게 되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누가는 말한다. 가난한 자에 대해 정의하기를 자기 스스로 살아가기에 너무 힘들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말한다. 또한 힘없고 굶주리고 병들고 신체적 결함을 가진 장애자(障碍者), 고아(孤兒), 과부, 이방인 등 경제적인 고통을 겪는 자들을 말한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가난에 처한 자를 말한다.
주변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 우는 자, 핍박을 당하는 자를 통 털어 지칭할 수 있다. 이처럼 가난한 자에 대해 정의를 내린 누가복음의 저자는 평지설교를 통해 그의 신학적 철학과 신학적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가난한 계층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완전히 무능(無能)하다는 것, 즉 자신의 영적(靈的) 가난과 영적인 필요를 아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해야 함을 아는 것이다.
영적(靈的)으로 가난한 자들은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구원을 받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받게 된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이미 경험하기 전에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이룰 수 있는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계층들이다.
누가복음 6장 21절, “이제 주린 자는 복(福)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수님의 선포는 그의 눈을 들어 주린 자를 향하여 축복을 선포하는데 그 선포 받는 주린 자들의 정의에 대해서 놀랜드(Nolland)는 그들의 ‘가난’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우는 자는 ‘운다’라는 말로 누가가 자주 표현하는 방법으로 모든 슬픔과 애통에 대한 총체적인 말이다. 마태복음은 애통하다로 표현하며 우는 자와 함께 쓰이기도 한다. 이 슬픔의 원인(原因)은 가난에서 온다. 가난이 해소될 때 슬픔이 사라진다. 어떤 사람은 그때가 하나님의 도래라고 한다.
누가복음에서만 예수의 공생에 첫 설교(說敎)가,
누가복음 4장 18절, “ 주의 성령(聖靈)이 내게 임(臨)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福音)을 전(傳)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捕虜) 된 자에게 자유(自由)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傳播)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으며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그들에게 주신 명령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하셨다.
누가복음 7장 2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따라서 누가에게 있어 복음(福音)은 오직 “가난한 자들”에게 선포(宣布)되고 있다.
누가는 예수가 누가복음 6장 20절, “가난한 자(者)는 복(福)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그리고 누가복음 6장 21절, “이제 주린 자는 복(福)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라고 “가난한 자”와 “주린 자”를 축복했음을 강조한다.
누가복음 6장 20절-26절의 평지설교는 ‘가난한 자’를 중심으로 그들에게 내리는 복(福)을 선언하고 있다. 이것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 바,
누가복음 6장 20절은 담론, 21절-23절은 가난한 자에 대한 축복 선언, 24절-26절은 부자(富者)에 대한 경고(警告)로 나타난다.
예수의 선포에서 가난한 자들의 희망과 그들에 대한 약속은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에게서 성취되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게 선포(宣布)된 예수의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와 복이 선포되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예수의 복음의 연결고리가 되는 주제이다. 지금의 가난이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있다. 때문에 이들은 더 이상 가난한 자들이 아니며 미래에도 계속 하나님의 나라는 유지된다.
복(福)에 대한 여러 가지 의미는 헬라적 용법으로 신(神)들이 아무 걱정이 없고 행복한 상태, 부자들이 걱정이 없는 상태를 묘사하는데 사용 되었다.
칠십인 역에서는 보통 ‘행운’ ‘행복’으로 묘사 되었다. 이 행복(幸福)은 하나님이 가져다준 구원(救援)의 결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행복은 구원(救援)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행복’이란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에 참여한 종교적인 기쁨을 의미하고 있다고 하우크(Hauck)는 설명한다.
복(福)은 일시적인 상황에 따라 나타나는 행복을 말하지 않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복을 말한다. 다시 말해 복은 하나님 나라로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말하며, 천국(天國)과 복과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 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복(福)은 경제적인 ‘가난’에서의 자유로움이며, 정신적인 압박으로 부터의 자유로움이며, 사회적인 차별로 부터의 해방(解放)이다. 이복은 하나님 나라와 연결이 되며 하나님의 약속은 가난한 자에게 풍요로운 복(福)을 약속하셨다.
누가 공동체의 삶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빈곤한 자들의 그룹과 물질적(物質的) 풍요는 있으나 정신적(精神的)으로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예수의 복음 선포를 들었던 자들이고 핍박을 당했던 자들로 세상 적인 부요함을 좇는 자들은 아니었다. 예수는 주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이들에게 가난한 자임을 말씀하셨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심을 선포하셨다. 그러나 아직 현실의 세계에서는 고통 가운데 거하는 그들은 고통(苦痛)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했던 계층(階層)들이다.
린지(S. H. Ringe)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희년 모티브가 누가 복음서 전체에 깊이 스며 있다고 주장하고, 에래미아스(J. Jeremias)는 누가 관심의 초점이 가난한 자에게 맞추고 있다고 분석(分析)하고 있다.
가난한 계층들을 위한 복음에 대한 누가의 주제는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다.
가난한 계층들은 순수 빈곤과 욕구로부터의 고통(苦痛)을 포함하며, 그들은 부자(富者)와 힘 있는 자들과 대비되고 있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가 예수님의 복음 자체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으로 누가복음 4장 18절, 수용될 것을 소망하며,
필그림(Pilgrim)은(Walter E. Pilgrim, Good News to the Poor. Wealth and Poverty in Luke-Acts(Minneapolis: Augsburg Publishing House, 1981). 부자들을 위한 복음도 포함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마크 포웰,「누가복음 신학」, 배용덕 역, 137. 참조) 이러한 통찰은 누가복음의 내용의 다양성을 설명한다.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16장19절-27절, 부자(富者)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누가복음 16장 19절, “한 부자(富者)가 있어 자색(紫色)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豪華)로이 연락(宴樂)하는데”
날마다 잔치를 베풀고 호화롭게 사는 ‘한 부자(富者)’의 집 대문 앞에
누가복음 16장 20절-21절,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富者)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床)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는 ‘거지’가 살고 있었는데, 비유에 의하면 부자(富者)는 문전(門前)의 거지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고, 거지는 오로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만 배를 채우려고 했다. 이 비유는 누가가 처한 공동체 내의 빈부(貧富) 문제를 잘 묘사하고 있다.
부자계층과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삶을 살아가는 자체도 문제성이 있으며 배부른 자(者)가 배고픈 자에게 가진 것을 전혀 나눔이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누가는 이런 문제에 직면해서 나눔을 모르는 부자들에게 음부의 고통,
누가복음 16장 23절, “저가 음부(陰府)에서 고통(苦痛)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참된 보화(寶貨)는 인간의 중심에 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12장 34절, “너희 보물(寶物)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어리석은 부자(富者)의 비유로, 누가복음 12장 17절부터 20절,
“17) 심중(心中)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穀食)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 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穀食)과 물건(物件)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靈魂)에게 이르러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物件)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平安)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者)여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내 예비(豫備)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어느 주석가는 이 부자(富者)의 의도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교활하고 악(惡)하다고 주장한다. 즉 이 부자가 소출을 모두 쌓아둘 곳이 없어 곳간을 더욱 크게 지어 그곳에 쌓아 두려고 했던 것은 나중에 곡식이 귀해져서 곡식 가격(價格)이 높아질 때까지 쌓아둠으로 폭리를 취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부자의 행동은 매점매석(買占賣惜)으로 부당하게 폭리를 누리려 했던 악덕(惡德) 상인(商人)의 행위와 같으며, 부자의 죄는 이기적(利己的)으로 재물(財物)을 축재한 것에만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가며 자기 자신의 이익을 누리려고 계획한 사회 전체에 해독(害毒)을 끼치려 했던 행동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 정의의 차원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대비시키고 있는 누가복음 18장 18절, “어떤 관원(官員)이 물어 가로되 선(善)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永生)을 얻으리이까?”
사회적 지위(地位)와 함께 부(富)를 겸비한 사람이 영생(永生)에 이르는 길을 물었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준 대답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소유의 분배 권면이었다.
영생(永生)과 구원(救援)을 얻는 문제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나,
누가복음 18장 1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善)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善)한 이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계명들에 대한 충실한 준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가복음 18장 20절, 21절, “네가 계명(誡命)을 아나니 간음(姦淫)하지 말라, 살인(殺人)하지 말라, 도적(盜賊)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證據)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恭敬)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영생(永生)을 얻는 길은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를 위해 자기 소유(所有)를 나누어 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마태나 마가는 각각 그 사람이 ‘재산(財産)이 많기 때문에’ 마태복음 19장 22절, “ 그 청년이 재물(財物)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가복음 10장 22절, “그 사람은 재물(財物)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氣色)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근심하며 예수를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오직 누가만이 그가 관원(官員)(로마 정부가 임명한 정부관리 라고도 함)이며, 특히 큰 부자(富者)였음을 말하고 있다..
누가복음 18장23절, “그 사람이 큰 부자(富者)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甚)히 근심 하더라”
이 이야기의 주제는 ‘부자’와 ‘가난한 자’간의 문제임을 밝히고 있다.
시작은 영생을 얻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라는 종교적인 질문 이었으나 누가의 최종적인 관심은 사회 경제적인 문제라고 보았다. 때문에 누가에 있어서 재산 분배, 소유의 분배에 대한 문제라고 보았다.
가난은 다가오는 시대(時代) 속에서 그들의 소유(所有)에 대한 급진적인 사회적 반전을 꽤하고 있다. 가난한 자들은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살고 있는 병든 자와 사로잡힌 자들을 포함하며, 그들은 치료(治療)자의 주변에서 얻은 교제 속에서 치료와 전적인 수용을 제공 받는다.
그들은 경멸당하는 직업과 비도덕적(非道德的) 삶 때문에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무시당하는 버림받은 자들과 죄인들이며, 그들은 아버지의 선하신 은혜 가운데 환영받으며, 예수와 그 제자들 주변에 모여든 공동체 속에서 새로운 신분과 전적인 참여를 제공 받는다.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포함시키는데 그들은 그의 봉사에서 떠난 자들이며, 낮은 자들이 높여지고, 힘 있는 자들이 낮아질 때 다가오는 해방을 열망하며 기다리는 계층이다. 가난한 자들의 개념은 누가복음에서 폭넓은 요점을 지닌다.
누가는 먼저 복음(福音)에서 “구제하라”는 명령을 반복 하고,
누가복음 11장 41절,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救濟)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누가복음 12장 33절, “너희 소유(所有)를 팔아 구제(救濟)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寶物)이니 거기는 도적(盜賊)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사도행전 9장 36절,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弟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飜譯)하면 도르가라 선행(善行)과 구제(救濟)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사도행전 10장 2절, “그가(고넬료) 경건(敬虔)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며 백성(百姓)을 많이 구제(救濟)하고 하나님께 항상(恒常) 기도하더니”
사도행전 10장 4절, “고넬료가 주목(注目)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主)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天使)가 가로되 네 기도(祈禱)와 구제(救濟)가 하나님 앞에 상달(上達)하여 기억(記憶)하신 바가 되었으니”
사도행전 24장 17절,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民族)을 구제(救濟)할 것과 제물(祭物)을 가지고 와서”
이어서 사도행전에서는 구제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베드로, 다비다, 고넬료, 바울). 누가에게 있어서 재물은 소유와 축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분배와 나눔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그의 문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누가복음 4장16절부터21절은, 이사야의 인용구로서, 선포된 예수의 직무(職務)는,
누가복음 4장 18절-19절, "주의 성령(聖靈)이 내게 임(臨)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者)에게 복음(福音)을 전(傳)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捕虜)된 자에게 자유(自由)를, 눈 먼 자(者)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傳播)하시며 눌린 자(者)를 자유(自由)케 하고, 주의 은혜(恩惠)의 해를 전파(傳播)하게 하려 하심이라”
도덕적(道德的)이고 영적(靈的)인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社會的)이고 경제적(經濟的) 차원에서도 매우 진지한 누가복음 속에서 구체화 된다.
예수의 대속적인 직무(職務)를 가난한 자들과 배고픈 자들, 병든 자들, 괴롭힘 당하는 자들, 사로잡힌 노예들과 압제 당하는 자들, 버림받는 자들과 죄인들과 함께 한다. 누가복음에서 어려운 사회적, 경제적 실재들, 게다가 깊은 영적 욕구까지도 포함한다. (「Good News to the Poor」, 64-84. 최석원 목사 번역) 인용.
따라서 경제적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용기(勇氣)의 부족과 절망, 혹은 내적인 삶으로 해석하면서 스스로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거지와 같은 의미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뜻으로 보았다.
누가복음 6장 20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가난한 자’와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心靈)이 가난한 자는 복(福)이 있나니 천국(天國)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 사이를 연속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가난한 자의 의미는 경제적, 정신적 가난을 모두 포함하며, 누가복음의 저자(著者)
는 예수님 선교(宣敎)의 목적과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과 일치시킴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지속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누가복음과 공관복음(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서 살펴본 것같이 가난한 자의 의미에는 사회, 경제, 정신적, 종교적,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보았다.
가난한 자는 에브욘(히브리어), 으로 경제적, 물질적, 영적(靈的)으로 결핍을 겪고 있는 사람,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하나님 섭리의 중심이다.
시편 9편 18절, “궁핍(窮乏)한 자가 항상(恒常)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者)가 영영(永永) 히 실망(失望)치 아니하리로다”
마가복음 14장 7절, “가난한 자(者)들은 항상(恒常)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願)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당시 예루살렘 총회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가난한 자를 기억하라고 요청 했다.
갈라디아서 2장 10절,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라”
누가는 가난한 자들과 사회의 소외 계층에 대한 사회 복음(The Social Gospel)을 말하고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회에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