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하늘 아래에는
저 하늘 아래에는 운동모자 꾹 눌러쓰고
코스모스 꽃길
말없이 걸어가는 소년과
하얀 팔 내놓고 오르간 앞에 앉아 있는
갈래머리
소녀가 있었다
마중
비가 오는 날마다
할머니는
삼거리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세시차가 있고
다음은
다섯 시 반이었다
헌 우산은 쓰고
새 우산은 접고
세시차에 안 오면 다음 차가 올 때까지
비에 젖어,
해오라기처럼 서 계시었다
곡우 단비
하늘이 때를 알아 비를 내리십니다
달팽이는 긴 뿔대를 세우고
가재는 바위를 굴리며
청개구리는 연잎 위에 알몸으로 무릎을 꿇고
물새는 수면을 차고 날며
잉어는 못 위로 뛰어올라
농부는 땅에 엎드려
온몸으로, 오시는 비를 마중합니다
비 오다가 갠 날
젊은 엄마가 옥양목 앞치마
반듯하게 매고
부엌에서 손님 맞을 준비하고
있을 것 같은,
젊은 아버지가 원추리꽃 꺾어
소 귓등에 꽂아주고
무지개 뜬 산길 넘어
소 앞세우고 돌아올 것 같은,
감꽃 지는 마을
감꽃 피는 내 고향 가고 싶다
논두렁에 콩 심고
비 맞으며 깨 모종하고
장날이면 엄마랑 단둘이
등불 밝혀 들고
한내 장길 아버지 마중을 나가고 싶다
개구리 울음소리
가만가만 밟아가며
오늘같이 비 오다가 갠 날엔
앞산 뒷산
나란히 잠든 어르신들
한 분 한 분 깨워 일으키고 싶다
고향 산 베고 누워
저물녘에 들려오는 오뉴월 무논의 개구리 울음소리
건너말 외딴집 불빛 새로 들려오는 다듬이질 소리
한여름 밤 떡갈나무 잎에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 소리
저녁나절 들려오는 먼 마을 닭 울음소리
보름도 갓 지난 초가을 빈 마을 우물 터서 들려오는
가늘고 긴 풀벌레 소리 베고 누워 고요히 저물고 싶다
세월 속에서
눈이 와서 마을이 박속처럼 화안한 날
고향에 돌아와서 밥을 먹는다
80을 바라보는 엄마가 해준 흰 쌀밥 먹는다
90을 코앞에 둔 아버지가
50이 넘은 아들 밥 먹는 모습 지켜보다
귀밑에 흰 머리 하나를 뽑아 준다
눈꽃이 전설처럼 피어나는 동화 속 마을에서
장마 끝나고
장마 끝나고,
갈울내깔
징검다리 하나 둘 모습 드러내면
시냇물 맑아져 송사리 피라미 떼 줄을 짓는다
아랫내 물턱
큰물에 휩쓸려온 방개고무신 한 짝 걸려 있다
하늘이 높고 구름이 빠르게 움직인다
버들붕어 한 꿰미씩 들고 곱돌모랭이 돌아오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내
눈길만 마주치고 살자며
첫날밤
잠도 안 자고
창밖에 별만 쳐다보던 그 여자
아들 군대 보내 놓고
오늘은
밥도 안 하며
먼 산만 바라보는 저 여자
가족사진
계급장도 없는 훈병 모자 눌러쓴
삼십 중반 아버지가
세 살짜리 고추를 안고
박꽃처럼 환하다
할머니랑 엄마랑
광시, 청양, 부여 백마강을 배 타고 건너 꼬박
이틀 만에 당도한 논산훈련소
스물다섯 분꽃 같은 엄마는
내외를 하는지
다소곳이 고갤 숙인 채
새촘한 표정,
무슨 생각 저리도 골똘한 것일까
사진 밖에 서 있는
할머니 환한 얼굴도, 내 눈에는 환하다
가장의 밤
잠든 아내 이불 끌어다
미운 발
덮어주는 일
딸 자는 방 살짝 들어가
지폐 한 장
찔러주는 일
아들놈 우산 갖다주고
책가방
들어주는 일
창밖 밤비 소리 들으며
쓴술
삼키는 일
소꿉놀이
한세상, 흙에서 나
땅 파고
씨를 묻다
저 가을 강변
감빛 물 곱게 드는 저녁노을 속으로
소리소문없이
잠겨 버렸으면
소꿉놀이하다
엄마가
부르면
집으로 돌아가듯
첫사랑 그 여자
남몰래
가슴 깊이 묻고 살아도
꿈속에서 불쑥 뛰쳐나와 들킬 것 같아
불안하다
한세상 살며
가슴 좀 실컷 아파 보라고
꿈길마다 찾아와
눈웃음치다
한 발짝
다가가면
살래살래 달아나 버리는
강 건너 그대
하늘빛이 흐려서 손 한번 헐겁게
잡아 보지 못했네
그리워 말 못 하고 살아온 지
오랜 지금
강 건너 갈밭머리
반백의 머리칼 날리며 쓸쓸히 웃고 섰는 여인아,
그대 향한 그리움 오늘도
겨울 강둑에
빈 해바라깃대처럼 서 있을 뿐이네
내 안의 여자
우체국 측백나무 사이로
바라보던
오렌지색 원피스가
고옵던 그녀
까마득한 세월 흘러갔어도
그 집 앞 지날 때면
내 가슴은
뛰고 있지
그날 읍내로만 따라 나왔더라면
지금 그녀는
곁에 있을 텐데
항상, 내 안에 있지
봄밤
보리술 씬냉이국에
그대 목소리 동동 띄워 맑은 귀로
담아내는
청복의
밤
소래산 진달래꽃
언제 보아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저 산
밀물 드는
포구에서
짜디짠 소금바람 불어오면
소래산 진달래는 석양에 붉게 핀다
앙상한 가지마다
고만고만한 작은 슬픔들 거느리고
해마다
붉게 피는
소래산 진달래꽃
먼 손님
오래도록 기다린 당신,
머리카락 끊어
밥 한술 마련했으니
찬물에 잘 말아
새로 담근 열무김치 얹어서 드시고
가시는 먼먼 길
살펴 살펴 가십시오
망종 지나고
게으른 잠에서
막 깨어나는
청개구리
한 마리
얼마나 울었는지
지난밤
눈두덩이
부어 있다
고향 집
고향 집 팔았단 소식 듣고, 사흘 밤낮
이불 덮어쓰고 잤네
꿈결에도 바람 타고 날아가 대문 밖
서성이며
달 그늘에 잠긴 뜨란 넘겨다 보다
낯선 개가 캉캉 짖어
슬금슬금 꽁무니를 내리며 돌아오고 말았네
밤마다 잠 못 들고 떠도는
내 발걸음아,
오늘 밤은 어느 낯선 마을 떠돌다
긴 그림자를 끄을며 돌아올꺼나
질라래비훨훨-
하루에도 몇 번씩 날개 돋친 새가 되어 날아가
엎드려 입 맞추고 돌아오는 곳,
인제는 새봄이 돌아와도
찾아오지 않는
식구 하나 더 늘어
샘봉에 쏙독새만 밤을 새워 울어 쌓겠네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날 밤
밤새
큰손주 이름 부르셨단다
할머니-
옛 동산에 오르며
저-기 저
소장뜰 대흥내 건너
꿩 산비둘기 사뿐 내려앉는
채당미 해바른 곳은 붙들아버지 묘
닭재산 자락 코불네 산은 꼽새할머니 묘
찬샘골 서낭당 산삐알은 마구셍이 체장수 묘
황골 방죽머리 뱀밭엔 머슴살이 성배 아버지 묘
앞산 모랭이 양지 녘엔 자식 못 둔 천안할머니 묘
함질재 오르막에는 푸른 이끼 덮어쓴 딸그만이네 묘
부엉이골 분고개 산등성은 매방앗간 연승 할아버지 묘
때까치 새끼 치는 팽나무재 너머 애꾸눈이 순옥 엄마 묘
흐드러진 찔레꽃 멍개나무 덤풀 속엔 올망졸망 애기들 묘
수리봉 자락길 지나 시루셍이 먼발치로 중뜸 소이침쟁이 묘
주걱샘 가는 길섶 쑥대밭은 아들 못 둔 연국이 외할아버지 묘
작은매봉재 큰 바위 아래 가재골 다락논 곁에는 늑대할아버지 묘
죽은 처녀들 달밤에 나온다는 개티고개 황톳길 한복판엔 처녀들 묘
말구루마 비척대는 삼거리 주막집을 지나 갈참나무 숲은 우리 할머니 묘
눈 내리는 저녁
저녁 눈 설핏하게 떠도는 날은
고향마을 찾아들고 싶다
아이들 한바탕 떠들다 돌아가고
시누대 밭 참새들만 춥다고 조잘대던
저녁 어스름,
그 집 앞 지나다가
나풀대던 단발머리 보고 싶다
외양간에 늙은 소
숨 몰아쉬는 소리 들릴 듯하다
꼬마 시인
엄마- 달님이가 자꾸 나를 쳐다봐
괜찮아, 우리 애기 예뻐서 그래
엄마- 달님이가 나를 따라와
괜찮아, 우리 애기 함께 놀자고 그래
엄마, 엄마- 달님이 물에 빠지려 해
울지 마, 달님이는 옷이 젖지 않아
세 살짜리 꼬마가
엄마 등에 업혀 소래포구를 건너간다
홍성군 금마면 봉서리
개다리소반 위에
밥 한 공기
문밖에서 비 맞고 있다
젊어서 혼자되어
비를 맞더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비를 맞는다
홍성군 금마면 봉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