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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오씨 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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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댁 손자 글방 스크랩 그 많던 호랑이는 누가 다 죽였을까?
오대댁(병연) 추천 0 조회 136 10.01.29 17:20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월간 ‘산’‘남한에 야생 호랑이 있나, 없나’란  글이 실렸고

조선일보에도 같은 기사가 올라가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22/2010012201335.html

 

전문(全文)은 위 링크에 들어가 읽으면 되려니와,

기사 중 이건 좀 뭘하다 싶은 부분이 있어 몇자 적어 본다.

 

 

….“불과 85년 전인 1921년 고종 재위 시절 경복궁 안에

호랑이가 나타나 수백 명의 군사를 동원했다는 기록도 있다.”…

 

1921년 당시 궁에서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가?

 

1921년이면 고종황제가 승하한지 2년이나 지난 뒤다.

고종은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냈다.

 

순종황제를 착각했다고 하더라도 순종은 창덕궁에서 살았다.

경복궁에 고종이 임어하던 때는 대원군이 중건한 직후 몇 년 간이었다.

1921년은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호랑이가 잡힌 해-즉 멸종된 해다.

 

 

…” 그렇게 많던 호랑이는 일제강점기에 들어 ‘해수구제(害獸 驅除)’

또는 ‘맹수구제(猛獸驅除)’, 즉 해로운 맹수를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수난을 당했다.”….

 

이와함께 우리나라에서 호랑이는 일제가 다 잡아 죽였다고 기사가 이어진다.

 

과연 그럴까?

같은 기사 후반부로 가면 “한국의 마지막 호랑이는

1922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혔다.” 라는 부분이 나온다.

 

마지막 호랑이를 경주 대덕산에서 잡은 것은 1922년이 아니라 1921년이다.

 1, 2년 차이야 별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1922년 경주에서 마지막 호랑이를 잡는데

1921년에 경복궁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가 있을까?

 

‘산” 지 기사 앞부분은 1921년에 궁에서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했다가,

뒤에 가서 1922년 마지막 호랑이가 잡혔다니 앞 뒤가 맞지 않는다.

그래도 그랬다면 더 할 말은 없지만, 그랬을 것 같지 않다-개연성이 없다.

 

내 대학 다닐 때 생각이 난다.

당시 나는 이 책 저 책 뒤적여 근사한 말을 골라 짜깁기하여 레포트를 만들었다.

그런데 짜깁기는 아무래도 티가 난다.

 

첫째 문장 연결

글이란 마치 지문(指紋)처럼 쓰는 사람 특색이 나타나는데,

이걸 무차별로 엮어버리니, 가다가 호흡이 갑자기 달라져 버린다.

 

둘째는 상호 모순

잘 썼던 못 썼던 어떤 책이라도 일관된 논리가 있는데

여러 군데서 발췌해 버리니 논리의 상호충돌이 생긴다.

 

이 점을 알고 신경 썼지만 ,기본이 베끼는 것인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 표띠 나지 않는 선에서 그냥 레포트 낼 수 밖에.

 

나는 그렇게 했어도 워낙 마음 좋은(?) 선생님이 학점을 주었지만...

 

 

 

각설(却說)하고 (남 흉보기는 이쯤 하고),

마침 필자는 최근 김동진 교수(한국교원대)의 호랑이강의를 들은 바 있다.

김교수는 “조선전기 포호(捕虎)정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다.

그 강의 중 일부를 다음에 소개한다.

 

 

일제가 그 많던 호랑이를 11년 만에 다 잡아 버리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우리나라에서 범은 일제 이전, 조선 말기가 되면 거의 씨가 말라 버렸다.

그건 조선 왕조에서 범 사냥-포호(捕虎)정책을 국가적 사업으로 펼쳤기 때문이다.

 

그 덕(?)에 범은 조선왕조 말기 이미 멸종상태이다가,

일제 때인 1921년 경주에서 마지막 한 마리가 잡힌 것이다.

 

 

 

사진: 1921년 경주에서 잡힌 마지막 호랑이.

동네에서 다 잡아 놓으니까 일본 순사들이 우 몰려가서 사진 찍으며 폼 잡은 것이었다.

 

(1924년 강원도에서 마지막으로 잡았다는 설도 있다.)

 

 

호랑이가 과연 깊은 산중에 살았을까?

 

위 소개한 월간 산의 기사에 다음 구절이 나온다.

 

“호랑이는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한반도의 90% 이상

되는 산악지역에 엄청난 수의…. 운운”

 

이 기사 아니라도 호랑이가 깊은 산중에 살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김동진 교수는 그 상식이 실은 별로 맞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설화, 민담에는 호랑이가 깊고 깊은 산중에 산다고 나온다.

비록 설화는 그렇지만 조선왕조 실록 등 실제로 호랑이 잡은 기사를

추적해 들어가면 모두 갈대밭 근처에서 잡았다 고 나온다는 것이다.

 

갈대 밭이면 산중이 아니라 물가가 아닌가?

 

 

깊은 산중에 살던 호랑이가 사람 물 때만 갈대밭으로 왔다는 말인가?

이제 호랑이 서식지에 대하여 알아 본다.

 

 

호랑이 기원지

 

아래는 호랑이 기원지에 대한 도표다.

 

 

 

 

현재 종(種)의 호랑이 공통조상의 출현 시기는 약 200만년전이며,

발원지는 인도차이나 북부와 중국 남부지역이다.

이 지역은 깊은 정글과 늪이 많은 곳이다.

 

 

인도차이나 북부와 중국 남부에서 기원한 호랑이는

인도를 거쳐 실크로드-중앙아시아-몽골 북쪽 삼림지대를 거쳐

아무르강 (훅룡강)과 중국 동북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 한반도에 호랑이가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0,000-9,000 년 전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시베리아 호랑이와 한반도 호랑이는 유전적으로 거의 같다고 한다.

 

이상으로 볼 때 호랑이는 동남아시아와 인도의 정글에서

진화할 때부터 늪-물가를 좋아했던 것이다.

 

몽골 북쪽과 아무르강 일대로 퍼져 가면서 현지 적응을 했으나,

물가를 좋아하는 원래 습성이 없어진 것이 아니었으니,

민담과는 다르게 조선시대 호랑이가 실제로 나타나고

또 잡힌 곳이 모두 갈대밭이었던 것이다.

 

 

아래는 현재 호랑이 분포도.

 

 

 

 

 

호랑이는 조선왕조 시대 들어와서 조직적으로 잡았다.

 

 

신라 궁궐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몇 번 나오는 등

삼국시대, 고려시대에 호랑이가 나타나고 또 잡은 기록이 전해온다.

그러나 국가가 정책적으로, 조직적으로 호랑이 잡기 (포호-捕虎)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 들어와서였다.

 

조선조는 중앙에 지휘관 1인과 포수 40명으로 구성 된

범 잡는 전문 군사조직을 상시 출동 대기시키고,

지방 각 고을마다 착호군(捉虎軍)을 두었다.

이래놓고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첩보가 들어오면 반드시 쫓아가서 잡도록 했다.

 

김동진 교수가 조선시대 범 출몰 소식과 그 잡은 기사의 비율을 조사하니

거의 80 % 였다고 한다. 곧 나타나기만 하면  대부분 잡았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 포호-捕虎)정책이 국가의 중요 시책이었다는

김동진 교수 강의를 듣다가, 인조반정 때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이귀가 아뢰기를, “범을 잡는 곳은 반드시 경기(京畿),황해(黃海) 두 도의 경계인데,

범이 만약 다른 도로 달아나면 법규상 경계를 넘어서 쫓아가지 못하므로

비록 대군이 모였더라도 매양 중도에 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범을 쫓을 때는 범이 가는 곳을 쫓아서 경계에 구애받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광해가 허락하고 장단(長湍)과 송경에

“평산과 함께 힘을 합하여 범을 쫓으라.”고 명하였다.

 

그해 겨울 12월에 이귀가 자기가 관할하는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두 풀어

범을 잡는다고 흥의동(興義洞)에 모아놓고 장단 방어사(長湍防禦使)

이서(李曙)와 함께 세력을 합하여 일을 일으키려 하였다가

유천기(柳天機)의 고변으로 인하여 예측하기 어려운 화를 당할 지경이었는데,

다행히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의 주선으로 파직에 그쳤다….

(연려실기술 인조조 고사본말  중에서)

 

평산부사로 가서 범 잡는다는 핑계로 군사를 자기 경계 밖으로 출동시켜

거사하려 했던 이귀의 계획은, 위 인용기사 끄트머리에 나온대로 실패하지만,

인조반정은 미구(未久)에 성공할 것이었다.

 

 

 

왜 조선시대 호랑이 기사가 유독 많을까?

 

그 이전-삼국시대 고려시대 범 출몰 기사가 있지만

조선시대 들어와 유독 많다. 왜 그럴까?

 

호랑이 서식지는 갈대밭-물가였다.

그런데 조선시대 들어와서 농경지개간이 비약적으로 확대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호랑이 사는 곳을 침범하게 되고

이에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호랑이가 깊은 산중에만 있다면야 무슨 문제가 있었겠는가?

 

충돌-호랑이가 사람을 습격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사람 해치는 나쁜 호랑이 잡는 것을

위정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호랑이 입장에서 보면 참 억울하기 짝이 없었겠다.

자기네 사는 곳을 사람들이 밀고 들어와서 자위수단을 쓴 것 뿐인데,

멸종 당하고, 거기에 나쁜 호랑이네 뭐네 윤리적 비난까지 받았으니.

 

이래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요,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도 지배한다는 말이 나오는 모양이다.

 

 

범을 어떻게 잡았을까?

 

…진덕여왕(647~654) 때 유신공(金庾信) 등이

경주 남산에서 나랏일을 의논하는 데 큰 호랑이가 나타났다.

모두들 놀라 일어서는데, 알천공(閼川公)만 태연히 앉아 있다가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서 땅에 메쳐 죽였다….

 

이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데 큰 호랑이면 무게가 대략 300 kg 까지 나간다.

이걸 꼬리를 잡아서 패대기친다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함정(陷穽)

 

원시시대와 그뒤 한참까지 짐승 잡는 데 널리 쓰인 방법은

함정을 파는 것이었다.

 

 

다음은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 일대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 함정유적이다.

 

 

 

오른 쪽 사진에서 보다시피 함정의 단면은 V자 혹은 Y자형태다.

또한 왼쪽 구멍 2개는 나무로 만든 창을 박았던 흔적 같다.

 

산돼지건 호랑이건 빠지는대로 날카로운 창이 아래부터 몸을 꿰뚫고

또 양쪽 벽이 V자 또는 Y자 형태로 꽉 조여 버리니,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다음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 중 일부다.

 

 

 

위 그림 15번에 함정에 빠진 짐승이 있는데 얼룩 무늬로 보아

대형 고양이과 동물 같다. 또한 19번에는 우리에 갇힌 짐승이 보인다.

 

 

 

말 위에서 배사(背射)

 

아래는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다.

 

 

 

사슴 등 짐승들이 달아나는데 그림 중앙에는 호랑이같이 생긴 짐승이 쫓긴다.

말탄 무사들은 발에 등자(橙子)를 찼고, 위쪽 무사는 몸을 있는대로 뒤틀어

활로 사슴을 쏘는 멋드러진 배사(背射)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등자가 없이는 말 위에서 이런 동작을 취할 수가 없다)

 

무지하게 근사한 장면이나, 이렇게 하려면 몰이꾼이 필수다.

몰이꾼들이 원하는 장소에 짐승을 몰아 주어야 가능한 것이다.

 

다음은 세종대왕 기념사업회에 있는 강무도다.

 

 

 

 

위쪽 중앙 검은 말을 타고 활을 당기는 분이 그림의 주인공-세종대왕이다.

오른쪽 흰말을 탄 인물은 세자 곧 나중 문종(文宗)이고, 그 뒤 문무 대신이다.

그림 테두리 쪽으로 군사들이 빙 둘러싸고 있으니, 대왕의 사냥을 위하여

짐승 몰이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전통적 짐승잡이는 함정을 이용하거나

대규모로 몰이꾼을 동원하여 잡는 것이었다.

호랑이도 그렇게 해서 잡았을 것이다. 

 

화살 한대에 호랑이 숨통이 끊어지지 않는다.

 

수호지(水滸誌)의 무송은 맨주먹으로 호랑이 골통을 부셔버린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

 

김동진 교수 조사에 의하면, 조선시대 호랑이 잡은 뒤 포상은

첫번째 화살을 꽂은 사람, 그 두번째 세번 째,

창 제일 먼저 박은 사람, 그 두번째, 세번 째가 각각 달랐다고 한다.

 

이를 해석하면 저 멀리부터 호랑이를 포위하여 몰아 온 다음

제법 원거리에서 화살을 어지럽게 쏜다.

그래도 호랑이 가죽이 워낙 두꺼워 잘 박히지도 않고,

급소를 맞추기도 어렵고, 꽃쳐도 화살 몇 대에 죽지 않는다.

 

그렇지만 화살을 여러 대 맞으면 기운은 어지간히 떨어 질 테니,

그때 우 달려들어 창을 차례로 꼽아서 잡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첫화살을 맞춘 사람, 첫창을 꼽은 사람 공이 제일 높았던 것이다.

 

 

조총(鳥銃)과 노도(弩刀)

 

임진왜란 때 조총이 들어오고 막바로 대량 보급된다.

 

연속극에는 으레 창을 쥐켜주나, 조선후기 군사들 기본 무장은 조총이었다.

 

임란(壬亂)에서 실제 전투경험을 가진 조선 포수의 실력은 꽤 소문이 났다.

광해군이 명나라의 종용으로 만주에 1만 군대를 출병시킬 때,

포수들이 주력인 조선군을 명나라 장수들이 탐을 내고

서로 데리고 가려고 다투는 일도 있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호랑이 사냥에는 조총을 든 포수(砲手)들이 활약한다.

 

18세기 정시응이란 사람이 노도(弩刀)라는 호랑이 잡는 신무기를 개발했다.

 

이 노도(弩刀)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해오지 않으나, 노(弩)라는 이름으로 볼 때 반탄력을 이용한 기계장치 같다.

아무튼 호랑이를 아예 토막내 버릴 정도의 위력이 있었다고 한다.

 

 

호피(虎皮)

 

조선시대 각 고을은 호랑이 가죽을 나라에 바쳐야만 했다.

 

호피(虎皮)가 귀해서가 아니었다.

오늘 날 호랑이 가죽하면 대단하게 여기나, 우리 조상들은 별로였다.

호랑이 가죽 용도를 보면, 천한 수군(水軍)들이 노 저을 때 앉는 방석

또는 짐 실은 수레를 덮는 천막 용도 등이었다.

또 호조(戶曹) 창고에는 호랑이 가죽 만장이 넘게 쌓여 썩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왜 호랑이 가죽을 바치라고 했느냐 하면

우리 어릴 때 쥐 잡았다는 증거로 학교에서 쥐꼬리 내던 생각하면 된다.

호랑이를 잡았는지 어쨌는지 증빙을 내라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로 가서 호랑이가 거의 멸종상태에 이르러

웬만한 고을은 가죽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런다고 한 번 정한 공물의 세목이 바뀌지는 않았다.

이에 고을들은 돈을 거둬 북쪽 아직 호랑이가 살아 남은 곳에서

가죽을 살 수 밖에 없었으니, 이 또한 백성들에게 피해주는 일이 되어버렸다.

 

 

이상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말로는 호랑이를 신령님이니 뭐니 하며 떠 받들었지만,

잡기는 열심히 잡고, 조선시대 와서는 아예 박멸해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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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1.29 23:17

    첫댓글 오랫만에 글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일단 인컴하고 1월도 벌써 빠른 시간앞에 정신이없습니다 내일은 정모하러 안면도 다녀 31일에 돌아옵니다 고운밤 되시구요 감사합니다므흣

  • 작성자 10.01.30 12:32

    네 오랫만입니다 ^^

  • 10.02.08 09:59

    감사합니다 그동안 많이 바쁘셨나보네요 글 올려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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