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중순 말복 더위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안개가 짙게 깔려 걷기만 하여도 땀방울이 주르르 흘러 내릴 때 직장 동료 10명과 자가용을 타고 호남 고속도로를 내달리며 마음껏 푸르른 고개와 높다란 다리를 넘어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니 지리산이 서쪽을 가로막고 우람한 자세로 딱 버티고 섰다. 그 밑으로 한가하게 여유를 부리며 흘러가는 낙동강 맑은 물에는 학생들이 고무보트 위에서 래프팅으로 빠르게 물살을 가르며 노를 젓고, 강물도 신이 나는지 우당퉁탕 즐겁게 물장구를 치면서 왁자지껄 시끄럽게 지나간다.
차는 순천을 지나 태백산맥의 무대가 되었던 벌교 기념관을 건너 고흥 들판으로 들어섰다. 너른 들판에는 싱싱하게 자란 벼들이 서로 키재기를 하는 듯 푸르름을 과시하며 꽉 들어차 있고 일부는 바다 간척지를 막아 개간한 듯 반듯반듯한 모난 들판이 너무나 넓어 신비로움이 절로 나온다. 그 끝으로 긴 연육교 다리가 일직선으로 놓여 내나로도와 연결시켜 준 제1 나로대교다. 섬 이름은 지역에 목장이 많아 나라에 긴요하다고 나라도라고 불렸는데 일제 시대에 뜻보다 음을 중요시해 나로도로 바꿔 사용하기 시작한 것을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육지와 가까운 곳은 내나로도,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외나로도로 이 섬이 조금 더 크다. 제2 나로교를 한참 지나 좌측으로 가니 가장자리에는 동백나무 숲이 길게 군락을 이루며 우거져 있고 무성한 잎 속에는 갓 피어난 붉은 동백꽃이 수줍은 듯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다. 나도 웃음을 흘리며 숲을 지나자 넘실거리는 파도는 끝없이 밀려오고, 싱그러운 바람은 흐르는 송이땀을 바다로 몰고가 시원함이 넘쳐 흐르자 특유의 갯내음을 코로 솔솔 뿌려준다.
M과 금빛 누런 모래사장이 길게 뻗쳐 있는 해수욕장을 맨발로 거닐자 부드러운 모래는 발 아래 잘게 부서져 내리고 M과의 데이트는 외로움을 떨쳐 버리고, 유쾌한 마음은 사뭇 푸른 하늘로 날아 오른다. 한참을 걸어서 멀리 보이는 산 모퉁이까지 같이 갔을 때 그곳에는 얕은 바다가 놓여 있고 바위산이 펼쳐져 있다. 바위산 위로는 작은 소나무들이 분재처럼 자라고 있는 모습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빼어난 절경에 감탄이 저절로 흘러 나왔다. M과 맨발로 바위산 위를 거닐며 소나무도 만져보고 예쁜 바위에 앉아 사진 촬영도 하려니 이곳이 선녀가 사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간단한 점심 식사후 배낭을 맡기기 위해 숙소인 동백장에 들렀다. 여관은 이름에 걸맞게 주위가 온통 동백나무에 둘러쌓여 아늑하고 평화로움에 감싸여 있다. 우리 일행은 예정대로 오후에는 작은 15인승 여객선을 전세내어 제1 나로대교 아래를 빠져나와 나로도 일주 관광여행을 힘차게 출발하였다.
배가 잔잔한 물결을 미끄러지며 섬 주변을 달릴 때만 해도 여유가 있어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아 멀리 스쳐 지나가는 고깃배를 향하여 손도 흔들고, 동료와 웃으면서 잡담도 하며 행복한 표정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잠시 파도는 성난 황소처럼 점점 거세게 몰려왔다. 여객선이 넓은 바다로 들어서 힘차게 달리자 그동안 숨어 있던 크고 작은 섬들이 제 각각 검은 머리를 쳐들고 자태를 뽐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백도가 흰 머리를 흔들며 살며시 나타나더니 뒤 이어 먼 남쪽에서 뚜렷한 모습으로 거문도가 우뚝서서 자기의 육중한 체구를 알리고, 동쪽 끝 먼 곳에서는 희미하게 대마도가 떠올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물결이 점점 강해져 높게 밀려올 무렵 구명조끼를 간신히 입고 머리만 쳐들고 배 바닥에 몸을 붙이고 파도와 사투를 벌이며 힘겹게 버틸 때 선장님의 큰 외침 소리가 들려 선창 밖을 보니 섬 곳곳에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약속이나 한 듯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사자 바위, 거북 바위, 금강 절벽, 조각공원, 꼭두여, 중빠진 굴, 활개 바위, 서담 바위 등이 지나갈 때 마다 동료들의 환호성으로 바다가 떠나갈 듯 하다. 특히 서담 바위는 선녀와 백마기사가 애틋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자, 선녀는 하늘로 날아가고 백마기사는 한이 맺혀 바다에 빠져 죽는다는 선장님의 이야기에 모두들 눈시울이 붉어진다.
배가 동쪽으로 지날 때 봉래산 기슭을 넓게 닦아 바닥이 훤하게 드러난 나로도 우주센터에는 발사대가 우뚝서서 내년부터 계속 우주로 발사될 통신위성이나 방송 위성인 무궁화 위성과 아리랑 위성을 발사하는 장면이 빨리 보고 싶어진다.
여객선이 한 바퀴 돌아 섬 가까이 다가가자 작은 배를 뒤집을 듯 심술 많던 파도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한 물결로 바뀌어 배의 움직임에 양순한 파도가 전혀 영향을 못주자 이제는 귀로의 배타기가 너무 싱거워 험한 파도가 오히려 기다려지니 내 자신도 나에 마음을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아이러니칼 할 뿐이다 .
돌아오는 길에 과수원을 지나자 후박나무와 해송이 숲을 이루는 사이로 오솔길이 나타나 그 길로 곧장 가려니 푸른 바닷물이 넘쳐나며 온종일 노래 부르고 해안가는 동글동글한 검은 조약돌이 쫙 깔려있는 몽돌 해수욕장이다.
그래서 운동화를 벗고 수영복만 걸친 채 맨발로 조약돌 위를 걷자 지압을 받는 듯 발바닥이 간지러우면서도 시원시원한 느낌이 든다. 조약돌 5개를 손바닥 위에 놓고 손으로 굴리자 보들보들, 몽실몽실하고 마치 공깃돌이 구르는 듯 감촉이 좋아 감성돔이 튀어 오르는 물결 속으로 훌쩍 던지자 돌이 물고기를 닮았는지 퐁당퐁당 물위를 넘나들며 잘도 튀어 나간다. M과 개헤엄을 치며 푸른 물속을 가르자 더위가 물러간 자리에는 돌돔이 와서 친구인 양 물속을 넘나들며 꼬리를 흔들어 반갑게 맞아준다. M은 머리칼을 길게 드리우고 포동포동한 다리를 문어처럼 잘도 움직여 먼 바다를 마음대로 해엄쳐 돌아오는 수영 실력을 과시한다. 그 모습에 나도 신이 나서 돌돔을 흉내내며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기자 기분이 좋아져 마음으로는 온 바다를 떠도는 착각 속에 M의 손을 잡으니 한없이 보드랍고 미끌미끌하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동백장 앞 해안길을 나서니 선선한 바람에 몸은 움츠려 들고 개울가에는 갈대가 잔뜩 우거진 사이사이로 백로가 날아들어 식사하느라 바쁜 가운데 왼쪽으로 올라가니 섬이라 길이 좁아 차들이 간신히 피할 정도다. 언덕 위로 올라가니 나로종고가 산비탈 가파른 곳에 위치하여 있고 화단에는 후박나무와 비자나무, 동백나무 등 상록수림들이 싱싱하게 큰 잎을 드리우고 젊음을 과시한다. 산위 화단앞 교정을 거닐고 있으려니 푸른 바닷물을 박차고 솟아 오른 시뻘건 태양이 어린애처럼 해맑은 웃음을 터뜨리자 배꼽시계가 밥 달라고 자꾸 조르는 듯 꿈틀거린다.
식사후 외나로도 동쪽 끝을 보려고 최고봉인 봉래산 기슭을 따라 차를 몰자 외딴 도로는 너무 좁아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을 피할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비탈은 경사가 왜 그렇게 심한지 두려운 나머지 식은 땀까지 솟는다. 시멘트 포장 도로 옆으로는 작은 밭들이 이어져, 채소나 콩, 팥, 옥수수가 바람에 휘날리고 야산에는 싸리꽃이나 칡꽃이 홍조를 띄우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려니 조마조마한 마음이 조금은 풀린다. 가끔은 동네 어귀에 다랑이 논도 꽤 있어 싱싱한 벼들이 마을을 녹색으로 아름답게 수놓는다.
동쪽 끝에 다달으니 비탈이 심한 아래 바다 쪽으로 시멘트 방파제가 길게 뻗어 있고 그 위에는 차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데 바다 안쪽에는 고깃배들이 즐비하게 서서 출항을 준비하고 있다. 왼쪽 좁은 길을 따라 바위를 타고 내려가려니 억센 풀들이 제멋대로 자라는 부근 갯바위 위에는 낚시를 하는 어옹들이 물고기를 낚느라 바쁘고, 많은 바위에는 홍합이나 굴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어 작은 물고기들이 수시로 들락거린다.
해송이 우거져 짙게 그늘을 드리운 곳에 앉아 동료들과 낚시꾼들이 잡은 감성돔과 돌돔, 굴, 조개 등을 회를 쳐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니 식욕이 북돋아 오르고, 멀리 바다 옆으로 보이는 오묘한 바위들과 해송, 후박나무 군락들이 멋진 풍경화로 다가 온다.
오후에는 동백장 주인이 차려주는 다양한 물고기로 요리한 푸짐한 회를 맛있게 먹고 동백나무들의 춤추는 듯한 인사와 눈앞의 바다에서 불어오는 갯바람을 뒤로 하며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차에 올랐다. 제1,2 나로대교를 차례로 건너려니 머리 위에는 물새들이 낮게 떠서 날개를 흔들며 길게 울어 작별을 아쉬워 하고, 뒤로 멀어지는 두개의 다정한 내나라도, 외나로도 섬들이 정든 여인처럼 자꾸만 그리워져 눈에 선하게 아롱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