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걷는 산줄기는 금(金)과 같아서 녹슬지 않죠
다만, 인간에 의해 어떤 연유로 折下(절하)되어 물이 흐르는 경우도 있고,
혹은 折下(절하) 될 뻔하다가 살아남은 경우도 있고...
많은 산꾼들께서 대간을 마치고 나면 서, 남해로 흩어지는 9 정맥길로 이어가시는데
정맥길을 걸으면서 절하되어 있는곳 꼭 한번 눈여겨볼 곳들만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굴포 운하
금북정맥길의 굴포운하(태안-서산)를 만들려고 했던 고려 인종-조선 현종까지 530년 동안
10차례 (지금의 천수만 태안읍 인평저수지-인평리-서산시 팔봉면 진상리(금북정맥 마루금)-서산시 가로림만까지 7km) 를
뚫으려고 태종 때 하륜대감, 세조 때 신숙주, 선조 때 송시열 같은 분들이 머리를 싸맨곳이다.
녹색선은 정맥 마루금
파란 선은 굴포운하
지도가 나오기 전에 굴포운하와 정맥 마루금이 어땟을지 아는 이는 이미 세상에 없다.
다만, 굴포운하를 뚫을 때 가장 높은 곳에서 뚫고 내려갔다면 실제 정맥 마루금은 현, 물이 흐르는 판개골(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니 물이 고여있고...
아래 천수만은 일제강점기 무렵에 일차 간척 공사를 시작했고 이후 1980년대 무렵에 물막이 공사가 완료됨
가로림만은 30년쯤 간척공사를 했던 곳이다
실제 정맥 마루금이라 보이는 우측의 신털이봉(해발 40미터)에서 이어지는 정맥능선은 조상님들께서 운하를 뚫으며 파놓아 물이 흐른다
신털이봉(신을 털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은 우리나라에서 3곳뿐인데 제천의 의림지의 신털이봉과 김제 벽골재 인근의 신털미산 그리고 이곳 태안 인평3리에 있고 작아도 고된 노역의 산물인 신털이봉이다.
어지간한 물줄기를 다녔지만 음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나, 이곳은 산에 있어 살과 뼈를 바른 곳이라 음침하니...
현재 정맥 마루금에서 본 굴포운하와 우측 외딴집 한채, 소나무 있는 부분이 신털이봉
예전에는 저곳이 실제 정맥 마루금이라 생각된다.
정맥 길이죠
누구나 이길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데
대부분 이 길을 지나면서 무침코 지나치는데 실제는 작은 도랑을 건너서 진행한다
파란 선은 물이 흐르는 곳인데
북쪽으로 흐르면 가로림만으로
남쪽으로 흐르면 천수만 쪽으로 흐릅니다.
이제 마루금 이야기는 그만하고
예전 고지도의 태안과 서산 가운데 굴포운하지역
왜 이렇게 했을까?
고려시대, 조선시대 때 개성의 궁궐이나 한양의 궁궐로 세곡선이 있던 조창이 대부분 서해 인근 하천의 기수역으로 있었고
전국 각지에서 세금으로 거둬진 미곡을 배로 실어 나르던 중 서해바다 3대 위험지역인 안흥량 관장목, (금북정맥 끝부분, 태안군 가의도, 신진도 파도리 사이의 수로길)과 손돌목 (김포시 대곶면, 강화초지대교 인근 ) 그리고 마음씨 고운 심청의 전설을 간직한
황해도 인당수의 장산곶을 지나야 하는데
암초와 거친 물살의 태안읍 안흥량 관장목(옛 지명으로는 난행難行량)에 60년가량 침몰된 선박수 200척 인명 피해로는, 많으면 한 해에 1천명 가량 목숨을 잃었고 , 국가 제정 유지의 축을 담당하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세곡선에서 실어오던 미곡 손실은
15,800 섬 정도였다.
참고로 마음씨 고운 심청이 공양미 300석에 팔려 갔을 때 300석은 약 48톤, 한석의 가격은 약 5냥(25만 원 정도)였으니
15,800석은 대단한 량이다.
그래서 거칠고 암초가 많은 태안 앞바다를 우회하는 방법을 찾다 보니 지금의 태안 천수만에서 서산 가로림만을 연결하는 7km의 토복공사를 시작함으로써 자연을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려 했던 두 왕조의 굴포운하 작전이 이어진다
태안 외해(外海)로 나간다면 해양 기술부족으로 지금의 중국으로 갈 수 있고 침몰의 위험성도 더 커 내해(內海)인 태안과 서산을 연결하는 수로건설을 한다.
그리고 고려 때 실패를 거울삼아 조선 3대 왕인 태종과 함께 찾아온 어린 충녕이 이곳에서 민초들의 고생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며 성군이 되겠다고 다짐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도 덧붙이며
굴포운하는 고려 때부터 조선 중기까지 약 530년간 모두 10차례 정도 공사를 하였지만 전체 7km 중 4km만 성공하고 나머지 3km는 화강암이 많아 실패한다
요즘 같으면 포클레인 몇대로 일주일이면 다 파내고 물 길을 만들 곳이다
국가 제정중 10분의 1 정도가 서해바다 물고기 밥으로 쓰이다 보니, 운하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고 노력했음에도 끝내 완공하지 못한 굴포운하 500년간 공사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지금은 세월이 지나 약 1km 정도만 흔적이 남아있다.
만약 이 운하 공사가 성공했다면 금북정맥은 날머리가 물래산에서 안흥진이 아닌 남쪽방향으로 흘러와 부석사가 자리하는 도비산을 지나 천수만 방조제에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530년동안 삽질하다가 포기한 굴포운하 실패로 다시 뚫어놓은 지금의 안면도는 350년전에는 육지 였으나 170m 안면 연육교 운하공사로 섬이되어 버렸다
만약 안면도가 태안의 육지로 남아 있었다면 금북정맥 날머리 역시 어떻게 변했을지 생각해 볼일이다
참고로 조선시대 때 10대 조창으로는 소양강창, 흥원창, 가흥창, 조율포창, 금곡포창, 경창, 공진창, 덕성창, 법성포창, 영산창이 있다.
금북 정맥길에 지척에 있으니 꼭 한번 찾아가보시고
2번째 조선 중기에 들어와 낙남정맥을 절하(切下)할 상소를 올라온다
장재곤 :주상전하 진주의 산줄기 하나 절하 하옵시면 수많은 농경지가 홍수로부터 안전하옵니다"
정조임금:무어라~~~
남강은 함양땅의 봉황산 서쪽 계곡에서 발원해
진주, 의령군 지정면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186km의 강으로 역사가 흐르는 강이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여름 장마철이면 덕유산 지리산, 황매산 같은 고봉에서 거침없이 흘러온 덕천강, 임천강, 양천, 신등천)이 모두 진주와 의령평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으니 이를 해결하고자
조선 정조 때(1796년 정조 20년) 장재곤이라는 사람이 남강물을 사천만으로 방류해 홍수를 방지하여 농토를 확보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쓸데없는 소리라며 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엄한 벌을 내린다는 기록이 있다.
남강댐 물을 초당 6천 톤씩 경남 사천시 사천만으로 방류하는 방수문
유수교
여름 장마철에 덕유산 남쪽에서 시작한 홍수는
지리산 북쪽(임천강)-동쪽(덕천강)에서 흘러온 물과 만나면서 진주와 의령의 농토를 초토화시키기에 충분했으니
산줄기 어디를 절하(切下)하던 물을 분산시키는 방법이 최우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산줄기 어느 부분을 끊어 물을 사천만으로 보내느냐!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에는 낮은 언덕과 같은 낙남정맥이 지나는 마루금이며
현재 유수교 북쪽으로는 삼계천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3km 흘러들어 남강에 합류하는 곳이고
남쪽으로는 사천만으로 흘러드는 가화천 8km가 흘렀다.
남강물을 남해 바다로 보내는 가장 빠른 길이 이곳 유수교인 셈이다.
조선 영조 때 만들어진 山經表(산경표)를 보면 낙남정맥은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되어 진주, 고성, 창원을 거처 김해시 구산동 분산에서 맥을 다하며 산자 분수령은 물을 건너지 않는다고 했지만 지금은 물을 건너는 대표적인 정맥길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정조가 반대했던 낙남정맥을 절하시킨 이는 누구인가
구한말 시대 때 영남춘추(1934년 경남 진주에서 발행된 신문)에 남강 홍수를 방지하고 비옥한 농토를 확보하기 위해서
산줄기 하나를 절하(切下)하고 남강물을 사천으로 보내면 땅 8천정보을 얻을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1 정보:3천 평(15 마지기)
8 천정보:2천4백만 평
이후 일제강점기 때(1936년)에 남강댐(진양호) 공사를 하다가 해방과 동시에 중단되었으며
1949년도에 다시 공사를 시작했으나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다시 공사는 중단되었다.
낙남정맥은 이렇게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남았지만 1962년에 다시 착공하여 7년 뒤인 1969년도에 남강댐이 완공된다.
낙남정맥은 중간에 맥이 끊어져 희생되었지만 진주. 의령의 드넓고 비옥한 농토가 물로부터 안전해진 결과로 이어졌다
낙남정맥 마루금은 끊어지고 시멘트 방수로가 대신한다.
3번째 한남정맥과 경인운하
경기도 안성시 칠장산에서 수원 광교산, 인천 계양산을 거쳐 경기도 김포시 문수산에 이르는 190km에 이르는 산줄기로
산의 평균 해발고도는 9 정맥 중에서 가장 낮은 곳이나 땅값은 가장 비싼 곳이다
100개 넘는 도로와 공원묘지가 즐비하고 매년 바뀌는 정맥 마루금
한남정맥 동쪽의 굴포천의 잦은 홍수로 인해 방수로 공사를 추진하면서 경인운하로 확대된 사업
2009년 초에 시작하여 2012년 중순에 개통을 했지만 운하로서 사업은 실패
결국 정맥 길 하나를 싹둑 잘라버렸다.
첫번째 태안과 서산을 잇는 굴포운하는 거친 바다를 이겨보려 530년간 이어진 국책 사업
두번째 낙남정맥 진주구간 잦은 장마로 인해 농경지 침수문제로 남강물을 사천만으로 흘러 보내는 국책사업
세번째 경인운하는 왜 뜷은건지...
첫댓글 하하, 이렇게 정리해주실 줄이야~~ ^^
그러니 산줄기가 물을 건너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에 와서 다시 생각해볼 문제군요.
제 생각에는,
옛산줄기를 따르면서도 그처럼 고정된 공식보다는
사람들의 삶과 그 삶의 양식이 빚어내는 문화에 더 큰 가치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낙남을 걷는 동안에 친구님과 나눈 대화들이 소중하게 새겨집니다. 거듭 감사합니다.
잘 정리 하셨네요.
제 카페로 퍼 갑니다.
몇번이나 들었는데도
자꾸 까먹네요.ㅎㅎ
잘 정리된 글 잘봅니다.^^
굴포운하(금북정맥), 남강물을 가화천으로(낙남정맥), 경인운하(한남정맥)... 이런 자료는 방장님 아니고서는 이렇게 깊게 들여다 볼 사람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좋은 자료 저도 퍼갑니다. 정맥길 걸어가며 살펴보며 지나가겠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요^^
굴포운하, 경인운하에 대하여 정리한 글 잘봤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경인운하 같은 경우는 예전에 정맥 1차때 없어진 등로로 황당했던 경험도 있었지요
굴포운하 가화천은 그때 큰의미를
두지않고 진행했습니다
방장님의 자료로 확실하게 인지합니다
오래된 지도까지 참조 했군요.
대단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