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왕에 버금가는 진평왕의 업적
진평왕은 재위 6년 째 되던 해에 건복(建福)이라는 연호를 썼다. 할아버지 진흥왕이 그랬던 것처럼,
신라만의 독자적인 역사 만들기에 그 또한 당당했다.
13년에는 남산성을 쌓고 이어서 명활성을 고쳐 쌓았다.
수도의 주변 경계를 확실히 하자는 뜻이었다. 이는 나아가 이웃인 백제와 고구려에 대항하여
한판 벌릴 준비이기도 하였다.
특히 백제와의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삼국사기]의 기록만으로 보자면, 24년 아막성, 33년 가잠성,
38년 모산성, 40년 가잠성에서 전투가 벌어지더니, 45년 늑노현을 시작으로 절정에 달해,
46년에는 속함ㆍ앵잠 등 무려 6성에서 동시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로도 백제와의 싸움은 그치질 않았다.
신라가 팽창해 가는 만큼 주변의 대항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내부의 반란까지 일어났다. 재위 53년, 칠숙과 석품의 반란이 대표적이다.
다행히 초기에 발각되어 칠숙을 잡아 처형시켰는데, 석품은 백제 국경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나 석품은 가족이 그리웠다.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돌아와 총산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바꿔 입고 땔나무를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름대로 치밀히 변장을 했지만
집을 감시하던 군사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54년을 왕위에 있었으니 어찌 내우외환이 적었을까. 그러나 진평왕은 바야흐로 성장해 가는 신라를
수성(守成)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이것이 고구려의 장수왕과 비견되는 대목이다.
성골 집단을 더욱 공고히 하여, 왕위 계승은 비록 딸이라 할지라도 이 안에서 이루리라 각오한 진평왕의
집념도 대단하다. 그는 사촌 동생 용춘을 사위로 삼았는데, 이는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동생 집안의 모반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진평왕의 집념은 이루어졌다.
딸인 덕만으로 왕위를 이었다. 선덕여왕이다.
제왕의 길에 빛나는 한 가지
진평왕의 54년은 성장하는 신라의 발걸음과 같이 하였다. 이 54년 재위의 의의를 한마디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삼국유사]가 그리는 진평왕에게 눈길을 돌리게 된다.
일연은 오직 한 가지 이야기로 이를 요약한다. 기이 편의 천사옥대(天賜玉帶) 조이다.
왕의 키가 무려 11척, 제석궁(帝釋宮)에 갔을 때 돌계단을 밟는데, 돌 두 개가 쪼개지는 것이었다.
진평왕은 주변의 신하들에게, “이 돌을 움직이지 말고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라”고 하였다.
그가 얼마나 거구이며 얼마나 힘이 셌는지 보여주는 삽화이다. 이 이야기 다음에 하늘이 내려준 옥대가 나온다.
왕위에 오른 첫 해였다. 하늘의 사신이 궁전 뜰에 내려와 왕에게, ‘상황께서 옥대를 내리라 하였다’고
전하였다. 왕이 몸소 무릎 꿇고 받자 그 사신은 하늘로 올라갔다. 왕은 교외나 종묘의 큰 제사 때
모두 이 옥대를 찼다.
이런 이야기는 진평왕과 그 주변 세력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열세 살 어린 왕의 등극 후에 하늘로부터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받고 있다는 징표가 필요했을 것이다.
집권의 정당성이다. 신라는 나라가 커가는 만큼 내부의 권력구조도 복잡해지고 있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왕이 된 진평으로서는 자신이 왕이 된 정당성 위에 튼튼한 권력의 구축이
필요했다. 이에 맞춤하는 도구가 하늘이 내려준 옥대이다.
이와 닮은 이야기가 신문왕의 옥대이다. 왕은 감포 바닷가 문무왕의 수중릉 부근에서 만파식적을
받아 나왔다. 이때 함께 받은 것이 옥대이다. 왕은 감은사에서 하룻 밤 자고 궁으로 돌아오는데,
지림사에 이르러 서쪽 시냇가에서 머무르며 점심을 먹었다. 태자 곧 효소왕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서 경하하였다. 서서히 살펴보더니 왕에게,
“이 옥대의 여러 구멍들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험 삼아 옥대의
왼쪽 두 번째 구멍을 시냇물에 담갔더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고구려의 왕이 신라를 치려다 신라의 세 가지 보물 때문에 중단한다.
황룡사 장륙존상과 구층탑 그리고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은 옥대가 그 세 가지이다.
앞의 두 가지가 불교의 힘을 말한다면, 옥대는 신라 스스로 자랑해마지 않던 신국(神國)의 상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