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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편의상 반말 죄송.
1951년 2월 27일, 치열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한 여인이 돌봐주는 이 하나 없이
쓸쓸히 사망한다. 이 때 그의 나이 꼭 81세, 자신의 생일에 파란만장한 인생에
마침표를 찍은 인물의 이름은 배정자였다.
역적의 딸 – 파란만장한 인생의 시작
1873년, 명성황후와 대원군간의 국가적인 고부갈등은 마침내 대원군의 은퇴와
함께 막을 내린다. 이때 대원군은 은현궁에 안전히 갇혀있음과 동시에 바깥에서는
자신의 팔다리들이 잘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의 실각과 동시에 그의 수많은
똘마니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숙청당하게 되는 것이다. 자고로 인생은 줄서기, 이쪽
줄이냐 저쪽 줄이냐에 인간사의 흥망성쇠가 달려있는 것인데 이 때 줄을 잘못
섰었던 김해 고을 아전 배지홍이란 자도 지지리 없는 운을 탓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역시 줄을 잘 서야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배지홍에게는 처자가 있었는데 이 일 때문에 아내는 충격을 받아 장님이 되어
네살바기 딸 배분남(1870년 출생)을 데리고 몇 년간 전국을 떠돌며 산다. 그러다
1882년 12살이 된 분남을 양산 통도사에 맡기고 길을 떠난다. (몸 맡길 곳도 없는
눈 먼 여인이 길을 떠나 그 후로 어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여기서 분남이
비구니로 일생을 조용히 마쳤다면 그녀의 일생, 그리고 한국의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허나 절 생활이 체질에 안 맞으셨던지 분남은 얼마 뒤 가출을 시도했고 또
얼마 뒤 (역적의 딸이었으므로) 밀양관청에 체포되었다.
만약 여기서 그녀가 관비로 조용히 일생을 마쳤다면 또다른 얘기가 되겠으나
그녀는 반전드라마의 주인공이었기에 이 불운 속에서 로또 당첨의 행운을 만난다.
바로 밀양부사 정병하가 아버지의 지인이었던 것! 운이 억수로 좋은 분남은 풀려날
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와는 달리 인맥복이 무척
쎘었던 그녀는 체포 후 밀양부사 정병하 -> 일본 밀정 마쓰오 -> 개화파 안경수 ->
김옥균을 거쳐 마침내 이토 히로부미까지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더군다나 이토
히로부미는 “그녀의 빼어난 미모에 끌려” (정운현/오마이뉴스, 2004) 그녀를
양녀로 들여앉히고 다야마 데이코라는 이름까지 지어주는데 그녀의 이름
배”정자”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빼어난 미모라는 말에 호기심이 발동한 나머지 인터넷에서 검색한 그녀의 사진.
내가 보기엔 그냥 평범한 아낙네 같은데;;;
저 시대의 기준으로 미모는 우리 시대의평범한 외모인가 추측해봄.
역시 나는 조선시대에 태어났어야 하는 건가…
난 언제나 거울을 보며 내가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중전감일 거라고 생각을 하곤 하지….
그리고 무수리들은 다 김태희, 한예슬인 거다.ㅋㅋㅋ
미션 임파써블 – 밀정으로서의 삶이 시작되다
그 어렵다던 “한 큐에 인생반전”에 성공함으로서 역적의 딸에서 일본 총리의
양녀가 된 배정자. 그녀가 그래서 그냥 잘 먹고 잘 살았느냐? 그건 또 아니다.
이토는 그녀를 수영, 승마, 사격, 변장술 등을 가르치고 일본의 제국주의 사상을
주입시킴으로서 그녀를 완벽한 밀정으로 만드는데 주력한다. 아 참, 그리고 이토와
배정자의 관계는 양부녀간의 그것 이상이었다고 한다…음, 사실이라면 좀
충격인데…-_-;; 배정자는 김옥균이 돌봐줄 무렵 전재식이라는 남자와 결혼했었고
유부녀란 걸 감안하지 않더라도 이토는 1841년생으로 배정자와 거의 30살 정도
나이차가 난다. 흠좀무…
그리고 1894년, 24살의 배정자는 그녀의 첫 임무를 띄고 조선으로 보내진다.
그녀의 첫번째 임무는 김옥균 등 개화파의 연락을 담당하는 것. 그러나 체포되어
고초를 겪다가 이토의 양녀라는 빽을 내세워 일본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그녀가
그냥 집에 짱박혀 있었느냐? 그녀는 고영근이란 자를 만나 그에게서 어떻게 어떻게
신임장을 빼내와 하야시 공사의 통역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입국한다.
참고로 이 고영근이 바로 명성황후 시해범 중 하나인 우범선을 살해한 사람이다.
우범선!!! 종이 땡땡땡 울리지 않는가? 아니라면 국사 공부 한 번 더 OK?
농담이고 이 자가 바로 우리 나라 전후 농업 개발에 앞장 선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이다. 참고로 우장춘 박사 이 분도 참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드라마 같은 삶을 사신 분이다. ㅠㅠㅠ 이 분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조사 바람.
위 사진은 우범선과 우장춘 박사의 모친인 그의 일본인 처, 그리고 우장춘 박사다.
이번 임무는 일본이 조선 내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는 걸 돕는 일이었는데 배정자는
엄비와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된다. 미모와 일본어 실력으로 고종의 환심을 샀다고
하는데 음... 외모지상주의와 외국어제일주의는 구한말에도 만연했었나보다.
음, 오늘 밤에는 피부관리와 영단어 공부를 해야겠다…가 아니라 어쨌거나
배정자는 고종의 블라디보스톡 천거 계획 사실을 빼내기도 하는 등 성공적인 밀정
역할을 해낸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전성기를 누린다. 이후 그녀는 고종의 신임과
이토의 총애를 등에 업고 세력을 휘두르기, 친족을 주요 관직에 앉히기, 만주와
반도를 누비며 일본의 명 받들기 등의 활동을 해주었다. 1905년, 밀서사건(일제가
배정자를 통해 고종에게 오만방자한 문서를 보냄.)으로 잠시 유배생활을 했으나 곧
풀려났고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35살에 배정자는 현영운과 재혼하는데
(전재식은 병사.) 일본 육사 출신에 배정자 빽을 등에 업고 출세한 이다. 이 글을
기초한 자료에는 의병대장이라는 말이 있으나 정황으로 봤을 때 오히려 친일
매국노일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잘 아시는 분은 댓글 좀.) 어쨌거나 결혼의
신성함도 무색하게 배정자는 후에 세번째 남편이 될 친일파 박영철과도 스캔들을
낸다. (출처: http://bluecabin.com.ne.kr/split99/2214.txt)
운명의 총소리 - …하지만 그녀의 운명은 아니었다
1909년 10월 26일 도마 안중근 선생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다. 이 소식을
듣고 배정자는 쓰러져 며칠간 식음을 전폐, 병석에 누웠다고 한다. 그리고 1910년 8월,
자리에서 한일합방 소식을 들으며 만세를 불렀다고 하니 참 뭐라 할 말이 없다..;;;
이토를 대신할 인물로 조선주둔관 헌병사령관 아카시라는 자가 나타나는데 배정자는 이
때부터 일본군의 밀정으로 일한다. 그리고 1차대전 발발 이후, 시베리아로 가는 일본군을
따라 납치되어 죽을 고비도 넘기면서 활동을 계속한다. 그녀는 중국 마적단 두목과 동거까지
해가면서 정보를 빼내왔다고 하는데…. 참.. 개인적으로 그렇게까지 살아야했던 이유가 뭔지
알고 싶다. 하여튼 만주 조선인들의 동향 정탐, 보민회 창설 등 만주에서 조선인들과
독립군이 고초를 겪는데 많은 공헌을 해주셨다. 참고로 보민회는 “일제가 독립운동가
탄압과 체포를 위해 조작한 무장 첩보단체”라고 한다. (정운현/오마이뉴스, 2004) 예전에
과제 때문에 일제가 간도에서 조선인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조사할 기회가 있었다. 뭐,
짧게 말하자면 무자비하게 조선인들을 때려잡아 잔인한 짓을 일삼았는데 그나마 외국인들에 의해
알려진 조선 내 학살 사건과는 달리 (예. 제암리 사건) 적은 인구가 떨어져 사는 간도의
특성상 실제로 자세히 알려진 건수는 별로 없어 우리가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
한다. 근데 이 여자가 그 활동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하니 참 감회가 새로우면서도 뒷골이
마구 땡긴다. 후에도 배정자는 계속 돈과 명예를 얻으며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는데 그
활약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일본군 성노예 징집이 되겠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겁을 상실하고 예고도 없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한다. 열받은
미국, 태평양 전쟁을 선포하고 일본도 군대를 움직이자 배정자 일본이 천황과 세계평화-_-
;;;를 위한 전쟁을 한다는데 가만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녀는 조선 여인 100명을 징집해
먼 타지의 전선으로 내몰아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게 한다. 이 때 그녀는 칠순을 넘긴
호호할머니였다.
일본군 성노예가 된 많은 여자들은 살아돌아오지 못했다. 혹독한 성노예 생활 탓도 있었지만
일본군은 수많은 강제징용자들과 성노예들을 철군 전에 학살하고 떠나곤 했다.
배정자와 양대산맥을 이루는 김활란. 어렸을 때 위인전도 읽었는데 알고보니 친일파…;;;;;;
전선에서 고생하는 일본군들을 위로하자며 ‘종군위안부’ 자원을 호소했다고 한다. 미친..
위로하려면 지 혼자 위로할 것이지… 하지만 화나고 열받는 것보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 같은
여자로서 성노예가 되는 것을 남에게, 그것도 말도 통하고 생김새도 같은 이들에게 권하고
강요할 수 있었는지 너무나 궁금하다.
어쨌든 배정자는 그렇게 잘 먹고 잘 살았다. 또한 그녀는 세 번의 결혼도 맘에 안 찼는지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참고로 57세로 은퇴할 때 25살짜리 일본인 순사와 동거하고
있었다고 한다. 음, 엄청나다…;;;;; 매국노라는 것과 시대 상황 등을 빼고 순수히 숫자만
가지고 볼 때 그녀의 연애생활을 후덜덜이다. 근데 비록 솔로부대원인 나지만 하나도 부럽진
않다. 저렇게 살아왔던 여자가 행복할 수 있을지 궁금하고 저런 사람과 관계를 맺는 남자가
제대로 될 리 없다. 보통 저렇게 종잡을 수 없는 관계사를 가지는 사람은 조건이 너무
후덜덜해주시는 능력자라서 많은 이들을 사귈 수 있었다기보다는 인성에 문제가 있고 인생이
공허해서 닥치는대로 이성을 만나다보니 저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정자는
전성기이던 일제탄압 시절에조차 안으로는 매우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산 것이 아닐까 한다.
개인적으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 세월을 살았던 것일까 매우 궁금하다.
해방 – 남은 것은 무엇일까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알리고 조선은 해방된다. 온 나라가
기뻐하던 이 날, 배정자는 집에 숨어있었다고 한다. 그 뒤의 일은 이 글을 기초한 자료에서
발췌해온 글로 대신하겠다.
해방 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취재차 형무소를
찾은 한 기자에게 그는 "따끈한 장국밥을 한 그릇 먹는 것이 평생 소원"이라고
애걸하였다. 한 시대를 풍비했던 '배정자'의 모습은 흔적도 없고 한낱 늙은
죄수의 모습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제 와서 전비(前非)를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신대도 달게 받고 가겠습니다.
다만 제 아들 무덤 앞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운현/오마이뉴스, 2004)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 배정자는 지난날의
반민족적인 밀정 행위에 대한 응징이 두려워 집에서 숨어 지냈다.
1948년 어느 기자가 성북동의 집으로 찾아가 배정자에게 조선이
해방되고 새로 정부가 세워진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배정자는 '기쁜 마음이 가득 차서 무어라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지금 아무 기억도 없고 다 어리석고
나이가 어렸던 까닭에 어찌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변명하였다.
이 때 옆에 있던 배정자의 손자가 할머니를 흔들면서 '자백하라',
'용서를 빌어라'면서 다그치기도 하였다.
(김무용/구로역사연구소 연구원)
다른 친일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배정자의 공식적인 처벌 또한 이루어지지 못했다.
반민특위가 해산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배정자는 잊혀졌다. 그러나 예전과 같은
영화를 누리지는 못했다. 돌봐주는 이 없이 홀로 살다 전쟁 중 사망한 것이다.
예전의 부귀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렇다고 어떤 사람들처럼 물질의 빈곤 속에서 영혼의
풍요를 찾은 건 아닌 듯 싶다. 모든 것이 덧없게 되는 세월, 그리고 우리가 그녀를
잊게 해준 세월이 그녀를 벌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글은 아래 두 자료를 토대로 쓴 것입니다. 내용이 서로 많이 겹치는 부분이 있어
제가 하나로 합쳐 정리하고 그를 재구성하여 이야기 하듯 쓴 것이 이 글입니다.
따라서 자료 조사의 공은 전적으로 밑의 두 글의 저자들에게 있으며 저는 단지 많은
분들에게 더 쉽게 다가가기 위해 풀어썼을 뿐입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셔서 원글을
읽으시면 제가 건너뛰었던 내용들도 접하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사진들은 인터넷에서
출처가 불분명한 것들을 주워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일부러 글을 가벼운 말투로 썼으나 일제의 행각과 배정자가 많은 이들의
인생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입니다. 이 점 유의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 그리고 잘못된 내용 있으면 지적해 주세요.
그리고 스크랩해가실 때 어디로 가져가는지 댓글 남겨주시면 좋지롱.^^
그리고 오타가 있었네요. 배정자는 1952년이 아닌 1951년 사망했습니다. 수정.
<이토 히로부미가 키운 ‘조선의 마타하리’> 2004.3.24. 정운현 기자, 오마이뉴스
http://www.womenandwar.net/bbs/index.php?tbl=M04033&cat=&mode=V&id=3&SN=0&SK=&SW=
김무용 (구로역사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민족정기의 심판>, 혁신출판사, 1948.
http://www.palaceguide.or.kr/gnuboard4/bbs/board.php?bo_table=gnu_data&wr_id=84&page=5
종군 성노예 자료 사진 출처: 동아일보 2007년 4월 28일자 기사
뱀다리)
제가 배정자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된 것은 네이버에서 어떤 미친 놈이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위한 온건파였으며 조선인을 양녀로 들일 정도의 온화한 사람이라는 주장을 한
것을 보고 조사한 것이 시점이었습니다. 참고로,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정치계 내에서는
온화파가 맞다고 하나 결국 조선을 먹으려는 똑같은 인간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비유가 좀
그렇지만;;;; 돼지를 삶아먹든 구워먹든 잡아먹히는 돼지에겐 똑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양녀가 알고보니 배정자였더군요… 황당해서;;;;;
뱀다리 2)
배정자 얘기를 들으면 (보지는 않았지만) 해밀튼 부인인가 하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처음에 술을 훔치려던 볼품없는 노파를 비추며 영화가 시작하는데 노파가 과거를 회상하면
귀티 좔좔 흐르는 비비안 리가 나타나며 넬슨 제독의 사랑을 받던 화려한 시절의 노파를
그린다고 하네요. 그냥 생각나서 적어봤습니다.ㅎㅎ
첫댓글 바로 우리 여성단체에 여성운동가들이 존경하는 김활란 그리고 배정자...참 요즘도 여성단체 김신명숙이나 나경원 보면 저시대 때었났어야 할 인물들인데 아깝습니다
눈에 쏙쏙 들어오게 정리를 잘 해주셨군요..
총살님이 '칼'? 도 잘 쓰시네요.
제가 쓴글 아닌데..스크랩 해온거예요.
그 무엇으로 너에 죄을 변명할 수 없다 네 감히 김옥균 선생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이리 감아으니 네 너에게 저주을 내려주마 내가 죽어서 저승에 가면 너에 혼을 찾아서 아주 똑같이 갚아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