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왜 시편찬송을 불러야 할까? : 성경이 말하는 대로만
“왜 시편찬송을 불러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 제일 처음 해야 하는 대답은 “우리 신앙은 모든 곳에서 성경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라는 대답입니다. 이 말은 당연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를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믿고 따른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경을 받아들일 때, 자신의 삶의 대부분의 문제들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고 믿는 방식으로 성경을 받아들입니다. 즉, 성경에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결국....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자기 스스로” 찾거나, “실용적인 목적에 따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의 범위는 오늘날에는 더욱 광범위해져서, 사실은 오늘날 복음주의권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믿는 성경이라는 범위는 지독히 좁아졌습니다. 성경은 거의 “겨우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방법” 정도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있고, 나머지 영역 전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알아서” 결정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 하지만 개혁신앙은
하지만 개혁신앙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개혁신앙이 철저하게 믿고 신앙하는 요소 중 하나가 “인간의 전적인 부패”입니다. 이 “전적인 부패”라는 말은.....인간은 너무나 타락하여서, “가장 경건하고 고상한 일에서조차도(예를 들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커녕, 자신의 죄성을 드러냄으로써 그 고상한 일을 망친다는 것입니다.
개혁자들은 예배의 상세한 부분이 성도들의 취향에 따라 결정되어서도 안 되고 인기 있는 어떤 방법에 따라 결정되어서도 안 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을 예배하기를 원하시는 방식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1)
2. 신조들에서
이것은 개혁파 신조들에서 잘 표현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의 1항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당한 방법은 그 자신이 친히 제정하셨고, 그 자신의 계시된 뜻에 의해서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가견적인 구상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탄의 지시에 따르거나 성경에 규정되어 있지 않는 다른 방법을 따라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없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35주일 96문에서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문 : 제2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방식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조들은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예배하는 것”을 2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실제로 개혁파 교회들에서 2계명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입니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자들이 많이 인용하는 문구 중에 “성경이 가라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서라는 곳에서 선다”라는 말이 있는데, 성경을 존중하는 사람들조차도 성경이 ‘서라고 하는 곳’에서는 서지만(금지한 것은 하지 않음), 성경이 ‘가라고 하는 곳까지만 가는 일’은 잘 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매우 협소한 부분에만 국한되어 있고 우리의 삶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 삶을 다 커버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매우 불신앙적입니다. 개혁파 신앙이란 “성경의 절대성”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실제로 우리의 모든 삶에 나침반이 되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1장에서 고백하는 대로의 성경을 믿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하여(‘모든 것’에 주의하십시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든지, 아니면 선하고 필연적인 귀결에 의하여 성경에서 찾아낼 수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6항)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서조차도 “우리의 마음에 원하는 대로 따를 때는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할 수 없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본 회퍼는 시편에 대해 설명하면서 “제자들이 스스로도 기도할 수 있을 터인데 왜 주님께 어떻게 기도할지를 물었는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들 스스로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어쩌면 모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오늘날에는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어 있으니 당연히 기도를 잘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한 착각입니다. 우리는 종종 마음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모든 것, 즉 소원, 소망, 한탄, 하소연, 찬양을 기도와 혼동하곤 합니다. 이는 땅과 하늘, 인간과 하나님을 혼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2)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3)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서조차 우상숭배를 저지를 것입니다!4)
존 머레이(John Murray)는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수용가능한 방법이란 하나님께서 스스로 제정하신 것들과 따라서 그의 계시된 의지에 의해 제한된 것들이다. 그분은 거룩한 성경 안에 규정하신 것 외에 어떠한 다른 방식으로도 예배 받지 않으신다.” G. I. 윌리암슨(G. I. Williamson)은 『The Singing of Psalms in the Worship of God』 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적절한 방법이 무엇인가?....오직 그가 의지하신 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 말은 그의 말씀에서 명령하시고 제정하셨거나 규정하셨던 방식대로만 예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말합니다.5)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의 구성요소 하나하나마저도 “우리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단호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은혜만 된다면 형식은 어떻든지 괜찮다고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형식조차도 마음대로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예배시간에 토크쇼나 간증을 하거나, 설교 대신 꽁트나 연극, 패션쇼를 하거나, 예배를 나이트 클럽에서 드려도 된다고....누가, 누구의 권위로 인정해 주었습니까? 예배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신중해야 합니다.
찬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시편을 불러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제일 일차적인 대답은, “적어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인간적인 것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라는 고백입니다. 예를 들어 축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개혁파 교회들은 성경 말씀에 기록된 대로만 축도하지6) 거기에 사람의 말을 집어 넣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해 복주시겠다고 하신 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자꾸 사람의 말을 더하는 이유는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개혁파 교회들은 축도 뿐 아니라 예배 순서 안의 어떤 요소들에도 성경말씀만을 가지고 말하지 사람의 말을 집어 넣지 않습니다(예를 들면 ‘예배 부름’이나 ‘축복의 인사’, ‘사죄의 선포’등에서도 일절 성경 말씀 외 다른 것을 넣어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말이 개입될 소지를 극도로 줄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에 너무 무감각한 이유는 “우리가 너무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몸에 익었기 때문입니다.
찬송에 있어서도 그 찬송이 “사람의 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 자체를 가사로 하는 것만을 예배 시에 불러야 합니다. 찬송가를 1800년대에 유통되던 가스펠송을 가지고 만들어 놓다보니 한국교회의 찬송가에는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한국교회 찬송가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뒷부분에서 잠깐 다루겠습니다)
첫댓글 시편이 참 참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