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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者必滅(생자필 멸), 會者定離(회자정리)라 여한은 없어
정운종
간암 3기 판정을 받기까지
내가 간암에 걸리리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다. 어쩌다 말기에 가까운 암 덩어리를 안고 살아야 했는지 간암 3기 진단을 받으면서 절망감보다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덤덤한 마음으로 병원을 들락거렸다. 내 나이 이제 87세, 살 만큼 살았으니 미련은 없으나 진통이 계속되다 보니 자연 병원을 찾게 된 것이다.
사실 간암 진단을 받기까지는 거쳐야 할 여러 단계가 뒤따랐다
처음엔 위쪽에 문제가 있지 않나 해서 심장전문의는 위 내시경 검사를 받아보면 어떠냐는 것이었고 전문분야가 다르다 보니 정확한 진단 내리기를 망서렸다.
내 생각에도 처음엔 위보다는 췌장이나 콩팥 쪽이 말썽을 부리는 것 같았다. 병원 예약이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 좀 지명도가 높다는 의사를 만나려면 거의 한 달은 기다려야 예약이 가능했다. 그래서 응급처방으로 응급실 부터 찾고 보자는 생각에 일산병원 응급실로 직행, 여기서도 검사과정은 복잡하고 고통스러웠다. 의사 면담까지 한 시간은 기다린 끝에 피 뽑고 혈압 재고 소변검사, 한 시간은 기다려 의사를 만나니 입원은 안 되고 진통제와 간단한 링겔 주사만 맞고 나가서 내과 전문의를 찾으라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10시에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고 아픈 배를 안고 의사 면담, 위장약만 한 보따리 받아들고 집에 오니 거의 초 죽음 며칠 동안 먹지를 못 했으니 몸은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진 몰골로 귀가했다. 내 증상을 정확히 진단하려면 우선 초음파 검사가 첩경일 것 같아 자식들이 백방으로 수소문 백석동 영상의학 병동을 찾아 검사를 하게된다. 두 어 시간 후 의사의 판독 결과는 간 쪽에 악성종양 덩어리가 있는데 캔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찾은 곳이 백병원, 간 전문의사를 만나기 위해 일산 백병원 김경아 교수와 조우 했다. 김 교수는 바로 mri 검사를 권유했다. 다음날 바로 mri검사. 다시 1주일 후 진료예약, 40여분 동안 숨을 드리 쉬였다 내쉬고 정지를 거듭하는 동안 비교적 순조롭게 검사를 완료. 결과를 보려면 또 이틀 뒤에 오란다.
이틀 뒤 드디어 mri 판독 담당 의사를 만난다. 결과는 간암 3기, 영상을 직접 보여주며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내 육안으로도 간 3분의 2 정도가 암세포로 멍든 것이 확연하지 않은가. 나이가 많아 수술은 어렵고 항암 치료 방법으로 방사선 치료는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것도 임시변통 완치는 여렵다는 결론이다. 그래도 방사선 치료를 원하면 방사선과 의사와 상의 하란다.
다음날 방사선과 의사 면담, 이날은 굶지 않고 가니 기력은 다소 호전되는 느낌이었다.
방사선과 의사도 친절하게 영상을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하는데 절개 수술로 간을 이식하는 방법이 있긴 한데 나이가 있어 권유하기 어렵다는 소견이다. 정 방사선 치료를 해보고 싶다면 일정을 잡아보겠다는 반응.
나는 결심했다. 말기에 가까운 암 덩어리를 없애야 하는데 그놈 잡으려다 거의 망가질 대로 망가진 콩팥도 문제고—이제 살면 얼마나 살 것인가.
몇 년 더 살려고 초 죽음이 되어 검사를 받느니 통증이나 참으면서 몇 달 더 연명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식 들은 치료를 더 해 보는데 까지 해보자며 방사선 치료를 강권했지만 나는 결코 반대였다. 입원이 어렵다면 요양병동에서 요양도 할 겸 암과 투쟁하며 살다 가는 것이 나로선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쾌적한 운정한강요양병원에서 질 좋은 식사를 하며 며칠 있으니 원기도 호전되어 가는 기분이다,
암 전문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병원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서울서 먼 거리도 아니고 주변에 호수공원이 있어 산책도 가능했다. 기력이 좀 회복되면 찾을 생각이다.
암병동이라지만 전문적인 치료는 거의 백병원 아니면 국립암센터 동국대 병원을 찾아야하니 다소 불편하긴 하다.
한 1주일 입원하고 느낀 점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요양병원은 아닌 느낌이다. 우선 식단부터가 세밀하게 신경을 쓴 흔적이 역역했다. 환자들의 건강을 고려해 끼니마다 영양가 있는 반찬이 오르내린다. 과일은 기본이고 고구마 옥수수 사과 쥬스 삶은 겨란도 빠지질 않으니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입원실 환경이나 시설도 다양하다. 휴게실 상담실 샤워실 세탁실 자유자재로 이용이 가능하다. 필요하면 외출도 가능하고 건물 주변엔 온갖 먹거리가 즐비하다. 밥맛이 없으면 외식도 자유롭다. 심산유곡에 자리한 요양병원과는 다르지만 비교적 조용한 편, 모두 들 시한부 인생(?)을 사는 환자 같지 않게 삶의 의욕이 넘쳐 난다. 병실은 1인실 4인실 6인실 원하는 대로 선택 할 수 있다.
간호사들도 친절미가 넘쳐난다.
며칠 입원하는 동안 밥맛도 돌아오는 느낌, 허약해진 몸이 조금은 생기가 도는 기분이다. 지팡이를 짚고서도 걷기가 힘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려면 몇 번이고 쉬어야 했던 며칠 전 보다 넘어지지 않고 병원 복도를 걸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자식들은 빨리 기력을 회복해 방사선 치료라도 해보자며 9월 3일 진료 예약. 내 의견은 안중에도 없다.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90이 내일 모래인 고령인 내 나이에 며칠을 더 살겠다고 무슨 방사선 치료란 말인가. 그것도 한방에 효과가 있다면 모르지만 항암 치료를 받다 초 죽음이 되어 명을 단축하기보다 편안히 살다 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란 소신엔 변함이 없다.
방사선과 의사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지만 90 가까운 나이에 무리하게 치료하다 명을 단축한다면 처음부터 안 하는 것이 상책이다.
간이란 다 알려진 얘기지만 우직한 존재라서 아프다는 신호를 보낼 때는 이미 때는 늦다. 밥이나 제때에 잘 먹고 네가 이기느냐 내가 이기느냐 이판 사판으로 싸울 때까지 싸워 볼 밖에----
돌이켜 보니 살 만큼 살았고 자식으로 태어나서 내가 할 도리는 다하고 갈수 있어 아주 홀가분한 느낌이다. 5대조 산소에 합동 추모비를 세워 그 많던 제사를 합동으로 모실 수 있게 했고 심산유곡 남의 땅에 모셔져 있던 부모님 산소를 개나리 공원에 이장, 가족묘지를 조성했으니 한동안 자손들 유택 걱정은 안 해도 되니 이 또한 자화자찬 같지만 내 할 도리를 하고 생을 마감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디 그뿐인가. 이세상에 딱 한질밖에 없는 증조부 진재(휘 혼 고종조에 김화현감을 지내다) 유고 전5귄을 초역 출판했고 그방대한 부피의 족보를 요약해 영일정씨 문중요람을 펴낸것도 나로선 자손된 도리를 한 것이지만 큰 보람이다.
약골이지만 강단으로 버틴 87년
나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약골이었다. 젖을 제대로 못 얻어먹고 자란 탓인지는 몰라도 새 다리에 불면 날아갈 듯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졸업식 날 수석 졸업장을 받으러 복도를 걸어 나가는 나를 보신 아버님이 제가 커서 과연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할지 모르겠다며 울먹이셨다니 지금까지 건강하게 산 것만도 천운이 아닌가 싶다.
몰골은 이랬지만 초등학교 졸업 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왕복 60리를 걸어서 통학을 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엔 이런저런 산행으로 강단을 키웠으니 타고난 약골도 단련하기 마련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자화자찬이지만 나의 등산 경력도 화려하다면 화려하다는 생각이 든다. 6년을 걸어서 하루 60리를 걸은 것도 산행의 기초체력을 제공했겠지만 취미삼아 오른 산행 기록을 책으로까지 엮을 정도로 열심히 오르 내렸다. 산 따라 45년(대한언론인회 출판) 산이 좋아 25년(경향OB산악회 발행) 모두 거의 나의 산행기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본격적인 산행 시작은 제천향우회 산악회, 허영호 동문의 마나술루 정복을 기념해 관악산에서 축하 겸 기념 산행을 시작할 때 내가 총무로 심부름을 하다 회장 감투까지, 꽤 오랫동안 이 산악회를 이끌어 왔다.
이 무렵 나의 등산 욕구를 증폭시킨 것은 바로 충북협회 산악회 안병길 회장의 권유로 전국산하를 돌며 시산제를 거창하게 올릴 때 내가 축문을 써 낭독하니 갑자기 지명도가 높아졌다.
충북협회 산행기록도 모아 책을 엮으니 ‘청산은 날 보고 오라 하네’ (강신용 이종락 정운종 공저) 높고 낮은 산을 오르내리며 열심히 기록으로 남기니 이또한 크나큰 보람이 아닌가. 안병길 회장은 이 책을 회원들에게 나누어 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몸 둘 바를 몰랐다.
아뫃든 내 약골 체질로 이렇듯 산을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산행의 즐거움도 컸지만 내 다리가 아직은 쓸만함을 만천하에 고지한 것으로 산행으로 다진 몸이 간암 정도로 무너져서야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다.
이런 저런 산악회는 나에게 고향의 맛을 만끽하게 했고 산행을 같이한 동료들과의 끈끈한 우정으로 하여 사는 맛을 느끼게 했다. 오를 때 정복의 쾌감을 만끽한다면 하산 할 때의 성취감이란 산을 오른 사람만이 느끼는 희열이다.
가까이는 금수산 용두산 정상에서 고향의 맛을 느꼈다면 월악산 영봉 한라산 백록담, 백두산 천지, 설악산 울산바위, 곤륜산 등반 태백산 줄기 줄기에서 체력을 확인했다. 청량산 출렁다리 한탄강 주상절리 단양팔경에 감탄했고 의림지 맑은 물가에선 어린 시절 소풍와 도시락을 까먹던 생각으로 말문을 닫아야 했다. 등산전문가는 아니지만 오르고 싶은 산은 거의 섭렵했으니 늙어서 이 몰골이 될 줄은 꿈엔들 알았겠는가.
만나면 헤어지는건 자연의 섭리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열반(涅槃)에 드실 때, 제자에게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 라고 설파했다. 즉, “사람이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 “산 사람은 반드시 사라지고, 만나는 사람은 당연히 이별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란 말이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관계, 사람이 한평생을 살다 반드시 갈 날이 오게 마련이니 나도 이런 자연법칙을 어길 재간은 없지 않은가. 편작이 열이 온 들 이미 갈 때가 된 사람을 붙잡을 수 없고 진시황의 불노초도 그때나 지금이나 백약이 무효임을 어쩌겠는가.
연인도,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결국은 회자정리(會者定離)라 언젠가는 떠나야 할 사람들이다. 그 시기가 길고 짧을 뿐 결국은 왔다면 가야 한다.
그러니 나도 숙명으로 알고 버티다 부르면 갈 작정이다.
세월은 정말 쏜살같이 흘렀고 90평생이 한순간이다. 찰나 란 이런 것인가. 우리의 만남은 찰나에 불과했고 몇천 년을 더 산다 해도 결국은 없어지게 마련, 인연(因緣)으로 엮어진 모든 것들의 본질(本質)이 그런 것이라 생각하니 슬퍼 할 것도 억울 해 할 것도 아쉬워 할 것도 없다.
한평생을 살면서 무수한 사람과 만나고 이별을 겪으며 살았으니 이별이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고 이별이 없는 만남도 없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많은 인연 속에 맺은 끈끈한 정을 내려놓아야 하는 슬픔이다. 다정한 벗 이웃, 가족 친지 간에 한평생 나누던 정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서글프고 서글플 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유난히 많은 분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다. 신아일보 조사부 기자로 한창 스크랩북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장기봉 사장이 나를 불러 사설을 쓰게 한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았고 신아 15년 동안 논설실을 지킨 보람 있어 경향신문으로 옮겨서도 인덕이 있어서인지 동료들로부터 남다른 사랑을 받아 정년 때까지 무해 무탈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한방에서 동고동락했던 지용우 이광훈 박노경 이강걸 최낙동 장명석 최용길 이춘송 문영웅 구건서 조규진 이용승 이정세 이상호 허경구위원 모두 뭐가 그리 급한지 일찍이 세상을 하직 했으니 오호! 통재라 세상이 이렇게 무심하고 매정할 수 가 없다.
회사선 그렇다 치고 제천고 동기동창 대학 동기들 또한 타계한 분이 부지기수다. 유난히 다정했던 강신용 송동일 이명섭 한상우 김진억 이재선 김봉규 윤성한 엄인호 이원현 정운영 정운주 장남희 이진호 허영청 김성규 오상락 권용하 모두들 이 세상에 없다. 제주도로 이사가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깨가 쏟아 질 듯 여생을 행복하게 지내던 이재선 동문은 치매에 걸려 5년 전 갑자기 집을 나간 뒤로 종무 소식이다. 사람이 살다 이런 날벼락이 왠 말인가. 이들보다 몇 해를 더 살았으니 나로선 큰 행복이지만 저승에 가서나 만날는지 하나같이 보고 싶은 얼굴 들이다.
대한언론인회에서도 정만 잔뜩 주고 떠난 분들이 한둘이 아니다. 한창 의기투합해 대한언론인회의 기반을 정착시킨 김광섭 이혜복 선생님을 비롯 매우 역동적으로 일했던 제재형 홍원기 김은구 한기호 회장을 비롯, 함께 동고 동락 했던 문명호 송두빈 김준하 김건이 오건환 김의수 이종기 송효빈 선생과도 각별했으나 저승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오라 손짓하는 것만 같다.
유명을 달리한 많은 신아일보 동료들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다. 100수를 넘기신 윤임술 선생(작고) 앞에서 서둘러 저승길을 택한 임승준 김경섭 정도현 이왈수 박환수 유승택 임덕규 호영진 장기효 김길홍 윤종보 김왕석 천상기 조규석 이영희 김인수 전규삼 권동섭 장상섭 김익진 박용정 이방원 배한용(촘배) 주길치 모두들 기라성 같은 신아의 동량들이었다. 장기봉 사장도 좀 더 사실 나이에 유명을 달리 하셨다. 신아 조사부에서 밤늦도록 스크랩북과 씨름했던 김형심씨는 경향으로 옮긴지 한 달도 안 돼 말없이 가버렸다. 부부동반 모임도 가졌는데 소문 없이 가고 나니 이 또한 회자정리라 좀 일찍 헤어졌을 뿐이다.
대학 동기들도 거의 가고 없다.1957년 성대법정대 법률학과엔 120여명이 입학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은 한 10여명 생존했으니 인생무상 이보다 더할 수가 없다. 최 고령자 유철상동문은 지하철 계단에서 쓰러져 일찍이 세상을 떳고 김홍범 홍순진 박치형 김병현 서영언 이형국 김행원 권병완 성유경 이진홍 조창래 지병억 모두들 다정다감했는데 하늘나라로 훌쩍 가버렸다. 남달리
자존심이 강했던 장흥순동문도 간경화로 고생하다 미국서 부음을 전해 왔다.이형국동문은 신동욱 학장 밑에서 함께 형법을 전공 했는데 졸업후 하이델 베르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해 경희대 연세대에서 석학으로 지명도가 높았다. 말년엔 학술원 회원까지 노후가 찬연했다고 믿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알츠하이머로 길을 걷다 버스에 부딛혀 와병중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대학 동기중 몇 명은 살아 있어도 요양원 신세를 지는지 전화도 불통이고 종무소식 윤영석 김종만은 근래까지 소식을 교환했는데 최근엔 연락 두절이다.
같은 동기는 아니지만 재학중 줄곧 근로학생 장학회에서 동고 동락 했던 김유성동문은 내 호까지 직접 지어 주었는데 장학회 회장으로 남의 등록금을 대신 내주느라 같은 해 졸업도 못하고 끝내 경희 한의대로 가서 한의사가 되어 대구대학에서 강의 중 쓸어져 쓸쓸이 생을 마감했다. 돌이켜 보니 친형제 이상으로 가까이 지내며 자주 만나 술잔도 기울이며 포효하던 세월이 엊그제 같다. 워낙 성실해 당시 김제원 신진자동차 사장과 가까이 지내며 보좌관 노릇을 톡톡히 했었다. 코로나 자동차가 처음 나왔을 때 나에게 사설까지 부탁해 내딴엔 성심껏 집필했던 기억이 새롭고 김제원 사장이 경향신문을 맡아 경영 했을 때도 비교적 자주만나 술잔을 기울였고 한번은 신아논설실 전원이 경인고속도로 개통기념으로 인천행. 밤새도록 놀다 통행금지에 걸려 인천서 일박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떴을 때 경기도 포천 장지에서 만난 애숭이 어린 상주가 눈에 아른 거린다. 지금쯤 장성해 어디서 큰 재목으로 일하고 있겠지만 한번도 보살펴 주지 못한 것이 후회 막급이다.
이원석 교수 밑에서 상법을 전공했던 엄영진 선배는 일찍이 전주대학교 총장 까지 올랐는데 갑자기 세상을 떴고 정봉휘교수도 한창 살 나이에 이승을 하직했다.
그러고 보니 사는동안
주례도 많이 서봤고 조사도 자천 타천 여러번 쓰고 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 중고 시절 별명은 금성촌놈 누가 붙였는지 나의 몰골에 딱들어 맞는 닠네임이 아닌가 백번 들어도 싫지가 않다.
그러고 보니 작은처남 큰처남 모두 한창 살나이에 세상을 떴으니 이래 저래 나만 오래 산 꼴이다.
잦은 문병에 뜻밖의 희소식도
병원에 입원하고 보니 가족들은 물론이고 소식을 들은 친인척 친지들의 병문안이 잦았다. 실인심은 안 한 모양인지 적지잖게 위로금도 답지했다.
제일 먼저 제천 아우 남매 부부가 달려왔고 증평서는 둘째 수씨와 조카들 남매가 먼 길을 마다 않고 상경했다.
서울 와 한솥에 밥을 먹던 신아일보에서는 김용발 사우회 회장과 장항만 사장이 입원소식을 듣자마자 거금을 들고 와 나를 감격 시키니 몇 십년 전 신아에서 고생한 보람인지 만감이 교차했다. 한주에 두 세번 만나 식사를 같이했던 편우회 최귀조 안종우 친구도 물어 물어 병원을 찾아 식사를 함께하니 이 또한 살아있는 보람이 아닐 수 없다.
유난히 정이 많은 김성묘 경향궁산책 회장을 비롯 경향텃밭을 함께 일궜던 유병희 회장과 오래동안 출판관계로 자주만났던 태봉출판사 조성한 사장과 박서연 전산실장도 먼길을 마다않고 병원을 찾아와 쾌유를 빌었다. 황우연 경향신문 사우회 회장 ,
장옥 자문워원, 안순영 성법 57동기회 회장과 최돈문 장섭운 동문, 정성근 양수회(고 신동욱 선생님을 추모하는 모임) 회장,
4.6회 장석주 회장, 정이훈 총무, 큰딸 친구 송윤지 공인중계사, 남진애 심리상담사,삼김모임의 성낙오 박문두 전용호회장, 국방일보 모임의 김용언 송선무 최형익회장등 하나같이 눈물겹도록 고맙다.
90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찾아오신 한국유림총연합 안명호 총재님과 박규을 상임고문께도 머리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한유총과 나는 30년가까이 의기투합, 정도병례 도덕재무장 유림총화를 위해 3군자공보를 발행하며 동고 동락했으니 더욱 각별한 관계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내가 갑자기 이모양 이꼴이 됐으니 이또한 인연을 다한 탓인가 허전하기 이를데 없다.
제천서도 종친회 임원이 왔고 서울 종친회 임원들과 월림친목회 회원들도 먼 길을 찾았다.
모두들 빈손으로 오지 않고 금일봉에 음료수 복숭아 사과상자까지 들고 왔으니 나로선 정말 과분한 대접을 받은 셈이라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한가지 감격적인 소식은 봉화 와선정에 내가 쓴 시 ‘와선정 음’(臥仙亭 吟)편액을 걸 수 있게 한다는 것, 이 시는 몇 년전 봉화 태백오현 학술회의를 다녀와서 쓴 시인데 주로 태백오현의 우국충정 굳은 절개와 빼어난 와선정 풍광을 읊은 것으로 내 딴엔 심혈을 기울여 쓴시다. 와선정에 내시가 걸린다면 제천 종친회는 물론이고 가문의 영광으로 자손 대대로 빛날 경사가 될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하늘이 도우셨는지 내가 심혈을 기우려 집필한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지켰다,가 국방부 진중문고로 선정됐다소식을 듣고 나는 꿈인가 생시인가 귀를 의심했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선정된 이 문고가 전국 방방곡곡 국군장병들에게 선보일수 있게된것은 말그대로 진인사대천명,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말로 그 기쁨을 대신하고 싶다.
외손녀 김현진 양은 생각지도 않은 삼성노트북까지 선물해 나를 감동시켰다. 병원에서 소일거리론 안성맞춤이라 손녀딸 성의를 봐서도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용기가 절로 솟는 기분이다.
병원을 찾은 친지들을 대하니 죽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번 볼 수 있어 기뻤고 살아서 한 번 더 정을 나누었으니 죽고 난 다음 부고를 보내봐야 얼굴 한번 대할 수 없을 테니 하늘은 나에게 큰 시혜를 베풀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 동창 이준원 군은 그 나이에 손수 차를 몰고 인천에서 달려왔다. 빈손도 아니고 그 비싼 흑염소 다린 한약 한 상자를 들고 왔다.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1970년대 신아일보 논설위원 때 톡톡히 신세 진 일이 있어 늘 미안했다며 이실직고. 내가 도움 준 일이라곤 기사 몇 줄 부탁해 억울한 일을 대변해 주었던 모양인데 두고 두고 고마워 하다 큰 마음 먹고 문병을 결심하게 됐다니 이 또한 나로선 뜻 밖이다. 물건도 과분하지만 60여년 전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니 살맛 나는 세상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긴 1970년대 그 가난했던 시절 모두들 보리 고개를 면치 못하고 있을 때 서울 학교에 시험을 보려면 서울 친척 집을 찾는 것이 거의 관행처럼 생각되던 때 한 3일 묵었다고 그것이 고마워서 금일봉을 전달한 제택 종친도 있었으니 그 끈끈한 우정은 필설로 다 표현키 어렵다. 종친 간이나 같은 할아버지 자손 당연히 할 노릇을 했는데 그것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진정한 의미의 숭조돈목이란 이를 두고 일컫는가 싶다. 영일정씨 문중요람을 내게 된 동기가 여기서부터 싹튼 것임도 책 속에 밝힌 바 있다.
사실 장례식장을 여러 번 다녀 보았지만 고인의 영정을 뚫어지게 바라본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살아서 한 번이라도 얼굴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르겠다.
요양병원의 한계
한강요양병원에 입원한지 두달, 이곳은 시설이나 주변환경은 흠잡을데가 없지만 위급상황 발생시 대처능력이 부족한것이 문제였다.
할수없이 일반병원 신세를 저야하니 복잡하기 이를데 없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옮긴 병원이 파주의료원, 여기선
집중치료도 가능하고 위급시 대처능력이 있어 집가까운 경기의료원 파주병원 호스피스(완화병동) 병동으로 옮기게 된다.
또한가지 유리한점은 바로 호스피스병동에서 안락하게 임종을 마지할수 있어 다른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호스피스 병동도 옛날 죽으러 들어가는 곳이라는 인식도 확달라졌다. 환자에대한 집중치료에서부터 간호사 간병사가 상주하며 캐어하고 있으니 열아들 부럽지 읺다.
생각해보니 자식들과의 합의가 좀 힘들었지만 이생명 다하도록 국가가주는 혜택을 마음껏 누리며 남 은인생 고통없이 가고싶다.
남는 건 결국 가벼운 재 한줌
입원 중 특기할 사항은 신아 동료 차순길 회우가 한번 읽어보라고 권한 책 ‘허송세월’(김훈 작가 에세이집), 밤새워 독파하면서 마치 나에게 한 말 같아 여기 한 토막 소개한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벗들한테서 소식이 오는데, 죽었다는 소식이다. 살아 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으니까, 소식이 없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 지난달에도 형뻘 되는 벗이 죽어서 장사를 치르느라고 화장장에 갔었다.
화장장 정문에서부터 영구차와 버스들이 밀려 있었다.
관이 전기 화로 속으로 내려가면 고인의 이름 밑에 '소각 중'이라는 문자등이 켜지고, 40분쯤 지나니까 '소각 완료', 또 10분쯤 지나니까 '냉각 중'이라는 글자에 불이 켜졌다. 10년쯤 전에는 소각에서 냉각까지 100분 정도 걸렸는데, 이제는 50분으로 줄었다고 화장장 홍보 전단에 적혀 있었다. 기술이 크게 진보했고, 죽음을 관리하는 의전 절차도 세련되어졌다.
'냉각 완료되면 흰 뼛가루가 줄줄이 컨베이어벨트에 실려서 나오는데, 성인 한 사람분이 한 되 반 정도였다. 직원이 뼛가루를 봉투에 담아서 유족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유족들은 미리 준비한 항아리에 뼛가루를 담아서 목에 걸고 돌아갔다. 원통하게 비명횡사한 경우가 아니면 요즘에는 유족들도 별로 울지 않는다. 부모를 따라서 화장장에 온 청소년들은 대기실에 모여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제 입으로 “우리는 호상입니다"라며 문상 객을 맞는 상주도 있었다. 그날 세 살 난 아이가 소각되었다. 종이로 만든 작은 관이 내려갈 때, 젊은 엄마는 돌아서서 울었다. 아기의 뼛가루는 서너 홉 되었을 터이다.
뼛가루는 흰 분말에 흐린 기운이 스며서 안개 색깔이었다. 입자가 고와서 먼지처럼 보였다. 아무런 질량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개골과 정강이뼈에는 타다 만 형태가 남아 있었다. 물체의 먼 흔적이나 그림자였다. 뼛가루의 침묵은 완강했고, 범접할 수 없는 적막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금방 있던 사람이 금방 없어졌는데, 뼛가루는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나 애도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었고, 이 언어도단은 인간 생명의 종말로서 합당하고 편안해 보였다.
죽으면 말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 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화장장에 다녀온 날 이후로 저녁마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생각했다. 죽음이 저토록 가벼우므로 나는 이 가벼움으로 남은 삶의 하중을 버티어 낼 수 있다. 뼛가루 한 되 반은 인간 육체의 마지막 잔해로서 많지도 적지도 않고, 적당해 보였다. 죽음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으로 애도할 만한 사태가 아니었다.
뼛가루를 들여다보니까, 일상생활 하듯이, 세수하고 면도하듯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 들이지 말고 죽자, 건강보험 재정 축내지 말고 죽자,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고 가자, 질척거리지 말고 가자, 지저분한 것들을 남기지 말고 가자, 빌려 온 것 있으면 다 갚고 가자, 남은 것 있으면 다 주고 가자, 입던 옷 깨끗이 빨아 입고 가자, 관과 수의는 중저가가 좋겠지, 가면서 사람 불러 모으지 말자, 빈소에서는 고스톱을 금한다고 미리 말해 두자...
가볍게 죽기 위해서는 미리 정리해 놓을 일이 있다. 내 작업실의 서랍과 수납장, 책장을 들여다보았더니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의 거의 전부(!)가 쓰레기였다. 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한 생애가 지나갔다. 똥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 둔 꼴이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표가 안 나게 이 쓰레기들을 내다 버린다. 드나들 때마다 조금씩 쇼핑백에 넣어서 끌어낸다.
나는 이제 높은 산에 오르지 못한다. 등산 장비 중에서 쓸만한 것들은 모두 젊은이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나머지는 버렸다. 책을 버리기는 쉬운데 헌 신발이나 낡은 등산화를 버리기는 슬프다. 뒤축이 닳고 쭉으러진 신발은 내 몸뚱이를 싣고 이 세상의 거리를 쏘다닌 나의 분신이며 동반자이다. 헌 신발은 연민할 수밖에 없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헌 신발은 불상하다. 그래도 나는 내다 버렸다. 뼛가루에 무슨 연민이 있겠는가.
유언을 하기는 쑥스럽지만 꼭 해야 한다면 아주 쉽고 일상적인 걸로 하고 싶다. "딸아, 잘 생긴 건달 놈들을 조심해라", "아들아, 혀를 너무 빨리 놀리지 마라" 정도면 어떨까 싶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스스로를 '광야를 달리는 말로 자칭했다.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돌면서 평생을 사셨는데,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미안허다”를 남겼다. 한 생애가 네 음절로 선명히 요약되었다. 더 이상 짧을 수는 없었다. 후회와 반성의 진정성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것은 좋은 유언이 아니다. 평생을 밖으로 나돌다가 임종할 때 "미안하다"라니 어쩌라는 것인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었고, 대책 없이 슬프고 허허로워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퇴계 선생님은 죽음이 임박하자 이런 시문을 남겼다.
조화를 따라서 사라짐이여 다시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임종의 자리에서는 “매화 화분에 물 줘라" 하고 말씀하셨다고 제자들이 기록했다. 아름답고 격조 높은 유언이지만 생활의 구체성이 모자란다. '매화에 물 줘라'라는 유언은 일상의 소중함과 사소한 일의 엄중함을 명심하라는 뜻으로 들린다. 유언이라는 형식이 말씀의 뜻을 더욱 무겁게 한다. '매화'가 생활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과도하게 탐미적이어서 나 같은 속인이 듣기에는 리얼리티가 모자란다.
내 친구 김용택 시인의 아버지는 섬진강 상류의 산골 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김용택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김용택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셨는데, “네 어머니가 방마다 아궁이에 불 때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 부디 연탄보일러를 놓아 드려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이야기를 김용택의 어머니 박덕성 여사님한테서 직접 들었다. 몇 년 후에 김용택의 시골집에 가 봤더니 그때까지도 연탄보일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 퇴계 선생님, 김용택의 아버지, 이 세 분의 유언 중에서 나는 김용택 아버지의 유언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 유언은 건실하고 씩씩하고 속이 꽉 차 있다. 김용택 아버지는 참으로 죽음을 별것 아닌 것으로, 아침마다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가듯이 가볍게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인생의 당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정도 유언이 나오려면 깊은 내공과 오래고 성실한 노동의 세월이 필요하다.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죽음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의술의 목표라면 의술은 백전백패한다. 의술의 목표는 생명이고, 죽음이 아니다. 이국종 국군대전병원장처럼, 깨어진 육체를 맞추고 꿰매서 살려내는 의사가 있어야 하지만, 충분히 다 살고 죽으려는 사람들의 마지막 길을 품위 있게 인도해 주는 의사도 있어야 한다. 죽음은 쓰다듬어서 맞아들여야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다 살았으므로 가야하는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고무호스를 꽂아서 붙잡아 놓고서 못 가게 하는 의술은 무의미하다.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뼛가루를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 결국 한 줌 재는 가볍다.
(2024 8.4)
끝으로 병원에 있는동안 아들딸 4남매의 지성어린 간호에 감격하며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이글을 마친다.
한강요양병원 608호 병실에서 지난 날을 회고하며)
* 과분한 주기도 문
나의 입원을 계기로 큰딸을 비롯 독실한
크리스찬 친구들이 다투어 주기도문을 보내왔다. 나는 전통적인 유교집안에서 자란관계로 기도문 같은 과분한 설교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1년 아홉번 제사에다 부모님 상을 당해서도 굴건제복에다 1년 탈상 조석으로 상식을 올렸으니 유교 집안의 전통을 마지막으로 고수했다는 자부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야 천당간다고
시도 때도
없이 기도문을 보내주니 그 성의를 봐서도 열심히 아멘으로 화답하고 있다. 평생을 건성으로 듣다가 말년에 천당가기위해 예수를 믿으라니 내가 예수님이라면 괘심죄로 다스릴 법한 일이 아닌가. 아뫃든
딸의 성의를 봐서도
아멘 만은 잊지 않고 복창하고 있다.
* 사랑하는 아빠 정운종 님께
천국나라의 티 켓을 드립니다
영접 기도문
저는 예수님을 제 마음의 주인으로 모십니다. 예수님께서 저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 지었던 모든 죄를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제부터 저와 영원히 함께 해 주시고
저를 축복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심금울린 외손녀 김현진편지
평소에 말이없던 외손녀 김현진양이 장문의 편지를 보내와 나를 울리니 그심성이 고와 다함께 공유하고싶어 올린다.
외할아버지께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외손녀 김현진이에요. 오늘은 9월 19일이니까 제가 만으로도 꼭 29년을 산 날인데, 이제껏할아버지께 손편지는 처음 쓰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제가 말로는 쑥스러워서 편지로 대신 썼습니다.
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항상 글쓰시는 모습이 가장 먼저 생각나요. 그래서인지 어릴 적부터 교과서에서 '선비'라는 말을 보면 자연스럽게 할아버지를 떠올렸답니다. 항상 흐트러진 모습 없이 온화하고 다정하게 저희를 반겨주시고, 곧은 자세로 삶을 살아가시고, 좋은 글로 작품을 내셔서요. 저는 글 쓰는 사람을 존경해요. 할아버지가 쓰신 글 속 내용처럼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헤어지고 이별하기 마련이지만, 글이라는 작품은 평생 사람들에게 남아 기억되니까요. 할아버지가쓰신 글에는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다 녹아있고,
그래서 글만 보아도 할아버지가 느껴져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쓰신 책들과 글이 너무 자랑스러워요. 또, 할아버지는 기억이 안나실수도 있지만 옛날에 저한테 사랑하는 현진에게'를 붓글씨로 용돈을 주시면서 봉투에 써서 주셨었는데, 저는 그게 너무 소중해서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어요. 늘 감사합니다.
올해 설에 할아버지 댁에 갔을 때, 할아버지가 보여주셨던 몇십년도 더 지났을 저희 엄마의 어버이날 편지부터 세세한 것들까지 다 기록해두신 책이 너무 신기하고 대단해서, 저도 할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닮고 싶다고 느꼈어요. 제가 미처 볼 수 없는 할아버지의 머릿 속 도서관에는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이 있을지 너무 놀랍고 존경스러웠습니다. 저도 끊임없이 창작하고 기록하는 사람이 될게요.
할아버지! 오늘 병원을 옮기신다고 들었어요. 제가 비록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엄마 따라서 곧 또 뵈러갈게요. 지금처럼 밝은 모습으로 계셔주세요! 항상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 현진 올림 - 2024.09.19
* 又松의 글을 읽고.
통덕랑공 종친회 정규원 상임고문
又松과 나는 四從叔姪間이란 관계를 떠나서 16년간 同門修學하고 지금까지 同居同樂한 친구로써 몇자 적겠네. 천하의 성인 공자도 生卽蒼蒼.死卽畏畏 .살아 있을때는 창창한 앞일을 생각 하지만, 죽음에 임할때는 두렵고 두렵도다 했거늘 어찌 죽음을 그리 담담하게 표현할수 있단 말인가? 이는 聖人의 경지를 떠나 天道理程에 通達한 仙人에 이른것이 아니겠소.
人命은 在天이라 했어도 盡人事待天命이라 했으니 요즘 좋은 醫術을 믿고 치료에 전념하길 바라오 又松의 빠른 快愈를 기원하겠소
* 이종락 동문이 이 글을 읽고
우송!
"간암 3기 판정을 받고" 잘 읽었네. 인생을 달관한 노신사의 청산 속 계곡물이 어쩌면 그리 독자의 심금을 씻어 주는가.
읽으면서 너무 많은 감명을 받아 청산 속을 헤매였네.
월악산 비로봉에서 용암과 우송과 같이 사진찍던 생각을 하면서 추억 속에서 잠시 헤매이기도했네
우송의 달관된 인생론을 곱씹으며 아직은 회자정리를 말할 때가 아니란 것을 말하고 싶네.
요즘같은 더위 속에서는 모든 것이 정지된게 요즘의 내 생활이네.
날씨가 가라앉고 서늘한 바람이 찾아오면 만나세.
우송의 건안을 기도하면서 ...
* 최귀조 편우회 회장도 다음과 같은 소감을 보내왔다.
정선배님!
잘 읽었습니다 읽다 눈물이 나 쉬다 또 읽었습니다 그래도 용기내서 잘드시고 힘내세요 자꾸만 슬퍼만 가는 인생 정선배 와 함께 있으며 많은것 을 배웠어요 평생을 잊지못할 선배입니다 조금만 더 용기내서 싸워봅시다 좋은 날이 올겁니다 간절히 빕니다
사랑하는 정선배 ~?
* 남경진동문이 호주에서
다 읽고나니 먹먹한가슴 가눌길이 없구나
지난해 10월 29일 서울호텔에서 만나 사진찍고 얘기나누고 했는데 그때는 건강해보였는데.. 이무슨 날벼락같은 소식인가
자연의 섭리를 누가 거스릴수 있을까만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가슴아픈 소식이라 나의 무딘 글로는 도저히 이심정을 표현할 길이없구나.
그래도 포기하지말고 섭생잘해서 기운차리도록 해라,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의료선진국 이므로 반드시 좋은결과가 있을거라고 믿는다 정운종 자네는 강한 사람이니까
끝까지 포기하지 말게 싸우고 또 싸워서 이겨내리라 믿네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지켰다"가 우리군장병 모두에게 읽히는책이 되었다니 정말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
나에게 너같은 친구가 있다는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시드니에서 남경진
잘잤냐
암세포가 젤 싫어하고 무서워하느것이 엔돌핀 이란다.
그리고 엔돌핀에게 얻어터진 암세포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단다.
몇년전에 읽은 어느 의학논문기사 얘기다
나의 솜씨없는 글몇줄에 엔돌핀이 절로 솓은것 같았다니(good response) 자넨 아직 먼길떠날 준비가 전혀 않된 사람이다. 아직 멀었어.
그렇게 준비가 엉성해가지고 어떻게 그 먼길을 가려고하나. 꿈도 야무지다. 평소의 정운종 답지않다.
부르면 가겠다느니 버텨"볼께" 따위의 약한소리 집어치우고 전복 연어같은 고단백식품 뭐든지 잘먹고 체력보강해라. 전복살 돈없냐 없으면 말해 내가 보내줄께.
내가 그거 못하겟냐.
내년에 서울갈 예정이다. 괜히 딴소리 하지마라
글솜씨 더럽게 없다고 흉보지마라. 자네한테 비교하면 족탈불급 일테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청춘이란다.
너의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듣고싶고나
시드니 에서 남경진
깊은 철학과 투철한 국가관을 갖고 이만큼 사회발전에 기여한 사람이 제천에서는 정운종 너만한 이가 없는것 같다.
아직도 너에게는 할일이 많이 남아있어. 그렇지 않으면 그건 직무유기가 될꺼다.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시드니에서 남경진
* 제천고 동문 이철재 목사의 기도문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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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많은분들이위로의 말씀과 더불어 쾌유를 빌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열심히 치료받고 건강한몸으로 찾이뵙겠습니다. 거듭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