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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행 8 - 익선동 한오길
봄햇볕이 따스한 2018년4월에 종로3가역에서 낙원상가 가는쪽에서 위로
익선동 한옥길을 거늘었습니다.
북촌과 같은 분위기로 이쪽도 문화거리가 형성이 되어갑니다.
종로 할머니 칼국수 맛집이 보입니다. 문화거리는 맛집에서 돈화문쪽으로 한두블럭으로
올라가면 있습니다.
원조 할머니(강전석 님)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던 그 해, 종로 3가 골목에서 밀가루
반죽을 홍두깨로 밀어낸 칼국수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담백하고 구수한 국물맛이
일품이었던 칼국수는 점차 사람들의입맛을 사로잡았고, 할머니의 손맛은 ‘시골 외할머니의
사랑과 정성’처럼 쉽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맛이 되었습니다.
‘종로할머니 손칼국수’는 원조 할머니의 정성어린 맛을 그대로 이어받아, 할머니 손으로
직접 멸치 육수를 만들고, 반죽을 치대어 면을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것이 할머니에게는
가장 중요한 기본이자, 가장 큰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을 이완복 추천으로 이성구,
이완복, 유종완, 김진섭이랑 와서 먹어본 다음에 자주오는 맛집입니다.
이 골못은 "갈매기살"로 유명한 골목입니다. 저녁때만 되면 젊은이들이 갈매기살을 찾아 이곳
으로 모여듭니다. 이 갈매기살도 1970년대에는 인기가 없어서, 서울서 쫓겨난 판자촌
철거민들이 여수동 근처의 도축장에서 자주 얻어다 먹었다고 합니다. 사실 갈매기살은 맛은
있지만 손질이 굉장히 까다로운데, 발골작업이 끝난 갈매기살 원본(?)을 먹기 좋게 다듬
으려면 그 주위 기름들을 일일히 떼어내어야 하는 귀찮은 부위 ...갈매기살(Skirt steak)은
돼지의 부위 중 갈비뼈를 골반할 때 분리되는 얇고 긴 형태의 횡격막을 이루는 부위를
말합니다. 기름이 없고 부드러우면서 쫄깃한 맛을 내기 때문에 고급육에 속합니다.
횡격막은 우리말로 가로막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에 살이라는 단어를 합치면 가로막살이
되고 변천하여 갈매기살이라 명명되었습니다. 갈매기살에는 지방이 적고 불포화 지방산이
높아 먹어도 살이 잘 찌지 않으며 동맥경화를 예방하고, 피로회복에 좋은 비타민 B1, BF
함유, 단백질 중에서도 필수 아미노산이 풍부하며 철분, 빈혈예방 특히 간장보호 효능이
탁월히 좋습니다
골목길에 담장 넘어 집안이 보입니다. 옛날에는 이런 집에서 살았기에 정겹습니다.
종로3가역 4번출구에서 좁은 골목을 따라 몇 걸음 들어가면 시간 여행을 떠나온 듯한 풍경과
마주친다. 1920년대에 지은 한옥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익선동입니다. 세월의 때가 묻은
골목을 거닐다 보면 '열두달' '식물' '경양식 1920' '4.5평 우동집' 등 이름만 봐도 들어가고
싶은 공간이 줄줄이 나타납니다. 숨은 듯 자리한 익선동에 1~2년 사이 문을 연 밥집과
찻집을 많은 젊음이들이 찾아와 문화거리로 탈바꿈하여 갑니다.
골목 초입, 반듯한 나무 간판을 따라 '열두달'에 들어서면 연기 자욱한 마당에 장작 타는
냄새가 솔솔 풍깁니다. 열두달은 훈제 햄을 만드는 '말마햄', 수제 잼 마켓 '제이제이',
수제 청 마켓 '手청', 뿌리채소 전문점 '루트', 전통주 제조 모임 '자주', 수제 맥주 펍
'스킴45' 등 7개 브랜드로 구성된 식재료 마켓이자 식당이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1년
열두 달 자연이 주는 맛의 즐거움을 지향합니다
너른 마당을 품은 한옥에서 고집스런 생산자의 손을 거쳐 나온 느리고 건강한 맛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각 브랜드의 재료를 활용한 연근크림파스타, 수제햄샌드위치, 견과류주먹밥
등은 한 끼 식사나 맥주 안주로 즐기기 좋습니다.
익선동 한옥마을이 조성된 1920년대에서 따왔다는 경양식 1920은 '백 투 더 아날로그'라는 콘셉트로 열두달과 익동다방을 꾸린 '익선다다' 팀이 최근에 오픈한 식당이 있습니다. 투박한 통유리, 서까래가 드러난 천장, 에디슨 전구, 분홍색 소파가 어우러져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익선다다에도 사람들이 줄을 지어 밖에서 순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옆의 돈화문로는 조선시대에 왕이 행차하던 거리였으며 그로 인해 주변에 시전행랑과 피맛골,
순라길이 자연스럽게 생겨났었습니다. 돈화문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와 창덕궁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역사적 자산으로서 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관광객들과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봄을 즐기며 골목을 누빕니다.
익선동 골목에 여행자의 발길이 스미기 시작한 건 '식물'이 둥지를 튼 다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이 골목에서 핫한 곳이다. 밖에서는 컨테이너 한 채가 덩그러니 있는 듯 보이지만,
들어선 순간 반전의 매력이 있습니다. 한옥의 멋을 그대로 살린 공간에는 못 박히고 부서진 나무
기둥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자개 문양 테이블, 이곳 사장이 유학 시절에 쓴 낡은 소파, 유명
디자이너의 의자 등이 독특하게 어울립니다. 비닐 막을 벽처럼 두른 마룻바닥 옆에는 키 큰 선인장
화분이 놓여 온실 같은 분위기마저 감돕니다. 식물은 낮에는 자연광이 환하게 들어오는 카페로,
저녁이면 어두컴컴한 바로 바뀝니다
이곳 옆 동네가 와룡동이라고 하였습니다. 와룡동(臥龍洞)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종로1·2·3·4가동 아래에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창덕궁, 창경궁,
종묘 북쪽 일부를 관할되었던 와룡동이라는 이름은 일제가 원래의 지명과는 전혀 관계
없이 만들어 냈습니다. 일제가 여러 동들을 합치면서 조선 국민의 반감을 줄이고자, 관할
구역의 창덕궁에 기거하는 임금을 용에 비유하고 동의 높낮이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것이 누워있는 사람 같다는 데에 착안해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1914년 이후 이러한
동명이 생기면서, 창덕궁 북쪽의 봉우리인 응봉(鷹峰)을 와룡봉이나 와룡산으로 부르게도
되었습니다.
1914년 에 누동(樓洞), 니동(泥洞), 마전동(麻田洞), 수문동(水門洞), 승문동(承文洞) 각
일부를 와룡동(臥龍洞)으로 통합했습니다. 누동(樓洞)은 누하동과 누상동으로 나누어지기도
했습니다. 1936년 4월에는 일제시대이기에 와룡정(臥龍町)으로 변경으로 바뀌고. 1943년 6월에는 신설된 종로구에 배속되고 1946년 10월에 와룡동으로 변경이 되었습니다.
종로구는 서울특별시 증심인 정치 1번지입니다. 서울시는 중심부에 위치하여 중구와 함께
서울의 도심을 이룹니다. 2018년 2월 기준 인구 154,509명 정자치부 주민등록 인구통계.
면적은 23.92제곱킬로미터입니다. 종로 한가운데에서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익선동 166번지
일대. ‘한옥 섬’이라 불리는 동네입니다.
저의 본적이 바로 이곳 옆 동네인 연지동이라 와룡동도 생각이 나고 또한 태어난 곳은
효제동입니다. 옛날에는 서울시에 살아도 4대문(동대문, 남대문, 서대문, 북문) 안에 사는
사람은 문안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어의 표준어도 서울의 4대문 안에 쓰는 언어를
표준어로 말한다고 중학교때 국어선생이 말하는것이 생각납니다.
한자(漢字)를 중국글자로 알고 있지만 한자의 원조는 은나라의 갑골문자라고 합니다. 중국의
역사서들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비롯해서 중국의 고대사의 확실한 년대를 기록합니다.
주나라 이전시대는 자기네 나라 역사로 보지 않고 전설의 나라로 은나라를 봤는데 북경의
주구점지역에서 한의사가 비방으로 땅에서 맘모스 뼈를 발굴하여 약재에 넣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뼈에 글씨가 써있어서 보니 은나라때 기록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그 맘모스 뼈가
용골(龍骨)이라는 약재입니다. (이풍원의 "한의열전"에서.)
유명한 사마천도 '사기'에 은나라는 동이족(東夷族)국가라고 하고 주나라는 한족(漢族)국가
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한나라 한은 한고조가 우리민족의 한을
베껴갔다고 합니다. 원래 중국민족은 지나족이나 화족이었습니다.
은나라는 동이족이 통치했던 국가였습니다. 단군제국의 제후국이었습니다. 한문의 근원인
갑골문자는 우리의 조상 동이족의 문자였던것입니다. 단군시대 이후에 동이족이 힘이
약해지고 진나라 한나라 등의 한족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환문(桓文)이 한문(漢文)으로
바꿔지게 되었습니다.
70 – 80년 된 한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낙원상가 뒤편의 낡은 한옥 주택가. 익선동 166번지
일대의 한옥 100여 채. 한옥이 즐비한 북촌이 관광 명소가 되고 주변이 빌딩으로 하나 둘 채워질 때도
변함없이 옛 모습을 지키고 있는 숨겨진 동네입니다.
이곳은 음식점입니다. 익선동 요정 여종업원들을 상대로 생긴 점집이 20여 곳 가까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이것도 옛이야기입니다. 익선동의 한옥은 대부분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에 건축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 개발업자라고 불리는 정세권 선생이 1910년대 후반부터 당시
건설회사인 ‘건양사’를 운영하며 주거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급형 한옥을 지어 서민들에게
분양한 것입니다
커피 맥주를 파는 카페입니다.
익선동에는 전통 한옥과 달리 한옥과 양옥의 중간 형태의 한옥이 대다수다. ‘ㅡ’ 자, ‘ㅁ’ 자, ‘ㄷ’ 자
등의 형태로 구조도 평수도 각기 다릅니다. 익선동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전통 찻집 ‘뜰안’의
주인장은 “밖으로 난 창문의 창틀 같은 것들이 지금은 구하지 못하는 일제시대의 것도 간혹 있어서
그런 것만 찾아 찍는 일본 작가가 온 적이 있다”고도 전합니다
맥주맛이 예술이네라는 간판을 보게 됩니다.ㅎㅎ
익선동은 1997년 재개발 추진 구역으로 논의되고 2004년 재개발 바람에 휩싸여 사라질 뻔했으나
익선동을 지켜야 한다는 시민들의 주장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았습니다.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는 익선동의 한옥 마을이 “20세기 도시형 한옥의 본모습을 가지고 있어 건축적 가치가 높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부티크 맥주집은 수제맥주를 파는곳이기에 맥주맛이 일품이라 그냥 지나칠수 없다고
광고가 되어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피자도 같이 맥주랑 먹는 카페입니다.
세월을 고스란히 담은 익선동의 예스러운 분위기에 반한 젊은이들이 1–2년 전부터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공간을 하나 둘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변화의 물결을 타는 익선동의 상업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서울의 오래되고 잊혀진 공간에 대한 가능성, 보존과 개발을 이야기하는 책 "리씽킹 서울"은
익선동의 가치를 주목하며 단순히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건축물을 짓는 개발을
비판합니다. “우리가 외국의 도시를 방문하는 이유는 도시의 대형 건물을 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소비하기 위해, 즉 도시의 역사를 이해하고 문화를 즐기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이 곳은 게임하는 곳인데 광고문안이 "미세먼지 대피장소"라고 하며 손님을 유혹합니다.
과도한 오락은 지능개발에 좋다고 ....유혹하는 광고가 벽에 붙여져 있습니다.
이 게임기를 보니 옛 버젼의 게임기입니다. 옛날에 유종완이가 이런 기계를 만들어서
재미를 봤었습니다.
도시의 건물 자체보다는 건물의 역사성이나 건물이 가진 문화적 기능이 중요합니다.
” 다행스러운 것은 이야기를 나눠본 익선동의 젊은 주인들은 이곳을 사랑하고 의미를 보존
하면서 발전하는 방향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착한 의도가 이 ‘한옥 섬’을 그대로
미래로 보내는 길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옥 체험살이 ....외국인들의 게스트 하우스인가 봅니다.
익선동 거리 표시입니다.
동쪽으로는 종묘, 서쪽으로는 낙원상가 인사동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청계천 북쪽
으로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예로부터 사대부들의 주거와 관기능을 담당
하는 행정시설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이곳에 요정(고급 요리집) 오진암(梧珍庵) 이 익선동에 있었습니다. 1970,80년대
3대 요정 대원각, 삼청각 바로 오진암이 이곳에 있었습니다.1972년 7.4남북 공동성명을
의논한 곳입니다.
100년 전통의 서울 익선동 한옥마을이 도심 속 쉼터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특히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대중들의 휴식처로 각광 받고 있습니다.
1920년대 지어진 익선동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마을이지만 북촌이나 서촌, 삼청동 등
의 다른 한옥마을에 비해 한옥 건물들의 밀집도가 높고 저렴한 가격으로 다양한 맛집들까지
가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집은 꿀호떡으로 인기를 끌고있습니다.
호텔1층의 커피집
상권도 팽창했습니다. 지난 2014년 1개에 불과했던 가게는 3년 말인 올해 현재 50여개로
급증했습니다. 익선동의 ‘몸값’도 뛰었습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부동산 1제곱미터(㎡)당 평균 가격은 2011년 798만 원에서 2016년 1,844만 원으로 5년 새
두 배 이상 올랐습니다. 과거 값싼 주가 가격에 노인들이 주로 머물렀던 익선동에서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자리한 셈입니다.
이집은 만두집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골목에 줄 서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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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풍원 박사님...
나는 안국동이 본적이고 인사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어. 종로국민학교를
졸업했지.
그때는 전부 초가집.기와집
이었지..
60여년전 옛생각이 절로 나는 추억의 거리..,
아...세월이여..어느덧 7순..
좋은 사진풍경 고맙습니다.
인사동에서 살았으면 '4대문'안이네...ㅎㅎ
맥주집 있네 주봉이 불러
저녁에는 갈매기살에 술 애호가들이 길거리에 쫘악 진을 치고 있어...특히 젊은이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