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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은 우주의 시작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에너지가 한 순간에 폭발했고 그 결과 시간과 공간이 생겼다고 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우리는 우주(宇宙)라고 부릅니다.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원소들이 만들어졌고 원소들이 모여서 별이 되었고 별들 중에 하나가 지구라고 합니다. 지구라는 공간에 시간이 보태어져서 생명이 생겨났고 그 생명 중에 하나가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주라는 시간과 공간에 지구라는 공간은 먼지보다 작다고 합니다. 지구라는 시간과 공간에 잠시 머물다가 가는 사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거시적인 측면에서 사람은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우리들이 하는 모든 것들은 먼지보다 작은 지구에서 벌어지는 것이니 헛되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헛되고 헛된 것 같은 이 세상을, 순간처럼 사라지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는 분명 우리의 몫입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나뭇잎처럼 살 수도 있고, 거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살 수도 있습니다. 시간의 길이와 공간의 크기에서 우리는 정말 작고 또 작습니다. 그러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면 우리의 짧은 생은 온 우주보다 결코 작지 않습니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들에 핀 꽃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낄 수만 있어도 좋습니다. 넘어진 이웃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다면,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다면, 옳고 그름을 식별할 수 있다면 우리의 짧은 생일지라도 그것은 안드로메다은하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매 순간 삶의 자리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사람의 손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이 세상을 좀 더 깨끗하게 하였다는 행복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운 조카의 등록금을 내준 삼촌이 있습니다. 본인도 그리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공부할 조카를 보며 삼촌은 이 세상이 좀 더 환해진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난 봄 길가에 코스모스를 심었던 분들이 있습니다. 가을, 길가에는 예쁜 코스모스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습니다. 코스모스를 보면서 길을 걷는 분들은 마음이 밝아질 것 같습니다. 봄에 코스모스만을 심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희망을 심은 것입니다.
일의 결과만 보면, 목적만을 추구하면 힘든 생활이 되겠지만,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보람을 생각한다면 다가오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축복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무지개를 애써 쫓아가려하지 않고, 무지개를 바라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오늘 하루가 즐거울 수 있습니다. 결혼만 하면 잘 살 것 같지만, 결혼을 하고나면 또 다른 일들이 생겨납니다. 아이만 낳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아이를 낳으면서 많은 일들이 생겨납니다.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 그 목적을 향해서 오늘 한걸음을 충실하게 걷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허무로다, 허무로다.’ 그리고 화답송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천년도 주님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나이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허무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헤로데는 왕으로서 많은 권세를 누렸지만, 많은 재물을 가졌지만, 삶의 참된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허무한 삶을 살다 갔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권세와 힘 때문에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방송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화려한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어집니다.’ 결국 꽃이 시들어야 결실을 맺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땀을 흘리고, 자신을 희생해서 누군가를 위한 다리가 되어 줄 때, 진정한 결실을 맺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인생은 하느님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참 좋은 성가 모음 12곡
성 빈첸시오 드 폴은 라자로 남자 수도원과 카리타스(愛德) 자매회라는 여자 수도원의 창립자로서, 온 교회의 자선 사업의 총 보호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빈첸시오라는 말은 프랑스말로 승리자라는 뜻인데, 성 빈첸시오는 자기 이름이 뜻하는 대로 온 세상을 사랑으로서 정복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난한 이를 돕기를 무엇보다도 즐겼으며, 자기 천성을 그래도 잘 보전하고 지켜서 커서도 자선과 박애 사업에 투신해 이를 천직으로 알고 일생을 송두리째 바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빈첸시오는 교회에 있어서는 대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우대를 받고, 일반사회에 있어서는 그의 자선사업의 공로로 말미암아 온 인류 사회의 은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1576년 4월 26일 프랑스의 농부인 쟝 드 폴과 베르트랑드 드 모라스의 6남매 중 셋재 아들로 프랑스의 가스코뉴 주의 란기느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래 가난한 살림인데다가 형제가 여럿이었으므로 빈첸시오도 어려서부터 목동으로서 가사를 돕지 않으면 안 되었다.
12세가 되었을 때 그의 탁월한 재주를 아깝게 생각해 오던 아버지는 그를 근방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맡겨 교육을 받게 했다. 빈첸시오는 거기서 4년간이나 학문과 고행에 열중한 후 수도원장의 알선으로 어느 변호사의 가정에 유숙하면서 닥스 대학교와 툴루즈 대학교에서 수업한 후,160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순조롭게 사제가 되었으나 학문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부인의 유산을 넘겨받게 되어 마르세이유에 가서 이를 접수한 후 배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뜻밖에 투르크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가련하게도 소지품을 모두 약탈당하고, 게다가 몸은 철사로 결박되어 아프리카에 끌려가서 튜니스란 곳에서 노예로 팔리는 불운을 겪었다. 빈첸시오는 제일 먼저 어느 선주(漁業家)에게 팔렸고 그 후로는 의사의 집에서 일한 때도 있었고, 어느 때는 어느 대 농가의 주인에게 인도되어 혹독한 더위에 땀을 흘려가며 온종일 밭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된 때도 있었다.
그 주인은 전에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던 그리스도교 신자였음에도 어느새 믿음을 잃고 자기 구령 사업을 조금도 돌보지 않는 불행한 배교자였다. 그런데 그 주인의 아내는 빈첸시오가 노예 같지도 않게 몸을 아끼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할 뿐 아니라, 때로는 찬미가를 읊으며 기도를 올리는 것을 보고 무척 감탄했다. 하루는 종일 그의 종교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점점 더 탄복하며 자기 남편을 향해 "그리스도교는 이처럼 훌륭한 종교인데, 당신은 어째서 이를 버렸습니까?"하고 물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 아내의 말과 더불어 주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제 잘못을 깨닫고 아내와 빈첸시오를 데리고 튜니스를 거쳐 프랑스에 가서 그곳에서 자신은 회개하고 아내는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아내는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남은 두 사람은 다시 로마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주인은 로마에서 어느 수도원에 들어갔고, 빈첸시오는 순교지를 찾아가서는 기도하며, 한편으로는 신학 연구를 하고 나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파리 근방에 있는 성 젤마노의 작은 집에서 매일 부근의 자선병원에 통근하며 환자를 간호해 주고 교리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는 그들의 집에 도둑이 들어와 변호사의 금품을 훔쳐간 일이 있었는데, 그 도난의 혐의를 빈첸시오가 받게 되어 그는 매우 딱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물론 그는 자기의 무죄와 결백을 주장했으나 항상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내가 그런 훔치는 것을 하지 않은 사람이란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하고 간단한 말로 변명할 뿐이었다. 그의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는 훌륭히 보답되었다. 그것은 범인이 제 양심의 가책에 못 이겨 자수하게 되자 저절로 그의 무죄함이 백일하에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빈첸시오는 남몰래 수많은 선행을 실천했는데, 그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의 한 친구가 신앙에 대한 유혹으로 밤 낮으로 고민하던 끝에 이를 빈첸시오에게 다 토로했다. 그것은 듣기만 해도 무서운 시련이었다. 억제 할 수 없는 동정심에 가득 찬 그는 친구를 대신해 그 시련을 받으려고 결심하고 하느님께 그 뜻을 전구했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부터 친구의 마음에는 치열했던 모든 유혹이 사라지고 그야말로 잔잔한 바다와 같은 평화가 깃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빈첸시오의 가슴에는 의혹의 구름이 끊임없이 몰려와 그 후 4년동안 평화가 조금도 없었다고 한다.
빈첸시오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도신경을 기록한 종이 조각을 가슴에 매달고 그것을 매일 보면서 신앙의 은혜를 청했다. 그리고는 여러 날 기도한 후 일생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헌하리라는 마음가짐을 먹었다. 그가 마음먹은 대로 일생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헌한다는 서원을 하자 유혹의 검은 구름이 깨끗이 사라지고 화려한 신앙의 광채를 받을 수 있었다.
1612년, 빈첸시오는 37세로서 클리시이라는 시골 성당의 책임자로서 5년간 맡은 임무를 완수한 후, 전근되어 샤튼의 주임 신부가 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당시 프랑스의 해군 장관으로서 유명했던 곤디 가문의 전속사제로 선택되고, 또한 소작인, 뱃사공, 배일꾼들과도 접촉할 기회를 얻어 그들의 노고와 종교적 지식에 대한 갈망이 대단함을 알고 마음속 깊이 느끼는 바가 컸었다고 한다.
빈첸시오는 언제나 그런 노동자들의 구령을 도와 주려는 의도하에 묵상회를 열어 대환영을 받고 바라던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그는 곳곳에 있는 하류 사회의 사람들을 위해 그와 같은 모임을 가지려고 했으나 애석하게도 일꾼이 없어서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다.
마침내 생각한 끝에 그는 사랑의 수도원 사제들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수도원은 수도원 자체로서의 지장이 있었던지 모두 거절을 해왔으므로, 빈첸시오는 아무래도 이 목적을 위해서는 특별한 단체를 조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곧 동료들을 모집해 한 회를 결성했다. 이것이 유명한 라자로(또는 빈첸시오회)회이다. 그 후 빈첸시오는 상부에 청원해 교구의 주임 사제직에서 떠나 제자들과 더불어 프랑스 국내를 순회하며 이곳 저곳에서 묵상회를 열었다. 또한 그는 자선 사업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이를 위해서 동료들을 남녀 두반으로 나누어 각각 회를 조직하여 여자 회에는 주로 병자의 간호를, 남자 회에는 빈궁자의 구제를 위탁했다.
빈첸시오가 일생동안 개최한 묵상회는 실로 7백회에 달했다. 그리고 라자로 수도원은 그 후 전세계에 퍼져 여러가지의 자선 사업에 종사하며 사회에 공헌한 바가 컸었다. 그 수도원의 창립 기념일은 1625년 4월 17일이었고 그 본부는 파리에 두었다.
빈첸시오는 청소년 시절에 갖은 고통을 겪었던 만큼 불행한 사람들에게 동정도 남보다 배로 더 깊었고, 틈만 있으면 병자나 죄수들을 방문해 그들을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며, 또한 의지할 곳 없는 고아들을 찾아서는 이를 카리타스 수녀들에게 맡겼다.
1619년 곤디의 알선으로 국왕 루이 13세의 임명을 받아 해군 전속 사제가 되고 나서는 점점 자선 사업을 행할 기회가 많아졌다. 이 동안의 유명한 한가지 이야기를 소개한다면, 한 가족을 도맡아 살아나가던 사람이 징역살이를 하게 되어 하루의 양식에도 매우 곤란을 느끼는 아주 가난한 집안을 구출하려고 빈첸시오는 그 죄수를 대신해서 뱃사공 노릇을 하며 형무를 마쳐 주었다고 한다.
빈첸시오는 일생 동안 얼마나 많은 자선 사업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고, 버림받은 아이들, 타락한 여성, 고민하는 사람, 병든 나그네, 불쌍한 걸인들을 도와 준 횟수는 이루 셀 수가 없다. 또한 그가 얼마나 많은 빈궁자를 구했는가는 그의 손을 거쳐나간 자선금이 5백만 프랑이나 되었다는 사실로도 감히 짐작할 수 있다.
빈첸시오는 교제술에도 능통해 상류인사들 사이에도 상당한 신용을 얻었기 때문에 자선에 투자하려고 하는 귀부인들은 그를 통해 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의 위대한 업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랑의 일꾼인 빈첸시오는 1660년 9월 27일, 잠자듯이 고요히 이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는 86세였다. 그는 1737년 6월 16일에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레오 13세는 1885년에 모든 자선 단체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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