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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桓檀古記) 5 -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
高句麗國本紀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오나니 해모수의 어머니의 고향 역시 그 곳이다. 《조대기》에선 이렇게 말한다.「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서 일찍이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의 시조라고 한다. 까마귀의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오룡의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오백 여명이 있었는데 아침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니 호령하지 않아도 절로 관경(管境)이 교화되었다. 산에는 도적이 없고 벼와 곡식이 들에 그득했다, 나라에 큰 일 없고 백성 또한 일없었다. 단군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심은 임술(B.C.239) 4월 초 여드레로서 곧 진왕정(秦王政)의 8년이다.
고리군(藁離郡)의 왕 고진(高辰)은 해모수(解慕漱)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弗離支)는 고진(高辰)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衛滿)을 토벌한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바라. 불리지(弗離支)는 일찍이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河伯女) 유화(宥和)를 만나 그녀를 맞아 들여 고주몽(高朱蒙)을 낳게 하였다. 때는 곧 임인년(B.C.79) 5월 5일이라. 곧 한나라왕 불능의 원봉 2년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熊心山)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迦葉原)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와 마리외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卒本)으로 왔다. 때마침 부여 왕은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서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32년 갑오년(B.C.27) 10월 북옥저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을미년(B.C.26)에 졸본으로부터 서울을 눌현으로 옮겼다. 눌현은 지금의 상춘 주가 성자이다. 유리명제(琉璃明帝, 2대, B.C.19~A.D.17)의 19년 또 눌현으로부터 국내성으로 옮겼으니 또한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일이 있으면 여기에 머물렀다. 대무신(大武神) 열제(3대, A.D.18~43)의 20년, 제는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켰으니,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게 속했는데 오직 해성의 남쪽, 바다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산상제(山上帝 : 10대, A.D.197~226)의 원년 동생 계수를 파견하여 공손탁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현도와 낙랑을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고주몽 성제는 조서를 내려 가로되,
「천신께서 만인을 만드실 때에 하나의 상으로서 균등하게 삼진을 주시었으니 이에 사람은 저 하늘을 대신하여 능히 세상에 서게 되었다」라고 하셨다. 하물며 우리 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나와 천제의 아들이 되었다. 밝은 이의 마음이 비어 고요함은 계율에 뿌리를 두는 것이니 오래도록 사특한 기운을 눌러 그 마음이 안락하고 태평하다. 이에 뭇 사람과 함께 일하면 항상 잘되는 것이라. 병력을 쓰는 까닭은 침범을 느슨하게 하려함이요. 형을 행함은 죄악을 없앨 것을 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가 지극하면 정이 생기며, 정이 지극하면 지혜가 가득하며,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융성하다. 때문에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가운데 헤아리며 지혜로써 사물을 이치대로 하고 덕으로써 사람을 다스린다. 이것이 곧 신시의 개물 교화이다. 천신을 위해서는 성품을 열고 중생을 위해서는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서는 공을 다하고, 천하만세를 위해서는 지와 생을 나란히 닦는 교화를 이룸이라.」
을파소(乙巴素)는 국상이 되더니 나이 어린 준걸들을 뽑아서 선인도랑이라 하였다. 요화를 관장함을 참전이라 하였으니, 무리들을 선택하여 계를 지키고 신을 위하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皁衣)라 하였으니 바른 행동을 거듭하여 규율을 만들고 공동을 애하여 몸을 바친다. 일찍이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신시(神市)이화(理化)의 세상은 백성들의 지혜가 열림에 따라서 날로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만세에 걸쳐서 바꿀 수 없는 표준이 되는 이유가 되다. 때문에 전(參佺)의 계(戒)가 있으니, 신의 계시에 따라 무리를 교화하고, 한맹에 율이 있으니 하늘을 대신하여 공을 행한다. 모두가 스스로 마음을 써서 힘을 모아 뒤에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을지문덕은 말한다.
「도(道)는 이로써 천신(天神)을 섬기고 덕(德)은 이로써 백성과 나라를 덮는다. 나는 이런 말이 천하에 있음을 안다. 삼신일체(三神一體)의 기(氣)를 받아 이를 나누어서 성(性)․명(命)․정(精)을 얻으니 광명(光明)을 마음대로 하고 양연하여 움직이지 않으나 때가 되면 감동이 일어나니 도(道)는 이에 통한다. 체(體)가 삼물(三物)인 덕(德)․혜(慧)․력(力)을 행하고 삼가인 심(心)․기(氣)․신(身)이 되며 즐겨 삼도(三途)인 감(感)․식(息)․촉(觸)을 채우는 이유이다. 그 중요함은 날마다 재세이화(在世理化)하고 조용히 경도를 닦아 홍익인간(弘益人間)함을 간절히 생각함에 있다. 한국은 5훈(訓)을, 신시는 5사(事)를, 조선은 5행6정을, 부여는 구서(九誓)를 말한다. 삼한의 통속도 역시 5계(戒)가 있어 효(孝)․충(忠)․신(信)․용(勇)․인(仁)이라 한다. 모두 백성을 가르침에 있어 올바름과 공명함을 가지고 무리를 정리함에 뜻이 있다.」
《조대기》에 가로되,
「동천제도 역시 단군이라 한다. 한맹의 절기가 될 때마다 삼신을 평양에서 제사하여 맞이한다. 지금의 기림굴은 즉 그 제사지내던 곳이다」라고 했다. 크게 맞이하는 의식은 처음에는 수혈에서 행해졌다. 구제궁에 조천석이 있었으니 길을 가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었다. 또 삼륜구덕의 노래가 있어 이를 권장하였다. 조의선인은 모두 선택되었으니 국인이 그 선출됨을 긍지로 여기는 바였다. 그렇지 않다면 영광으로써 왕의 사자와 동등하게 여겼겠는가?
광개토경호태왕(19대 광개토(廣開土), A.D.392~412)은 융공성덕하여 어느 왕보다 탁월했다. 사해안에서는 모두 열제(광개토대왕)라고 칭한다. 나이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고 하늘의 음악을 예로써 연주했다. 군지에 나아갈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의 노래를 부르게 하고 이로써 사기를 돋우었다. 말을 타고 순수하여 마리산(摩璃山)에 이르러 참성단(塹城壇)에 올라 친히 삼신에게 제사지냈는데 역시 천악을 사용하였다.
일단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국 사람들을 격파하였다. 왜인은 백제의 보좌였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 제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슬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 제천하고 돌아오셨다. 때에 곧 백제 신라 가락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 평량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任那)와 이왜의 무리는 모두 신하로써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해동의 번성함은 이때가 그 극성기이다. 이보다 앞서 협보는 남한으로 도망쳐 마한(馬韓)의 산중에 살았다. 그를 따라온 자도 수백 가였는데 몇 해 지나지 않아 큰 흉년에 시달려 유리하고 방황했다. 협보는 장혁을 알고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浿水)를 따라 내려와 해포로부터 몰래 항해하여 곧 바로 구야(九耶) 한국에 이르니 곧 가라(加羅)해의 북안이다. 여기서 수개월 동안 살다가 아소산으로 옮겨가서 기거했다. 이를 다파라국의 시조라 한다. 뒤에 임나를 병합하여 연정(聯政)을 세워 이를 통치케 했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처음 변진 구야국의 사람들이 한때 모여 산적이 있었는데, 이를 구야 한국이라 한다.
다파라를 다라 한국이라고도 한다. 홀본(忽本)으로부터 와서 고구려와 일찌감치 친교를 갖고 있었으므로 늘 열제의 통치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과 함께 이웃하여 성이 같다. 본래 웅습성을 갖고 있으니 지금 구주(九州)의 웅본성(구마모또 시로)이 그것이다.
왜는 회계군의 동쪽 동야현의 동쪽에 있으며 배로 9,000리를 건너 나패에 이르른다. 또다시 1,000리를 건너서 네시마에 이르른다. 네시마는 도시마라고도 한다. 때에 구노인은 여왕과 서로 싸워 길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구야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자는 쯔시마, 가라산, 지 가도로부터 비로소 말로호자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동쪽 경계는 곧 구야 한국의 땅이다. 회계산은 본래 신시의 중경이 간직된 곳이다. 사공(司空) 우(禹)가 재계하기 사흘 만에야 겨우 치수의 비결을 얻어 공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우는 돌을 벌채하여 부루 태자의 공을 산의 높은 곳에 새겼다고 한다. 즉 오월은 본래 구려의 옛 읍이며 산월 과 좌월은 모두 그 후예가 옮겨 산 땅이다. 항상 왜와 왕래하며 무역하여 이익을 얻는 자가 매우 많았다. 진 때 서불(徐巿)은 동야현의 해상으로부터 곧바로 나패에 이르러 다네시마를 거쳐 세도나이까이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이르렀다. 이세에 옛날 서복(徐福)의 무덤이 있었다. 어떤 이는 말한다. '단주는 서복이 있던 곳'이라고도.
장수홍제호태열제(20대 장수(長壽), A.D.413~491)는 건흥(建興)이라고 연호를 바꿨다.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서 강역을 널리 넓혔다. 이에 웅진강 이북이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어 북연(北燕) 시위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족속의 서열에 들어오게 되었다. 또 신라 매금 백제 어하라와 남쪽 평양에서 만나 납공과 수비 군사의 수를 정했다.
문자호태열제(21대 문자명(文咨明), A.D.492~518)는 명치라고 개원하였다. 11년 제, 노, 오, 월의 땅은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평강상호태열제(25대 평원(平原, A.D.559~589)는 담력이 있고 말을 타고 활 쏘는 것을 잘 했으니, 곧 주몽의 풍이 있었다. 대덕으로 개원하더니 잘 다스려 밝게 교화했다. 대덕 18년 병신 제는 대장 온달을 보내 갈석산, 배찰산을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에 이르러 북주를 크게 격파하니, 유림진 동쪽은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은 지금 산서성의 경계이다.
영양무원호태열제(26대 영양, A.D.590~617)때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 나라는 부하고 백성은 성했다.
수나라 왕 양광은 본래 선비의 유종족인 바, 남북의 땅을 통합하여 그 여세를 모아 우리 고구려를 모욕하고 업신여기더니, 상국을 업신여기고 자주 대병을 일으켰으나 고구려는 이미 대비가 있어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홍무 25년 양광은 또다시 동쪽으로 침략해와서 먼저 장병을 보내 비사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케 했다. 관병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니 바야흐로 평양을 습격하려 했다. 제께서는 이를 듣고 완병술을 쓰려 했다. 계략을 꾸며 곡사정을 보냈다. 때마침 조의(皂衣) 가운데 일인이라는 자가 있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한 끝에 함께 표를 양광에게 바쳤다. 양공이 배에서 표를 손에 들고 읽는데 절반도 채 읽기 전에 갑자기 소매 속에서 작은 활을 꺼내 쏘아 그의 뇌를 맞혔다. 양광은 놀라 자빠지고 실신했다. 우상 양명은 서둘러 양광을 업게 하여 작은 배로 갈아타고 후퇴하여 회원진에 명을 내려 병력을 철수시키도록 하였다. 양광은 좌우에 말하여 가로되「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몸소 작은 나라를 쳐도 승리하지 못하니 이는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겼는가?」라고 했다. 양명 등은 얼굴 색이 검게 변하여 대답 못하고 말았다. 후인들은 이를 노래로 불러 가로되,
오호 어리석은 한나라 어린애들아
요동은 향하지 마라. 개죽음이 부른다.
문무의 우리 선조 한웅이라 불렀느니
자손들은 이어져서 영웅호걸 많단다.
주몽 태조 광개토님 위세는
세상에 울려 더할 나위 없었고
유유 일인 양만춘은 나라 위해
못 바꿔 스스로 사라졌다.
세상문명은 우리가 가장 오래니
오랑캐 왜구 다 물리치고 평화를 지켰다.
유철 양광 이세민도 보기만 해도
무너져서 망아지처럼 도망갔다.
영락기공비는 천 척 만가지기가
한 색으로 태백은 높단다.
라고 하였다.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입산하여 수도하고 꿈에 천신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3월 16일 마리산으로 달려가 공물하며 경배하고 돌아오고, 10월 3일이면 백두산에 올라가 제천했다.
제천은 곧 신시의 옛 풍속이다.
홍무 23년 수군 130여만이 바다와 산으로 나란히 공격해왔다. 을지문덕은 능히 기이한 계책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서 이를 초적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러 마침내 이를 대파하였다. 수나라 군사는 수륙 양군이 무너져 살아서 요동성(遼東城)까지 돌아간 자가 겨우 2,700인이었다. 양광은 사신을 보내 화해를 구걸했으나 문덕은 듣지 않고 영양제도 또한 엄명하여 이를 추격케 하였다. 문덕은 제장과 더불어 승승장구하여 똑바로 밀어붙여 한쪽은 현도로부터 태원까지 추격하고 한쪽은 낙랑도로부터 유주에 이르렀다. 그 주군에 쳐들어가 이를 다스리고 그 백성들을 불러다가 이를 안무하였다.
여기에서 건안, 건창, 백암, 창려의 제진은 안시(安市)에 속하고 창평, 탁성, 신창, 용도의 제진은 여기에 속하고 고노, 평곡, 조양, 누성, 사구을은 상곡에 속하고 화룡, 분주, 환주, 풍성, 압록은 임황에 속했다. 무두 옘처럿 관리를 두고 다스렸다. 이에 이르러 강병백만으로 강토는 더욱 더 커졌다.
양광은 임신의 오랑캐라고 한다. 출사가 성대하기로는 예전에는 그 예가 없었다. 그런데 조의 20만인을 가지고 모조리 그 군을 멸망시켰는데 이는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공과 같은 분은 곧 만고에 세상의 흐름을 만드는 한 성걸이다. 문충공 조준이 명나라 사신과 더불어 축배하고 함께 백상루에 올라 이렇게 시를 읊었다.
살수는 탕탕하게 흘러 프르고 허하고나,
수나라 병사 백산은 물고기 밥이 되었지.
이제 가던 길 멈춰 어부에게 그 때 얘기 듣나니
정부이 한마디 웃음 남기기엔 오히려 모자라네.
옛 역사에서 말하기를,
「영양무원호태열제(26대 영양, A.D.590~617)의 홍무 9년 제는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 등주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잡아 죽이게 하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백제(百濟)는 병력으로써 제(齊)나라, 노나라, 오(吳)나라, 월(越)나라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정벌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內地)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연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고 진흥치 못하매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로 돌아왔다. 성읍을 구획짓고 문무의 관리를 두었는데 수나라가 또 군대를 일으켜 말썽이 났다. 남북이 소요하여 사방이 온통 시끄러워지니 해독은 백성들에게 시치게 된지라. 제는 몹시 화를 내어 삼가 하늘의 뜻을 행하여 이들을 토벌하니, 사해에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수나라 왕 양견은 은밀하게 모반의 뜻을 품고 감히 복수의 군대를 내어 몰래 위충 총관을 파견하여 공명을 위해 관가를 부수고 읍락에 불지르고 노략질하게 하였다, 이에 제는 곧장 장병을 보내 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니, 산동 지방은 이에 다시 평정되고 해역은 조용해졌다.
이 해에 양견은 또 양량 왕세적 등 30만을 파견하여 싸우도록 했으나 겨우 정주를 출발하여 아직 요택에도 이르지 못하였을 때 물난리를 만나서 식량은 떨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마저 크게 돌았다. 주라고는 병력을 모아 등주에 웅거하여 전함 수백 척을 징집시켜 동래로부터 배를 띄워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이를 알아차리고는 후군으로써 이를 방어하도록 내보냈는데, 갑자기 큰바람이 일어나서 전군이 물에 떠다니는 판에 백제가 수나라에 청하여 군의 향도가 되려 하다가 고구려의 타이름을 받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좌장군 고성은 은밀하게 수나라와 친할 마음이 있어 은밀하게 막리지의 북벌계획을 막았다. 이에 여러 차례 청해서 출사하여 공격함으로써 공을 세웠다. 그러나 홀로 막리지는 대중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수북벌의 정책에 집착하여 여러 차례 이해관계를 들어 말하므로 이 말에 따르게 되었다. 고성이 즉위하게 되자 전황제의 모든 정책은 폐기되었다.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노자(老子)의 상을 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도덕경을 청강시켰다. 또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게 하였으니 부여현으로부터 남해부에 이르는 1000여 리이다. 때에 서부대인 연개소문은 청하여 도교(道敎)를 강(講)하는 것과 장성 쌓는 일을 중지시키고자 했으나 제는
기꺼워하지 않고 소문의 병사를 빼앗고는 장성을 쌓는 일의 감독을 시키더니, 은밀하게 뭇 대인과 더불어 의논하여 연개소문을 주살코자 하였다. 소문은 앞질러 이 말을 들을 수 있어 장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이 몸이 죽고 나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 일은 급하다. 때를 잃지 말지라.'하고 모든 부장을 모아 마치 열병하는 것처럼 하고는 성대하게 술상을 벌려 뭇 대신을 초청하여 함께 이를 시찰하자고 하였다. 모두가 참석하자 소문이 소리를 크게 내며 격려하기를,
'대문에 호랑이 여우가 다가오는데 백성 구할 생각은 않고 되려 나를 죽이려 한다. 빨리 이를 제거하라'하니 제는 변고를 듣고 평복으로 몰래 도망쳐 송양으로 가서 조서를 내려 나라의 대신을 모으려 했으나 한 사람도 오는 사람 없고 보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저절로 숨이 떨어져 붕어하였다.
<조대기>에 가로대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라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라 하고, 증조부는 광(廣)이라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홍무 14년 5월 10일 태어났다.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웅위하고 의기호일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 때는 반드시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로 삼고, 하늘을 경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며 권세 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인저!'라고 했다. 스스로 '물 가운데 살아서 능히 잠행할 수 있고 온종일 더욱 건장하게 피로할 줄 모른다'고 말하였다. 무리들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가로대 '창해의 용신이 다시 몸을 나타내심이로다'라고 했다.
소문은 마침내 고성제(27대 영류(營留), A.D.618~641)를 내어쫓고 무리와 더불어 함께 고장을 맞아들여 이를 보장제(28대 보장(寶藏), A.D642~668)로 삼다. 소문은 드디어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정기 자유 개물 평등으로 하고, 삼홀을 전으로 하고, 조의에 율이 있게 하고, 힘을 국방에 쏟아 당나라에 대비함이 매우 완전하였다. 먼저 백제의 상좌평과 함께 의를 세웠다. 또 신라의 사신 김춘추에게 청하여 자기의 집에 머무르도록 하며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를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우리나 그대들은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삼국은 백성들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서울 장안을 쳐들어가 도륙한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승의 뒤에 옛 영토에 따라서 연정(聯政)을 실시하고 인의로써 함께 다스려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구준수의 계획으로 함이 어떻겠소?'라고 하며 이를 재삼 권하였으나, 춘추는 종래 듣지 않았으니 애처롭고 가석할 일이었다.
개화 4년 당나라 이세민이 군신에게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제하의 땅이다. 수나라가 네번 출사하였어도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이제 출병하여 제하를 위해 자제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고 하다. 세민은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이세적 정명진 동 수십만 명을 이끌고 요택에 이르다 진흙길 200여 리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었다. 도위 마문거가 말에 채찍질하며 달려가 공격했지만 이미 싸움을 벌였던 행군총관 장군차는 대패했다. 이도종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고 세민은 몸소 수백기를 이끌고 세적과 합쳐 백암성의 서남쪽을 공격했다. 성주인 손대음은 속여서 항복을 청하게 하고 실은 틈을 엿보아 반격하고자 하였다. 세민은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으로부터 병사들을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북부의 욕살 고연수와 남부의 욕살 고혜진은 관병 및 말갈병 15만 이끌고 똑바로 전진하여 안시에 연결되는 진지를 쌓고,높은 산의 험악한 곳에 의거하여 진지를 쌓고 성의 곡식을 식량으로 삼고, 병력을 종휭무진으로 풀어놓아 당나라 군마를 약탈했다. 당나라군을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고 돌아가려고 해도 진흙길이 가로막았으니 가만히 앉아서 패하는 길밖에 없었다. 고연수는 군대를 이끌고 똑바로 나아가서 안시성에서 약 40리 떨어진 곳에 나아가더니, 사람을 보내 대로 고정의에게 물었으니 그는 나이가 많아서 모든 일에 익숙했다. 정의노인은 대답하기를,
'이세민은 안으로 군웅들을 제거하고 집을 바꿔 나라를 이루었으니 역시 범상하진 않다. 지금 모든 당나라의 병력이 떨치어 나왔으니 업신여길 수가 없다. 우리들로서 바람직한 것은 군대를 움직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여러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며, 날랜 병사들을 보내 그 식량 보급의 길을 끊는 것보다 좋은 계책은 없다. 식량이 이미 끊겨 싸우고자 하나 싸워주지도 않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결국 이기기 마련이라'고 하였다. 고연수는 그 계략에 좇아 적이 오면 막고, 적이 도망가면 곧 추격을 멈추고, 또 날랜 병사들을 파견하여 식량의 길을 끊고, 불태우거나 빼앗게 하자 이세민은 백가지 계략으로 유혹하여 뇌물도 썼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고는 속으로는 거슬렸다. 수시로 습격을 감행하여 마구 무너뜨리니 적군의 사상자는 쌓여만 갔다. 고연수 등은 말갈과 병력을 합쳐 진지를 펴고 지구전을 벌이다가 어느 날 저녁 표변하여 작전을 개시하여 급히 습격하여 번개처럼 치니, 이세민은 거의 포위될 뻔하게 되자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이세민은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재물과 보화를 보내면서 연수에게 말하기를,
'나는 귀국의 힘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으므로 그 죄를 물으려온 것이다. 그대의 나라에 들어와서 싸움을 하게 됨에 말 먹이와 식량을 공급할 수가 없어서 얼마간 노략질을 몇 곳에서 했었을 뿐이니, 그대의 나라가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리면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연수는 말했다.
'좋다, 그대의 군사가 30리를 후퇴하면 곧 나는 우리 황제를 알현코자한다. 그렇지만 막리지는 국가의 기둥이다. 군법을 스스로 갖고 있으니 많은 말도 필요가 없다. 그대의 임금 세민은 아비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동생의 아내를 음란하게도 받아들으니, 이것이야말로 죄를 물을 만하다. 이 뜻을 이세민에게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시관을 보내 더욱 더 방비를 굳혔다. 산에 의지하여 전지를 굳히고 허를 틈타 기습하니, 세민은 백가지 계략을 다 써도 어쩔수가 없어 요동 출병의 불리를 통한히 여길 뿐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유공권의 소설에서,
'육군은 고구려의 조롱거리가 되고 거의 떨쳐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척후병이 영공의 군기는 흑색 깃발(고구려의 군기 색깔)로 에워싸였다고 보고 하니 세민은 크게 놀랐다. 종내 저 혼자 탈출했다해도 위험을 이와 같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신구당서>와 사마공의 <통감>이 이를 적지 않음은 어찌 나라를 위해 치욕스러운 일을 숨기려 함에서가 아닐까보냐? 이세적은 세민에게 말한다.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습니다. 우리 군대의 양곡은 벌써 요동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 건안을 습격하는데 만일 고구려가 수송로를 끊으면 군세는 궁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안시를 공격함만 같지 않을 안시가 함락되면 곧 북 치고 행진하여 건안을 취할 뿐입니다.'
안시성의 사람들은 세민의 깃발이 덮어오는 것을 멀리 바라보며 성위에 올라 외치고 떠들며 침을 뱉으며 세민을 조롱했다. 그의 죄목을 열거하면서 무리에게 떠들어댔다. 세민은 몹시 화를 내면서 성을 함락시키는 날 성중의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흙구덩이에 생매장하겠다고 했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더 굳게 성을 지키니 성을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때에 장량은 사비성에 있었는데 그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채 이르지 못하였고. 이리저리 망설이는 사이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도종도 역시 험악한 곳에 떨어져 떨치지 못하니 당군의 여러 장수들은 의논한 끝에 갈라졌다. 세적만이 홀로 생각하기를 '천자의 친정은 제장의 정벌과는 달라 요행을 바라고 행동한다는 건 안될 일이다. 지금 건안 신성의 적은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의 군대도 역시 수십만이다. 국내성의 병력도 오골성을 돌아 낙랑의 여러 길을 차단할 것 같다. 그리 된다면 저들의 세력은 날로 성해지고 포위 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적을 우롱하다가는 후회막급이 될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고 그런 후에 천천히 진격하느니만 못하다. 이것이 만전책이다.'라고 했다. 이 문제가 채 결론도 나기 전에 안시성주 양만춘은 이를 듣고 밤 깊음을 틈타 수백의 정예를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오니 적진은 스스로 서로 밟고 찔러 살상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세민은 이도종을 시켜 흙산을 성의 동남쪽에 쌓게 하였다. 관병(고구려 병사)은 성의 틈 사이로 출격하여 마침내 토산을 뺏고 참호를 파고 이를 지키니 군세는 더욱더 떨치더라. 당군의 여러 진은 거의 싸울 힘을 잃으니, 부복애는 패전으로 목잘려 죽고 도종 이하 모두가 맨발로 나와 죄를 청하였다.
막리지는 수 백기를 이끌고 난파를 순시하며 상세하게 정세를 듣더니 사람을 보내 총공격하여 사방을 칠 것을 명하였다. 연수등도 말갈병과 합쳐 협공하고 양만춘은 성 위에 올라가 싸움을 격려하니 사기는 더욱 떨쳐져서 일당백의 용맹이 없는 자가 없었다. 세민은 이기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서 감연히 나서서 싸우려 했다. 양만춘은 이에 한 마디 소리지르며 화살을 당겨 반공에 날렸다. 세민은 진에서 나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떨어져버렸다. 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서 도망쳤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길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 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니. 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역사를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렸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심히 급하게 이들을 추격했다. 추정국은 적봉에서부터 하간현으로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가니, 군세는 크게 떨쳐졌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를 건넜다. 때의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케 하니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제군을 나누어서 일군을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이다. 일군을 세만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을 상곡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이다. 이에 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에 입성하여 세민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백제와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이 있었다. 문자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고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북 70리 되는 곳에 있다. 지금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무열제가 쌓은 것이다. 당의 번한은 고려성 회고의 시 한 수로 세상에 전하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외진 땅 성문은 열렸는데 구름 끝 성벽은 길기도 해라.
물 맑은 곳에 저녁빛 비치더니 강변이 어둡자 촛불 별빛 반짝이네
북소리 맞춰 구름이 보이니 새 꽃이 흙 털며 새단장하고
언제나처럼 아침의 거리는 밝아오건만 다시 들을 길 없는 관현의 소리여
가시밭 누런 먼지 속 옛 길 옆에는 잡초만 무성하네
먼지 따위에 묻힌 비취여 황량한 언덕엔 소와 양만 오르지
어쩔거나 옛날의 일을 가을 소리 고요하니 기러기만 나르네
내 비록 운율은 따를 바 없지만 뒤를 이어 보련다.
요서엔 아직도 옛 성터가 있다네 생각컨대 큰 나라에 왕조는 길었으리.
연나라 험한 산 싸움도 많고 요하는 도도히 하늘빛으로 흘러라.
바람 숲은 빈 골짜기에 흔들리는데 학은 높은 가지에 울어 단장하네
군기와 장수는 하룻밤에 변해도 장사꾼 방울소리 요란키도 해라
연도 양도 본디는 우리 땅이었나니 고구려 군사 진치고 말먹이던 곳이었지
영웅은 나지 않고 세상은 흘러가니 다시는 양떼처럼 적을 몰지 못하고
이제 와서 끝없이 옛 일을 슬퍼하며 핵랑의 만리붕정에 이별노래 부르네.
연타발(延佗勃)은 졸본(卒本)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성제가 북옥저(北沃沮)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을 초무하고 왕사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에 봉작을 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 34년 병인 3월이다.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嫡子)인 유리(琉璃)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召西努)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 3월에 패(浿)․대(岱)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 번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러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召西努)를 어하라라고 책봉했다. 13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 등은 온조(溫祚)에게 말하기를 '신(臣) 등이 듣기는 마한(馬韓)의 쇠퇴는 이미 드러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라고 했다. 온조(溫祚)가 '좋다'고 승락하니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추골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한참만에 한산에 이르러서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마여, 오간 등 열 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생각컨대 이 하남의 땅은 북쪽이 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은 천험의 지리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마땅히 도읍을 정할 만한 곳입니다. 여기보다 나은 곳을 찾지 마시옵소서.'
온조는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의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고 칭하니 백제(百濟)라는 이름은 백 사람이 건너 왔다는 뜻의 이름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서로의 시왕은 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 없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수로부터 도망쳐 동옥저(東沃沮)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辰韓)의 나을촌에 와 닿았다. 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다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는지라,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존경하여 거세간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辰韓)으로 하고, 또한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임나(任那)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었는데 국미성이라 한다.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다.
어떤 자는 조공하고 어떤 자는 반한다.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가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 때부터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부터 구주(九州)와 대마도(對馬島)는 곧 삼한이 나누었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는 또 갈려서 삼가라가 되었다. 소위 가라는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 때부터 삼한은 서로 다투고 싸워왔고 세월이 오래 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함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영락 10년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나라가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聯政)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다. 아유타(阿踰佗)는 <삼국유사>에서 서역(西域)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지금 옛날 여러 기록을 고찰해 보면 곧 아유타는 지금의 섬라를 말함인 듯 하다. 그렇다면 아유타의 사람들은 대식 사람들 때문에 쫓기어 이곳에 이르러 살았던 것인지?
이명(李茗)의 <유기(留記)>는 말한다. '옛날 백제의 장사꾼이 있었는데 바다를 건너 아유타에 가서 많은 재보를 벌어 돌아왔다. 그 곳 사람들도 백제 사람들을 따라와 내왕했던 바, 날로 교제하여 친밀해졌다. 그렇지만 그 풍속은 겁이 많고 싸움엔 익숙지 않아 많은 사람에게 통제되고 제약을 받게 되었다.' (해설)
또 말하기를, '평양에 을밀대(乙密臺)가 있는 바, 세상에선 말하기를 을밀선인(乙密仙人)이 세운 것이라 한다. 을밀은 안장제 때 뽑히어 조의가 되고 나라에 공이 있었는데 본래 을파소의 후손이다. 집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배우며 삼신을 노래하고 무리를 모아 수련하니, 그 옳음과 용기에 공으로 봉해졌다. 일세의 조의로서 그의 무리는 3,000이었으니 가는 곳마다 구름처럼 모여서 다물흥방의 노래를 제창했다. 이에 의하여 그 몸을 던져서 의를 다한다는 풍속을 고취한 사람이었다.'고 하였으니. 그 노래에서 말한다.
지나간 것은 법이 되고 뒤에 오는 것은 위가 되네
법이라는 것은 그래서 날 것도 사라질 것도 없으며
위라는 것은 그래서 귀할 것도 천할 것도 없지
사람 가운데 하늘도 땅도 하나일 뿐이고
마음은 신과 더불어 근본에 닿나니
하나이기 때문에 빈 것도 찬 것도 같은 것이며
근본에 닿기 때문에 신이라 함이나 사물이라 함이 둘이 아닐 뿐
참은 온갖 착함의 극치이고 신은 참나를 주관한다네
극치이기 때문에 세 가지 참은 하나로 돌아오고
참하나이기 때문에 일신은 곧 셋이라
하늘 위 하늘 아래 다만 내가 스스로 있음이여
다물은 나라를 일으킴이라
스스로 있기 때문에 티없이 일을 하고
나라를 일으켰기 때문에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였지
참 천명의 큼이여, 성품을 낳아 공명에 통하네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서면 충성함이라
광명은 그래서 모든 선을 행하지 않음이 없고
효와 충은 그래서 모든 악은 일체 짓지 않나니
백성의 옳은 바는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나라 없이 나라는 건 어떻게 생겼을 것인가
나라가 소중하기 때문에 백성은 사물이 있어 복을 누리고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엔 혼이 있어 덕을 누린다네
혼의 생을 낳고 각을 낳고 영을 낳음이여
일신의 그윽한 거처는 천궁이 되네
삼혼은 그래서 지혜와 지혜와 생을 함께 닦을 수 있고
일신은 그래서 모습과 혼을 함께 이루는 것이라
우리들 자손 착하게 나라를 이룸이여
태백의 가르침은 우리의 스승일세
우리들 자손들은 그래서 그래서 다 평등하고
우리들의 스승은 그래서 가르침마다 새로워라
을밀선인은 일찍이 대에 살면서 하늘에 제사 올리고 수련함을 임무로 삼았다. 대개 선인의 수련법은 참전으로 계를 삼아 스스로를 굳세게 하고 영광되게 한다. 나를 비워 사물이 있게 하고 몸을 버려 옳음을 지켜서 나라 사람들의 사표가 됨이니, 천추에 우러러 감흥을 일으킬 만한 것이다. 역시 사람들의 존경하는 상징이 되었으니, 후세 사람들은 그 대를 칭하여 을밀이라 했으며, 바로 금수강산의 빼어난 곳의 하나이다.
대진국본기
大震國本紀
<조대기>에서 말한다. 개화 27년 9월 21일 평양성 함락 때 진국장군 대중상(大仲象)은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변을 듣고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려 개원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겠다고 원하는 자 8000인이 재빨리 모여들어, 동쪽으로 동모산에 이르러 웅거했다. 성벽을 굳게 하여 스스로 보존하고 나라를 후고구려라 칭하고 기원을 중광(重光)이라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격문을 전하니 원근의 뭇 성들은 귀속해 오는 곳이 많았다. 다만 옛 땅을 회복함을 자기의 임무로 삼다가 중광 32년(A.D.699) 5월 대중상은 붕어하였다. 묘호(廟號)를 세조(世祖)라 하고 시호(諡號)를 진숙열황제라 하였다.
태자 조영(祚榮, 2대 태조(太祖), A.D.699~719)은 부사를 따라 영주 계성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당도하여 제위에 오르다.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군 10만을 모집하여 위세를 크게 떨치었다. 곧 계책을 세우고 제도를 세워 당나라에 대항하여 적에 복수할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말갈의 장수 걸사비우와 거란의 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고 병력을 연합하여 크게 당나라 장군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격파했다. 뭇 장수들을 나누어 군현을 두고 지키며 유망민을 초무하고 정착을 널리 보호하고 크게 백성의 신망을 얻어 모든 기강을 새롭게 했다. 국호를 정하여 대진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니, 땅은 6,00리가 개척되었다. 천통 21년(A.D.719) 봄 대안전에서 돌아가시니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라 하고 시호(諡號)를 성무고황제라 하였다.
태자 무예(武藝, 3대 광종(光宗), A.D.719~738)가 즉위하였다. 개원하여 인안(仁安)이라 하고 서쪽으로 거란과 경계를 정하니 오주목의 동쪽 십리에서 황수를 굽어본다. 이해 개마 구다 흑수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 될 것을 청하며 공물을 바쳤다. 또 대장 장문휴를 보내 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주와 동래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다. 당나라 왕 융기가 노하여 병사를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듬해 수비장수 연충린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의 대산의 남쪽에서 크게 당나라 군사를 격파하였다. 당나라는 비밀히 신라와 약속하여 동남의 여러 군과 읍을 급습하여 천정군에 이르렀다. 제는 조서를 내려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이를 격파케 하였다. 이 때 신라와 당의 군사는 동사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추격하여 하서의 이하에 이르러 국계를 정하니, 지금 강릉의 북이하가 그것이다. 해주 암연현은 동쪽으로 신라(新羅)와 접했는데 암연은 지금의 옹진이다. 이로부터 신라는 해마다 입공하고 임진강 이북의 제성은 모조리 우리에게 속했다. 다시 이듬해 당나라는 신라의 병사와 연합하여 침입하였으나 결국은 아무 공도 없이 물러났다. (해설)
인안 16년 구다 개마 흑수의 여러 나라들이 항복해 오니, 이들을 성읍으로 삼았다. 이듬해 송막 12성을 쌓고 또 요서 6성을 쌓다. 마침내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니 그 원폭이 9,000리였다. 성대한 나라였다. 이 해 당나라 신라 및 왜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는 해동성국이라고 칭송했다. 이에 발해 사람 셋이면 한 마리 호랑이를 당한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때의 군민은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며 의를 즐겼다. 오곡은 풍성하고 사해는 안락했다. 대진육덕의 노래라는 것이 있어 이러한 대진국을 찬미했다. 다음해 3월 안민현에 감로가 내리다. 예관은 계장을 올려 하의할 것을 청하여 이에 따랐다. 이 달 16일 삼신일체의 상제를 서압록하의 강변에서 제사하였다. 서압록하는 고리(高離)의 옛 나라의 땅이다. 19년 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광종(光宗)이라 하고 시호(諡號)는 무황제라 했다. 태자 흠무(欽茂, 4대 세종(世宗), A.D.738~794)가 즉위했다. 개원하여 대흥(大興)이라 하고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로부터 상경의 용천부로 옮겼다.
이듬해엔 태학(太學)을 세우고 천경(天經) 신고(神誥)를 가르치며 한단고사를 강하고, 또 문사에 명하여 국사 25권을 편찬케 하니, 문치(文治)는 예악을 일으키고 인간의 홍익(弘益)하는 교화(敎化)는 이로써 만방에 미치게 되었다. (해설)
大興四十五年淄靑節度使李正己擧兵拒唐軍帝遣將助戰李正己高句麗人也生於平盧二十二年師衆逐軍帥李希逸立正己卒子納統父衆五十六年納卒子師古代其位及卒其家人不發喪潛使迎師道於密而奉之
대흥(大興) 45년(A.D.782) 치정의 절도사 이정기(李正己)는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제는 장수를 보내 싸움을 도우게 하였다.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이요, 평로에서 태어났다. 52년(A.D.789) 장수들은 군사 이희일을 쫓고 정기를 즉위시켰으나 죽었고, 아들인 납이 아버지의 백성들을 통솔하였다. 56년(A.D.793) 납도 죽고 아들 사고가 그 자리를 이었다. 사고가 죽었을 때 가인들은 상을 발하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사도를 맞아 고를 모셨다.
대흥 57년(A.D.794)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세종(世宗) 시호(諡號)를 광성문황제라했다. 국인은 그의 족제(아우) 원의(元義)를 즉위시켰으나 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갑술년(A.D.794) 국인은 이를 폐하고 선제의 손자 화여(華璵, 6대 인종(仁宗), A.D.794~795)를 맞아 즉위시키고 개원하여 중흥(中興)이라 하였다. 이듬해(A.D.795)에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인종(仁宗) 시호(諡號)를 성(成)황제라 하였다.
황숙(皇叔)인 숭린(崇璘, 7대, A.D.795~809)이 즉위하니 이를 목종(穆宗) 강(康)황제라 한다. 의종(毅宗, 8대) 정(定)황제 원유(元瑜), 강종(康宗, 9대) 희(僖)황제 언희, 철종(哲宗, 10대) 간(簡)황제 명충(明忠)을 지나 선(宣)황제 인수(人秀, 11대 성종(聖宗), A.D.818~832)에 이르다. 타고난 모습이 영명하시고 덕은 신과 같고 재능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곧 태조의 풍채가 있었다. 남쪽으로는 신라를 평정하여 이물, 철원, 사불, 암연 등의 7주를 두고 북으로는 염해, 나산, 갈사, 조나, 석혁 및 남북 우루를 공략하여 제부를 두고, 장백의 동쪽을 안변이라 하고 압록강의 남쪽을 안원이라 하고 모란의 동쪽을 철리라 하고 흑수의 강변을 회원 난하의 동쪽을 장령, 장령의 동쪽을 동평이라 하며 우루는 북쪽에 있다. 대개마의 남북에 자리잡고 땅의 넓이 9,000리 영토는 크게 열리고 문치는 널리 가득 퍼졌다. 위로는 국도로부터 밑으로는 주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식 있고 구서 오계를 아침저녁으로 읽고 익혔다. 춘추에 공적을 생각하여 뭇 사람이 의논하여 인재를 추천하며 공물을 바쳤다. 사람들은 이미 힘을 길렀고 집집마다 모조리 나라에 쓰임을 기다리니, 이로부터 국세는 부강하여 나라의 안팎이 모두 편안하게 즐거웠으니 절로 도둑질이나 모사의 폐단이 없어졌다. 당나라, 왜, 신라, 거란 할 것 없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천하만방은 이로써 성인흥취의 해동성국이라고 흠송하였다.
오대가 바뀌었을 때 야율은 빈번하게 몇 차례나 싸움을 일으켜 왔으나 종내 굴복 시키지는 못했고 뒤에 장종 화황제 이진, 순종 안황제 건황, 명종 경황제 현석을 지나 애제인 청태에 이르러 거란에게 멸망되니 세조로부터 15세를 전하여 259년을 누렸다.
목종은 개원하여 정력이라 했고 의종은 영덕 강종은 주작 철종은 태시 성종은 건흥이라 히고, 장종은 함화 순종은 대정 명종은 천복 애제는 청태라고 개원하였다.
대진국의 남경인 남해부는 본래 남옥저의 옛 땅이다. 지금의 해성현이 그것이다. 서경인 압록부는 본래 고리국이요, 지금의 임황이다. 지금의 서요하는 곧 옛날의 서압록하였다. 고로 옛 책에서의 안민현은 동쪽에 있으며, 그 서는 임황현이다. 임황은 뒤에 요나라의 상경 임황부가 된다. 곧 옛날의 서안평이다.
정주는 의려국이 도읍한 땅이다. 선비 모용괴에게 패하여 핍박받을 것을 걱정하다가 재빨리 생각하기를 '나의 혼이 아직도 오히려 망하지 않았으니 어디 간들 이루지 못할 것인가?'라고 했다. 은밀하게 아들 부(의)라에게 맡겨서 백랑산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너게 하였더니 따르는 자 수천이라,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자칭 삼신의 부명에 응한다고 하여 군신으로 하여금 하례의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혹은 말한다. '의려왕은 선비 때문에 패하여 도망쳐서 바다에 든 후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들은 도망쳐서 북옥저를 보전하고 이듬해 아들 의라가 즉위하니 이 때부터 모용괴가 또다시 국인을 침략하였다. 이에 의라는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해서 왕이 되다.'라고.
일본은 옛날에 이국(伊國)에 있었나니 역시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쪽은 안라(安羅)에 속한다. 안라(安羅)는 본래 홀본(忽本)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들어갔는데 고구려와 이미 친교를 맺었다. 말로국의 남쪽을 대우국이라 한다. 시라군이 있었으니 본래 남옥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남만, 도침미, 완하, 비자체의 무리는 모두 조공했다. 남만은 구려(九黎)의 유종으로서 산월로부터 온 자들이다. 비자체는 변진의 비사벌 사람의 취락이다. 완하는 고구려 속노들이다. 때에 왜인들은 갈리어서 산도에 근거하여 살며 각각 100여 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구야 한국이 가장 크니 본래 구야 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가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 위, 만, 월의 무리들 모두 통상했다. 처음 바다를 건너 천여 리에 대마국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 리쯤 된다. 또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 리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여기는 사방 300여 리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 또 바다를 건너면 말로국에 이른다. 본래 읍루(挹婁)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동남쪽 육지로 500리쯤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곧 반여언의 옛 읍이다.
<신당서>에서는,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붙어 있던 자로 성은 대씨이다.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자가 말갈(靺鞨)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여중과 함께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을 확보하여 오루하에 근거하였다. 중상(仲象)이 죽고 아들 조영(祚榮)은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도망쳐 갔다. 곧 비우의 무리를 합쳐 거칠고 멀다는 것을 믿고 곧 건국하여 스스로 진국왕이라 이름하고 부여, 옥저, 변한, 해북의 뭇 나라를 모조리 었었다.'고 하였다.
사씨는 말하기를 '걸걸중상(乞乞仲象)은 패망의 나머지 무리를 데리고 험한 곳에 달려가 스스로 보전하였다.'라고 한다. 태왕이 빈(牝)을 떠난 것과 같이 고왕 조영은 창업의 뜻을 갖고 가시밭을 갈아 다시 나라의 기초를 이룸은 구천이 월(越)나라를 세움과 같다. 대저 폭원은 이미 설만하니, 곧 문덕을 가지고 이를 닦고 제도를 제정하여 관작을 세우고 군현을 늘어놓아 대국에 저항하였다. 나라의 영역은 5,000리에 이르고 역사는 300년에 이르다. 당시 사방에 대진국을 넘볼 자가 없었고 역시 크게 성했던 나라라 할만하다.
고려 현종 원문대왕의 20년 거란의 동경장군 대연림은 태조 고황제의 7세손이다. 유수부마 소효원과 남양공주를 사로잡고, 호부사 한소윤 등을 죽이고 즉위하여 요를 세운다고 하고 천경이라고 개원했다. 고길덕을 파견하여 와서 건국을 알리고 겸하여 원조를 청했다.
요동의 유보 수보는 정치를 함에 혹독하였다. 고려의 예종 문효대왕의 11년 정월, 동경의 비장이요, 발해 사람인 고영창은 수십 인과 술김에 용기를 내어 칼을 들고 울타리 담장을 넘어 부위에 들어갔다. 등청해서 유수가 있는 곳을 묻고 거짓으로 외부의 군대가 쳐들어 왔다고 하며 대비를 해야겠다고 청하였다. 수보는 먼저 나오다가 무리에게 죽임을 당하고, 가유수 대공정과 부유수 고정신은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서쪽 문을 뚫고 나와서 요나라로 도망했다. 영창은 스스로 대 발해국 황제라 칭하고 융기라고 개원하니 요동 50여 주를 거느렸다.
<송사>에 가로대,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자들인데 요나라에 망하니 그 족장은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그 서쪽 변두리 땅을 확보하여 나라를 세우고 개원하여 스스로 장안국이라 했다.
개보 3년, 왕 열만화는 입공하는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태종 때 그 왕 오현명은 다시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거기서 요약하여 말하기를 '신은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 터로 발해의 유민으로서 이 한쪽 구석을 보전하는바'라고 하였다. 태종은 답장에서 요약하여 이르기를 '경은 마한(馬韓)의 땅을 남김없이 모두 남김없이 보전하고 경파의 표를 올리니 운운'이라고 했다. 단공(988~989)으로부터 순화(990~994) 사이에 다시 여진을 통해 표를 올리더니 그 뒤에는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대진국은 애제의 청태 26년 봄 정월 야율배는 동생 요골과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을 포위하자 애제가 성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대진국은 망했다.
2월 병오 요의 태조가 동단국을 세우고 장자 배를 인왕황으로 삼았다. 왕은 감로라고 개원하고 홀한성을 천복성이라 개칭하였다. 천자의 관복을 준용하고 12류의 면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으니 바로 대진국의 옛날 제도이다. 숙부 질자를 좌대상으로 삼고 대진의 노상을 우대상으로 삼으며, 대진국의 사도 대소현을 좌차상으로 삼고, 야율우지를 우차상으로 삼다. 나라 안의 사형이하 죄인을 사면하고 해마다 포 10만단, 말 천 필을 할 것을 약속케 했다.
고려국본기
高麗國本紀
태조 신성대왕의 천수 2년 서울을 송악의 남쪽으로 정했다. 25년 어제훈요를 발표했다. 그 대략을 보면 이렇다.
'생각컨대 우리 동방이 옛부터 당풍을 사모하여 문물 예악이 빠짐없이 당나라의 제도를 따랐다. 방을 달리하고 땅을 달리하는 사람은 성품 또한 각각 다르기 마련이고 적어도 반드시 같을 순 없는 것 아닐까?'
태봉국의 왕 궁예는 그 선조가 평양사람이라 본래 보덕왕 안승의 먼 후예이다. 그의 아비는 강직하여 술가의 말에 따라 어머니의 성씨를 따서 궁씨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의 수임성 사암 모잠 대형은 남은 백성들을 모아 후고구려왕으로 삼고 원조를 신라에 청하였다. 신라왕은 이를 나라의 서쪽 금마저에 두었다가 뒤에 개명하여 보덕왕이라 했다. 신문왕은 즉위하더니 보덕왕을 거두어 소판을 삼고 그의 족자 대문을 금마저에 살게 하였는데 모반하여 왕을 칭했기 때문에 주살되었다. 나머지 무리들은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에 근거하다가 다시 반역을 꾀하였으므로 신아의 평정을 받게 되었고 그곳 사람들은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겼다.
대진국 명종 경황제의 천복 9년 5월 5일, 궁예가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 옥상에는 흰빛이 비추이고 긴 무지개의 끝은 하늘에 닿은 듯 보였다. 신라 일관이 이를 보고 머지 않아 나라에 이롭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라 했다. 이 소식이 들리자 왕은 이를 미워하여 사람을 시켜 그 집을 파괴하고 그를 죽이려 했다. 그 어미는 진귀한 보물로 뇌물을 쓴 후에 애를 끌어안고 도망가 숨어살며 고생하며 양육했다. 나이 10세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선종이라 했다. 장년이 되자 방일하여 원래부터 계율에 따르지 않으며 크고 작은 일에 담이 컸다. 어느 때 바루를 들고 재를 모시러 가는데 까치가 부적 하나를 물어서 바루 속에 떨어뜨렸다. 이를 펴본즉 왕이라는 글자가 있는지라, 이를 숨기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매우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앞서 안승 때부터 왕을 모시는데 고생이 많았거늘, 신라는 이에 보답은 하지 않고 도리어 고 땅과 백성들을 뺏고 다만 왕의 누이 하나를 아내로 삼게 하였을 뿐이었다. 고구려의 유민들은 이 때문에 대를 물려서 원망을 갖고 불만을 품고 있다가 변을 일으켰는데 번번이 패했었다. 궁예 때에 이르러 나라가 어지럽고 쇠약함을 보고 이를 틈타 무리를 모아 조상의 옛 땅을 회복하고 쌓여왔던 원한을 씻으려 했다. 곧 궁예는 죽주의 도적이었던 기훤에게 투항했는데, 훤이 업신여겨 이를 예로써 대하지 않았다. 궁예는 울분을 터뜨리고 스스로 편치 못하더니, 몰래 훤의 휘하의 원회 신훤 등과 결탁하여 친구가 되어 북원의 적, 양길에게 투항했다. 양길은 이들을 잘 대우하여 이들에게 일을 맡겼다. 병력 100기를 나누어주고 동쪽을 공략하게 하니 주와 군이 모두 항복했다. 또 아슬라를 공략하여 무리가 600
이 되자 스스로 장군이라 부르게 했다. 힘들고 쉬운 일들을 모두 사졸과 함께 하고 뺏은 것을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않고 함께 나누니, 무리들이 마음으로부터 두려워하며 따르게 되었다.
천복 27년 태수 왕륭은 궁예에게 귀순하며 그에게 설명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 숙신 변한의 왕 노릇 하고자 한다면 먼저 송악을 점령하고 나의 장자 건으로 하여금 그 주인이 되게 하는 것보다 상책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그 말에 따랐다. 때에 이훤은 병을 무진주에서 일으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삼국의 근원을 상고해 본즉 마한이 먼저 건국하고, 혁거세가 뒤에 일어나고 변진이 그 뒤를 따랐다. 백제가 개국하여 600년을 전했는데 신라가 당나라와 합쳐 공격함으로써 멸망시켰다. 이제 나는 덕이 없지만
의자왕의 분을 풀려고 한다.'
마침내 완산에 도읍하고 왕을 칭하며 국호를 후백제라 하였다.
궁예도 역시 그 이듬해 왕이라고 칭하면서 말하기를,
'신라는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했다. 이는 치욕스런 일이야. 내 반드시 고구려를 위하여 그 원수를 갚을 터'라고 했다.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고 건원하여 무태라 하였다. 남쪽으로 나아가 흥주사에 이르렀을 때 벽에 신라 전 왕의 화상이 걸려있음을 보고 칼을 뽑아 이를 쳤다. 궁예는 마음속으로 신라를 합치고자 그 서울을 멸망시키겠다고 외치며 신라로부터 귀순해 오는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 때부터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하고 머리에 금책을 썼다. 또 경 20권을 저술하고는 때때로 정좌하여 강설하였는데 승 석총은 말하기를 “모두 사설괴담으로 이를 들어 논할 가치도 없다”하니 궁예가 듣고는 철퇴로 때려서 죽였다.
천수 원년 무인 6월,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승겸, 복지겸 등의 제장에게 추대되어 새벽에 곡식더미 위에 앉아 군신의 예를 행하고, 사람을 시켜 뛰어다니면서 '왕건이 마침내 의거를 들었다'하고 외치게 하니, 달려와 모이는 무리가 많았다. 먼저 궁문에 이르니 북 치며 기다리는 자 역시 만 여명이라 마침내 포정전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정하여 천수라 했다. 여기에서 태봉왕 궁예는 변을 듣고 평복을 한 채 문을 나서 도망하다가, 얼마 못 가서 부양의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거란의 성종은 장군 소손녕을 보내 침략하니 봉산을 격파하여 우리의 선봉을 몰아 부쳤다. 성종 문의왕은 군신을 모아 의논하니 어떤 이는 항복을, 어떤 이는 땅을 갈라 거란에게 주자고 하는데, 중군의 서희만이 홀로 말한다.
“지금 적군의 기세가 크다는 것만을 보고 즉시 서경이북을 적에게 준다는 것은 계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삼각산 이북도 역시 고구려의 옛 땅입니다. 저들이 끝없는 욕심으로 이를 가지려 한다면 막지도 못할 것이라 하여 모조리 줄 것입니까? 항차 지금 땅을 잘라서 준다면 실로 만고의 치욕입니다. 원컨대 어가를 돌려 돌아가시고 신 등으로 하여금 한 차례의 싸움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 후에 이런 의논을 한다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서희는 국서를 가지고 거란의 진영으로 가 상견의 예를 청하니 손녕이 말하기를,
“나는 대조의 귀인이다. 마땅히 마당에서 절을 하라.”하니 서희는,
“양국의 대인이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손녕이 또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 땅은 우리가 갖고 있는 바라. 그런데 그대들이 이를 침략하더니 우리와 땅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넘어 송나라를 섬기고 있다. 때문에 오늘의 전란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쪼개어 이를 바치고 조공을 올린다면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니 서희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 나라는 고구려를 선조로 한다. 때문에 고려라고 이름하고 평양에 도읍했다. 만약 국경을 논한다면 곧 귀국의 동경은 모두 우리의 땅이다. 어찌 이를 침식이라 할 수 있으랴. 만약 여진을 쫓아 우리 옛 땅을 되돌려 주면 곧 감히 교류하지 않을손가.“
하니 말솜씨가 강개한지라 손녕은 강변함이 쓸모 없음을 알고, 병을 파할 것을 결정하고 연회를 베풀고 위로한 뒤 서희를 송별했다.
도원수 윤관은 여진을 공격하고 격파하여 비를 선춘령에 세워 경계를 삼았다. 아들 언이를 보내 표를 올리고 축하하게 하였다. 평장사 최홍사, 김경숙, 참지정사 임의, 추밀원사 이위 등은 선정전에 들어가 이에 대하여 극론했다.
“윤관과 오연농과 임언 등은 함부로 명분 없는 군대를 일으켜 군을 파하고 나라를 해롭게 한 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간관 김연과 이재등 역시 계속하여 탄핵하기를,
“임금이 토지를 취하는 것은 본래 백성을 키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을 다투며 사람을 죽였는데, 그 땅을 돌려주고 백성을 쉬게 함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과 말썽이 생길 것이옵니다.”
라고 했다. 제 가로되 “무슨 말썽인가” 하시니 김연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처음 9성을 쌓았습니다. 거란에 표징을 고함에, ‘여진의 궁한리는 곧 우리의 옛 땅이다. 그 백성도 역시 우리의 편맹이다. 근래 변두리를 노략질함이 끊이질 않기 때문에 수복하여 그 성을 쌓는다.’고 하였습니다. 표사가 그렇다면 궁한리의 추장은 거란의 관직을 받은 자일 것이니 거란을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망언을 하며 우리를 책양할 것입니다. 만약 동쪽을 여진에 대비하고 북쪽을 거란에 대비한다면 신은 9성이 삼한의 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라고 했다. 간의 대부 김인존도 역시 옛 땅을 돌려줄 것을 청했다. 제는 선유하여 가로대 '양원수는 여진을 정벌하여 선제의 유지를 받은 바라, 짐이 몸소 말하는 것을 행하여 몸은 활과 창을 무릅쓰고 깊숙이 적진에 들어가서 포로로 잡고 죽인 자가 이루 다 셀 수 없으며 100리의 땅을 열고 9주의 성을 쌓아 국가의 치욕을 갚았다면 그 공은 크다고 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여진은 인면수심으로 변덕이 몹시 심하다. 저 남은 무리들이 있지만 의지할 곳은 없다. 고로 추장이 항복해 오며 평화를 청해오매, 군신이 모두 좋다고 하므로 짐도 역시 차마 어쩌지 못하겠다. 유사가 법에 따라 여러 차례 탄핵을 논하는바 있어서 갑자기 그 직을 빼앗으려 한다. 짐은 종내 이를 허물로 여기진 않는다. 바라건대 속히 다시 복직하게 되기를 비노라'고 하였다.
예종 문효대왕 4년 가을 7월, 9성에서 철수하여 여진의 옛 땅을 돌려줬다. 이보다 앞서 여진은 요불과 사현 등을 보내 상주하여 가로대,
“옛날 우리 태사 영가는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방(고려)에서 나와 자손에 이르렀다.’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귀부하여야 옳을 것입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갑오 연간에 궁한리 사람들이 스스로 안정하려 들지 않았는데 이는 본래 태사의 지위 밑에 있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국조가 죄를 앞세워 이들을 토벌하시더니 다시 수교를 허락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이지 않았는데, 작년엔 크게 일어나서 우리의 모아를 죽이고 9성을 쌓아 외로이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떨게 하고 말려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에 태사는 우리를 보내어 땅을 되돌려 줄 것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재상 추밀원 대성 지재고 시신 병마판관 및 문무의 3품 이상을 만나 다시 9성을 돌려주는 일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가 '띰다'고 했다. 옛 사서에서 말한다.
'두 장군은 비를 선춘령에 세우고 이곳에 이르러 고려의 국경이라고 했다. 선춘령은 두만강으로부터 700리 밖 송화강의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한다.'
광주목 윤언이는 자해표에서 말한다. '중군 금부식이 상주한 것을 보건대, “언이가 정지상과 결탁하여 결사당을 만들어 크고 작은 일들을 상세히 의논하더니 임자년에 서경으로 행차하셨을 때에는 건원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국학생들을 유혹하여 앞의 일을 상주하도록 하였으니, 대저 대금국을 격동시키려고 일을 벌리고는 틈을 타서 제 멋대로 처리해 버렸고 다른 사람들을 당파로 몰아 공모하여 법도에 맞지 않는 짓을 함은 신하된 도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신은 재삼 거듭하여 읽고 난 후에야 겨우 마음에 안정을 찾았습니다. 건원칭제를 청한 근본은 임금을 높이자는 정성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태조와 광종의 고사가 있습니다. 지난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비록 신라와 발해가 황제를 칭했어도 대국은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고 작은 나라들은 의논도 끄집어 낼 수 없었으니, 잘못될 바가 어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좋은 때에 오히려 쩔쩔매는 셈이니 신은 일찍이 이를 논했습니다. 죄라면 그것입니다. 지금 결사당을 만들었다거나 대금을 격노하도록 만들었다는 말 등이 매우 크지만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강한 적이 우리의 땅에 쳐들어오면 이를 막아내기에도 벅찰 텐데 어찌 그 틈을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당파를 만들었다고 하는 자는 누구이며, 누구를 가리켜 당파라고 하는지요? 만약 무리가 화합하지 못한다면 싸워봤자 패하여 오히려 몸둘 곳조차 없어질텐데 어찌 멋대로 모반하겠습니까? 생각하고 생각해 보아도 신은 지극히 자질이 약하나 서쪽으로 정벌의 전장에 나아가서 몸을 잊고 나라를 지켰으니 의로써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일의 이룸은 모두가 사람에게 달린 것인데 어찌 도에 맞도록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까?'
<금사>에 말하기를 '세종은 대정 15년(1175)9월, 고려의 서경유수 조위총이 서언 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자비령 이서와 압록강 이동을 가지고 내부코자 하였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있다.
<고려사>에 말하기를 '예종 11년(1115) 3월 을미에 상은 요의 내원과 포주의 두 성이 여진에게 공격을 받아 성중에 양곡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도병마록사 소억을 보내 쌀 1000석을 보냈으나, 내원은 통군이 이를 사절하고 받지 않았다. 8월 경진에 금나라 장수 철갈이 요나라의 내원 포주 두 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하게 되었는데, 통군 야율령은 무리를 데리고 도망치려 했다. 상은 추밀원 지주사 한교여를 파견하여 초유하니 야율령은 왕의 어지가 없다 하여 사양했다. 교여는 달려와 이를 주상했다.
“추밀원으로 하여금 공문을 갖춰 이를 보내고자 한다.”고 하였다. 재신과 간관은 말하기를 “저가 왕의 어지를 요구하지만 그 뜻을 알기 어렵다. 고로 이를 말리도록 요청한다”고 하니, 상은 곧 사신을 보내 금나라에 가서 청하기를 “포주는 본래 우리의 옛 땅이다. 바라건대 요나라를 이 때문에 만나 뵙고자 한다.”하니, 금나라 왕이 사자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그 땅 내원성을 직접 취하라”고 하였다. 후암 이존비(-1287)는 고려 경효왕 때의 인물이다. 한 때 서연에 있으면서 자주부강론을 상주하였다. '우리 나라는 한단조선, 북부여, 고구려 때부터 모두 부강자주해 왔다. 또 원을 세우며 칭제하는 일은 우리 태조 때에 처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사대의 논은 정해져서 국시가 되고, 군신상하가 굴욕을 감수하고 스스로 혁신할 기도를 하지 않음은 하늘이 두려운 바라. 나라를 보전함을 진실로 옳은 것입니다. 어찌하여 천하 후세에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하는가? 바야흐로 왜와 원한을 사려 하다가 원실에 변고가 생기면 장차 무엇에 기댈 것인가? 그리고 나라를 위해 칭제하는 일이 시기를 핑계로 기피하는 바 된다면 참으로 회복할 수 없는 나라일 것이니, 자강책을 강구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주하는 바가 비록 채택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듣는 자 이를 그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뒤에 또 왜에 대비한 5사를 말했는데 첫째, 호구를 잘 파악하여 병사로 삼을 것. 둘째, 군대와 농사일을 하나로 하여 수륙 공히 나라를 지킬 것. 셋째, 군량을 비축하고 전함을 수조하는 일. 넷째, 수군을 확장하며 겸하여 육전도 익혀둘 일. 다섯째, 지리를 상세히 익히고 인화를 확보할 일. 등을 말했다. 일찍이 회당상인에게 보낸 시 한 수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사물은 아름답고 더러움을 떠나서 쓰임이 있는데 누가 있어 쓴 오얏이 씨까지 많다고 싫다고 하는가? 맏아들은 천자가 되어 조정에 남지만 둘째부터는 새로 법왕의 가문을 이룬다네. 충성을 바침은 진실로 신하의 본분이고 사랑하는 이들을 떠남은 그게 바로 출세가 아니련가. 돌아보며 웃는 늙은이 상념에 빠지면 때로 꿈속에 들어 하늘 끝까지 아득해라. 상께서 일찍이 연경에 계실 때에 연나라 여인의 유혹을 받았다. 헤어질 무렵 손에 연꽃을 한 개 쥐어주며 '상께서 돌아가시는데 이 꽃을 보시고 혹시 시들면, 이 목숨 막상 다하는 것으로 아십시오'하다. 며칠 뒤 꽃을 보니 꽃이 초췌하여 죽으려 하는지라, 상은 여인의 죽음을 염려하여 다시 연나라로 가려하니, 존비가 청하여 연나라로 가서 여인을 찾아보았다. 연나라 여인은 울며 시를 바쳐 가로대, 서로 바친 연꽃의 향기여 처음에는 붉은 빛 싱싱하였지. 가지를 잘라 며칠이 지나니 초췌하기 님과 같아라. 했다. 존비는 임금이 시를 보고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커질까 염려하여 그녀를 대신하여 시를 지어 바쳤다.
어리석은 사람아, 어리석은 사람아,
수레를 멈출 것 없다오, 수레를 멈출 것 없다오.
이 몸이야 연잎에 이슬 같아
거기서 구르면 여기서 둥글다오.
임금의 이 시를 보고 크게 노하여 마침내 귀국했다. 뒤에도 임금은 연나라 여인을 원망하기를 끊이지 않는지라 존비는 상주하여 '신은 그 때에 임금님의 봉환을 서두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권사를 했사오니 임금님을 속인 죄를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의 화가 나서 그의 관직을 뺏고 유배시켰다. 문의 태자와 조신이 반복하여 유배를 풀 것을 장계한 고로 임금은 다시 후회하며 깨달은 바가 있어 관직을 회복하여 소환했다. 그러나 사자가 채 미치기 전에 존비는 숨졌다. 부음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크게 슬퍼하며 조회를 폐하였다. 태자가 상을 치룸에 말하였다. '이존비의 정직은 방가의 사직이다. 어찌하여 요절함이 이 같을까?'라고. 곧 장사를 왕명으로 왕례를 써 행하고 마침내 형강의 변두리에, 그 산을 에워싼 4리로써 그를 봉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을 왕묘라 하고 리를 산사라 한다. 행촌 이시중 암(1297~1364)은 일찍이 권신은 무리가 국호를 폐하려 하자, 이를 말려 청하여 행성의 의를 세웠으니, 그 소의 략에 이르기를 '하늘 아래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나라를 가지고 나라를 삼고 또 각각 그 풍속을 가지고 풍속을 삼는다. 국계를 서물지 말라 민속 역시 섞지 말라.
하물며 우리 나라는 한단 이래로 모두 천제의 아들을 칭하고, 제천을 행하는 일 있어, 절로 분봉하는 제후와 근본이 서로 갖지 않다. 지금 일시 다른 사람의 발 밑에 있기는 하나 이미 혼과 정신과 피와 살이 있어 한 한 근원의 조상을 갖게 되었으니, 이게 곧 신시개천으로부터 이를 삼한관경(三韓管境)으로 하고 크고 이름난 나라를 하늘아래 만세에 만들게 된 연고이다. 우리 천수태조께서 창업의 바탕으로 고구려가 다물국을 세우신 풍습을 계승하사 온 세상을 평정하시고, 나라의 명성을 크게 떨치었었다. 때로 강한 이웃이 생겨 틈을 타 횡포를 일삼았으니, 유영의 동쪽이 아직도 우리의 것이 되지 못했다. 이것이 곧 군신이 밤낮으로 떨치고 나서서 도모하고 자주부강의 계책을 감히 세우고 있는 이유인데, 잠청과 같은 간사한 무리가 있어 기량을 자랑하며 남몰래 꾀하고 있다. 우리 나라가 작다고 하지만 국호를 어찌 폐하려 하는가? 세력이 비록 약하다 한들 위호를 어째서 깎고 낮추려 하는가? 이제 그러한 행동거지는 모두 간사한 소인배의 포도에서 나온 바요 국민이 아닌 자의 공언일 뿐, 마땅히 도당에 청하여 그 죄를 엄히 다스릴진저'라고 하였다. 행촌시중은 저서가 세 가지 있으니 <단군세기>는 원시국가의 체통을 밝힌 바 현저하고, <태백진훈>은 도학심법을 소개한 것이요, <농상집요>는
경제실무의 학문이다. 문정공 목은선생 이색은 이에 서문을 붙여 가로되,
“대저 의식에 말미암아 족하게 되는 것, 재물을 쫓아서 풍부해지는 것, 자식 후손들이 의지하여 두루 갖춰야 할 것에 이르기까지 문을 가르고 비슷한 것을 모아 자세하게 나누어 밝히고 비추지 않음이 없다 할지니 실로 이치를 살리는 좋은 책이라.”라고 하였다.
행촌선생이 일찍이 천보산에 노닐 때에는 태소암에 묵었던 바 한 거사가 있어 말하기를 “소전은 많은 기이한 옛날 책을 가지고 있다.” 이에 이명(李茗), 범장(范樟)처럼 신서를 얻으니 모두 옛 한단의 진결이라. 그 통달박고의 학문은 탁연하다고 칭찬할 만한 바가 있었다. 게다가 그 참전수계의 법은 대저 성(性)을 엉기게 하여 지혜(智慧)를 만들고, 명(命)을 엉기어 덕(德)을 이루고, 정(精)을 엉기어 힘(力)을 이루게 한다. 그래서 우주에 있으며 삼신(三神)은 오래도록 존재한다. 저 사람과 사물에 있어 삼진(三眞)이 멸하지 않음은 마땅히 천하만세의 대정신과 혼연히 그 체를 같이하고 생화하여 무궁한 때문이라'고 했다. 선생은 가로되 '도(道)는 하늘에 있을 땐 삼신(三神)이요, 도(道)는 사람에 있을 때 삼진(三眞)이라고 한다. 그 본(本)을 말한다면 곧 일(一)이 된다. 유일을 도(道)로하고 불이를 법(法)이라 한다. 클지로다. 한웅은 우두머리로서 서물(庶物)에 나오셔서 길을 천원(天元)에 얻으시고 가르침을 태백에 세웠도다. 신시개천은 뜻을 처음으로 크게 세상에 밝혔노라. 지금 우리들 곧 글로 도를 구하고 참전하야 계를 받는다. 나의 가르침을 높이는 일도 아직 이루지 못했다. 또 듣는 일은 백가지라 하나 만나기 어렵고, 나이 들어 어느덧 백발이 발치에 이르렀으니 한스럽기 짝이 없어라'고 했다. 선생은 시중 벼슬을 하시다가 강도이 흥행촌으로 퇴거하시고, 스스로를 흥행촌의 늙은이라고 부르시며 마침내 행촌삼서를 쓰시어 집에 간직하셨다. 현효왕의 뒤 5년 행촌 이암(李嵒)은 명을 받들어 참성단(塹城壇)에서 제천하시고 백문보에게 말씀하시기를 “덕(德)을 믿고 신(神)을 수호함은 첫째로 신념에 달려 있고, 영재를 기르고 나라를 지킴은 공이며 발원이다. 곧 신은 사람에 의존하고 사람은 신에 의존해서 백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야만 나라는 영원토록 안강을 얻으리라. 제천의 성은 보본으로 필경 돌아가는 것이니, 사람의 세상에서 그것을 구해 봐야 갑자기 사라질 거품과 같은 것을”이라 했다. 정지상은 하동사람이다.
일찍이 그의 누이로 인해서 원나라에 왕래하다가 경효왕을 만나 입시하여 수종함에 공이 있었으므로, 왕이 즉위하게 되자 즉시 뽑히어 감찰 지평에 이르렀는데, 일을 처리함에 큰소리를 치지 않았다. 일찍이 전라도의 안염사가 되어 암지에 가서는 세도가를 만나보더니 별안간 그를 사로잡아 문초하고 여러 고을에 이를 공시하니, 온 도가 다 가슴이 써늘했다. 야사불화라는 자는 본국사람이다. 원에 있으면서 순제(1332~1370)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의 형 서신주는 육재가 되고, 동생 응여는 상호군이 되었다. 세력을 믿고 위복을 갖춰 국인이 그를 꺼렸다. 불화는 향사로서 본국에 이르러 이르는 곳마다 횡포를 멋대로 하였으니, 존무사나 안림사들이 대개 욕지거리를 얻어먹거나 망신을 당했다. 이렇게 거칠게 굴다가 전주에 이르렀다. 정지상이 그를 맞아 근신하며 대접했는데 불화는 매우 거만하게 대했다. 반접사 홍원철은 지상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었지만 지상이 듣지 않았다.
원철이 격노하고 불화는 말하기를 “지상이 천사를 업신여긴다.”고 했다. 불화가 지상을 결박하니 지상은 성을 내며 크게 주의 관리를 속여 외쳐 말하길, “국가 이미 기씨를 주살(誅殺)하고 다시는 위나라를 섬기지 않는다. 재상 김경직을 원수로 임명하여 압록강을 지키게 했다. 이 사신을 제어하기 쉽다. 너희들은 무엇이 두려워서 나를 구하지 못하는가? 장차 서의 주가 강등되어 작은 현이 되는 꼴을 보려 하느냐?” 했다. 읍리들이 소리지르며 달려들어 결박을 풀고 도와주었다. 지상은 마침내 무리들을 이끌고 불화, 원철 등을 사로잡았다. 이들을 가두고는 불화가 차고 있는 금패를 빼앗아 서울로 달려 돌아왔는데, 공주를 지나면서 응여를 체포하고 철퇴로써 이를 치니 며칠만에 죽어 버렸다. 지상은 달려와서 왕께 고했다. 왕은 경악하여 순군을 내리고 행성원외랑 정휘에게 명하여 전주목사 최영기 및 읍리 등을 체포하고, 또 차포온을 보내 내온을 주고 불화를 위로하며 그 패를 돌려주었다. 원나라는 단사관 매주를 보내와 지상을 국문케 하였다. 왕은 뭇 기씨를 주살하고는 지상을 석방하여 순굿제공을 삼았다. 다시 호부시랑 어사중승를 거쳐 벼슬이 판사에 이르러 죽었다.
성품은 엄격하여 대개 큰 죄를 다스릴 때에는 그를 보내었다. 지상의 과부로 담양에 살다가 왜인은 해를 입어 죽으니 아들이 박위를 따라 대마도를 정벌했다. 문대는 고종 안효대왕 18년, 낭장으로 서창현에 있다가 몽고병에게 잡혔다. 몽고병이 철산성 밑에 이르러 문대로 하여금 성안의 사람들을 설득하계 하였다. 말을 시키기를 “진짜 몽고병이 왔다. 재빨리 나와서 항복하라.”고, 그러나 문대는 “가짜 몽고병이다. 그러니 나와서 항복하지 말라.”고 하니 몽고인은 그를 죽이려 하다가 다시 한번 더 시켜 보았다. 다시 해도 전과 같이 하므로 마침내 그를 죽였다. 몽고병이 성을 공격하는데 아주 급하게 하였다. 성에는 양곡이 떨어지니 마침내 지키지 못하고 함락되려고 했다. 판관 이희적은 성중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모아서 창고에 들어가게 한 다음 창고에 불을 지르고는 장정들을 인솔하여 모두 자결했다.
경순왕12년(1351)신묘 3월에 은밀히 직사 이강은 명을 받고 참성단에 제 지내고 나무판에 글을 새겨 시를 읊었다.
봄바람에 풍경은 풍션인냥 화사롭고
명을 받고 오는 길은 멀기도 해라.
날쌘 말에 채찍을 더해 아침에 궁궐을 떠났는데
배 띄운 저녁엔 하얀 갈매기 파도만 쫓네.
창공은 푸른빛에 비취빛 산 색깔 묻어나고
골짜기엔 가득 기운이 차서 풀잎 절로 꽃피우지.
묻노라 봉래산은 어디라 할꼬
사람들은 이 땅을 선가라 한다네.
마음 고요하고 몸이 한가로우면
뼈는 절로 신선이 되려 하는데
사람세상 여러 가지 일은 참으로 정신없지
부평초 가득한 신비의 자리 중흥한 뒤에나
돌 쌓은 제단은 옛날로 돌아갈까.
이미 순으로 천리 땅을 바라보는데
어찌 몸이 구중 하늘에 있음을 의심할까.
이 길은 짝도 없는 길이지만 있는 것만 같아
모름지기 서울의 일년과도 같아라.
강능왕 우의 5년(1391) 3월 신미, 사자를 보내 참성단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대제학 권근(1352~1409)이 서고문(誓告文)을 지어 바치니 그 글에 가로대, '초헌에, 바다 위에 산은 높고 멀리 뜬세상의 번요를 끊었노라. 단은 가운데는 하늘에 가까와 선어의 강림을 맞을 지며, 조촐한 공물을 지열하니 명신은 있느나 싶네. 재배에, 신이 들으심은 미혹하지 않으사 사람의 소원을 들으시며, 하늘의 덮으심은 삿됨이 없어 땅을 다 덮으시니, 이를 예로써 섬기면 마침내 트일지니.
그윽이 생각하니 마리산은 단군이 제사하신 곳. 성조로부터 백성들을 위해 극을 세우시고 옛 것을 이어 휴식을 드리우셨네. 후왕에 이르러 오랑캐를 피하여 도읍을 옮기셨지만, 역시 여기를 의지하사 근본에 보답하시었고, 때문에 우리 가문은 이를 지켜 끊이지 않았도다. 그래서 짐은 작은 자식으로 이를 계승하여 더욱더 경건하였다. 하늘이시어, 어찌 왜구의 개 같은 도둑떼에 의해서 우리 백성을 어란으로 하시겠는가? 먼 나라의 수모를 받는다 하더라도 (하늘은) 아직도 우리의 표문의 길을 막지 않으시고 들으시노라. 하물며 저 읍민들이 오랑캐에 침략되는 것을 옳다고 참고 계시겠는가? 어째서 이름 떨칠 효험이 없을까보냐? 그럴리 없다. 덕의 좋음이 없음이로다. 참말로 남을 책하기 어렵고 오직 스스로를 책하는 데 있나니. 그렇지만 사람이 만일 그 업에 주저앉지 않는다면 신이 마상 돌려주려고 해도 줄 곳이 없을지며, 이에 구전의 준법을 쫓아 감히 당시의 우환을 고하노라. 진실은 관관하며 보감은 명명이라. 하늘이시여, 명을 밝히시옵고 크게 사직의 반석을 이루도록 빛을 받게 하소서'라고 하다.
천수기원 439년은 경효왕 5년(1357)이다. 이해 여름 4월 정유예, 기철, 권겸, 노이 등이 모반하다가 주살되었다. 정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을 삼고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물리치게 하였다. 때에 원나라는 매우 쇠폐하여 오왕 장사성은 강소에서 기병하였고, 여러 가지 일로 소란하였다. 최영 등은 이 때 고우로부터 돌아왔다. 상께서는 처음 최영 등과 의논하시사 서북지방 회복의 계획을 정하시고 먼저 정동행성을 격파하였다. 이어서 인당, 최영 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사 압록강 이서의 8첩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또 유인우, 공천보, 김원봉 등을 보내어 쌍성 등의 땅을 수복하도록 하였다.
10년 겨울 10월, 홍두적 번성 사유 주원장 등 10만의 무리가 압록강을 건너 삭주를 침략해왔다. 11년 적은 안주를 습격하니 상장군 이름과 조천주가 이 싸움에서 죽었다. 12월 상께서는 복주에 이르러 정세운으로 총병관을 삼으니, 정세운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깨끗하여 파천이래 밤낮으로 울분하며 우려하며 홍두적을 소탕하여 경성을 회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였으니 상께서도 그를 신임하셨다. 세운은 종종 애통의 뜻을 조서로 내리시고 민심을 가엾이 여기실 것을 청하여 사신을 각도에 보내 병력을 독려하도록 청하였다. 상께서는 마침내 조서를 내리시니 수문하시중 이암은 전하여 말하기를
“천하가 편안하면 뜻을 쏟아 백성을 다스리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뜻을 쏟아 장수를 따라야 하리니, 나는 문신이기에 약해 빠져서 군에 몸담지는 못한다. 그대는 내 뜻을 알고 힘을 다하라!”라고 했다. 세운은 도당을 뵙고 분언양성하여 유숙에게
“군대를 점검하라. 뒤로 미루었다가는 문책을 당하리라.”라고 했다. 막 떠나려는데 이암이 세운에게 말하였다. “지금 강력한 적들이 갑자기 황성에 밀어닥쳐 이를 지키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파천하였으니 천하의 웃음거리요 삼한의 치욕이라 할 것이다. 공은 대의를 부르짖어 무장하고 군을 통솔한다. 사직의 안녕과 왕업의 중흥은 이번 공의 일거에 달려있으니 우리의 임금과 신하들은 밤낮으로 공의 개선만을 빌 것이오.”
라고 했다. 이렇게 격려하여 이를 내보내고 매일 제장을 독려케 하였다. 의를 부르짖으며 모의에 나아가서 계책을 주어 이를 도왔다. 이암의 종질 순과 한방신 등의 장수들이 이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20년 신해 2월 갑술에 여진의 천호 이두란 첩목아는 백호 보개에게 백가구를 보내어 투항해왔다. 윤3월 기미 북원 요양성의 평장사 유익과 왕우승 등은 요양이 본래 고려의 땅이라는 뜻에서 우리 나라에 투항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이를 청해왔다. 이에 조정의 의견은 통일되지 못하였고 국사는 다난했다. 그렇지만 임금은 정몽주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촉을 평정함을 축하하도록 하였다. 김의는 명나라 사신 채빈을 죽여 버렸지만 조야가 모두 조용할 뿐, 이 일을 말하려는 자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사실을 명나라에 회보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유익 등은 마침내 금주, 복주, 개평해성, 요양 등지를 가지고 명나라에 투항하였다. 오호라 청론을 떠드는 자들의 무기력함이여, 스스로 좋은 기회를 잃고는 마침내 옛 강토를 회수하지 못하였구나. 뜻 있는 이의 원한 이처럼 깊은 것을!
강능왕이 선제의 명을 받아 즉위하였다. 이 때에 요동도사가 승차 이사경 등을 보내 압록강에 이르러 방을 붙여 가로되 ,'철령 이북 이동 이서는 본래 개원의 소관에 속한다. 군인 한안 여진 달달 고려는 곧 요동에 속한다'운운하니 조의는 분분하여 하나같지 않더니 마침내 전쟁을 결정하여 사방에 병마를 징발하고 최영을 팔도 도통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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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가야(加耶), 가라(加羅) : "加"는 변두리라는 뜻의 고대 말을 음을 따라 한자로 적은 것으로 변(邊)과 같은 뜻이고, "나(那)" "야(耶)" "라(羅)"는 땅이라는 뜻의 고대 말을 음을 따라 한자로 적은 것이다. 즉 "가야" 또는 "가라"는 가 쪽에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경상도 지방을 "가야" 또는 "가라"라 부른 시기는 B.C. 194년에 만주남부지방에 살던 기자조선 유민들 중 일부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평양과 홍성 금마를 거쳐 지금의 경상도 지방으로 이주하여 수십 개의 소국(小國)을 세우고 살면서 그 곳을 이주 경로로 볼 때 가장 가 쪽에 있는 땅이라는 뜻으로 "가야" 또는 "가라"라 불렀을 때이다. 그 후 가야인들 중 일부가 다시 대마도나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살면서 그 곳도 역시 가 쪽에 있는 땅 또는 가야 무리들이 건너가 사는 땅이라는 뜻으로 이주한 곳에 "가야" 또는 "가라"라는 지명을 많이 붙였다.
그 때문에 대마도나 일본열도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무리들이 살았던 곳에 "가라(加羅, 韓)"라는 지명이많이 남아 있다. 나라 이름을 "가야" 또는 "가라"라 부른 시기는 A.D. 42년에 지금의 경상도 지방에 6가야가 건국되었을 때이다. 일부 사학자들은 "가야" 또는 "가라"를 지금의 경상도 지방에 있는 나라로만 이해한 까닭에 사서 해석에 큰 오류를 범하였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236).
연정(聯政) : 임나연정(任那聯政)을 말한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은 A.D. 392년에 신라, 걸안, 온조백제를, A.D. 396년에 구태백제를 궤멸시키고 가야와 온조백제를, A.D. 400년에 대마도왜(任那), 구주왜(倭), 대화왜(伊)를 각 복속시켰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은 복속지를 군사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요지에 위치한 10개국으로 연립정부를 만들어 그 치소(治所)를 대마도에 두었는데, 이를 임나연정(任那聯政)이라 불렀다. 온조백제는 A.D. 392년과 396년에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각 항복하였으나 곧 임나연정의 통제를 벗어났고, 신라는 A.D. 392년 정월부터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복속하였으나 A.D. 418년에 고구려에 인질로 간 복호와 임나연정(任那聯政)에 인질로 간 미사흔을 돌려 받은 후부터 고구려와 임나연정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러나 일본열도왜는 A.D. 479년까지 임나연정에 복속하였다. 임나연정은 찬(讚)부터 제(濟)까지는 고구려의 위성국이었으나, 흥(興)부터는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하여 고구려와 적대관계에 있었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 고대사>
237).
홀본(忽本 : 골본) : 골(忽)은 고을이라는 뜻이고, 골본(忽本)은 고구려 때 수도(首都)라는 뜻으로 사용된 용어이다. 특정 지명이 아니다. 중국의 사서에는 골본(忽本)이 졸본(卒本)으로 적혀 있다. 이는 중국인들이 고구려 무리들에게 하도 당하여 고구려가 졸(卒)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고구려의 수도로 사용된 곳을 원래 용어대로 골본(忽本)으로 적지 않고 졸본(卒本)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서를 인용한 삼국사기에도 골본(忽本)이 졸본(卒本)으로 적혀 있다. 골본(또는 졸본) 중 고구려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가 수도로 사용한 골본(忽本)은 심양(沈陽)이고, 고주몽(高朱蒙)이 초기에 수도를 둔 졸본천(卒本川)은 혼하(渾河) 상류이며, 유리(琉璃)가 고주몽을 찾아온 졸본(卒本)은 당시 고구려의 수도인 북옥저(北沃沮)이다.
237).
요동성(遼東城) : 오늘의 창려성
238).
연타발(延佗勃) : 소서노(召西努)의 아버지.
239).
미추골(彌鄒忽) : "미(彌)"는 용(龍)을 가리키는 글자이다. 고대 우리민족은 용(龍)을 천제(天帝)의 아들이라 믿었고 "미르"라 부르며 한자로는 "龍" "辰" "彌" "未" "味" "密" 등으로 적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미추(彌鄒)"를 일명 "미조(味照)"라 부른다고 적혀 있고, <삼국유사>에는 "未祖" 혹은 "未古"라 부른다고 적혀 있다. 이로 보아 "추(鄒)"는 조(祖) 또는 고(古)와 같은 뜻이다. 그리고 "골(忽)"은 고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미추골(彌鄒忽)은 천제(天帝)의 아들이 사는 고을 즉 수도(首都)라는 뜻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미추골(彌鄒忽)로 불린 곳은 비류백제(沸流百濟)의 수도인 패(浿) 대(帶) 지역과 비류백제가 궤멸된 후 비류가 한반도로 이동한 지금의 아산군 인주면이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240).
부아악(負兒岳) : 부아악(負兒岳)은 풍수지리에서 어린애를 업고 있는 모양의 산세(山勢)를 말한다.
부아악 산세 모양을 한 곳은 한반도에 여러 곳이 있었다.
241).
백제(百濟) : 백가제해(百家濟海)
242).
유기(留記) : 이명(李茗)의 진역유기(震域留記)를 말한다.
243).
태백일사 저자의 생각에 아유타는 인도의 아요다이가 아니라 미얀마의 아유타였을 것이라'하는 내용이다.
지리적으로 인도보다 가까우므로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으나 파사석탑이 인도 아요다이의 특산인 돌인 것이 판명되고 태양문장등 많은 수로왕의 유적과 북인도 옛 아유타국의 유적에 유사점이 입증되어 저자의 생각이 틀린 것으로 증명되었다.
244).
대중상(大仲象) : 대진국(발해) 1대 세조(世祖, A.D.668~699).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고도 한다.
245).
임승국님의 주해에 따르면 <요사 권 38 지리지>에 '암연현은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하고 옛 평양성은 암연현의 서남쪽에 있으며 동북으로 120리 지점에 해주가 있다.
평양 ----- 암연현------------------- 해주 신라
만약 옹진을 암연이라 한다면 평양은 어디 있어야 하고 해주가 어디 있어야 하느냐?'라고 하며 이는 한반도의 지명일 수 없다'고 하였다.요사의 해주는- 단군세기나 북부여기 가섭원부여기에 나오는 해두가 아닐까? 또는 오늘날 연해주라는 지명의 어원이 된 것은 아닐지?
246).
1949년 길림성 돈화현 현성 근처의 우정산 고분에서 문황제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의 묘비가 출토 되었다. 그 비문 2행은 '대흥'으로 시작된다. 대흥을 연호로 적는 유일한 기록이 태백일사다.
247).
대흥(大興) : 대진국(발해) 3대왕 문황제 흠무의 연호
248).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나라 평로치청왕국 : 중국대륙에는 서기 761년부터 817년까지 4대 58년간 당나라와 맞서며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했던 독립국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세운 평로치청왕국이다. 이정기는 서기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보장왕과 함께 당으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다. 그의 본명은 '이희옥'이며, 평로에서 태어나 평로군 부장이 되었다. 서기 755년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평로에서 산동으로 건너온 그는 치청의 절도사 ' 우희일을 몰아내고 절도사가 된다. 서기 765년 당은 유화정책으로 이정기를 치청의 절도사로 임명하지만, 그는 반당세력으로서 독립노선을 추구한다. 서기 778년에 그는 수도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기고, 계속적으로 당에 대항 하는데, 이 당시 치청의 인구는 약500만, 넓이는 18만 평방 킬로미터 정도 되었으며, 군대는 10만이었다고 전 한다. (당시에 신라의 넓이가 약 13만 평방킬로미터 정도 되었음을 볼 때, 상당한 국력을 가 지 나라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참고로 당시의 당의 인구는 5000만 정도 되었고 군대는 60 만 정도였음) 서기 781년 평로치청군은 제음에서 격전을 벌이는데, 이때 이정기(732-781)는 사망하고 서 기 782년 그의 아들 이납이 제왕에 오른다. 서기 813년 이납이 죽고 이사고가 즉위한다. 서기 815년 이사고가 죽고 동생인 이사도가 즉위한다. 이때에 이르러 당은 치청을 칠 목적으로 하음전운원에 있는 150간의 창고에 200만석의 군량 미를 비축하지만 이사도의 공격으로 불타게 된다.
서기 817년 당나라 헌종은 당군, 선무군, 위박군, 무령군(장보고의 군대)을 동원하여 치청을 공격하는데, 이사도가 전장에서 돌아오던 중 부관인 유오에게 시해당하여 사망함으로써, 서 기 818년에 4대 58년간 의 짧은 역사를 뒤로 하고 평로치청왕국은 멸망한다. 다음은 중국 청주박물관 부관장 씨아밍차이씨의 말이다.
"언젠가는 당신들이 찾아 올 줄 알았다.... 이정기는 당신들 한국인의 선조다. 이정기의 나라는 형식상 당나라에 속했으나 실제로는 조세, 법률 등을 독자적으로 시행하던 산동성 전체와 하북, 하남, 안휘성을 다스린 독립왕국이었다......"
아직도 청주 범공사에 이정기가 심었다는 당추(唐楸)라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위 글은 1997년 10월2,3일 KBS-1 TV에서 개천절 특집으로 방송됐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나라 평로치청왕국" 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 '평로치청왕국'에 대한 기록 :
(1) 국민 조선 역사(최남선) : 이정기는 북지나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는 짤막한 기록이
있음
(2) 삼국사기 : 이사도가 당나라 헌종을 거역하여 신라가 군사 3만을 동원하여 토벌했다는 기록이 있음
- 끝-
(번역 및 주해자 임 승 국)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