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大宛列傳
而漢使者往既多(이한사자왕기다), 其少從率多進熟於天子(기소종솔다진숙어천자),67)
한나라 사자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그 젊은 종은 대다수 천자에게 알현함이 익숙하여
67) 集解漢書音義曰: 「少從, 不如計也. 或云從行之微者也. 進熟, 美語如成熟者也.」
집해한서음의왈: 「少從은 어린시종이니 더불어 모의 하지 않았다. 혹자는 따라가는 미천한 자들이다. 進熟은 성숙함의 미칭이다.」
言曰(언왈): 「宛有善馬在貳師城(원유선마재이사성), 匿不肯與漢使(닉불긍여한사).」
말하기를「대원에는 좋은 말이 이사성에 있습니다. 숨겨놓고 한나라 사자에게 주기를 싫어합니다.」하였다.
天子既好宛馬(천자기호원마), 聞之甘心(문지감심), 使壯士車令等持千金及金馬(사장사거령등지천금급금마) 以請宛王貳師城善馬(이청원왕이사성선마).
천자는 이미 대원의 말을 좋아하였다. 이 말을 듣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장사거령 등에게 천금과 금마를 가지고 이사성의 좋은 말을 대원왕에게 청하게 하였다.
宛國饒漢物(원국요한물), 相與謀曰(상여모왈): 「漢去我遠(한거아원), 而鹽水中數敗(이염수붕수패),68)
68) 集解服虔曰: 「水名, 道從外水中〔行〕.」 如淳曰: 「道絕遠, 無穀草.」 正義孔文祥云: 「鹽, 鹽澤也. 言水廣遠, 或致風波, 而數敗也.」 裴矩西域記云: 「在西州高昌縣東, 東南去瓜州一千三百里, 並沙磧之地, 水草難行, 四面危, 道路不可準記, 行人唯以人畜骸骨及駝馬糞爲標驗. 以其地道路惡, 人畜即不約行, 曾有人於磧內時聞人喚聲, 不見形, 亦有歌哭聲, 數失人, 瞬息之閒不知所在, 由此數有死亡. 蓋魑魅魍魎也.」
집해복건왈:「물 이름이다, 길은 밖으로부터 물가운데로 이어진다.」 如淳曰: 「길이 끊어져 멀고, 곡시과 풀이 없다.」 正義孔文祥云: 「염은 염택이다. 물이 넓고 멀어 혹 풍파를 만나면 자주 패했음을 말한다.」 裴矩西域記云: 「서주 고창현 동쪽에 있다, 동남쪽으로 과주에서 일천삼백리 떨어져 있다. 모래가 쌓인 땅으로, 수초로 가기가 어렵고, 사면이 위함하며, 도로는 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고 행인은 오직 사람이나 가축의 해골과 낙타의 분변으로 기준을 삼았다. 그 땅의 도로는 험하고 사람과 가축은 가는 길을 보장하지 모했으며, 일찍이 어떤 사람이 사막 안에서 사람의 부르는 소리를 들어도 형상은 보지 못하고 또 울음 소리가 있기도 하며 자주 사람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순식간에 소재를 알수 없으니 이 때문에 자주 사람들이 죽었다. 대개는 도깨비의 짓이다.」
대원에는 한나라의 물건이 많아졌으므로 서로 함께 모의하기를「한나라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고 염수 안에서 자주 패망하였다.
出其北有胡寇(출기북유호구), 出其南乏水草(출기남핍수초). 又且往往而絕邑(우차왕왕이절읍),
그 북쪽으로 나오면 오랑캐의 침입이 있고 그 북쪽으로 나오면 수초가 모자라며 또 왕왕 마을이 떨어져 있어
乏食者多(핍식자다). 漢使數百人爲輩來(한사수백인위배래), 而常乏食(이상핍식),
식량이 모자라는 일이 많았으며 한나라 사자가 수백 명이 무리지어 와도 항상 식량이 모자라서
死者過半(사자과반), 是安能致大軍乎(시안능치대군호)?無柰我何(무내아하).
죽는 자가 과반이었다. 이러니 어찌 대군을 동원할 수 있겠는가.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且貳師馬(차이사마), 宛寶馬也(원보마야).」 遂不肯予漢使(수불긍여한사). 漢使怒(한사노),
또 이사말은 대원의 보마다.」하고, 드디어 한나라 사자에게 주기를 싫어하였다. 한나라 사자가 노하여
妄言(망언),69) 椎金馬而去(추금마이거). 宛貴人怒曰(원귀인노왈):
망령되이 말하고는 금마를 깨뜨리고는 떠났다. 대원의 귀인이 노하여 말하기를
69) 集解如淳曰: 「罵詈.」
집해여순왈: 「욕을 한 것이다.」
「漢使至輕我(한사지경아)!」 遣漢使去(견한사거), 令其東邊郁成遮攻殺漢使(령기동변욱성차공살한사), 取其財物(취기재물).
「한나라 사자가 우리를 지극히 가벼이 보는구나!」하고서, 한나라 사자를 보내고 나서 그들의 동쪽 변방 욱성에 시켜서 한나라 사자를 공격해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취하게 하였다.
於是天子大怒(어시천자대노). 諸嘗使宛姚定漢等言宛(제상사원요정한등언원),
이에 천자가 크게 노하였다. 일찍이 대원에 사신으로 갔던 요정한 등이 모두 말하기를
兵弱(병약)誠以漢兵不過三千人(성이한병불과삼천인), 彊弩射之(강노사지), 即盡虜破宛矣(즉진로파원의).
「군사는 약하므로 실로 한나라의 군사 3천명에 지나지 않아도 강노를 쏘게 한다면 바로 대원을 쳐부수고 포로로 할 것입니다.」하였다.
天子已嘗使浞野侯攻樓蘭(천자이상사촉야후공누란), 以七百騎先至(이칠백기선지),
천자는 이미 일찍이 촉야후로 하여금 누란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7백 기병이 먼저 이르러
虜其王(로기왕), 以定漢等言爲然(이정한등언위연), 而欲侯寵姬李氏(이욕후총희이씨),
그 왕을 포로로 하였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요정한 등의 말을 옳다고 여겨 총희 이씨를 후로 삼고자
拜李廣利爲貳師將軍(배이광리위이사장군), 發屬國六千騎(발속국육천기),
이광리를 임명하여 이사장군을 삼고 속국의 군대 6천기와
及郡國惡少年數萬人(급군국악소년수만인), 以往伐宛(이왕벌원).
각군의 악소년 수만 명을 징발하여 대원 정벌에 가도록 하였다.
期至貳師城取善馬(기지이사성취선마), 故號(고호)「貳師將軍(이사장군)」.
이사성에 이르러 좋은 말을 취할 것을 기대하여 부르기를「이사장군」이라 하였다.
趙始成爲軍正조시성위군정), 故浩侯王恢使導軍(고호후왕회사도군),70)
조시성을 군정으로 삼고 전의 호후왕회로 하여금 군대를 인도하게 하였으며
70) 集解徐廣曰: 「恢先受封, 一年, 坐使酒泉矯制, 國除.」
집해서광왈: 「왕회가 먼저 봉해 진지 1년 만에 주천에서 군주의 명을 꾸민 죄에 저촉되어 나라가 없어졌다.」
而李哆71)爲校尉(이이치위교위), 制軍事(제군사). 是歲太初元年也(시세태초원년야).
그리고 이치를 교위로 삼아 군사를 통제하게 하였다. 이해가 태초 원년이었다.
71) 索隱音尺奢反, 又尺者反.
색은: 음은 尺奢의 반절음이다, 또 尺의 반절음이다.
而關東蝗大起(이관동황대기), 蜚西至敦煌(배서지돈황).
관동에 메뚜기 때가 크게 일어나 날아서 서쪽 돈황에 이르렀다.
貳師將軍軍既西過鹽水(이사장군군기서과염수), 當道小國恐(당도소국공),
이사장군의 군대가 이미 서쪽 염수를 지나자 길목에 해당하는 소국들은 두려워하며
各堅城守(각견성수), 不肯給食(불긍급식). 攻之不能下(공지불능하). 下者得食(하자득식),
각기 성을 굳게 지키면서 식량을 공급하지 않았다.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고 함락 하면 식량을 얻었으며
不下者數日則去(불하자수일즉거). 比至郁成(비자욱성), 士至者不過數千(사지자불과수천),
며칠 만에 항복하지 않으면 떠났다. 쫒아가 욱성에 이르렀을 때는 도착한 병사가 수천에 불과하였고
皆飢罷(개기파). 攻郁成(공욱성), 郁成大破之(욱성대파지), 所殺傷甚眾(소살상심중).
모두 배가 고프고 피곤함에도 욱성을 공격하자 도리어 욱성이 그들을 크게 쳐부수어 살해되고 상처 남이 매우 많았다.
貳師將軍與哆(이사장군여치)、始成等計(시성등계): 「至郁成尙不能舉(지욱성상불능거),
이사장군이 이치와 조시성 등과 의논 하기를 「욱성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함락할 수 없는데
況至其王都乎(황지기왕도호)?」 引兵而還(인병이환). 往來二歲(왕래이세).
하물며 그 왕도에 이르러서야?」 하고서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오가는데 2년이나 걸렸다.
還至敦煌(환지돈황), 士不過什一二(사불과십일이). 使使上書言(사사상서언):
돈황에 도착하자 군사가 불과 열에 일이만 돌아왔다. 사신을 보내 글을 올려 말하기를
「道遠多乏食(도원다핍식);且士卒不患戰(차사졸불환전), 患飢(환기). 人少(인소),
「길이 멀고 식량이 부족하였으며 또 사졸들은 싸움을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기근을 걱정하니 사람도 적어서
不足以拔宛(부족이발원). 願且罷兵(원차파병), 益發而復往(익발이부왕).」
대원을 정벌하기에 부족합니다. 원하기는 또 병을 파하였다가 군사를 더하여 다시 가도록 해 주십시오.」하였다.
天子聞之(천자문지), 大怒(대노), 而使使遮玉門(이사사차옥문), 曰(왈)
천자가 듣고서 대노하여 사자로 하여금 옥문을 닫고 말하기를
軍有敢入者輒斬之(군유감입자첩참지)! 貳師恐(이사공), 因留敦煌(인류돈황).
「군사로써 감히 들어오는 자가 있다면 바로 참수할 것이다.」하자, 이 때문에 이사장군이 돈황에 머물렀다.
其夏(기하), 漢亡浞野之兵二萬餘於匈奴(한망촉야지병이만여어흉노).72)
그해 여름 한나라는 촉야후의 군사 2만여명을 흉노에게 잃자
72) 集解徐廣曰: 「太初二年, 趙破奴爲浚稽將軍, 二萬騎擊匈奴, 不還也.」
집해서광왈: 「태초 2년, 趙破奴가 浚稽將軍이 되어 2만 기병으로 흉노를 쳤으나 돌아오자 못하였다.」
公卿及議者皆願罷擊宛軍(공경급의자개원파격원군), 專力攻胡(전력공호).
공경과 의론하는 자들이 모두 대원을 공격하는 군사를 파하고 오로지 힘을 오랑캐를 공격함에 쓰기를 원하였다.
天子已業誅宛(천자이업주원), 宛小國而不能下(원소국이불능하),
천자는 이미 대원을 주벌하기 시작했고 대원은 작은 나라며 함락하지 못하면
則大夏之屬輕漢(즉대하지속경한), 而宛善馬絕不來(이원선마절불래),
대하 무리의 나라들은 한나라를 가볍게 볼 것이며 대원의 좋은 말은 끊겨서 오지 않을 것이고
烏孫(오손)、侖頭易苦漢使矣(윤두이고한사의),73) 爲外國笑(위외국소).
오손과 윤두도 한나라의 사자를 쉽게 괴롭힐 것이며 외국의 웃음거리가 될 것으로 여겼다.
73) 集解晉灼曰: 「易, 輕也.」
집해진작왈: 「易은 輕이다.」
乃案言伐宛尤不便者鄧光等(급안언벌원우불편자등광등), 赦囚徒材官(사수도재관),
이에 이전에 대원을 정벌함에 무척 불편함을 주장 하던 등광 등과 죄수로 강궁을 쓰는 자를 사면하고
益發惡少年及邊騎(익발악소년급변기), 歲餘而出敦煌者六萬人(세여이출동황자육만),
사나운 젊은 장정과 변방의 기병을 더욱 징발하여 일여 년 그리고 돈황에서 출발한자 6만이었으며
負私從者不與(부사종자부여). 牛十萬(우십만), 馬三萬餘匹(마삼만여필), 驢騾橐它以萬數(여나탁타이만수).
사적으로 물건을 지고 따르는 자는 함께하지 못하게 하였다. 소 10만, 말3만여 필, 나귀와 낙타가 1만여 마리로 세었다.
多齎糧(다재량), 兵弩甚設(병노심설), 天下騷動(천하소동), 傳相奉伐宛(전상봉벌원),
많은 식량을 가져가고 병기와 궁노를 매우 정예하였다. 천하는 소동하고 소식을 전하여 서로 받들고 대원을 정벌하였다.
凡五十餘校尉(범오십여교위). 宛王城中無井(원왕성중무정), 皆汲城外流水(개급성외류수),
무릇 교위가 50여명이나 되었다. 대원왕의 성안에는 우물이 없어서 모두 성 밖의 흐르는 물을 길었다.
於是乃遣水工(어시내견수공)徙其城下水空(사기성하수공)以空其城(이공기성).74)
이에 수공을 보내어 그 성 아래 물을 옮겨 허공을 만들어 그 성을 비우도록하려고
74) 集解徐廣曰: 「空, 一作『穴』. 蓋以水蕩敗其城也. 言『空』者, 令城中渴乏.」
집해서광왈: 「空은 한편으로『穴』로 쓰여 있다. 대개 물을 흩어서 그성을 패하게 함이다. 『空』이란 것은 성안에 물이 말라없어지게 함을 말한다.」
益發戍甲卒十八萬(익발수갑졸십팔만), 酒泉(주천)、張掖北(장액북), 置居延(치거연)、休屠(휴도)
수졸 18만명을 더 징발하고 주천과 장액 북쪽에는 거연과 휴도를 두어
以衛酒泉(이위주천),75) 而發天下七科適(이발천하칠과적),76) 及載糒給貳師(급재비급이사).
주천을 방위하게 하였다. 그리고 천하의 7과 적을 징발하고 마른 양식을 실어서 이사에게 주었다.
75) 集解如淳曰: 「立二縣以衛邊也. 或曰置二部都尉, 以衛酒泉.」
집해여순왈: 「二縣을 세워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或은 二部都尉를 두어 酒泉을 방위하게 하였다.」
76) 正義音謫. 張晏云: 「吏有罪一, 亡命二, 贅婿三, 賈人四, 故有市籍五, 父母有市籍六, 大父母有籍七:凡七科. 武帝天漢四年, 發天下七科謫出朔方也.」
정의 음은 적이고 장안에서 말하기를 「관리로 죄가 있는 자 하나요, 명을 받고 도망가는 것이 둘이고, 노역을 대신하는 대릴사위가 셋이요, 장사꾼이 넷이고, 옛 시장에 호적이 있는 자 다섯이요, 부모가 지장에 적이 있는 자가 여섯이며, 대부모가 시장에 적이 있음이 일곱이다. 모두 7과이다. 무제 천한4년 천하의 모든 7과에 해당하는 자를 징발하여 변방에 내 보냈다.」
轉車人徒相連屬至敦煌(전거인도상연속지동황). 而拜習馬者二人爲執驅校尉(이배습마자이인위집구교위), 備破宛擇取其善馬云(비파원택취기선마운).
짐수레와 사람들이 서로 이어져 돈황에 이르렀다. 말에 익숙한 자 2명을 집구교위로 삼아 대원을 쳐부수고 그들의 좋은 말을 가려서 가져오려고 대비하였다.
於是貳師後復行(어시이사후부행), 兵多(병다), 而所至小國莫不迎(이소지소국막불영),
이에 이사장군은 다시 떠났다. 군사가 많으니 이르는 소국은 맞이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出食給軍(출식급군). 至侖頭(지륜두), 侖頭不下(륜두불하), 攻數日(공수일), 屠之(도지).
식량을 내어 군에 공급하였다. 륜두에 이르자 륜두는 항복하지 않았으며 몇일을 공격하여 도륙하였다.
自此而西(자차이서), 平行至宛城(평행지원성), 漢兵到者三萬人(한병도자삼만인).
이로부터 서쪽으로 평탄하게 가니 대원성에 이르렀다. 한나라 군사로 도착한자가 3만명이었다.
宛兵迎擊漢兵(원병영격한병), 漢兵射敗之(한병사패지), 宛走入葆乘其城(원두입보승기성).
대원의 군대가 한나라 군대를 맞이하여 싸웠으나 한나라의 군대가 이들을 쏘아 이를 깨뜨렸다. 원의 군대는 달아나 성안으로 들어가 그성을 지켰다.
貳師兵欲行攻郁成(이사병욕행공욱성), 恐留行而令宛益生詐(공류행이령원익생사),
이사의 군사는 가서 욱성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공격을 지체하면 대원으로 하여금 더욱 속임수를 쓸까 두려워
乃先至宛(내선지원), 決其水源(결기수원), 移之(이지), 則宛固已憂困(즉원고이우곤).
그래서 먼저 원에 이르러 수원을 터서 옮기니 대원은 실로 근심하고 곤경에 처하였다.
圍其城(위기성), 攻之四十餘日(공지사십여일), 其外城壞(기외성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한지 40여일 외성을 무너뜨리고
虜宛貴人勇將煎靡(로원귀인용장전미). 宛大恐(원대공), 走入中城(주입중성).
대원의 귀인과 용장전미를 사로 잡았다. 대원은 크게 두려워하며 달아나 중성으로 들어갔다.
宛貴人相與謀曰(원귀인상여모왈): 「漢所爲攻宛(한소위공원), 以王毋寡匿善馬而殺漢使(이왕무과닉선마이살한사).
대원의 귀인들이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한나라가 대원을 공격하는 것은 임금 무과가 좋은 말을 감추고 한나라 사자를 죽였기 때문이다.
今殺王毋寡而出善馬(금살왕무과이출선마), 漢兵宜解(한병의해);即不解(즉불해),
지금 임금 무과를 죽이고 좋은 말을 내어주면 한나라 군사는 마땅히 풀 것이며 바로 풀지 않으면
乃力戰而死(내력전이사), 未晚也(미만야).」
힘껏 싸우다가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宛貴人皆以爲然(원귀인개이위연), 共殺其王毋寡(공살기왕무과),
대원의 귀인들이 모두 그렇다고 여기고 그들의 왕 무과를 함께 죽이고
持其頭遣貴人使貳師(지기두견귀인사이사), 約曰(약왈):
그의 머리를 가지고 귀인 사자를 이사장군에게 보내어 약조하여 말하기를
「漢毋攻我(한무공아). 我盡出善馬(아진출선마), 恣所取(자소취), 而給漢軍食(이급한군식).
「한나라가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좋은 말을 다 내놓을 것이며 마음대로 가져가고 또 한나라 군사의 군량도 공급해주겠소.
即不聽(즉불청), 我盡殺善馬(아진살선마), 而康居之救且至(이강거지구차지).
곧장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좋은 말을 모두 죽일 것이다. 그리고 강거의 구원이 또 도착할 것이다.
至(지), 我居內(아거내), 康居居外(강거거외), 與漢軍戰(여한군전). 漢軍熟計之(한군숙계지), 何從?」
도착하면 우리는 안에서 항거하고 강거는 밖에서 한나라 군사와 싸울 것이다. 한나라의 군사는 숙계하여 무엇을 따를 것인지?」하였다.
是時康居候視漢兵(시시강거후시한병), 漢兵尙盛(한병상성), 不敢進(불감진).
이때 강거의 척후가 한나라 군사를 염탐 해보니 한나라의 군대가 아직도 강성하여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
貳師與趙始成(이사여조시성)、李哆等計(이치등계): 「聞宛城中新得秦人(문원성중신득진인),
이사장군과 조시성 그리고 이치 등이 의논하여 말하기를「내 들으니 대원의 성안에서는 새로 진나라 사람을 구하여
知穿井(지착정), 而其內食尙多(이기내식상다). 所爲來(소위래), 誅首惡者毋寡(주수악자무과).
우물을 팔줄 알고 있으며 그 안에는 먹을 것이 아직도 많다고 한다. 우리가 여기 온 것은 악의 수괴 무과를 죽이고자 한 것인데
毋寡頭已至(무과두이지), 如此而不許解兵(여차이불허해병), 則堅守(칙견수),
무광의 머리가 이미 이르렀으니 이와 같은 데도 군사를 물리기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굳게 지키고
而康居候漢罷而來救宛(이강거후한파이래구원), 破漢軍必矣(파한군필의).」
강거의 척후가 한나라의 피곤함을 보고 대원을 구원하러 오면 한나라 군사는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軍吏皆以爲然(군리개이위연), 許宛之約(허원지약). 宛乃出其善馬(원내출기선마),
군의 관리들이 모두 그렇다고 여겨 대원의 약속을 허락하였다. 대원은 바로 좋은 말을 내놓고
令漢自擇之(령한자택지), 而多出食食給漢軍(이다출식식급한군).
한나라로 하여금 직접 선택하게 하였다. 그리고 먹을 것을 많이 내어 한군에 공급하였다.
漢軍取其善馬數十匹(한군취기선마수십필). 中馬以下牡牝三千餘匹(중마이하모빈삼천여필),
한군은 좋은 말 수십 필과 중마 이하 암수 3천여 필을 가졌다.
而立宛貴人之故待遇漢使善者名昧蔡(이입원귀인지고대우한사선자면매채)77) 以爲宛王(이위원왕),
그리고 대원의 귀인으로 옛날 한나라의 사자를 잘 대우하던 매채(말살)이라는 자를 세워 대원왕으로 삼았다.
77) 索隱本大宛將也. 上音末, 下音先葛反.
색은: 본래 대원의 장수이다. 위 매의 음은 말이고 아래 채는 선과 갈의 반절음이다.
與盟而罷兵(여맨이파병). 終不得入中城(종부득입중성). 乃罷而引歸(내파이인귀).
서로 함께 서약하고 군대를 물렸다. 끝내 중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군사를 파하고 돌아왔다.
初(초), 貳師起敦煌西(이사기돈황서), 以爲人多(이위인다), 道上國不能食(도상국불능식),
처음에 이사장군은 돈황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나갈 때 인원이 많으면 행군중의 거치는 나라에서 군량 공급이 어려워질 것이라 여겨
乃分爲數軍(내분위수군), 從南北道(종남북도). 校尉王申生(교위왕신생)、
나누어서 몇 개의 군으로 만들어 남북의 길을 따라 나갔다. 교위 왕신생과
故鴻臚壺充國等千餘人(고홍여호충국등천여인), 別到郁成(별도욱성). 郁成城守(욱성성수),
전 홍여 호충국 등 천여명은 따로 욱성에 도착하자 욱성은 성을 지키며
不肯給食其軍(불긍급식기군). 王申生去大軍二百里(왕신생거대군이백리),
식량을 그 군에 주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왕신생은 대군에서 2백리 떨어져
(偵정)〔偩〕而輕之(이경지), 責郁成(책욱성). 郁成食不肯出(욱성식불긍출),
욱성을 정찰하고 이를 가벼이 여기고 욱성을 책망하였다. 욱성은 식량을 내주기를 여전히 싫어 하였고
窺知申生軍日少(규지신생군일소), 晨用三千人攻(신용삼천인공),
신생의 군이 날로 줄어드는 성를 엿보고 새벽에 3천여 명을 동원해 공격하여
戮殺申生等(륙살신생등), 軍破(군파), 數人脫亡(수인탈망), 走貳師(주이사).
신생 등을 죽이고 군을 쳐부수었다. 몇 명이 도망쳐서 이사장군에게 갔다.
貳師令搜粟都尉上官桀往攻破郁成(이사령수속도위상관걸왕공파욱성).
이사장군은 수속도위 상관걸로 하여금 가서 욱성을 공격하여 쳐부수게 하였다.
郁成王亡走康居(욱성왕망주겅거), 桀追至康居(걸추지강거). 康居聞漢已破宛(강거문한이파원),
욱성의 왕은 강거를 도망쳐 달아났다. 상관걸이 추격하여 강거에 이르자 강거는 한나라가 이미 대원을 쳐부수었다는 소식을 듣고
乃出郁成王予桀(내출욱성왕여걸), 桀令四騎士縛守詣大將軍(걸령사기사박수예대장군).78)
바로 욱성왕을 걸에게 내주었다. 걸이 4명의 기사를 시켜 포박하여 대장군에게 보내려 하였다.
78) 集解如淳曰: 「時多別將, 故謂貳師爲大將軍.」
집해여순왈: 「이때 별장이 많았으며 그래서 이사를 대장군이라 불렀다.」
四人相謂曰(사인상위왈): 「郁成王漢國所毒(욱성왕한국소독), 今生將去(금생장거),
4명이 서로 말하기를 「욱성의 왕은 한나라가 지극히 미워함이라 지금 살려서 끌고 가면
卒失大事(졸실대사).」 欲殺(욕살), 莫敢先擊(막감선격). 上邽騎士趙弟最少(상규기사조제최상),
끝내 대를 그르친다.」하고서 죽이고자 하였으나 감히 나서 치는 자가 없었다. 상규의 기사 조제가 가장 연소했는데
拔劍擊之(발검격지), 斬郁成王(참욱성왕), 齎頭(재두). 弟(제)、桀等逐及大將軍(걸등축급대장군).
검을 뽑아 이를 쳤다. 욱성왕을 베고 머리를 들고 갔다. 조제, 상관걸 등이 뒤를 따라 대장군에게 이르렀다.
初(초), 貳師後行(이사후행), 天子使使告烏孫(천자사사고오손), 大發兵并力擊宛(대발병병력격원).
이사가 뒤에 떠나던(두 번째 원정) 당초에 천자가 사자를 오손에 보내 말하기를 대군을 징발하고 힘을 합쳐 대원을 공격할 것이니
烏孫發二千騎往(오손발이천가왕), 持兩端(지양단), 不肯前(불긍전).
오손에게 2천의 기병을 징발해 가게 하였으나 두마음을 가져서 앞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貳師將軍之東(이사장군지동), 諸所過小國聞宛破(제소과소국문원파),
이사장군이 동쪽으로 가자 지나가는 여러 작은 나라들이 대원이 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皆使其子弟從軍入獻(개사기자제종군입헌), 見天子(견현자), 因以爲質焉(인이위질언).
모두 그들의 자제로 하여금 군을 따라 들어가서 천자를 뵙게 하고 인질이 되게 하였다.
貳師之伐宛也(이사집벌원야), 而軍正趙始成力戰(이군정조시성력전), 功最多(공최다);
이사장군이 대원을 정벌함에 군정 조시성이 힘껏 싸워 공이 가장 많았다.
及上官桀敢深入(급상관걸감심입), 李哆爲謀計(이치위모계),
상관걸이 고감하게 깊이 들어가고 이치는 작전계획을 만들었다.
軍入玉門者萬餘人(군입옥문자만여인), 軍馬千餘匹(군마천여필). 貳師後行(이사후행),
군인으로 옥문관에 들어온 자가 만여 명이었고, 군마는 천여 필이었다. 이사장군의 두 번째 원정은
軍非乏食(군비핍식), 戰死不能多(전자불능다), 而將吏貪(이장리탐), 多不愛士卒(다불애사졸),
군대의 군량이 적은것도 아니었으며 전사자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관리들이 탐욕스러워 사졸들을 아끼지 않고
侵牟之(침모지), 以此物故眾(이차물고중). 天子爲萬里而伐宛(천자위만리이벌원),
침탈하였다. 이 때문에 죽은 자가 많았던 것이다. 천자는 만리나 되는 대원을 정벌하였다 하여
不錄過(불록과), 封廣利爲海西侯(봉광리위해서후).
잘못을 기록하지 않았고 이광리를 봉하여 해서후로 삼고
又封身斬郁成王者騎士趙弟爲新畤侯(우봉신참욱성왕지기사조제위신치후).
또 몸소 욱성왕을 벤 기사 조제를 봉하여 신치후로 삼았다.
軍正趙始成爲光祿大夫(군정조시성위광록대부), 上官桀爲少府(상관걸위소부),
군정 조시성을 광록대부로 삼고 상관걸을 소부로 삼았다.
李哆爲上黨太守(이치위상당태수). 軍官吏爲九卿者三人(군관리위구경자삼인),
이치를 상당의 태수로 삼고 군관으로써 구경이 된 자는 3명이었으며
諸侯相(제후상)、郡守(군수)、二千石者百餘人(이천석자백여인),
제후의 상과 군수 등 2천석에 임명된 자는 백여 명이었고
千石以下千餘人(천석이하천여인). 奮行者官過其望(탈행자관과기망),79)
천석 이하는 천여 명이었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갔던 자들은 관직이 바라는 것 보다 뛰어 넘었다.
79) 集解漢書音義曰: 「奮, 迅. 自樂入行者.」
집해한서음의왈: 「奮은 迅이니. 스스로 즐겨 들어 간 자이다.」
以適過行者皆絀其勞(이적과행자개출기노).80) 士卒賜直四萬金(사졸사직사만금).
잘못을 저질러 갔던 자는 그 공노를 모두포상하지는 못하였다. 사졸은 직접 4만금을 하사하였다.
80) 集解徐廣曰: 「奮行者及以適行者, 雖俱有功勞, 今行賞計其前有罪而減其賜, 故曰『絀其勞』也. 絀, 抑退也. 此本以適行, 故功勞不足重, 所以絀降之, 不得與奮行者齊賞之.」
집해서광왈:「자원한자와 죄를 지어 온 자는, 비록 모두 공로가 있어도 지금 논공해상에 그 앞의 죄가 있어 상으로 감하였다, 그래서『그 공로를 굽혔다.』한 것이다. 絀은 눌러서 물린 것이다. 여기에 본래 죄를 지어 간자는 이 때문에 무겁게 하지 못하고 굽혀 뒤로 하게 되었으니 스스로 온 자들과 함께 상을 받지 못하였다.」
伐宛再反(벌원재반), 凡四歲而得罷焉(범사세이득파언)
대원을 정벌하고 다시 돌아오는데 무릇 4년이 걸리고서야 마칠 수 있었다.
漢已伐宛(한이벌원), 立昧蔡爲宛王而去(입매채위원왕이거). 歲餘(세여),
한나라가 대원을 정벌하고 나서 매채를 대원의 왕으로 세우고 떠났다. 한해 남짓하여
宛貴人以爲昧蔡善諛(원귀인이위매채선유), 使我國遇屠(사아국우도),
대원의 귀인들은 매채(말살)가 아첨을 잘하여 내 나라가 도륙됨을 만나도록 한 자이다 하고서
乃相與殺昧蔡(내상여살매채), 立毋寡昆弟曰蟬封爲宛王(입무과곤제왈선봉위원왕),
서로 도모하여 매채를 죽이고 무과의 아우인 선봉을 세워 대원왕으로 삼았다.
而遣其子入質於漢(이견기자입질어한). 漢因使使賂賜以鎮撫之(한인사사뇌사이진무지).
그리고 그의 아들을 한나라에 들여보내 볼모가 되게 하였다. 한나라는 이에 사자를 보내 뇌물을 주어 이를 진무하였다.
而漢發使十餘輩至宛西諸外國(이한발사십여배지원서제외국), 求奇物(구기물),
한에서는 사자 10여 무리를 대원의 서쪽 여러 나라에 보내 진기한 물건을 구하였으며
因風覽以伐宛之威德(인풍람입벌원지위덕). 而敦煌置81)酒泉都尉(이돈황치주천도위);82)
대원을 정벌한 위덕을 드러내게 하였다. 그리고 돈황에 주천도위를 두었고
81) 集解徐廣曰: 「一本無『置』字.」
집해서광왈: 「일부 책에는『置』字가 없다.」
82) 集解徐廣曰: 「一云『置都尉』. 又云敦煌有淵泉縣, 或者『酒』字當爲『淵』字.」
집해서광왈: 「일부에서 말하기를『都尉』를 두었다. 또 말하기를 敦煌은 淵泉縣에 있다 하였고. 어떤 사람은 『酒』字는 마땅히『淵』字가 되어야 한다 하였다.」
西至鹽水(서지염수), 往往有亭(왕왕유정). 而侖頭有田卒數百人(이윤두유전졸수백인),
서쪽으로 염수에 이르기까지 군데군데 정을 두었으며 윤두에는 둔전병 수백 명을 두었다.
因置使者護田積粟(인치사자호전적속), 以給使外國者(이급사외국자).
그로 인해 사자를 두고 전지의 보호와 곡식의 저장을 맡겨 외국에 사신가는 자에게 지급하게 하였다.
太史公曰(태사공왈):禹本紀言(우본기언)「河出崑崙(하출곤륜). 崑崙其高二千五百餘里(곤륜기고이천오백여리),
태사공이 말하기를 우본기에서 「황하는 곤륜산에서 나오니 곤륜은 그 높이가 2천5백여 리이고
日月所相避隱爲光明也(일월소상피은위광명야). 其上有醴泉(기상유예천)、瑤池(요지)」.
일월이 서로 피하여 숨는 곳으로 광명이 되는 곳이다. 그 위에 예천과 요지가 있다.」하였다.
今自張騫使大夏之後也(금자장건사대하지후야), 窮河源(궁하원),
지금 장건이 대하에 사신으로 다녀온 이후부터 황하의 근원을 찾았으니
惡睹本紀所謂崑崙者乎(오매본기소위곤륜자호)?83) 故言九州山川(고언구주산천),
본기에서 말한 곤륜을 어디서 보았겠는가? 그래서 구주의 산천을 말함은
83) 集解鄧展曰: 「漢以窮河源, 於何見崑崙乎? 尙書曰『導河積石』, 是爲河源出於積石, 積石在金城河關, 不言出於崑崙也.」 索隱惡睹夫謂昆侖者乎. 惡音烏. 烏, 於何也. 睹, 見也. 言張騫窮河源, 至大夏、于窴, 於何而見崑崙爲河所出? 謂禹本紀及山海經爲虛妄也. 然案山海經「河出崑崙東北隅」. 西域傳云「南出積石山爲中國河」. 積石本非河之發源, 猶尙書「導洛自熊耳」, 然其實出於冢嶺山, 乃東經熊耳. 今推此義, 河亦然矣. 則河源本崑崙而潛流至于闐, 又東流至積石始入中國, 則山海經及禹貢各互舉耳.
집해등전왈:「한에서 황하의 근원을 찾았는데 어디에서 곤륜을 보았던가? 상서에서 말하기를『導河積石』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수의 근원이 적석에서 나온다 하였으며 적석은 금성 하관에 있고 곤륜에서 나온다고 말하지 않았다.」색은에서 곤륜은 어디에서 보이는가? 하였으니, 惡의 음은 烏이다. 烏는 어디에서이다. 睹는 봄이다. 장건이 황하의 근월을 찾아 대하와 우전에 이르러 어디에 곤륜을 보고 황하가 시작되는 곳이라 말하였던가? 우본기와 산해경의 허망됨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산해경을 살펴보면「황하는 곤륜 동북의 모퉁이에서 나온다.」하였고, 서역전에서는「積石山 남쪽에서 나오는 것이 中國의 황하가 된다.」하였고 적석은 본래 황하의 발원이 아니다. 상서에서「熊耳에서부터 낙수로 이어진다.」하였고 그 실제는 총령산에서 나오니 동쪽으로 웅이를 지난다. 지금 그 뜻을 미루어보면 황하 또한 그러하다. 황하의 근원은 본래 곤륜이고 땅속으로 흘러 우전에 이르고 또 동쪽으로 흘러 적석에 이르니 비로소 중국으로 들어온다. 산해경과 우공이 각기 서로 맞추고 있다.
尙書近之矣(상서근지의). 至禹本紀(지우본기)、山海經所有怪物(산해경소유괴물),
상서가 이에 가깝다. 우본기와 산해경에 괴이한 물건이 있슴에 이르러
余不敢言之也(여불감언지야).84)
84) 索隱余敢言也. 案:漢書作「所有放哉」. 如淳云「放蕩迂闊, 言不可信也」. 余敢言也, 亦謂山海經難可信耳. 而荀悅作「效」, 失之素矣.
색은: 내 감히 말하거니와 한서에 쓰여진「所有放哉」를 살펴보니, 여순에 이르기를「放蕩迂闊하여 말을 믿을 수가 없다.」하였고, 余敢言也, 함은 또한 산해경을 믿기 어렵다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荀悅에「效」라고 쓰여있으니, 잘못된 것이다.내 감히 이를 말할 수 없다.
【索隱述贊】大宛之跡, 元因博望. 始究河源, 旋窺海上. 條枝西入, 天馬內向. 蔥嶺無塵, 鹽池息浪. 曠哉絕域, 往往亭障.
【색은술찬】대원의 자취는 원을 통하여 넓게 바라보았으니 비로소 황하의 근원을 궁구하려고 바닷가를 널리 살피고 지천을 따라 서쪽으로 들어갔으니 천마 내향, 총령 무진, 염지 식랑은 넓고도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라 군대 군대 마다 정장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