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은 잘하니 걱정하지 마시오
증 언 자 : 구성주(남)
생년월일 : 1956. 9. 10 (당시 나이 24세)
직 업 : 건재사 (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8. 8
개 요
5월 22일부터 27일까지 도청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동, 보급부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5월 27일 한일은행 앞에서 총격전을 벌이던중 도망쳤다가 체포당했다.
이를 악물고 금남로로 다시
5월 19일 오후 3시쯤 나는 차를 타고 오다가 금남로 한일은행 앞에서부터 가톨릭센터 부근으로 걸어 내려왔다. 시위군중은 골목골목에서 기다리기라도 한 듯 쏟아져나와 금남로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공사판에서 주운 돌과 각목으로 최루탄을 쏘아대는 경찰에 맞서고 있었다. 반대편 맨 앞줄에는 페퍼포그차 2대가 서 있고, 뒤로는 전경들이 서고, 그다음 줄은 공수들이 서 있었다.
밀고밀리는 공방전 속에서도 한쪽에서는 광주백화점 증축 현장에서 드럼통을 가져와 불을 붙여 군경들에게 굴려보냈다. 드럼통은 관광호텔 앞으로 굴러가더니 굉장한 폭음을 내면서 폭발했다. 폭음과 함께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는 등 싸움이 치열해졌다. 나는 감격해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수부대가 온다는 시민들의 말을 듣고 보니 공수들이 전경을 앞세우고 시위대가 모여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다. 때마침 그곳에는 CBS 취재차 포니2가 있어서 젊은 청년들은 다가오는 전경과 공수를 향해 차에 불을 붙여 밀어버렸다. 그러자 공수들은 건수라도 잡았다는 듯 민첩한 동작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동구청 쪽에서 제일은행 골목으로 도망을 갔다.
그때 나는 비비화를 신고 끈을 단단히 졸라매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꺼번에 빠져나가려는 아우성 속에서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잡혀가지 않기 위해 순식간에 곳곳의 건물 안으로 잠적하였다. 나는 도저히 사람들을 뚫고 도망 갈 길이 없어 내 앞에 도망가는 사람들을 뛰어넘었다. 뒤에 쫓아온 공수들이 "저 예비군복 잡아라"하며 쫓아왔다. 나는 가게 앞으로 뛰어들어가 다시 카페로 갔다. 밖이 조용해지는 것 같아서 그곳에서 나와 도로를 내려다보니 도로 위에는 신발이 한곳에 쌓여 있기도 하고 널려 있기도 했다. 그 신발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대로에서는 공수 2, 3명이 젊은 청년 3명을 잡아서 곤봉으로 때리고 있었다. 이를 보고 있던 노인들 5, 6명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공수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빨갱이 보다 더한 놈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빨리 젊은 사람들을 풀어 줘라."
"빨리 집으로 들어가시오."
하고 공수들은 맞섰지만, 노인들이 계속 항의해 결국 3명은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3명의 젊은이는 너무나 심하게 맞았기 때문에 풀려나서도 걷지 못하고 길바닥에 고꾸라졌다. 건물 앞에서 웅성거리며 이를 보고 있던 청년 몇 명이 달려와 부축해 갔다. 나는 노인들과 함께 대로에 널려진 신발을 주섬주섬 찾아 신었다.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고 이를 악물고 다시 금남로로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가톨릭센터 부근의 시민들이 "와아!" 하는 함성을 지르면서 가톨릭센터로 몰려가는 것이었다. 가톨릭센터 옥상에 공수가 몇 명밖에 없으니 죽여버리자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후 점심 먹으러 간 공수들이 다시 나타나 시민들을 포위하고 거리를 좁혀왔다. 나는 최루가스를 너무 많이 마셔서 도망을 가던중 동구청 앞에서 쓰러졌다. 쓰러진 나를 시민들은 부축해 주었으며 얼굴을 물로 씻어주기도 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나자 배가 고프기도 하고 더 이상 뛸 수 없을 정도로 지쳤으며 겁이 났다. 백운동 집까지 걸어와 충분한 잠을 잤다.
총구는 하늘을 대고 들어라
5월 20일. 아침식사를 하고 전날 입었던 예비군 바지 위에 웃도리는 남방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백운동 로터리 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삼양시내버 스가 그곳에 많이 있었다. 청년들이 시내버스 1대씩을 걷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삼양시내버스 1대를 끌고 적십자병원 앞으로 갔다가 시내 외곽지역에서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돌고개를 갔을 때는 그곳 아줌마들이 어디에서 구한 것인지 대형 태극기를 휘날리며 주먹밥을 날라다주었다. 시민들은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을 찢어죽이자' 라는 구호와 '애국가'를 불렀다. 나는 서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들이 길이 막혀 광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차 두 대가 교도소 쪽으로 갔다. 교도소 부근 주유소 앞에는 이미 1개 중대 31사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중대장 한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돌아가시오."
"알았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유소에서 기름을 잔뜩 넣었다. 그리고 차에 실려 있던 박카스, 음료수 등을 중대장과 몇몇 군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처음에는 먹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부하더니 계속 권하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와 장성 쪽으로 향했다. 비아 가까이 오자 우리 일행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왜냐면 일행 중 누구 하나 이곳 지리에 밝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마을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 물어보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장성이 집인 학생을 만나 그 학생을 통해 비포장도로로 차를 몰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겁도 나고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 맞은편에서 달려온 차 한 대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차를 세워 물어보았다.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온 학생들을 보았는가? 길이 막혀서 광주로 들어오지 못 한다는 말을 듣고 지원을 나왔다."
"잘 모르겠소."
그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말을 듣고 우리 일행은 가보았자 사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을 뿐더러 계엄군이 숨어 있다가 총을 쏘아댈지도 모르니 다시 광주로 돌아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차 방향을 바꾸어 동운동 쪽으로 해서 전남대 로터리쯤 갔을 때 50여 명의 시위대와 공수들간에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수 2명은 철로 위에서 내려다보고 서 있었고 시위대와 공수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총성이 들렸다. 처음에는 시민들 대부분이 공포탄이려니 하고 있었는데 앞쪽의 사람 하나가 푹 쓰러지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앞을 다투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왼쪽 다리를 맞고 쓰러진 그 사람을 버스에 싣고서 적십자 병원으로 옮겼다. 적십자병원에서는 한창 헌혈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적십자병원에서 나와 차를 외곽으로 빼기로 했다. 나는 무장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단 백운동의 친척집에 들렀다. 안심을 시키려고 담을 넘어 조용히 들어갔다.
식사를 하고 잠자고 일어나보니 석양 무렵이었다. 집 앞으로 나와 거리를 둘러보니 내가 몰고 왔던 차는 온데간데 없고 군용 트럭이 한 대 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손을 들어 차를 세웠다. 차에 탄 10여 명은 대부분 고등학생으로 보였다. 기관단총이 장치되어 있고 카빈 총알이 트럭 바닥에 엄청나게 많이 쌓여있었다. 나는 이 어린 고등학생들에게 "총구는 항상 하늘을 대고 들어라. 그렇지 않으면 오발로 인하여 우리를 죽이게 되니까 조심해라"하고 당부를 해놓고 백운동 외곽지역에서 내렸다. 그때 관광버스 한 대가 왔다.
그곳에는 7, 8명이 승차하고 있었다. 그들은 총으로 무장을 하고 시내 쪽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이 관광버스를 세워 차에 오른 후 도청으로 가자고 주장했다. 차는 도청을 향해 시내 쪽으로 들어갔으나 도청에는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차에 탄 사람들과 얘기한 끝에 각각 몇 명씩 분담하여 백운동에서 모이기로 하고 흩어졌다. 얼마 되지 않아 차를 몰고 온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때 헬기 1대가 계속 공중비행을 하면서 방송을 했다.
"시민 여러분! 집으로 귀가하십시오."
시민들은 일제히 헬기에 대고 사격을 시작했다. 그러자 낮게 떠있던 헬기는 방송도 하지 않고 날아가버렸다. 시간은 흐르고 사방이 캄캄한 밤이 되었다. 나를 포함하여 버스 5대가 목포로 출발하기로 했다.
그러나 적과 아를 구분하기 힘든 캄캄한 밤인데다가 모두들 겁에 질려 있었고, 공수들이 어디에서 우리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누구 하나 선뜻 차 선두에 서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출발은 더욱 늦어졌다 .
나는 서슴지 않고 최선두로 나아갔다.
"내가 앞장을 설 것이니 모두들 나를 따르라."
그리고 앞장서서 속력을 다해 달렸다. 그런데 한참을 달리다 뒤를 돌아보니 이게 웬일인가? 나 혼자만 온 게 아닌가? 그렇다고 혼자서만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 역시도 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나는 따라오지 않고 망설이고 있는 청년들에게 호소했다.
"왜 따라오지 않는가? 가지 않을 사람은 빠져라. 죽기를 각오한 자는 나를 따를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 죽음이 두려운 자는 필요하지 않다." 결국 5대가 다시 출발하기로 했다. 차가 경상대학을 지나 대지가 보일 때 여자 한 사람이 손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누군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서 총을 들고 버스를 세웠다. 여고 1학년생으로 보이는 소녀였다.
"무슨 일이냐?"
"사람이 죽었어요."
그 소녀를 차에 태우고 사람들이 죽었다는 곳으로 가보았다.
버스 1대는 이미 벌집이 되어 있었다. 버스 한 대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총으로 공격한 흔적이 역력했다. 상상도 못 한 광경을 보게 된 것이었다. 버스 기사는 목에 총을 맞고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고 버스는 한쪽 귀퉁이에 처박혀 있었으나, 다행히도 차는 뒤집히지 않았다. 그러나 10여 명의 젊은이들이 피를 토한 채 죽어 있는가 하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얼굴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했다. 그곳 주위는 핏자국과 피냄새로 얼룩져 있었다. 이중 다행히 발목에 총을 맞고 쓰러져 있는 여자 하나를 목격하고 우리 일행과 그 여자만을 차에 태우고 다시 광주로 들어왔다. 맞은편에서 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그 차를 세워 "우리는 현재 목포로 가는 도중인데 여기 급한 환자 1명이 있으니까 데리고 가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라."고 했다. 여자를 차에서 내려주고 차를 돌렸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차를 세우고 다시 의논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 차에는 기관단총 한 대밖에 없었으므로 아무래도 불안했기 때문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숫자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목포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적이 공격해 올 것을 예상하여 외곽지역에서 통로를 차단하고 기관단총으로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모았다.
대동고등학교 정문 앞에 기관단총을 설치하고 공수들이 올 것에 대비했다. 모두 10명이 총을 한 자루씩 들고 무장하고 나는 총 2자루를 들고 서 있었다. 대동고 앞에 설치해 둔 기관단총이 아무리 조종을 해보아도 건너편 주민들의 주택으로 총구가 향해졌다. 더군다나 옥천여상 건너편 00학교 건물에 정통으로 총구가 겨냥되어 불안했다.
아무리 우리가 광주시민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민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결국 마땅한 자리를 찾아 옮기기로 했다. 옥천여상 조금 지나 '해태'상(지역경계표)이 세워져 있는 곳에 다시 기관단총을 설치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파트에서 나온 불빛으로 인해 우리의 모습이 드러날 것 같아 주민들에게 불을 끄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이곳도 문제가 있었다. 근처가 주택가였고 아파트도 있어서 주민들에게 공포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다시 조금 더 외곽으로 나가서 길에 2명, 철로에 2명, 그리고 나하고 또 한 사람은 기관총, M1과 카빈을 소지하고 땅바닥에 베니어합판을 깔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공포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어디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그곳에 일제히 총구를 대고 갈겨대곤 했다. 탄알이 2박스였던 것이 1박스로 벌써 줄어버렸다. 개소리만 나도 바로 인기척이 있는 곳이라 생각하고 그 사람이 누군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두려움에 무조건 쏘아대기도 했다.
새벽 4시가 지나고 점점 날이 밝아왔다. 해가 뜰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끝까지 함께 남아준 5명에게 고생 많이 했다고 격려해 주었다. 우리는 다시 모이자는 약속과 함께 헤어졌다.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5월 22일. 아침식사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8시쯤 도로 주변에 세워져 있는 차를 타고 도청으로 갔다. 도청 앞에서는 군데군데 청소를 하고 있었고 김원갑 씨가 도청을 접수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도청 안으로 들어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았다.
그 사이에 내부에서는 전남대 5명, 조선대 5명으로 학생수습위원회가 구성되고 도청 안과 밖을 정돈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한참 궁리하던 끝에 도청 안에서 활동중인 시민, 학생들과, 밖에서 수습을 위해 일하고 있는 시민들을 위해 식사를 제공해 주는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제격일 것 같았다. 나는 즉시 도청안 매점(지하식당)으로 내려갔다. 이미 몇몇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고, 한쪽에는 음료수 상자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그 밖에 다른 부식도 눈에 띄었다. 또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들도 합세하여 보급 일을 돕고자 했다.
도청은 무질서 그 자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수습위원들도 빠져나가고 도청을 드나드는 사람도 현저하게 불어나 누가 누구인지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얼굴이 자주 바뀌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시민들은 도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12시쯤 수습위원회 회의가 시작되었다. 나는 이때까지도 조직적인 직책을 맡고 있지 않았으므로 회의에는 참여할 수 없었으나 분위기와 이야기를 듣고 대강의 상황은 알 수가 있었다. 수습대책위원회에서는 오전에 회의를 통하여 정부당국에 대한 7개 항목의 요구사항을 결정하였다.
1. 사태수습 전에 군경 투입을 하지 말라.
2. 연행자 전원을 석방하라.
3. 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라.
4. 사후보복을 금지하라.
5. 책임을 면제하라.
6. 사망자에 대해 일체 보상하라.
7.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해제를 하겠다.
수습대책위원회는 무질서한 질서를 잡기 위해 무기를 회수할 것을 결정했고 무기를 반납하라고 설득했다. 총기를 안전하게 보관해 두었다가 비상시에 쓰기로 하고 도청 경비병 외에 모두 총을 수거했다. 회수된 총기는 모두 식당 부근에 두었는데, 몇천 정이 되었고 다이너마이트와 사용할 수 없는 총이 장작더미처럼 쌓여져 있기도 하였다. 또 한쪽 귀퉁이에는 뇌관이 상당량 있었으므로 위험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뇌관처리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다가 화순탄광의 기술자를 불러 처리한다는 등의 말이 있었지만 결국 상무관에서 폭약전문가가 들어왔다. 뒤늦게야 안 사실이지만 상무관에서 폭약전문가가 어떻게 도청 안에까지 잠입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총기를 보관한 곳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고 무기처리반에서 담당하였으며 삼엄한 통제도 이루어졌다. 김창길 씨만 상무관에서 온 폭약전문가를 아는 것으로 나는 당시 알고 있었고 나의 분야 외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아, 밥은 잘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5월 23일. 나는 계속해서 식당에서 도청 안에 있는 3백여 명이 먹을 수 있는 밥과 국을 준비하면서 지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거의 매일 무엇을 하였는지는 기억하기가 힘들다. 다만 이날은 수거된 총기 중에서 2백자루 정도를 정부측에 넘겨주고 구속되었던 사람들 중 30-40여 명이 풀려났다.
5월 24일.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온건파와 강건파의 의견대립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하게 나타났다. 계엄당국에 대한 요구사항에 대하여 김종배와 김창길간에 무기반납 문제를 둘러싸고 팽팽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김창길은 "만약 우리가 무기를 자진반납하지 않으면 계엄군이 무력으로 진압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이야기했다.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면 광주시민 전체가 몰살당해 피바다가 될 것이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무기를 반납하도록 하자." 이에 맞서 김종배는 "우리의 요구사항이 전혀 관철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기를 반납한다는 것은 시민들의 피를 팔아먹는 행위이므로 무기반납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면서 우리의 요구사항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두 의견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뿐만 아니라 수습위원회나 도청 안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의사를 제대로 밝히지도 못했다.
심신이 극도로 피곤해 회의진행중 조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부측에서는 26일을 기해서 어느 누구도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김종배가 "선보장 후대책"을 서면으로 보장해 달라고 계엄군 소장에게 요구했으나 말로만 구속되지 않게 해주고 장례식도 도민장으로 치러주겠다고 할 뿐 증서를 만들어줄 수는 없다고 했다. 나는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현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한 해 보자!!"고 말했다.
이날 수습대책위원회의 기구가 개편되었다.
위원장 : 김창길
부위원장 겸 총무위원 : 황금선
부위원장 겸 장례담당 : 김종배
상황실장 : 박남선
경비실장 : 김화성
기획실장 : 김종팔
홍보부장 : 허규정
나는 솥단지 3개와 큰 버너로 하루에 한 가마 이상의 밥을 지었다. 야간경비병을 신속 정확하게 외곽지역으로 보내기도 했다.
5월 25일. 이날은 '장계범 독침사건'이 일어났던 날이다. 오전 8-9시쯤 장계범이란 사람이 "독침을 맞았다"고 소리쳤다. 어떤 사람이 웃옷을 벗긴 채 상처부위에 입을 대고 몇 번 빨아내는 시늉을 하였고 대기해 두었던 차로 전남대병원으로 급히 실어갔다. 독침을 맞았다는 사람은 이날 오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과적으로 '장계범 독침사건'은 조작극이었다.
수습위원회의 갈등이 심화된 상황에서 간첩이 침투했다는 소문은 도청 안의 질서를 걷잡을 수 없이 혼잡하게 했다. 더 이상 불안을 견딜 수 없어 도청을 빠져 나가는 사람도 많았으며, 도청 내부의 일을 맡은 사람들 사이에는 불신이 팽배해졌다.
그리하여 집행부 일원은 '증'을 발행하여 이를 소지한 자만이 도청을 자유스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증'은 빨강색을 두 줄 대각선으로 그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신분증이었다.
내가 맡았던 보급 일도 점점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인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상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도저히 사람을 뺄 수가 없다면 2사람씩 교대로 도와줄 것을 요구하자 이를 받아주었다.
저녁 무렵에 간사 2명이 부엌일을 도와주려고 식당으로 왔다. 나는 이들에게 웃으며 물어보았다.
"밥 할 줄 아세요?"
"아, 밥은 잘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는 목장우유를 가져다주었다.
저녁식사 준비가 끝나갈 무렵(아침까지 준비하게 되므로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밤 8-9시쯤 하나밖에 없는 대형 버너가 고장이 났다. 총무에게 버너가 고장이 나서 새로 구입을 해야 겠으니 20만 원을 달라고 사정했다.
상황실에서 연락이 왔다. 방림동에서 쌀을 가져가라는데 차가 없어서 가져올 수 없다며 나더러 기동타격대 차를 타고 쌀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즉시 기동타격대 차를 타고 방림동으로 가보았다.
방림동 약사 한 사람이 중대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대장을 만나 정중히 부탁했다.
"나는 현재 도청에서 보급부장을 맡고 있는데 버너가 고장이 났으니까 밥을 좀 해 주었으면 합니다."
"좋습니다. 해드려야지요."
그는 자기 부인에게 전화를 하고는 가볍게 승낙해 주었다.
"연락만 해주시면 차로 실어가겠습니다."
나는 버너 때문에 곧 도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후에 그 중대장은 나를 강도로 매도했다. 내가 총으로 사람들의 배를 위협하고 쌀 내놔라며 갖은 협박을 했다는 것이다. 엉뚱한 모함에 기가 막혔다.
설령 내가 지금 죽는다 할지라도……
5월 26일. 오전 일찍 버너를 사러 나섰다. 가까운 금동시장에서 부식도 사고 콩나물도 샀다. 버너를 사기 위해 시내를 돌아다니던 중 시민관 건너편에 있는 버너가게에서 쓸 만한 버너를 구할 수 있었다. 돈을 지불하고 영수증을 받고 주인에게 설치해 달라고 요구하자 도청 안으로 버너를 운반하여 설치해 주었고 하루 종일 친절하게 다른 일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오전에 나갔다가 오후에 돌아와보니 도청의 상황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수습대책위원회 기구와 사무실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위원장 : 김종배
부위원장 : 정상용
부위원장 : 허규정
기획실장 : 김영철
민원실장 : 정해직
기획위원 : 윤강옥
나는 위원장 김종배에게 찾아갔다.
"아이고 위원장, 어떻게 된 거요? 나는 조직이 바뀐 거라 생각하고 그만두겠소. 모두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그만 해야겠소!!"
"무슨 말인가? 자네가 지금하고 있는 일을 계속해 주게." 윤강옥 형 등이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나는 계속 보급부장 일을 하기로 했다 . 주방장 한 명을 붙여주었다.
주방 안에는 조그만 부식창고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가끔 한숨 자고 나오기도 하였다. 이날 나는 점심시간에 할일을 다 마치고 너무나 피곤하여 부식 창고로 들어가 한숨 자고 있었다. 김창길, 김화성이 식당으로 내려와서 점심을 먹고 있다가 자고 있는 나를 깨웠다.
"27일 0시를 기해 광주시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최후통첩이 왔는데, 어떻게 할 것인지 회의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더욱더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도청 2층 회의실에 들어가 회의에 참가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싸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새벽에는 화정동에 있는 계엄군들이 한전 앞까지 쳐들어왔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아침 8시경에는 김성용 신부를 비롯하여 많은 시민들이 시가행진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이들은 금남로-유동 삼거리-양동 복개상가-돌고개-공단 입구로 나아가면서 '계엄군 물러가라', '광주를 지키자', '우리는 최후까지 싸운다' 등의 구호와 함성을 질렀다 고 했다.
도청 안 회의실에서는 김창길과 김종배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김창길은 "계엄군이 쳐들어오니까 빨리 빠져나가라"고 이야기하면서 도청 부근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김종배는 이를 강력히 제지했다. 결국 김창길은 마지막으로 나에게 연락처를 적어주면서 "연락해라" 하는 말을 남긴 채 도청을 떠났다.
나는 어쩌면 오늘 죽을지도 모르는 목숨이라는 것을 느꼈다. 착찹한 마음으로 식당으로 돌아와 나의 일을 서둘렀다.
설령 내가 지금 죽는다 할지라도 나의 임무를 방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싸움을 하더라도 식사는 해야 하니까 다음날 아침분까지 식사를 준비했다.
밤 12시쯤 되자 식사준비가 완료되었다. 나는 마침 도청 안에 남아 있던 고등학생들이 걱정이 되어 모두 한곳으로 모았다. 상황이 위험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한곳에서 함께 자도록 하고 서둘러 부르면 민첩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하고 나는 상황실로 갔다.
상황이 위급하기도 했지만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의자에 앉아 있기만 하면 졸음이 쏟아졌다. 상황실에 보고되어 오는 것을 체크하고 때때로 외곽지대에 사는 가정집으로 연락을 취해 보기도 했다. 혹시라도 계엄군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동타격대원들을 풀어 분위기를 살피게 했다 .
오도 가도 못 하는 그물에 걸린 고기 신세
5월 27일. 1시가 넘자 드디어 결전의 시각이 왔음을 알리는 비상이 걸렸다. 월산동, 까치고개, 서방 삼거리 쪽에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모두들 떨리는 가슴을 조이며 민첩하게 움직였다. 홍보차가 방송을 계속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읍니다. 광주를 지킵시다. 도청을 사수합시다."
처절하고도 애절한 목소리로 절규했다. 도청 안에서는 일제히 총을 받아 쥐고 정렬하였고 전투태세를 갖추기에 여념 없었다. 그런데 쌓여 있었던 TNT 뇌관이 보이지 않았다. 만약에 계엄군이 들어오면 무조건 TNT를 폭파시켜 자폭해 버리자고 했는데 상무관에서 온 전문가라는 자가 아무도 모르게 뇌관을 치워버린 것이었다. 모두들 긴장과 긴장이 더해지는 순간에 말하지는 않았지만 오늘 죽더라도 끝까지 싸우자는 다짐을 하면서 조직적으로 조를 짜고 배치해 나갔다.
YMCA 안에는 2백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도청 안에서 죽을 각오로 싸울 사람은 도청으로 들어오라"고 누군가가 소리치자 1백여 명이 도청으로 들어왔다.
지원자 중 나이가 어리다고 생각되는 학생은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가까운 집으로 돌려보내고 남은 학생이 1백명이 된 것이었다.
당시 군대에서 장교를 지냈다는 지원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몇 사람과 함께 계림동 쪽으로 배치되었다. 그 사람들이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하여 비상식량과 빵과 음료수를 갖다주었다. 몇몇 고등학생이 "나는 콜라 주세요", "나는 환타 주세요" 하고 손을 벌렸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죽기를 각오해야 할 전쟁터에서 그런 사치스러운 말을 하다니 용납할 수 없는 자세를 보고 무섭게 나무랐다.
보급부는 나를 포함하여 한일은행 앞으로 무장하고 갔다. YMCA, 전일빌딩 옥상에는 LMG 기관단총을 설치하였다. 몇 시쯤 되었을까? 공수부대가 금남로로 탱크를 몰고 당당하게 들어서는 것이 시야에 보였다. 어느 누가 지시하기도 전에 모두 고개를 뒤로 제치고 총구만 들이댄 채 적을 향해 쏘아댔다. 무엇을 쏘고 있는지 조차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위기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무조건 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이 탱크를 이길 수는 없었다. 우리는 밀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와 김화성, 그 외 5명이 부근의 건물 거북장이라는 곳으로 가서 문을 두들겼다. 다행히도 할머니가 문을 열어주었지만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총기를 모두 싸서 마루 밑에 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아들에게 무어라고 전화로 중얼거렸다. 방에 앉자마자 총소리가 났지만 피곤해서 모두들 깊은 잠에 빠졌다.
"폭도군은 모두 물러갔다. 시민들은 나오지 말고 폭도는 자수하라"는 헬기 방송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식은밥에 라면을 끓여 주어서 식사를 허겁지겁 마치고 수염을 깎고 세수도 하였다. 아무 것이나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밖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조심스럽게 골목으로 나가보았다 .
거리는 너무도 조용했다. 군인도 없고, 그러나 건물 옥상 곳곳을 군인이 점령하고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이라고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우리는 그물에 걸린 고기 새끼가 되어 버렸구나' 생각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궁리했다. 그사이에 할머니가 자기 아들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 아들 말이 "좋은 말 할 때 자수해라. 12시까지 자수하지 않으면 신고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김창길에게 전화를 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어디에 있느냐는 말에 이곳 장소도 가르쳐주었다. 도청으로 가겠다 했지만 어차피 모두들 잡힐 것이다 하여 불안해 하고 있다고 전화를 끊었다.
화염방사기로 인해 타버린 윤상원 열사
얼마 후 계엄군이 총을 들고 우리가 숨어 있는 곳으로 쳐들어왔다. 김창길이 계엄군에게 장소를 가르쳐준 것이었다. 나, 장성 사람, 박철, 김화성 등 7명이 계엄군에게 붙잡혀 밖으로 나갔다.
처음에는 "잘 나오셨습니다." 하면서 정중하게 이야기했고 토닥토닥해주기도 했다. 금남로에서 1개 중대가 호위를 하고 도청의 2층 조사실로 붙잡아갔다. 조사를 받으면서 보니 분수대 주위에는 기자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도청 안 구석구석까지 핏자국이 보였으며 벽과 바닥에는 총구멍이 나 있었다. 창문이 깨지고 캐비닛과 책상, 의자는 나동그라져 있었다. 우리 일행이 붙잡혀갔을 때는 공수들이 물청소를 하고 있었다. 공수 중 한 사람이 "집행부의 누군가가 있는 것 같으니까 가서 확인해라"고 했다. 얼른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 윤상원의 시체였다.
가슴에 총 구멍이 하나 나 있고 화염방사기로 죽은 흔적이 역력했다. 온몸이 까맣게 탄 상태였다.
조사가 끝나자 도청 안에 대기해 둔 트럭에 실려 그때부터 공수들에게 얻어터지기 시작했다. 7명의 계엄군에게 세상에 태어나 두 번 살아도 다 못 맞을 만큼 두들겨맞았다. 상무대로 끌려갔다. 트럭에서 내렸을 때는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리자마자 포복하기 시작했다. 영창 안으로 들어갔는데 운동장처럼 넓었다.
상무대 체격단련장에서는 이름을 알수 없 는 기가 막힌 벌을 받았다.
27일 저녁 김영철(기획실장)은 간첩으로 몰려 "나는 간첩이 아니다"고 외치면서 벽에 스스로 박치기하여 쓰러졌다. 머리가 깨졌고 피가 쏟아졌다.
5월 28일. 공수들이 영창 안으로 들어와서 나를 '보급부장'이라고 찍고 두들겨팼다. 온몸이 축 쳐지고 혼수상태에 빠져 정신이 오락가락하였다. 이날 보안대로 넘어가 다 시 조사를 받았다. (조사.정리 안은정)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